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러진 시간 앞에 서다
강원도 흥법사터
스러진 시간 앞에 서다
빛바래고 시든 것들, 떨어져 바람에 날리고 쌓인다. 쌓이고 뒹구는 게 나뭇잎만은 아니다. 무너지고 쓰러져 뒹구는 것들이 가을 하늘 아래 허다하다. 빈 들에 버려져 굴러다니는 것들 만나러 간다. 망한 옛 절터, 폐사지(廢寺址)들이다. 천년 세월을 잡풀 우거진 들판에 눕고 앉고 쓰러져 나뒹구는 보석들을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이다.
‘전 국토가 박물관’인 우리나라는 폐사지의 나라이기도 하다. 방방곡곡 3천여곳에 크고 작은 옛 절터가 흩어져 있다. 스러진 절터에 고인, 아득한 시간의 향기에 반한 이들은 이것을 ‘아름다운 폐허’라 부른다. 가을의 하루, 옛 절터를 찾는 일은 그래서 천년 세월 흥망성쇠의 허망함과 텅 빈 들판에 가득한 절절한 울림을 되새기며 위로받는 여정이 된다.
옛 절터가 보여주는 건 짓밟히고 깨지고 불타고 남은 것들, 버려져서 더욱 단단해진 것들이다. 단단해질 대로 단단해진 것들이, 다져질 대로 다져진 폐허 위에 널렸다. 놀라운 건 폐허 속에 살아남은 보석 같은 유적들이다. 집도 절도 없는 빈터에 국보·보물급 문화재들이 깔려 있다. 천년 세월을 견딘 석탑과 부처상, 비석들은 현란한 조각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섬세하고 또 투박하게 새긴 글씨들도 나그네의 눈을 거듭 새로 뜨게 한다. 폐사지는 불교 유적 이전에 이미 이 나라 역사·문화의 토양이다. 잡초에 묻힌 주춧돌, 발끝에 차이는 기왓조각 하나까지 모두 조상들의 손자취·발자취가 서렸다.
삼국시대 이래 우리 땅에 번창하던 절들은 화재나 자연쇠퇴로 사라진 곳이 적지 않지만, 수많은 사찰이 몽고 침입과 임진왜란을 거치며 소실된 것으로 전해진다. 복원된 절들도 다시 육이오 때 불탄 곳이 많다.
일부 중요 절터들에선 발굴 및 정비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대부분은 방치돼 있는 상황이다. 옛 절터 중 문화재나 기념물로 지정돼 보호되는 곳은 100여곳뿐이다. 나머지는 집터로, 논밭으로, 야산으로, 잡목숲으로 남아 있다. 일부 절터의 발굴·정비 작업은 예산부족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옛 절터들의 문화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보호·보존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시민단체인 문화복지연대는 3년 전부터 ‘1폐사지 1지킴이’ 운동과 옛 절터 순례행사를 펼치고 있다. 절터를 찾아가 여는 ‘달오름 음악회’도 올해로 4회째 진행했다. 국회에선 폐사지 보존을 위한 법안 제정을 추진 중이다.
무너져내리고 바람에 쓸리기 쉬운 가을, 폐사지 여행길에 마음의 보석 하나씩 건져 오시길.
한겨레 2008. 10. 16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