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신윤복·김홍도…‘진경산수 화원’에 모인다
정선·신윤복·김홍도…‘진경산수 화원’에 모인다 | |
북방·남방 화법과 주역원리 조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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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 학자였던 신돈복은 그의 야담집 <학산한언>에서 당대 일류 문인이던 사천 이병연(1671~1751)과의 ‘회고 인터뷰’를 통해 흥미로운 비화를 알려준다. 사천이 친구였던 화가 겸재의 뛰어난 그림들을 사신을 통해 중국에 넘겨 팔아 막대한 장서들을 입수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다.
사천의 도움으로 겸재는 숙종 38년(1712) 금강산 여행을 한다. 보답으로 내외 금강산 진경 21폭을 그려 사천에게 선물했다. 이를 <해악전신첩>이라 이름 붙이고 스승 삼연이 폭마다 시를 붙였다. 이 그림첩이 겸재가 중국까지 명성을 떨친 계기가 됐다. 그는 72세 때 또 하나의 21폭 <해악전신첩>을 그리는데, 36년 전 풋내기 화가로 처음 그렸던 금강산의 황홀경을 모든 기량을 쏟아부어 완성했다.
겸재가 양천 현령에 재직할 때는 ‘시화환상간’, 즉 사천은 시를 보내고, 겸재는 화답 그림을 보내기로 약속하고 영조 17년(1741) 만 일년 동안 실행에 옮겨 <경교명승첩> 상하 두 권을 완성했다. 한강 상류에서 하류로 배 타고 내려오면서 당시 강변의 진경 풍속을 그린 작품집이다. 일생의 친구 사천은 81살 때 타계하는데, 그를 잃은 겸재는 모든 기량을 쏟아부은 <인왕제색도>를 영전에 바친다. 백악산 기슭 사천의 집에 놀러가면 늘 바라보던 산, 노년의 겸재가 그 아래 살았던 인왕산이 비구름에 잠긴 모습을 그린 대작이다.
겸재의 인생에는 이처럼 재능을 아껴주던 벗과의 교유가 큰 몫을 차지한다. 사천이 한 축이라면 또다른 축은 영조였다. 영조는 왕자 시절의 그림 스승 겸재를 우대하여 시골 관리에서 한성의 종6품 관리인 주부로 끌어올렸다. 영조는 그뒤 사천을 간성 군수로, 겸재를 청하 현감으로 다시 내려보내 배 타고 오르내리며 관동팔경을 그리도록 배려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관동명승첩>이다.
최완수 연구실장은 겸재를 ‘화성’이라고 일컫는다.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사생하는 데 가장 알맞은 고유화법을 창안해 진경산수를 대성했기 때문”이다. 즉, 당시 중국 회화사에서 미해결로 남았던 북방화법과 남방화법의 특장을 이상적으로 조화시켰고, 성리학 경전 <주역>의 음양 원리를 성공적으로 도입했다는 것이다. (02)762-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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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등록 : 2009-05-14 오전 12:59:3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