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놉틱 정치 읽기

2008년 촛불의 단상 : “사람들이 변했다.”

시놉티콘 2008. 9. 19. 10:46

2008년 촛불의 단상 : “사람들이 변했다.”


 

2007년 11월 26일, 12월 10일 지식채널e에서 1968(68혁명)이란 제목의 5분 내외의 다큐가 방송되었다. 제1부 주동자가 없는 시위, 제2부 실패한 혁명, 68혁명은 주동자도 없이 시작되어서 전 세계를 휩쓸고 지나갔지만 실패한 혁명(?)이었다는 짧은 다큐이다. 최근의 상황과 연관해서 상상을 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래서 내용은 길지만 인용할까 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물었다.

“먹고 살만한 이때에 뭘 더 원한다는 거냐?”

아들은 아버지에게 답했다.

“우리가 원하는 건 단지 물질이 아니에요. 우리를 억압하는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암기위주의 주입식교육, 불합리한 시험제도, 불안정한 고용제도, 사회에 만연한 권위주의

그리고 “불의를 애써 못 본 척하며 사람들을 출신과 숙련기술에 따라 나누는 이 꿈쩍도 하지 않는 사회!”를 향해 던지는 젊은이들의 꽃

…그렇게 혁명은 시작된다. 무엇을 ‘얻어내기 위함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자유롭게 ’주장하기‘ 위한

아무도 주도하지 않은 혁명…

시험성적으로 미래가 결정되지 않는 세상

기계처럼 일하지 않아도 행복한 세상

성 인종 직업 학력 때문에 차별받지 않는 세상

소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세상

이게 정말 그저 몽상일까요?


68혁명이 시작되자 드골대통령은 “학생들의 공부를 방해하고 노동자들이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세력 때문에 프랑스 국민들이 정상생활을 하지 못하고 고생을 한다면 더욱 강력한 조치를 강구하겠다!”…


권력을 쟁취하지 못한 혁명은 이미 끝난 것 아닌가?

공평해진 대학 입학의 기회!

겨우 대학 입시 제도를 말하는 건가?

명문대 고유명사 대신 숫자로 명명되는 대학들!

그런다고 학벌이 없어질 수 있을까?

경제적 가치보다 소중한

인권 평등 박애를 향한 끊임없는 고민들!

고작 그걸 가지고 ‘세상’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필자는 아래 대목의 내용이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그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바뀐다. 1968년 이후로…

사람들은 격식과 존칭을 버리고

서로 말을 트고 ‘너’라고 불렀으며

젊은 여자들은 스타킹을 찢고

가터벨트를 집어던졌다.

학생뿐 아니라 노동자들도

생미셸 가에서 한참씩 머물렀다.

책을 훔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과 토론하기 위해서…1)


그렇게 1968년 봄과 여름은 폭풍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40년 후 대한민국…. 2008년 대한민국의 봄과 여름은 ‘촛불’로 상징되는 격정의 시간이었다. 이제 가을바람이 불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차분한 거리가 스산하기만 하다. 도처에서 촛불은 토론의 주제가 되었고, 사람들은 촛불 사이에서 자신의 삶을 격정적으로 얘기했다. 누구도 주동하지 않았고, 누구도 선동하지 않았고, 누구도 통제하지 않았던 그 뜨거웠던 봄과 여름….2) 이제 학계와 시민사회는 차분한 분위기에서 촛불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토론을 전개하고 있다.

진보든 보수든 가장 경계해야할 것은 규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잣대와 언어로 사물을 규정하고야 말겠다는 그 고집을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적어야만 하고 기록되어야만 한다. 이 모순적 상황에서 똑바로 그 길을 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이 필요하다.

그래서 기억된 것이 지식채널e의 짧은 다큐였다. 촛불정국의 국민적 공분 속에서도 이명박 정부는 건재하고, 대한민국의 국민이 자신의 요구를 자신의 입으로 외치는 것은 물대포의 공격대상과 체포의 이유가 되고, 방송국의 기자들은 펜 대신 복도를 막아서야만 하고, 다시 간첩이라는 명사가 방송에 오르내리고, 이제 신자유주의 광풍의 다른 이름인 ‘선진화’가 대한민국의 지상목표가 되고 있다.

올림픽 금메달 주역들의 승전보에 젖어 있는 동안, 비정규직의 슬픈 이야기들은 꽁꽁 숨어버렸다. 60일 넘게 단식투쟁을 전개하는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직원의 외침도, KTX 여승무원들의 고공시위도, 쇠사슬시위도…. 대한민국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넘는 비정규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명박 대통령이 얘기하는 ‘선진화’가 가능할까? 그들을 열악한 노동조건과 그들의 무너질 지경에 처한 가정환경을 방치하고 ‘선진화’가 가능할까? 그들의 온 몸에 배어 있는 땀, 전쟁 같은 노동의 일상이 ‘선진화’라면, ‘선진화’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초등학생은 국제중학교를 입학하기 위해 일렬의 경쟁으로 뛰어들어야만 하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너무나 예쁜 딸․아들의 미래를 위해 부모들은 학원으로 향해야만 하고, 그마저도 할 수 없는 대다수의 부모들은 한숨으로 지새워야 하는 대한민국.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시험성적으로 미래가 결정되지 않는 세상, 기계처럼 일하지 않아도 행복한 세상, 성 인종 직업 학력 때문에 차별받지 않는 세상, 소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세상”은 정말 그저 몽상일까? 어쩌면 이 광풍의 시대에 우리들은 몽상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68혁명이 스쳐간 그 자리에 오롯이 남은 것은 사람이 변했다는 것이다.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고와 인식이 변하면 세상은 변한다. 촛불이 남긴 것은 우리가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고, 우리가 자유롭게 자신의 견해를 밝힐 수 있고, 생면부지의 옆 사람과 손을 잡고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기쁨이라는 것이다.

최근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촛불정국에 대한 다양한 토론과 규정이 전개되고 있다. 촛불시위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이며, ‘더 많은 민주주의’가 대안이라는 의견들이 개진되고 있다. 또한 ‘집단지성’ 또는 ‘다중지성’이 출현했으며, 시민들의 직접행동 분출이라는 긍정적 해석에서부터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다중은 출현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 자체로 지속적인 저항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비판적 시각들이 개진되고 있다. 이런 논의들의 결말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조직화, 더 많은 민주주의를 통한 질적 전환, 아래로부터 저항의 한계를 지적하며 위로부터의 조직화 필요성 등이다.

이런 논의들의 긍정성을 폄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뭔가 비어있는 느낌이다. ‘더 많은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은 진보개혁진영은 장기 화두가 아니었던가? 촛불정국의 참여시민들이 정당정치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면 그 힘든 나날을 시청 앞, 청계광장, 종각 앞에 나와야 했던가? 아래로부터의 저항의 한계라고 주장할 근거는 무엇인가? 모든 변화의 지점에는 아래로부터의 저항이라는 폭발적 흐름이 존재했던 것이 아닌가? 대의민주주의 국가에서 왜 시민들은 이렇게 직접행동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해야만 하는 것인가? 많은 의문들이 스쳐지나간다.

아마도 이런 논쟁을 통해 새로운 변화의 토양이 쌓일 것이다. 핵심은 이런 논쟁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다수들은 여전히 삶을 영위하면서 변화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2008년 촛불정국은 꺼져버리거나, 실패한 시간이 아니다. 2008년 촛불정국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들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고 변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세상을 보는 시선이 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직접 실천했다는 것이다. 실천을 통해 세상을 만나고, 세상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고, 그 새롭게 창출된 문화공간을 통해 생각이 변했다는 것이다.

사회문화적 각인(刻印), 항상 반복되는 일상의 공간에서 새롭게 만나게 된 비(非)일상의 영역으로서 촛불정국은 사회문화적 각인의 굴절점이라 할 수 있다. 그 굴절점을 통해 이제 일상은 또 한 차례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철부지(?) 10대들의 외침, 88만원 세대로 불려지는 20대, 유모차를 몰고 나타난 아줌마부대, 메인미디어가 아닌 블로그와 카페를 통해 연결된 네트워크 등 사회적 마이크와 힘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촛불을 견인했다. 위계적 국가권력에 맞서 방사형 네트워크의 새로운 문화를 창출했다.

이제 촛불정국은 지역과 문화로 성장 진화할 필요가 있다. 그들에게 더 이상 ‘거리의 정치’를 요구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정치권과 정당조직에게 미래를 맡길 수도 없다. 이 딜레마적 상황은 우리에게 장기적 관점과 ‘진지전’으로의 전환이라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선진화로 포장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의한 나날이 고통스러운 삶에 얹어진 광우병에 대한 공포는 국민들에게 단기적인 저항을 촉발했으며, 국민들은 ‘기동전’을 통해 몸으로 실천했다. 그것이 ‘절반의 성공’이든 ‘실패’이든 삶은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고, 더 나은 세상으로 가기 위한 노력은 중단될 수 없다. 그래서 장기적 관점과 ‘진지전’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며, 그것은 문화와 지역에서 새로운 ‘일상의 정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장기적 관점이라 함은 변곡점으로서 2010년 지방자치선거와 그 결실점으로서 2012년 국회의원선거를 준비하는 것이며, ‘진지전’의 전개 또한 거대담론 수준이 아닌 지역차원의 일상담론의 형식으로 전개할 필요가 있다.

대의민주주의의 모순이라고 할까?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조항은 현실에서 작동하고 있는가? 대한민국의 국민은 2년 또는 3년 단위(대통령선거 5년 단위, 국회의원․지자체선거 4년 단위)로 투표일 집을 출발하여 투표를 마치는 때까지 대략 30분 정도, 실질적으로 투표장에 진입하여 투표를 마감하는 20초 동안만 대한민국의 주권자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선택의 계기가 더욱 중요하다. 일종의 모순이다. 일상적으로는 주권자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비일상적인 투표 행위 시점에만 그 지위가 보존된다.

2010년 지방자치선거가 중요하게 부각되는 이유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확대에서 가장 고통 받는 것은 서민들이며, 가장 첨예하게 파괴되는 것은 일상생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단위에서 서민들의 생존권적 요구와 일상생활의 양극화를 방지하기 위한 ‘진지전’이 절실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단위의 생활문화운동이 확산되어야 한다. 이미 촛불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통해 지역단위의 작은 모임들이 싹트고 있으며, 지역차원에 풀뿌리 자치모임들이 존재하고 있고, 정치에 꿈을 꾸며 봉사할 준비(?)가 된 정당인들이 있고, 지방자치체의 제도적․실무적 축적물들이 있다.

이와 같이 이미 존재하는 기존 인프라와 촛불시위를 통해 생성된 인프라의 결합을 통해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 지역단위의 생활문화운동이 확산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일상생활을 매개로 문화와 지역의 새로운 만남을 통해 생활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흐름의 확산은 자율적 정치공동체의 구성으로 진화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직접민주주의 구현이 ‘직접행동’의 양태로 다양하게 분출될 필요가 있다. 촛불이 현장에서 벌어진 직접행동의 형태였다면, 이제 일상생활이 영위되는 지역단위에서 구현되는 직접행동을 만들어 나가자는 것이다.3) 이는 진보개혁진영의 영역 확장이며 새로운 시도가 될 것이다.4) 즉 일생생활 공간의 진보적 재구성이라고 지칭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한 개인이 출근하고, 퇴근하여 가족과 함께 저녁시간을 보내고 잠을 자는 공간인 지역이, 또는 지역에서 자신의 생계를 영위하는 공간인 지역이 더욱 새롭게 변모되도록 해야 한다. 단지 베드타운과 같이 잠만 자고 나오는 공간이 아니라, 함께 얘기하고 토론하고 행동하고 변화시키는 자기활동의 공간으로 변화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어쩌면 21세기 새로운 시대의 변화된 민주주의의 구현일지도, 진보개혁진영의 새로운 변화의 출발점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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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BS 지식채널ⓔ 지음,『지식ⓔ season 3』(서울: 북하우스, 2008), pp. 190~193.


2) 누구는 주동자를 수배하고, 누구는 선동자를 빨갱이로 낙인찍고, 누구는 전경차로 바리게이트를 만들었다.


3) 직접행동이란 비폭력적 방식에 의한 비타협, 저지 또는 거부를 의미한다. 대의민주주의 하에서도 자유 또는 민주주의의 원칙들이 위협받게 되며, 이 때 여러 형태의 시민 불복종이나 시민거부 행동이 발생한다. 즉 자유민주주의는 일부 특권적 사회집단에 유리하게 작용하게 되며, 여기서 소외된 집단들은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직접행동에 호소하는 것이다. 에이프릴 카터 지음, 조효제 옮김,『직접행동: 21세기 민주주의, 거인과 싸우다』(서울: 교양인, 2007), pp. 37~39.


4) 이미 많은 지역단위에서 풀뿌리 자치모임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수준과 영역이 넓지 않으며 재정적․인적 측면에서 많은 한계를 안고 있다. 그리고 이 자치모임들의 경우 기존 정당과 정치인, 공조직 등에 대한 상당한 불신을 가지고 있다. 이런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하고 좀 더 진화된 지역공동체 문화의 구성이 필요하다. 그 진화의 계기를 촛불에서 발견하고, 만들어가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