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일상 담론

기억이 공간과 만나면 3-2) 기억이 공간으로 스며들다 : Holocaust Mahnmal

시놉티콘 2009. 3. 16. 11:11

기억이 공간과 만나면

 

3-2. 기억이 공간으로 스며들다 : Holocaust Mahnmal의 추모공간

 

불균형의 긴장과 빛이 주는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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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추모 공간을 빠져나오는 길은 울퉁불퉁 중심을 잡기 어려웠다. 이렇게 공간을 구성한 것에 대해 이동기 박사는 육체가 흔들리면서 고통과 불안을 느끼게 건축되었다고 설명해주었다. 불안정하게 걷는 것 그것은 지속적인 긴장과 공간건축에 나의 육신이 포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시대 학살을 당했거나 학살에 희생당할 뻔했던 유태인들, 그리고 나치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들과 학살당할 뻔했던 사람들이 걸어왔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아무런 압박도 없는 상황에서 내가 느낀 그 걸음걸이의 힘겨움을 생각하면, 그 시대 걸음걸이는 기억하기조차 싫은 기억이었을 것이다.

   

 * 전시관에서 판매하는 책자에 나온 사진을 스캔한 것이다. 학살의 참상이 이런 것이다.

 

어쩌면 망각되었으면 좋을 기억, 그래서 더욱 강렬하게 재생되는 기억…시간과 공간은 그것에 사람의 뇌리 속에 기억을 쑤셔 박고 고정시켰다. 그것이 어찌 시간과 공간의 탓이겠는가! 바로 사람들이 저지른 행위로 인해 만들어진 것인데 말이다. 위의 학살을 사진을 보면 가슴이 갑갑해진다.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부셔버리는지를…

 

빨리 빛 쪽으로 나오고 싶었다. 기념한답시고 사진을 찍은 내 행동을 생각하면 나 자신도 참…

 

이 어둠을 나오면서 조르조 아감벤『호모 사케르: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서울: 새물결, 2008)의 내용을 인용할까 한다.

 

// 히틀러, 1933년 7월 14일 ‘유전병 환자의 후손방지를 위한 법률’ 공포

 

“유전병에 걸린 자의 경우 만약 후손들이 이로 인해 육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될 가능성이 의학적으로 명백할 경우에는 외과적 불임시술을 행할 수 있다.”

 

1933년 10월 18일 ‘독일 국민의 유전적 건강성 보호에 관한 법’

 

“다음에 해당하는 어떤 결혼도 허가를 금한다. 1) 혼인 당사자 중 한 명이 배우자 또는 자손들의 건강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전염병에 걸린 경우. 2) 혼인 당사자 중 한 명이 금치산자이거나 일시적인 후견 대상인 경우. 3) 혼인 당사자 중 한 명이 금치산자 선고를 받지는 않았더라도 정신 질환을 앓고 있어서 결혼이 국민 공동체에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야기될 수 있는 경우. 4) 혼인 당사자 중 한 명이 1933년 7월 14일 자 법에 명시된 유전병 중의 하나를 앓고 있는 경우”

 

…이 법들은 그 자체로도 ‘제국 시민권’ 및 ‘독일 혈통과 명예의 보호’에 관한 뉘른베르크 법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유대인을 2등 시민으로 강등시키고 다른 무엇보다도 유대인과 완전한 시민권을 보유한 시민들 간의 결혼을 금지하고, 설사 아리안 혈통의 시민일지라도 독일의 명예에 부합하는 가치 있는 시민임을 스스로 증명하도록 강요했다.

 

히틀러가 전쟁의 막바지에 제안했던 한 계획…

 

“전 국민을 대상으로 엑스레이 검사를 실시한 다음, 병이 있는 국민 전체의 명단 특히 폐와 심장질환이 있는 국민의 명단이 총통에게 보고될 예정이다. 제국의 새로운 보건법에 의해…이들의 가족들은 더 이상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며, 아이를 갖는 것도 금지될 예정이다. 이들의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는 오로지 총통의 다음 명령에 달려 있었다.”//

 

경계와 경계선, 그리고 호모 사케르

 

이 얼마나 무서운 계획인가. 그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홀로코스트는 발생했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것을 추모하는 공간에 서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생각들, 죽음의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이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삶이고 무엇이 죽음인가? 과거 유태인들이 수용소에 갇혀 경계에 서 있었다면, 현재 팔레스타인 민중들은 겹겹이 쌓여진 장벽에 의해 거대한 수용소에 갇혀 있는 것 아닌가. 출구 없는 생존, 나날이 엄습하는 죽음의 공포…

 

역사를 기억하고 재발을 방지한다는 추모 공간이 무엇에 필요하단 말인가. 그것이 여전히 현실에서 악령으로 되살아오고 사람으로 재생산된다면 말이다.

 

다시 한 번 아감벤의 이야기를 인용해 본다. “인간존재로서의 권리를 어쩌면 그토록 완벽하게 박탈했는지, 그들에게 자행된 어떤 짓도 더 이상 위법이 아닌 것처럼(그러니까 사실상 모든 것이 정말로 가능해지게) 보이도록 만든 법적 절차와 권력 장치들을 주의 깊게 탐구하는 것이 보다 정직하며 또 무엇보다도 보다 유용할 것이다.”

 

그렇다. 그런 실상이 참혹하다는 설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내야 한다. 그것을 찾아내고 극복하기 위해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그런 행위들을 정치화하여 활용하려는 것을 막아야 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도발적으로 다음과 같이 직설적으로 현 상황을 표현했다.

 

“홀로코스트를 절대적 악이라는 심연으로 만듦으로써 홀로코스트를 탈정치화하는 것에 담긴 ‘객관적인’ 이데올로기적-정치적 내용이란, 공격적인 시온주의자들과 서구의 반유대주의적 우파들이 오늘날의 급진 정치적 가능성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 체결한 정치적 협정이라는 사실이다.”<슬라보예 지젝 지음‧한보희 옮김,『전체주의가 어쨌다구』(서울: 새물결, 2008), p.107>

 

도대체 어리둥절하다.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인지. 이런 다양한 해석들의 공존이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면, 우리가 학문을 함으로써 진리를 탐구한다는 것, 그리고 이를 실천으로 증명한다는 것, 이것도 거짓이 아닐까? 위선이 아닐까?

 

얘기가 약간 옆으로 나간 것 같다. 글이란 것이 항상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해주기 바란다. 하지만 하고 싶은 얘기는 해야지 하는 생각이다. 비판을 두려워한다면 글쓰기를 접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나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용기가 있을까? 자신이 없다.

 

우리 현실에서 많은 논객들이 글을 접거나 우회하는 모습을 보면 나라고 특별나겠는가!!!

 

 

* 전시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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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추모전시관으로 이동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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