파놉틱 평화 읽기
88년 홍제동거리와 똘레랑스(下)
시놉티콘
2000. 6. 1. 12:28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통일의 구호는 산천을 뒤흔들었다. 인산인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합당할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87년 민주항쟁을 현장에서 경험하지 못한 나로서는 이런 대인파를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 듯 신문기사에 의하면 3만명 정도의 인파가 홍제동 거리를 그득 메웠던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하간 거리는 온통 번잡스럽기만 한 공간이 되었다. 시민들은 그저 짜증나는 데모가 왜 하필이면 이 자리에서 벌어져야 하는지 그저 짜증스럽기만 한 모양이다. 이 거리는 시위의 경험이 거의 없는 곳이었으므로 더욱 그러했으리라.
근 500여 미터를 메운 인파는 이제 정연한 자세로 우리의 요구조건을 내걸기 시작했다. 한반도에서 통일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만나야 한다는 것, 그리고 통일을 가로막는 미국과 노태우 정권을 몰아내야 한다는 것,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국가보안법 등 제반 악법은 철폐되어야 한다는 것.
틀린 말도 아니지만 맞는 말도 아니다. 한국 시민들의 이중적 정신상태가 이를 뒷받침한다.
당연히 통일을 위해서는 만나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또 일각에서는 그들을 만나면 그들의 대남 전술에 넘어갈 수 있으니 극심한 조심을 해야한다는 모순적 담론.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미국이고, 노태우 정권임으로 물러가야 한다는 것과 그래도 평화를 유지시켜주고, 북한의 남침을 막아주는 미군은 주둔해야한다는 모순적 담론.
인권을 짓밟고 탄압하는 국가보안법은 당연히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과 적어도 국가안위를 해치는 자들을 처벌할 법은 존재한다는 모순적 담론
무엇이 옳은 것인지, 지금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우리의 정신상태이다. 나 또한 이 자리에서 그 혼란을 해결할 능력이 옳음은 당연하다.
현장으로 돌아가자! 얘기하고자 하는 똘레랑스와 관용의 클라이맥스로 가보자!
어디선가 구호는 사라지고 노랫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나라 살리는 통일 이 겨레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을 이루자" 되돌림 노래에 되돌림 노래가 몇 순배 돌아가는 순간. 주변에는 알 수 없는 눈물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목청 놓아 부르는 그 얼굴에는 두 줄기 뜨거운 눈물들이 흘러내렸다.
무엇을 알기에 전후세대인 우리가 통일이 무엇인지, 헤어짐의 고통이 무엇인지 모르던 우리에게. 지금 흘리는 눈물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리 통일은 서글픔으로 다가오는지, 그리고 지금 서있는 이 자리가 왜 그리고 안쓰럽고, 가슴 아프던지.
그렇게 홍제동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리고 가사 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몰입했다. 그런데 어느새 힘있는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연도를 메우고 있던 거리의 시민들의 입에서 하나 둘 "우리의 소원"이라는 노래가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어느새 인파는 몰려들고 그렇게 우리와 함께 동참했다. 그리고 어느 샌가 그들의 눈가에도 조금씩 가느다란 눈물줄기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진심과 진심이 만나는 아름다운 하모니였다. 희망과 투쟁이 만나는 하모니였다. 이제 도로와 보도는 경계선이 사라졌다. 쌍방이 주체와 객체가 아닌 모두가 주인이 되는 시간이었다. 바로 서로를 이해하고, 인내해 주는 것, 그리고 그들과 우리가 함께 되는 것 그것이 똘레랑스요, 관용이다.
빨갱이 대학생들이 아니라, 나와 같이 분단된 땅에 사는 분단아들임을 이해해 주는 것이요, 그들이 하고 있는 지금의 모습이 그야말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몸부림을 알고, 그들을 이해해주는 관용 그 자체였다.
그 관용이 샘물처럼 흐르던 2∼3분. 너무도 짧지만 너무도 숭고했던 2∼3분은 나에게 있어 커다란 힘이었으며, 헤어짐의 고통은 단지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한처럼 피를 통해 이어지는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이내 그 아름다움은 '지랄탄'에 의해 사라져 갔다. 대열의 3/4가 흩어지고 난, 하얀 연기사이로 의연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사람들이 나타났다. 연기에 기진맥진해 있었지만, 끝가지 우리의 소원을 부르며 도로에 누워 통일을 외치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을 연행하려는 전경들, 그들을 막고 나서는 시민들. 일대 아수라장.
도망치듯 옆으로 비켜났던 나의 눈물에 후회의 눈물이 흘렀다. 그 자리에 서 있지 못한 나의 소심함에 대한 죄책감이기도 했지만, 다시 한번 똘레랑스와 관용으로 그들을 보호해 주던 시민들의 모습 때문에 눈물이 흘렀다.
홍제동의 통일함성은 그렇게 흘러갔다. 지금도 내가 이 자리에서 그나마 마지막 양심을 지키며 생존하는 이유도. 그나마 통일을 위해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 조그만 몸짓도. 그 때의 함성이고, 그 때의 눈물이었으리라. 그리고 경계를 허물고, 차별을 부정하며, 함께 똘레랑스와 관용을 보여주었던 그 평범한 시민들 때문이었으리라.
이제 우리도 만들어 가야 한다. 거리의 관용이 아니라. 남과 북의 관용으로. 그리고 희망과 설렘의 똘레랑스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여하간 거리는 온통 번잡스럽기만 한 공간이 되었다. 시민들은 그저 짜증나는 데모가 왜 하필이면 이 자리에서 벌어져야 하는지 그저 짜증스럽기만 한 모양이다. 이 거리는 시위의 경험이 거의 없는 곳이었으므로 더욱 그러했으리라.
근 500여 미터를 메운 인파는 이제 정연한 자세로 우리의 요구조건을 내걸기 시작했다. 한반도에서 통일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만나야 한다는 것, 그리고 통일을 가로막는 미국과 노태우 정권을 몰아내야 한다는 것,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국가보안법 등 제반 악법은 철폐되어야 한다는 것.
틀린 말도 아니지만 맞는 말도 아니다. 한국 시민들의 이중적 정신상태가 이를 뒷받침한다.
당연히 통일을 위해서는 만나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또 일각에서는 그들을 만나면 그들의 대남 전술에 넘어갈 수 있으니 극심한 조심을 해야한다는 모순적 담론.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미국이고, 노태우 정권임으로 물러가야 한다는 것과 그래도 평화를 유지시켜주고, 북한의 남침을 막아주는 미군은 주둔해야한다는 모순적 담론.
인권을 짓밟고 탄압하는 국가보안법은 당연히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과 적어도 국가안위를 해치는 자들을 처벌할 법은 존재한다는 모순적 담론
무엇이 옳은 것인지, 지금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우리의 정신상태이다. 나 또한 이 자리에서 그 혼란을 해결할 능력이 옳음은 당연하다.
현장으로 돌아가자! 얘기하고자 하는 똘레랑스와 관용의 클라이맥스로 가보자!
어디선가 구호는 사라지고 노랫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나라 살리는 통일 이 겨레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을 이루자" 되돌림 노래에 되돌림 노래가 몇 순배 돌아가는 순간. 주변에는 알 수 없는 눈물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목청 놓아 부르는 그 얼굴에는 두 줄기 뜨거운 눈물들이 흘러내렸다.
무엇을 알기에 전후세대인 우리가 통일이 무엇인지, 헤어짐의 고통이 무엇인지 모르던 우리에게. 지금 흘리는 눈물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리 통일은 서글픔으로 다가오는지, 그리고 지금 서있는 이 자리가 왜 그리고 안쓰럽고, 가슴 아프던지.
그렇게 홍제동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리고 가사 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몰입했다. 그런데 어느새 힘있는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연도를 메우고 있던 거리의 시민들의 입에서 하나 둘 "우리의 소원"이라는 노래가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어느새 인파는 몰려들고 그렇게 우리와 함께 동참했다. 그리고 어느 샌가 그들의 눈가에도 조금씩 가느다란 눈물줄기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진심과 진심이 만나는 아름다운 하모니였다. 희망과 투쟁이 만나는 하모니였다. 이제 도로와 보도는 경계선이 사라졌다. 쌍방이 주체와 객체가 아닌 모두가 주인이 되는 시간이었다. 바로 서로를 이해하고, 인내해 주는 것, 그리고 그들과 우리가 함께 되는 것 그것이 똘레랑스요, 관용이다.
빨갱이 대학생들이 아니라, 나와 같이 분단된 땅에 사는 분단아들임을 이해해 주는 것이요, 그들이 하고 있는 지금의 모습이 그야말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몸부림을 알고, 그들을 이해해주는 관용 그 자체였다.
그 관용이 샘물처럼 흐르던 2∼3분. 너무도 짧지만 너무도 숭고했던 2∼3분은 나에게 있어 커다란 힘이었으며, 헤어짐의 고통은 단지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한처럼 피를 통해 이어지는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이내 그 아름다움은 '지랄탄'에 의해 사라져 갔다. 대열의 3/4가 흩어지고 난, 하얀 연기사이로 의연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사람들이 나타났다. 연기에 기진맥진해 있었지만, 끝가지 우리의 소원을 부르며 도로에 누워 통일을 외치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을 연행하려는 전경들, 그들을 막고 나서는 시민들. 일대 아수라장.
도망치듯 옆으로 비켜났던 나의 눈물에 후회의 눈물이 흘렀다. 그 자리에 서 있지 못한 나의 소심함에 대한 죄책감이기도 했지만, 다시 한번 똘레랑스와 관용으로 그들을 보호해 주던 시민들의 모습 때문에 눈물이 흘렀다.
홍제동의 통일함성은 그렇게 흘러갔다. 지금도 내가 이 자리에서 그나마 마지막 양심을 지키며 생존하는 이유도. 그나마 통일을 위해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 조그만 몸짓도. 그 때의 함성이고, 그 때의 눈물이었으리라. 그리고 경계를 허물고, 차별을 부정하며, 함께 똘레랑스와 관용을 보여주었던 그 평범한 시민들 때문이었으리라.
이제 우리도 만들어 가야 한다. 거리의 관용이 아니라. 남과 북의 관용으로. 그리고 희망과 설렘의 똘레랑스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