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일상 담론

기억이 공간과 만나면10-2) 장벽 전시관 안으로: 장벽을 넘어갔던 아픈기억

시놉티콘 2009. 5. 11. 11:25

기억이 공간과 만나면

 

10-2) 장벽 전시관 안으로: 장벽을 넘어갔던 아픈 기억들

 

* 베를린장벽을 둘러싸고 너무나 많은 사연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사연들을 책자에서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즉 저작권문제 때문에 사진으로 실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분이다. 이 내용은 전시관에 판매하는『The Berlin Wall - Monument of the Cold Wr』(독일어 원문은 Die Berliner Mauer - Monument des Kalten Krieges)에 기초한 것이다.

 

# 장면 1. 자유를 위한 점프(Jump to freedom), p. 39.

 

19살의 독일 병사 Conrad Schumann은 1961년 8월 15일 철책을 뛰어넘어 서독으로 탈출했다. 이 병사가 최초로 서독으로 탈출한 경계병이었다. 이 장면은 서독기자의 사진에 찍혔다. 그것이 이미 서로 알고 찍은 것이든 아니면 우연이든 상관없이, 젊은 병사의 철책을 넘는 사진장면은 자유를 찾아 철책을 뛰어넘은 행동으로 규정된다. 이런 행위가 장벽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요인이었겠지만, 그렇게 경계를 넘나들지 않는다면 장벽은 허물어지지 않는 역사로 지금도 남아 있었을 것이다.

 

# 장면 2. 경계선에 있는 집들을 통해 탈출하기, pp. 46~47.

 

동베를린 거리에서 장벽을 따라 집들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서독으로 탈출하기 위해 창문을 통해 점프하거나 로프를 이용해 탈출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자 동독 당국은 이 지역 주거민들을 퇴출시키거나 재배치시켰다. 77살의 Frieda Schulze는 자신의 집 창턱을 이용해서 탈출을 시도했고, 서독의 소방대가 깔아준 점핑 메트리스로 뛰어내렸다. 80살의 Olga Segler는 탈출을 위해 시도한 점프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다음날 죽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자 동독 당국은 경계선에 접한 모든 집들의 창문을 블록으로 모두 막아버렸다.

 

# 장면 3. 버스로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 p. 73.

 

1963년 5월 12일 동독의 20~28세의 8인은 훔친 버스로 시멘트 바리게이트를 뚫고 탈출을 시도했으나, 경계병들이 총탄 공격으로 단 1m 만 넘어가고 실패했다. 이들은 10년에서 9년 형을 살아야만 했다.

 

# 장면 4. 케이블 통으로 탈출하기, p. 73.

 

1965년 1월 베를린 전기회사 소유인 나무 케이블 통에 숨어서 6명이 탈출했다.

 

# 장면 5. 로프로 탈출하기, p. 74.

 

마지못해 동독공산당에 입당한 26세의 학생 Dieter W.는 친구의 집 창문을 통해 50m의 긴 천을 연결하여 5층 창문을 통해 탈출을 시도했다. 탈출엔 성공했지만 발목이 부러졌다.

 

# 장면 6. 불도저로 탈출하기, p. 75.

 

3살 아이와 함께 결혼한 커플이 12톤 불도저를 이용해 Staaken 장벽을 부쉈다. 이 불도저는 알람 펜스를 부수고, 여러 개의 그물 펜스를 쓰러트렸다. 동독 병사가 불도저를 향해 60발의 총탄을 쐈으나 결혼한 커플은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다. 그리고 불도저는 나무 앞에 멈췄다. 탈출자들은 다행히도 서독 영토에 있었다.

 

# 장면 7. 트로이의 소, pp. 76~77.

 

소 모양을 한 모형물 속에 숨어서 탈출자들이 이미 2번이나 성공했었다. 그러나 세 번째 시도에서 그 트릭은 발각되었다. 1969년 7월 7일(견우와 직녀의 7월 7석을 연상케 한다), 18세의 Angelika B.는 서독에 있는 그녀의 피앙새를 만나서 같이 살기 위해 시도한 것이었다. 그녀는 트로이 소 모양의 조형물 몸체 속에 숨었다. 그녀의 피앙새는 이 탈출을 위해 5,000 독일 마르크를 지불했고, 성공 시에 5,000 독일 마르크를 더 지불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녀는 발각 체포되었고 포츠담의 Lindenstrasse 감옥에 투옥되었다.

 

탈출을 위한 평범한 사람들의 다양한 실천은 지속되었다.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경계를 넘어서려고 했다. 어떤 이는 운 좋게도(?) 성공을 해서 서독에서 살 수 있었고 어떤 이는 재수 없게도(?) 발각되어 투옥되거나 탈출과정에서 죽었다. 이 아픈 기억들은 경계선에 새겨져 있다. 지금은 없어진 경계선에 아직도 아프게 매달려 있다. 기억은 그렇게 사람들의 입을 통해 새로운 탈출의 아이디어로 되살아나고, 그 되살아난 아이디어는 평범한 사람들의 실천을 통해 새롭게 기억에 추가된다.

 

장벽을 넘어가려고 하는 가지각색의 사연들은 가로막혀 있는 세상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울분이다.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고 그 애절한 사모곡을 남겨놓고 그렇게 서 있는 장벽은 분노의 대상이다. 자유를 향한 갈망은 멈추지 않았으며 그 자유를 향한 행진은 지속되었다. 이념을 넘어서 사람을 만나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은 그렇게 장벽이 건재해 있는 동안 계속되었다.

 

1961, 1962, 1963, 1964,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74, 1975, 1977, 1980, 1981, 1982, 1983, 1984, 1986, 1987, 1989

 

그렇게 매해 그들은 장벽을 넘다가 사망했다. 1973년 1972년 생 Holger H. 간난아이는 부모에 의해 탈출에는 성공했으나 질식사했다. 태어난지 얼마가 안 되어서…. 아픈 기억들은 기억하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이다. 애써 눈 돌리고 삶의 즐거움을 찾는 것이 어쩌면 지혜(?)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넘을 수 없는 장벽이라면 체념을 하는 편이 오히려 현명(?)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권력 앞에 배워왔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우리의 상식과 달리 그 일은 도처에서 벌어진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알면서 사람들은 그 길을 간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알면서도 말이다.

 

우리에게도 아픈 역사들이 있다. 문익환 목사님, 황석영 작가, 임수경씨 등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갈 것을 각오하고 그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감옥으로 예외 없이 수감되었다. 서울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달라고 외쳐야 한다던 문익환 목사님은 그 길을 온 몸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넘어가야 통일은 온다고, 하루라도 빨리 그 날이 온다고 말이다.

 

아직도 우리 앞에 장벽은 철책은 의연하게 서 있다. 그 장벽을 동포의 자식들이 총을 들고 서 있다. 그들은 상대방을 방어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땅에 있는 사람들의 월경도 막아야 하는 존재들이다. 아무 것도 모르고, 아니면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철책선에는 총을 들고 우리의 자식들이 동생이 오빠가 형이 서 있다.

 

언젠가는 사라질 장벽을 위해서 말이다.

 

도종환 님의 담쟁이란 시가 생각난다. 아마 우리가 가야할 길은 이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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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 쟁 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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