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일상 담론

기억이 공간과 만나면 3-4) 기억이 공간으로 스며들다: 인민과 다중

시놉티콘 2009. 3. 21. 16:05

기억이 공간과 만나면

 

3-4) 기억이 공간으로 스며들다 :

Materials on the Memorial to the Murdered Jews of Europe

 

* 이 부분의 글은 전체적인 맥락을 보자면 샛길로 빠진 글이다. 글을 쓰다 보니 이 길로 들어섰다. 뭘 빼들었으면 뭐라도 썰라고 하는 옛 선인들의 명언이 생각나서 떡 본 김에 제사를 지낸다는 생각으로 쓰는 글이다.

 

우리의 이름 인민(people), 새로운 이름 다중(multitude)

 

진보를 위한 본능은 면면이 전승되고 있다. 권력의 공간 안에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냈던 이름은 인민이다. 정치주체이며 배제된 계급을 동시에 지칭하는 '인민' 말이다.

 

“ '인민(popolo)'이라는 용어는 정치적 의미에 대한 모든 해석은 다음과 같은 특이한 사실, 즉 근대 유럽어에서 이 용어는 항상 빈민, 상속권이 없는 사람들, 배제된 자를 동시에 지칭했다는 독특한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하나의 동일한 말로 구성적(또는 제헌적)인 정치주체와 사실상 혹은 법률상 정치로부터 배제된 계급을 동시에 지칭하는 것이다.”<조르조 아감벤 지음․박진우 옮김,『호모 사케르』(서울: 새물결, 2008), p.332>

 

주체이며 배제된 객체인 인민, 그들에게 희망은 있는가? 이들에게 희망이 없는 세상은 온당한 것인가? 사회의 다수를 구성하는 인민에게 희망 없는 삶이란, 무엇을 위한 삶인가? 우리는 여전히 인민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것을 현실화시켜야 한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대에 민이 주인이라고 헌법에 명시된 사회에서, 그것이 현실이 되게 하려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실천이 필요하다. 잘못된 것을 올바르게 변화시키는 실천…

 

그저 주기적으로 다가오는 선거라는 절차 속에서 단지 1분 정도의 기표와 투표 행위로 주권이 실현된다고 말할 수 없다. 법에 명시된 항상적 주권자가 현실이 되어야 한다. 주기적으로 다가오는 계기마다 ‘찰라적 주권자’로 머무르는 것은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새로운 변화를 위한 실천은 현행법에 의해 제한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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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순적 상황을 새롭게 변모시켜야 한다. 배제된 주체들을 복원시켜야 한다.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 배제 당해왔고, 자본의 권력이 통치하는 공간으로부터 배제 당해왔고, 기억마저도 권력에 의해 빼앗겨버렸던 배제된 주체들을 복원해야 한다. 그래서 기억을 복원하는 것은 귀중하다. 권력이 만들어낸 기억, 역사로 재단된 기억이 아니라, 권력과 역사가 부단히 배제하고 없애려고 기획하고 짓눌러도 면면이 입에서 입으로 기억에서 기억으로 전수되어 왔던 배제된 주체들의 기억을 복원해야 한다.

 

그 복원된 기억은 현실의 권력역사와 충돌해야 하며 새로운 역사로 재탄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충돌의 과정에서 빼앗긴 공간들을 되찾아야 한다. 그래서 기억은 새롭게 재구성되어야 한다. 아마도 그 이 과정에서 네그리와 하트가 얘기하는 다중이 출현할지도 모른다.

 

다중에 대해 길게 인용을 해본다. 좀 지루할 것이다. 읽었던 나도 지루하고 무슨 말인지 몰라 아직도 헤매고 있으니 말이다.

 

“민중은 하나(일자)이다. 물론 인구는 수없이 다양한 개인들과 계급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민중은 이 사회적 차이들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종합하고 환원한다. 이와 달리 다중은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복수적이고 다양한 상태로 남아 있다. 정치철학의 지배적인 전통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민중이 주권적 권위로서 지배할 수 있고 다중이 그럴 수 없는 이유이다. 다중은 특이성들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특이성은 그 차이가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주체, 차이로 남아 있는 차이를 뜻한다. 민중의 구성부분들은 무차별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자신들의 차이들을 부정하고 단념함으로써 하나의 정체성이 된다. 따라서 다중의 복수적인 특이성들은 민중의 획일적인(undifferentiated) 통일성의 반대편에 서 있다.

 

그렇지만 다중은 비록 복수적으로 남아 있다 할지라도, 파편적이거나 무정부적이거나 지리멸렬하지 않다. 다중 개념은 그래서 군중, 대중, 폭중 등과 같은 복수적인 집합들을 가리키는 일련의 다른 개념들과도 대조되어야 한다. 군중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개인들이나 집단들은 지리멸렬하여 공통적으로 공유된 요소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 개인들이나 집단들의 차이의 축적은 생기가 없는 것으로 남아 있으며 쉽게 하나의 무차별적인 집합체로 나타날 수 있다. 대중, 폭중 그리고 군중의 구성요소는 특이성들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구성요소들의 차이들이 너무나 쉽게 전체의 무차별성으로 해소되어버린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더욱이 이 사회적 주체들은 스스로 행동할 수 없고 오히려 지도받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수동적이다. 군중이나 폭중 또는 폭도는 사회적 결과들-종종 끔찍하게 파괴적인 결과들-을 가져올 수 있지만, 자발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외부로부터의 조작에 그렇게 쉽게 영향을 받는 이유이다. 특이성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을 기초로 해서 행동하는 다중은 능동적인 사회적 주체를 나타낸다. 다중은 내적으로 차이나는, 다양한 사회적 주체이다. 다중의 구성과 행동은 (무차별성에 기초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정체성이나 통일성에 기초하지 않고 자신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에 기초한다.

 

다중에 대한 이 최초의 개념적 규정은 주권의 전통 전체에 대해 명백한 도전을 제기한다.…정치철학의 반복되는 진리들 중의 하나는, 오직 일자만이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군주이건, 정당이건, 민중이건, 또는 개인이건 말이다. 통일되지 않고 복수적인 채로 남아 있는 사회적 주체들은 지배할 수 없으며, 그 대신 지배를 받아야 한다. 달리 말해, 모든 주권적 권력은 필연적으로 명령하는 머리, 복종하는 손발 그리고 지배자를 지탱하기 위해 함께 기능하는 기관들로 이루어진 정치적 신체를 형성한다. 다중 개념은 주권에 대한 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진리에 도전한다. 다중은 다양함을 유지하고 내적으로 차이를 유지한다 할지라도 공통적으로 행동할 수 있으며, 따라서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다. 다중은 하나가 명령하고 나머지들이 복종하는 정치적 신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지배하는 살아 있는 살이다. 물론 다중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무수한 개념적․실천적 문제들을 제기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다중의 도전이 민주주의의 도전이라는 점이 분명해져야 한다. 다중은 민주주의, 다시 말해 만인에 의한 만인의 지배라는 법칙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적 주체이다. 달리 말해 지극히 큰 것이 걸려 있는 것이다.“

 

<이상,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지음, 조정환․정남현․서창현 옮김,『다중』(서울: 세종서적, 2008), pp.135~137>

 

이리도 길게 인용한 것은 나 스스로 다중 개념에 대해서 아직도 혼란스럽기 때문에, 직접 쓴 필자의 글을 인용하는 것이 혼선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여하간 21세기 새로운 시대라고 지칭되는, 달리 말하면 신자유주의 세계화, 기술의 발전에 힙 입은 바 큰 지구화라는 시대에 살고 있는 인민들은 행복한가? 그들의 행복하지 않다면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좋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 참 people라는 단어는 해석하는 과정에서 인민이라는 해석어를 선택한 것이다. 이 사회는 이렇게 스스로 단어마저도 선별하고 어떻게 쓸까 자기검열하게 만든다. 그래도 어찌하랴 이렇게라도 우회해서 가는 수밖에…용감하지 않은 자들은 우회로라도 선택해야 한다. 모두가 전장으로 나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어떤 학자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새로운 전조를 알리는 것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전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다 예측은 실천이 동반되지 않으면 바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여하간 온통 전 세계의 시간과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다수의 인민이었으며, 다중이었다. 그리고 빼곡하게 쌓인 기억의 모든 자취도 그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 몫들은 온전하게 전수되지 못했다. 앞에서 언급했듯 가진 자들 즉 지배자들의 시각과 권력에 의해 사라지고 숨겨지고 억눌려버렸다. 그 유명한 ‘분서갱유’(焚書坑儒)가 단적으로 보여준다. 약탈과 학살, 폭정의 역사는 항상 사라지거나 숨겨져야 했다. 저항과 봉기, 투쟁의 역사도 사라지거나 지워져야 했다.

 

그것이 사라지고 지워지고 억눌린다는 것은 끈질긴 실천의 기억들의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기억들은 어느덧 우리 곁에서 회생한다. 민중문화, 노동자문화, 생활문화, 관습과 제례, 제의 등 다양한 방식으로 다중들에 의해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다. 그것은 어느 새 새로운 것으로 갱신되어 과거기억의 빗장을 뚫고 현실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한다.

 

이제 기억을 다중에게 돌려줘야 한다. 이제 역사적 기억의 주체로 인민이 복원되어야 한다. 복원된 역사 위에 새롭게 공간은 재구성되어야 한다. 가진 사람들만을 위한 공간이 아닌 모두가 함께 향유하는 공간으로 말이다. 공공성, 공공재로서 공간을 재탄생시키고, 우리들의 일상은 평등과 공동체의 문화로 갱신되어야 한다.

 

그래서 기억여행이 중요하며 역사를 올바르게 교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역으로 공간을 통한 시간의 재구성도 가능하다. 공간은 인간이 시간의 궤적을 따라 일상을 살아가는 곳이다. 일상의 진보성을 획득하는 것은 공간의 진보성을 획득하는 것이며 시간의 진보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간과 일상, 기억은 맞물려 돌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문자와 대화 속에서 담론으로 재생산된다.

 

이것이 우리들 일상의 아우라다.

 

자 이제 전시관을 나와서 다시 베를린의 거리를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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