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일상 담론

기억이 공간과 만나면 8-2) 경계인(?)을 만나다 : 경계의 틈에서 희망을

시놉티콘 2009. 4. 17. 12:05

기억이 공간과 만나면

 

8-2) 경계인(?)을 만나다 : 경계의 틈에서 희망을

 

송두율 교수님은 뮌스터대학에서 정년퇴임을 얼마 남겨놓지 않았다. 이제 강단과 새로운 시간의 경계에 서 있는 것이다. 송두율 교수는 퇴임 이후 어떤 학문적 여정을 새롭게 출발하실지 궁금하다. 그리고 새로운 출발이 새로운 희망으로, 학문의 새로운 개척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더더욱 이렇게 바라는 것은 그 분이 우리 역사의 경계에 서 있는 경계인(?)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 어느 편에도 설 수 없었던 존재…. 그 고독의 시간을 생각할 때, 남은 그 분의 여생이 이제 편안한 학문과의 사색이기를, 고독한 삶의 여정에 단비와 같은 기쁨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북한 권력서열 23위의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

 

2003년 우리 언론은 그를 “북한 권력서열 23위의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고 규정했다.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암약한 간첩이었다고 규정한 것이다. 그 실체는 없다. 그러나 이 당시 이렇게 규정했던 신문과 언론인들의 반성의 목소리는 없다.

 

거짓말을 했으면 사과를 하고 반성을 하는 것이 사람 살아가는 방식이다. 사과도 없고 반성도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용서는 그냥 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한 사과와 반성에 기초해서 용서는 가능한 것이다.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말은 진정 이해가 가지만,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라”는 이해가 안 된다.

 

가해자의 진솔한 사과와 반성이 없이 피해자에게 용서를 하라는 것은, 어찌 보면 피해자에게 너무나 가혹한 사회다. 일제 식민치하의 가해자를,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를, 광주학살의 가해자를 용서하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홀로코스트의 만행을 저지른 나치를 용서할 수 있다는 뜻인가? 그리고 그 아픈 역사를 지나온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공격한 것을 용서하라는 말인가?

 

거짓은 단죄되어야 한다. 송두율이 김철수가 아니었는데…. 그러고 넘어가면 된단 말인가. 그 오랜 시간 고국 땅도 밟을 수 없었던 그에게, 오랜 시간을 돌아 돌아 밟게 된 땅은 사람들이 생동하며 움직이는 땅이 아니라, 감금된 땅이었던 그에게, 그리고 그 영어의 시간을 지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그에게….

 

너무나 가혹하다. 그에게 웃음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에게 진솔한 사과와 반성이 전제된다면, 넓은 마음으로 용서를 베풀지 않을까. 그리고 이 사회도 이제 그런 사과와 반성을 통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 국가보안법이라는 족쇄를 벗을 때도 된 것은 아닐까. 그 날 떠오른 여명은 아마도 너무 아름답지 않을까.

 

경계인, 추방된 자인가? 경계를 잇는 틈인가?

 

다시금 경계인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송두율 교수님의 ‘틈’이란 단어가 생각난다. 우리 시대 경계인(?)으로 불리는 송두율 교수는 추방된 자인가, 아니면 경계를 잇는 틈인가? 이 시대 ‘경계’는 핵심 화두이다. 도처에 경계선이 들어서고 있다. 어느 곳에도 설 수 없지만, 어느 곳에도 설 수 있는 존재. 배제되지만 포함되는 존재.

 

조르즈 아감벤은『호모 사케르』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추방된 자의 삶은-신성한 인간의 삶과 마찬가지로-법과 도시와는 무관한 야생적 본성의 일부가 아니다. 오히려 퓌시스와 노모스(간단히 말하자면 <노모스 nomos>는 법/규범을 -- 강제력을 갖는 실정법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 -- 의미하며 <퓌시스 physis>는 자연/본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노모스-퓌시스 논쟁이란 법과 자연의 대립을 둘러싼 논쟁을 가리킨다), 배제와 포함 사이의 비식별역이자 이행의 경계선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두 세계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그 두 세계 모두에 거주하는 늑대 인간의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삶이 바로 추방된 자의 삶인 것이다.”

 

경계의 호모 사케르는 늑대인간의 인간도 아니며 짐승도 아닌 삶이 바로 추방된 자의 삶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경계선인 것이다. 그리고 추방된 것이다. 그렇다고 배제된 것도 아니다. 포함되었지만 배제되는 존재. 송두율 교수는 추방되었으되 배제되지 않고 포함된 존재였다. 따라서 사법의 칼날은 그를 감금했다. 그가 배제되었다면 주권의 영역은 그를 포함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포함된 존재로서 그는 존재했다.

 

그것이 수용소이다. 우리 시대 이 경계인의 상징은 비전향장기수이다. 그들은 배제되었지만 포함된 존재였으며, 인간도 짐승도 아닌 존재로 치부되었다. 그 무자비한 전향공작이 벌어졌고 그들에게 그 순간은 인간이 아님을 강요받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사회안전법에 의해 지속적인 관찰의 대상이 되었다. 비전향장기수 김선명 선생님은 45년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송두율 교수님은 ‘틈’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 같다. “‘경계인’은 기존의 경계선을 허문다. ‘경계인’은 이쪽과 저쪽이 모두 숨 쉴 수 있는 틈을 만드는 사람이다. 이 틈을 열고자 경계인은 이쪽 안에서 저쪽을 발견하고 저쪽 안에서 이쪽을 발견하는, 쉽지 않은 작업을 해야만 한다.…남과 북을 가르는 휴전선이라는 경계선의 틈을 열어 서로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되게 하고, 이 공간을 다시 전 한반도로 확장시켜 평화로운 삶의 공간을 만들려면, 우리는 먼저 이쪽이냐 저쪽이냐는 식의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일차원적 경계 개념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해방해야 한다.…물고기가 물속에서 살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보면 대기 밖에 살고 있는 존재로 볼 수 있다. 이렇게 경계선의 이쪽과 저쪽을 아울러 볼 수 있는 그러한 여유를 이야기해야 한다.”

 

경계라는 틈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을 열자는 뜻일 것이다. 아마도 살아온 기억 속에서 발생하는 성찰과 앞으로의 갈 길에 대한 송 교수님 나름의 해법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피할 수 없는 3자’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서의 경계인, 그렇다면 즉 피할 수 없다면 새로운 가능성을 찾자는 뜻으로 들린다. 그래서 이런 틈이 넓어지고 그리하여 타자와 공존하는 생활세계를 만들려는 모색일 것이다. 그 제3의 공간을 열 수 있을까? 앞으로 송두율 교수님의 학문세계는 이 제3의 공간을 열어나가는 치열한 모색의 과정일 것으로 생각된다.

 

제발 부탁이다. 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천식이 짐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계속 머리에 머문다. 경계인, 호모 사케르, 틈, 피할 수 없는 3자, 새로운 가능성…. 우리에게도 한반도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중요 키워드가 될 단어들이란 생각이 든다.

 

경계를 넘어 휴머니즘의 세상으로

 

그래 이제 경계를 넘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로 가야할 것이다. 휴머니즘의 세상…. 경계를 허물고 수용소를 없애고, 그리하여 진정한 인간적 소통의 세계화 말이다. 우리는 지구화와 세계화를 역설하면서 그 시간 내내 경계선을 만들어나갔다. 과거 동서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장벽이 냉전의 경계였다면(우리의 현실은 아직도 휴전선이란 큰 장벽으로 나뉘어 있지만), 이제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곳곳에 늘어서는 경계는 사람과 사람을 나누는 경계선이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주정부가 도심으로 빈민가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빈민가 주변에 콘크리트 ‘분리 장벽’을 쌓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의 장벽도 유명하다. 1969년 신교도의 생킬 로드와 구교도의 폴스 로드 지역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처음 설치된 이래, 벨파스트 곳곳엔 비슷한 장벽이 세워졌다. 2002년 쇼트스트랜드 구역에서 충돌이 재연하자, 경찰은 장벽의 높이를 9.9m로, 3.3m나 높이기도 했다. 이라크를 점령한 미군은 2007년 치안 확보를 이유로 바그다드의 수니파와 시아파 거주지를 분리하는 5㎞ 장벽을 설치했다.

 

이제 세상은 두 개의 양극화 장벽을 쌓고 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장벽, 이주노동자를 막는 장벽, 종교적 충돌을 막는 장벽 등등 도처는 장벽 투성이다. 그리고 그곳의 경계인들은 수용소에 감금당하고 있다. 이 아이러니한 세계화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휴머니즘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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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웠던 너무나 아쉬웠던

 

자리가 너무나 아쉬웠다. 이심전심이던가 송두율 교수께서 자리를 옮겨 차나 한 잔 더 하시자고 권했다. 이구동성으로 우리의 발걸음은 옮겨졌다. 그리고 이어진 신변잡기와 신변잡기에 얽힌 슬픈 얘기들과 학문적 얘기들…. 짧지만 많은 얘기들이 오고갔다. 다만 술이 좀 들어갔었고, 필기를 해놓지 못했고, 지금은 시간이 좀 많이 지나서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냥 이 시간은 느낌과 느슨한 기억으로 남겨두자. 모든 것을 기억하려고 하는 것도 쓸데없는 집착이란 생각이 든다. 단지 그 시간, 그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 추억은 아름다웠다. 헤어짐의 시간이 아쉽기는 했지만, 다 그런 것 아닌가. 만남과 헤어짐, 그것은 인간이 변화해 온 역사로도 해결할 수 없는 운명 아니 숙명 아닌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삶의 역사였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두 번째 베를린의 잠자리로 들어간다. 내일은 무슨 일이 생길까, 무엇을 만날까, 그리고 어떤 감흥을 받을까? 설레는 마음과 무너질 때로 무너진 육신을 옮겨 베를린호텔 방으로 기어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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