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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4. 자크 랑시에르

시놉티콘 2009. 3. 14. 17:34

우리는 ‘과두적 우파국가’에서 살고 있다

한겨레

»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자크 랑시에르

 

 

자크 랑시에르는 1940년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루이 알튀세르 등과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읽기 세미나를 이끌었지만, 1968년 이후 알튀세르의 이론주의와 이데올로기론을 비판하며 그와 결별했다. 1970년대 내내 19세기 노동자 운동 관련 문서고를 연구하면서 노동자 정체성에서 벗어나 ‘공통적인 것’에 참여하는 정치적 형상들과 집단적 주체화의 문제에 천착했다. 그 결과물이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프롤레타리아들의 밤>이다. 그 뒤로도 지적 능력의 평등을 다룬 <무지한 스승>, 정치의 종언론에 맞서 정치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그동안의 성찰들을 개념화한 <불화>, 민주주의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재성찰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등을 썼다.


모든 정부·통치는 과두적이다. 통치란 항상 통치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소수가 다수를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민주주의란 통치자격이 없다고 간주된,‘아무 것도 아닌 자들’이 ‘공통적인 것’에 참여할 자신의 몫을 주장하는 행위다. 이런 민주주의적 투쟁이 없었다면 우리에겐 선거권도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 자크 랑시에르.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우리는 민주주의에서 살고 있는가.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명시하고 있으니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해 정부는 그 조항을 공공연히 무시하고 삭제하지 않았던가. 민주주의가 헌법 조문으로 보장되는 하나의 ‘정체’였다면, 국민들이 거리에서 헌법 제1조를 외칠 필요도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 등장하는 흥미로운 주장을 참조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에서 산다’는 표현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과두적인 우파 국가에 살고 있으며, 민주주의는 헌법이나 여타의 제도로 보장되는 하나의 체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정부/통치는 언제나 과두적이다. 통치란 항상 부·출생·지식 면에서 통치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소수가 다수를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통치의 관건은 각자 본성에 맞는 직무와 자리, 자신에 맞게 보고 행동하고 말하는 방식을 배분하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대의 민주주의’ 체제를 당연

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기원을 따져볼 때 투표 또는 대의란 넓은 땅에 살고 있는 많은 인구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가 아니다. 대의란 공통 사무를 관장할 자격을 지닌 소수가 다수에게 동의를 요구하는 장치일 뿐이다. 반대로 민주주의란 통치 자격이 없다고 간주된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공통의 일에 참여할 자신의 몫을 주장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런 민주주의적 투쟁과 정치적 실천이 없었다면 우리에게는 선거권마저도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랑시에르에 따르면 대의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가 모순된 두 단어의 결합이다.

 

랑시에르가 <불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서 묘사하고 있는 과두정의 풍경을 더 따라가 보자. 우리는 너무도 낯익은 그 장면에 섬뜩함마저 느끼게 된다. 대통령은 그 어느 때보다 자주 방송에 출현해 일방적 담화를 쏟아내며 국민의 동의를 구한다. 국민의 목소리는 각종 설문조사나 여론조사를 통해 재현된다. 여론조사에 나타난 ‘주민’의 의견이 곧 ‘인민’의 의견과 동일시되고, 그 밖의 다르거나 보충적인 말과 생각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생각할 가치도 없어진다. 정치의 종언(한국의 우파들은 87년 6월을 등에 업은 정치 편향적 정권의 종언과 그것을 동일시했다)을 선언한 과두정의 통치자들은 공적인 일은 경제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대중은 사적인 이익활동에 매달리면 된다고 주장한다. 정부 주장에 반대하며 거리에 나온 자들은 통치 전문가들의 ‘과학’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도래하지도 않은 사건에 벌벌 떠는 ‘무지한 자’로 간주된다. 정부는 자본의 무제한적 증식에 맞춰 화폐와 주민의 흐름을 관리하는 기구로 전락했으며, 이 정부가 내세우는 진보적이고 현실적인 비전에 반대하는 자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자’ 또는 퇴행적 이기주의자로 치부된다.

 

더구나 정부의 통치를 반박하는 의견은 혹세무민하는 ‘포퓰리즘’으로 낙인찍히고 처벌받는다. 거리에서 표출되는 목소리와 함성은 통치자의 귀에 ‘들리지 않으며’, 도로를 점거한 시민들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뿐이다. 거리를 물대포로 청소하고 컨테이너로 만든 숭고한 작품을 전시한 우리 정부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듯이, 과두정이 추구하는 최고 목표는 ‘인민 없는 통치, 정치 없는 통치’다.

 

물론 이와 반대되는 또 하나의 풍경을 우리는 알고 있다. 국민의 목소리를 하나의 말로 간주하지 않던 정부는 거리에 나온 모든 국민을 주권자로 보기는커녕, 사회의 부분으로 셈하지도 않으려 했다. 이에 맞서 도로를 점거하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외쳤던 익명의 사람들, 즉 ‘아무나’가 있다.

 

그들은 헌법 제1조를 외치면서 헌법이란 반복적으로 ‘검증’되는 순간에만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헌법은 투쟁 속에서 매번 다시 기록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시위대는 ‘인민 없는 경영’의 정치를 주장하는 하나의 세계와 ‘인민 권력’의 또 하나의 세계를 함께 놓음으로써 서로 불일치하는 공통의 무대를 세웠다. 이처럼 정치는 사회적·이데올로기적 갈등을 해소하거나, 각 개인 또는 집단의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중재하고 경영하는 ‘합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갈등’과 ‘분할’과 ‘불화’에 있다.

 

정부는 쇠고기 수입 문제를 ‘사적인’ 소비의 문제로 환원했으며, 이 과두정을 함께 경영하는 전문가들은 IT산업과 자동차를 위해 축산업을 희생해야 한다는 ‘공공선’을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나눔에 반대함으로써 인민은 더는 소비자 대중으로 머물지 않고 정치적 주체가 되었다. 이 정치적 주체화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아는 자와 무지한 자를 나누는 정부의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에서 이탈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시위대가 말하는 인민권력은 비단 하층민이나 노동자 계급의 권력을 뜻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통치 받을 자격 외에는 다른 자격을 갖지 않은 모든 자들의 권력으로 확장되어야할 것이었다. 통치가 아니라 정치를 했던 그 ‘아무나’들이 가진 것은 부, 출생, 지식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뿐이었다.

 

이것이 랑시에르의 사유를 ‘지금 여기에’ 중첩시켰을 때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장면이다. 독자들이 랑시에르에게 기대했던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이런 얘기들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랑시에르는 “지식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지적 능력의 평등에서 출발하지 않고 지식인과 대중을 나누는 것은 이미 통치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그의 사유의 의의는 오히려 우리가 잠시 겪었던 사건들을 되돌아볼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그 사건을 반복하도록 촉발하는 데 있다. 그가 지식인이 아니라 한 명의 ‘무지한 스승’으로서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이 아닐까. “네가 하는 것을 계속하라” 네가 가진 힘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게 해준 우연적 사건을 되풀이하라, 네가 배운 것을 다른 모든 것과 연결하라.

 

양창렬/파리1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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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창렬씨는 1978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파리1대학 철학과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 중이다.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과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를 우리말로 옮겼다.

 

기사등록 : 2009-02-27 오후 06:51:18 기사수정 : 2009-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