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작가 황석영이 만난 정경모 선생
여든여섯 망명객 “일왕 초청 안될 말” 카랑카랑 | |
작가 황석영이 만난 정경모 선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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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가 지난해 창간 20돌 기념 기획으로 시작한 원로들의 회고록 ‘길을 찾아서’ 다섯번째 주인공인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86) 선생의 이야기가 109회로 1부를 끝냈다. 2부 연재는 필자의 건강 사정으로 11월부터 재개할 예정이다.
지난 5월4일 ‘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란 제목으로 연재되기 시작한 그의 인생담은 그 어느때보다도 뜨거운 독자들의 호응과 민감한 반향을 일으켜왔다.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와 함께 평양을 다녀온 ‘의문의 재일동포’로만 국내에 알려졌던 그는 40년 가까이 일본땅에서 홀로 펜 하나로 싸워온 민주·통일운동 지사로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른바 민주화 이후에도 국가보안법의 사슬에 걸려 ‘자의반 타의반’ 귀국을 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에 국내 독자들과 직접 만날 수 없는 형편이다. ‘109회’ 집필을 끝낸 지난달 중순, <하니티브이> 동영상팀과 함께 일본 요코하마 히요시의 자택을 방문해 그의 근황과 감회, 앞으로 구상 등을 육성으로 들어봤다. 특히 북한 방문·<장길산> 일어판 번역 등으로 25년 가까이 각별한 친분을 쌓아온 작가 황석영씨가 1박2일 동반취재에 나서 정 선생에 대한 <한겨레>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줬다.
황석영 안녕하셨어요, 선생님. ‘길을 찾아서’에서 유년시절 이야기를 읽으며 선생님과 저의 기이한 인연을 새삼 느꼈습니다. 저도 영등포역이며 여의도샛강 주변에서 놀며 자랐잖아요. 선친 정인환 장로께서 만드셨다는 영등포교회의 흥화유치원을 저도 다녔습니다. 또 당산동에 있는 이백채 마을의 영단주택에 살았는데 그곳도 선친께서 지으셨더군요.
정경모 그 양말산(羊馬山·지금의 국회의사당 터) 꼭대기에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고 거길 올라가면, 강 건너로 밤섬이 보였잖아? 멀리 삼각산 연봉, 북악산, 뒤로는 관악산도 보였었지. 양말산, 죽기 전에 가 볼 수 있을까 했었는데…, 다 없어졌을 거야. 내 노래 한 가락 해볼까? ‘내 놀던 옛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 없구려~’
황 (짝짝짝) 참, 형제로는 지난해 작고한 남동생과 미국에 사시는 여동생, 그러니까 장남이시죠? 장남이 조국을 등지고 떠돌아다니셨으니…. 정 이젠 서울에 아무도 없는 셈이야….
황 50년 전쟁 나서 맥아더사령부의 통역장교로 다시 도쿄로 돌아와 하숙집 딸 사모님과 재회를 하셨는데…그 무렵 국내에서는 리영희 선생도 통역장교를 하셨죠. 저는 베트남전쟁에 끌려가서 통역을 했었고요.
정 미군의 통역을 하다 보면 미국이 움직이는 게 다 보여. 미군의 정체가 보이고. 이북이 쳐들어와서 침략전쟁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의 주장과 내가 보는 견해가 다르더란 말이지.
일왕 남쪽만 가는건 ‘정치적’
황 그때 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정 판문점에서 미군과 북한군이 종종 설전을 벌이는데, 양쪽 주장을 들어보면 말이야, 내가 대단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미국 사람들 주장이 어거지야. 그렇지만 내가 그걸 드러내놓고 표현한 건 아니야. 다만 냄새를 풍겼겠지. 그러다 어느날 호출이 왔어. 추방 통보를 받았지.
황 계기가 있지 않았을까요?
정 기억이 안 나 확실하게, 내가 그냥 사람들하고 하는 이야기가 흘러들어간 건지…. 해방 직전 귀국해서 서울대 의대를 다니다 미국으로 유학 간 게 47년, 에머리대 대학원을 떠난 건 50년, 56년 미군사령부에서 추방을 당한 뒤 미국에 간 적이 한 번도 없었어. 미국에 갈 시도는 여러번 했는데, 그때마다 거부당했지. 아무튼 유학생치고는 제일 먼저 갔던 미국에서 추방을 당하고, 나중엔 내 나라 땅에서도 추방을 당해서 40년 동안 못 가고 있어 이렇게.
황 이른바 민주화정부 때에는 귀국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아직 그 정도로 민주화가 된 건 아닌 거죠?
정 지금까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라는 건 ‘케넌 체제’ 반대운동이라고 할 수 있지.
미군 통역관으로 판문점 파견
황 이번에 저도 처음 들었는데, ‘케넌 체제’ ‘케넌 설계도’라는 것이 뭔가요?
정 일제 때 우리가 식민지가 된 건 미국이 태프트-가쓰라 밀약으로, 조선에 손을 안 댈 테니까 일본 니네 맘대로 하라 해서잖아. 그런데도 조선 사람들은 적이 일본만인 줄 알았지 뒤에 있는 미국은 몰랐어. 조지 케넌이란 미국 외교관이 47년에 기획한 ‘설계도’(87년 발견)를 보면 조선반도와 만주를 다시 일본에 맡기자는 발상이야. 내가 그런 거를 알지 못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걸 알아버려서 오늘날 이렇게 된 거야.
황 망명한 이후 내내 한국의 민주화 연대운동을 하시고, 글도 쓰시고 서숙을 열어서 <씨알의 힘> 잡지도 내시고 사실상 혼자서 줄기차게 언론활동을 하셨는데, 기본적으로 몽양(여운형) 노선을 따르시게 된 계기나 사상의 진전 같은 배경이 있으셨겠죠?
황 6·15 선언을 통해서 남북관계가 큰 진전을 보였는데, 김대중 대통령 서거 이후 ‘만약 그가 없었다면 근대화가 제대로 됐겠는가, 그런 (박정희 개발독재에 대한) 견제가 없었다면 한국이 지금과 같은 민주화를 이뤘겠느냐’ 하는 평가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정 내가 여러번 말했듯이, 그 ‘6·15 선언’의 모태가 바로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 주석이 만나서 합의한 ‘4·2 남북공동선언’이라구. (첫날 만나자마자 거실에 앉아 2시간 넘게 이뤄진 두 사람의 대화는 이튿날 집 근처 공원과 식탁에서 계속 이어졌다.)
황 (민주당의 하토야마 총리 취임 소식을 전한 9월16일치 <아사히신문>을 보며) 사실 한-일 관계를 비롯해 한반도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청산이 아직 이뤄지지 못했잖습니까. 북한하고는 더더욱 그렇죠. 54년 만에 일본 정권이 바뀌었으니…정신대문제를 비롯해서 전후청산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정 내년이 한일합방 100주년이라고 벌써 이명박 정권이 일본 왕을 초청하겠다고 하는데…. 그게 안 될 말이야. 일왕이 남쪽에만 가는 건 짙은 정치적 색깔이 있거든. 그 ‘통석지념’(痛惜之念)이란 말에는 죄과를 뉘우친다는 뜻이 없다구. 노태우의 일본 방문 때 아키히토가 한 말은, ‘조선은 자기네가 먹어야 하는 땅이니까…노한테 북쪽을 먹어라’ 명령하는 뜻이야.
한국을 다시 일본에 맡기려는
황 지난해인가? 몇몇 일본 지식인들 만났을 때 ‘일왕이 명성황후 묘에 가서 참배하면 어떻겠느냐’ 물은 적이 있어요. 상징적이긴 하지만…실질적으로 한반도 분단 해소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답했죠. 정 하토야마 이후 북쪽과 관계? 자민당 체제에서는 강경 일변도였지만 민주당 정권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있을 거야.
황 야박하게 말해서, 일본은 지금까지 미국에 대해 자주적 발언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북-미 관계가 변하면 즉시 따라갈 거라고 봅니다.
정 북쪽도 일본과의 관계는 염두에도 없을 거야. 남쪽에서도 3김 시대 청산과 더불어 새로운 전기를 맞았으니 이 기회를 살리려면 이명박 정부가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을 바꿔야 해.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죽었으니 내 맘대로 할 수 있다’ 하면 안 되지, 그 씨가 있는데, 역사의 바퀴를 그렇게 쉽사리 거꾸로 돌릴 수는 절대로 없을 거야. 민주화 운동 희생자들의 피눈물이 땅속에 스며 있는데 그 힘을 어떻게 무시하나? 크게 보면 케넌 설계도가 청산이 되느냐의 문제인데, 과거 청산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청산해야 해. 평화협정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클린턴 부인이 지금 국무장관이고 클린턴 자신이 평양에 갔다 왔으니 우연만은 아니라고 봐. 오바마 정부가 클린턴 말기 때로 돌아간다면, 정전협정이 아니라 평화협정으로 간다면, 냉전이 정말로 끝나는 상징적인 사건이 이뤄지는 것이지.
황 선생님, 모쪼록 강건하셔서 집필 잘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정 내년에 이 글 모아서 책 나오면 잔치 할 테니 꼭들 건너오라구.
요코하마/글·사진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풀밭에 눕게 하시며 인도하시도다. 진실로 인자하심이 인자하심이 나의 사는 날까지 나를 따르리니 내가 내가 여호와 전에 영원토록 영원토록 영원토록 거하리로다 아~멘.”
두번째 인터뷰를 위해 일본 요코하마 히요시의 자택을 찾아간 9월16일, 정경모 선생은 취재진과 황석영씨 일행을 평소 부부가 산책을 즐기는 집 근처 히요시언덕공원으로 이끌었다. 그러고는 팔순 후반의 불편한 몸으로 5개월 가까이 연재를 통해 자신의 삶을 정리해온 소감을 묻자, 대답 대신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구약 시편 23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어릴 때부터 제일 좋아하는 노래야. 나운영 선생 곡이지.”
그는 그러면서 이 노래가 그 대답이라고 했다.
“난 여한이 없어. 독재정권에서 들어오지 말라 해서 40년 망명객이지만. 미국에서도 쫓겨나 한 번도 다시 그 땅을 되밟아보지 못했고. <조선일보>에서, 이도형이란 사람이 쓰길 ‘한-일 관계가 좋아질 만하면 번번이 깨는 사람이 있다, 그게 정경모다, 독의 원액이다’ 했거든. 괜찮은 인생 아니야? 극우 언론에서 나를 그렇게 지독하게 욕한 건 나로서는 영광이야. 내가 나서 오늘까지 살아온 그 시대가 말이야, 그렇게 뒤틀어진 시대였어. 그 시대에 돈도 많이 벌고 출세도 하고 그런 사람들도 많잖아? 하지만 난 내가 원해서 돈도 없고 출세도 못했으니 여한이 있을 게 없다구.”
자수서, 내 존재 부정과 동시에 문 목사·민주세력 배반하는 일 황석영씨가 전날 했던 질문을 다시 했다. 이른바 ‘민주화’ 이후 한국으로 돌아올 수도 있었는데 왜 오지 않았을까.
“아니, 내가 무슨 억하심정으로 한국 정부가 받아준다는데 안 간 건 아니잖아?”
그는 2003년 참여정부 출범 이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인 박형규 목사를 통해 ‘귀국 제안’을 받았다. 당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민변·참여연대·천주교 인권위 등과 함께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국외 민주인사 64명의 조건 없는 입국 허용을 정부에 요구했다.
“요코하마 한국영사관에 여권을 가지고 가기만 하면 된다고 해서 한국 국적인 아내와 함께 갔더니, 서울에서 온 정보기관원 3명이 출장을 나와 기다리고 있더라구.”
그런데 다음달 다시 오라 해서 찾아간 그의 앞에는 ‘자수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준법서약서보다 더 고약한 게 자수서야. 간첩이었으니 자수하라는 거 아니야? 내가 뭘 잘못해서 간첩이라고 자인하란 말인가. 그때 문 목사가 서울로 돌아갔을 때 얼마나 고역을 당했나 새삼 절감했어. 화가 났지만 스스로 분노를 참았어. 그때 시키는 대로 도장 쳤으면 여권은 줬겠지만, 나 스스로 존재를 부정하고 문 목사를 욕보이며 민주화 세력 전체를 배반하는 건, 할 수 없었어. 그게 끝이었지.”
당시 참여정부는 정경모·송두율·김영무씨와 한통련(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인사 11명을 뺀 50명에게는 준법서약서 없이 입국을 허용했다.
“그 소동 이듬핸가 다마가와 강둑 2킬로미터에 벚꽃이 폈을 때 아내와 구경을 갔는데 강물이 흐르고 철교가 지나고 그 뒤로 산맥이 한눈에 들어왔어. 그걸 보는 순간 내가 그랬어. ‘여보 여보 한국에 안 가, 여기서 죽을 거야.’ 별안간에 부지불식간에 입에서 말이 나오더군.”
그는 자신이 ‘적지’와도 같은 일본 땅에서 평생토록 고독하게 해온 싸움을 ‘제2 해방운동’이라고 일찍이 선언했었다.
“하루 이틀…십년 이십년 사이에 해결될 일이 아니야. 베트남 사람들이 프랑스와 일본과 미국과 싸울 때 얘기했듯이, 내가 못하면 내 아들들이 하고 또 내 손주들이 할 거야. 그리 쉬운 싸움이 아니야. 일제 독립운동에서 지금 통일운동까지,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넘어 그 뒤 일본 사람, 그 뒤 미국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해. 내 생전에 끝날 거란 생각도 한 적이 없어. 내가 내 땅에 돌아가지 못하고 여기서 고독하게 죽는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야. 일제 때 얼마나 많은 독립운동가가 그렇게 죽었어. 그게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정경모 너만 뭐 잘났다고 돌아가나? 난 여기서 끝나도 괜찮아!”
‘이제는 한국에 오라 해도 나는 여기서 살다 여기서 꺼질 것’이라고 한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다짐하듯 말했다. “그게 정경모답게 살다가 정경모답게 죽는 길이야.”
요코하마/글·사진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내가 일본에 도착했을 때 각계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과거에는 반한단체나 한국의 민주화 통일운동을 지원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일종의 금기였다. 이를테면 취약지대라서 언제나 일본을 거점으로 한 ‘간첩단 사건’ 따위를 조작하기가 쉬웠던 탓이었다. 나는 좌우 막론하고 총련의 인사들까지도 무작위로 만났다. 그것은 혼자인 나같은 작가가 오히려 좌충우돌 벌려 놓는 것이 사건을 조작하기에 더욱 어려울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정경모라는 이름을 말하면서 ‘위험하다’고 말했고 또 누구는 그분도 조직에 들지 않고 혼자 망명하고 있는 분이니 ‘안전하다’고 엇갈린 의견을 냈다. 나는 정경모 선생이 한일관계에 대해서 쓴 평론집 <어느 한국인의 감회>(아사히신문사 펴냄)을 보고 그를 꼭 만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85년 겨울의 일이다.
그는 당시에 <씨알의 힘>이라는 팸플릿 잡지를 간행하면서 재일동포와 일본인들이 함께 하는 시민단체를 이끌고 있었으며 ‘여운형 선생 기념사업회’ 일도 하고 있었다. 그는 주위 사람들이 평하는 것처럼 원칙의 사람이었고 바늘 끝만한 타협의 빈틈도 없어 보이는 분이었다. 어찌보면 답답하고 융통성없이 고지식하게만 보이기도 했다. 편협하다는둥, 너무 날카롭다는둥, 일본에 살면서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이 너무 야멸차다는둥, 다른 조직과 불화를 일으킨다는둥…, 그에 대한 평가는 어쩐지 한쪽으로 치우진 감이 있었다. 직접 만나보고 인간적인 교류를 하면서 나는 뒤늦게야 그가 순수한 분이며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휴머니스트라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과학을 전공한 사람인데도 문화예술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었고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 일본 중국에 대한 시사적 문제에 대해서도 정확한 인식과 깊이있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1985년 겨울 일본서 첫 만남
정경모 선생은 운명적으로 독립적이고 소수적인 국외자의 삶을 살아왔는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농담으로 그를 ‘야간’이라고 부른다. 주간부가 주류의 넓은 길을 걷는 삶이라면 야간부는 역행하면서 뒤안길을 걸어야 하는 삶을 의미한다. 선생은 웃으면서 나의 농담을 받아들였다.
그가 게이오 의대에 유학하고 하숙집 따님과 인연을 맺게 된 이야기며, 해방과 전쟁이라는 엄청난 역사적 사건의 발생과 더불어 두 부부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재회의 기나긴 사연은 자신의 회상에 의하여 다 나왔을 터이다.
내가 <찢겨진 산하>라는 그의 책을 읽었을 때에는 정경모라는 사람의 개인사에 대해서 별로 알지 못하다가 선생과 교유하게 되면서야 그의 운명적인 일본 체류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가 약삭빠르게 선택하고 처신했다면 얼마든지 순조롭게 평탄한 삶을 살았을 것이었다. 가장 첫 번째 계기가 전쟁 중 통역장교로 판문점 근무를 하면서 미군과 원활하게 협력하지 못했던 점이다. 그가 통감한 것은 참담하고 종속적인 민족의 현실과 자괴감이었으며 이는 일찍이 리영희 선생이 같은 기간에 느끼고 발견했던 분단된 후진국 지식인의 자기 모멸감이었을 것이다. 이는 나도 베트남 전장에서 느꼈던 자각이었다. 선생의 두 번째 계기는 한국에서 취직하여 군사정권의 근대화계획에 참여했던 때였지만 그는 역시 적응하지 못했다. 부패와 편법이 만연했던 때였으니 그가 주위 동료나 군출신의 상부와 사사건건 마찰을 일으켰을 것이 뻔한 노릇이다. 그가 수삼년에 한번씩 간신히 말미를 얻어, 정식 교류도 없던 일본에 사흘간 통과비자를 얻어 집을 다녀오던 이야기는 다음의 영화 같은 광경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일본으로) 들어오는 날은 귀가 시간으로 허비되고 (집에서) 하루를 체류한 뒤에 그 다음날은 길 떠날 채비로 끝이 난다. 묵묵히 앉아 있는 그의 등 뒤에서 아내는 남편의 여행 봇짐을 챙기고 있다. 그때마다 아이가 하나씩 생겨나게 되었다고’.
그래,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 가족 곁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 군사독재가 종신체제인 유신의 길로 접어들 때 그는 일본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그것이 세 번째의 계기가 되었다. 그는 그야말로 여권도 비자도 없는 임시체류자인 ‘경계인’의 처지로 자신을 내몰게 된다. 그는 한국인 망명자이니 여행의 자유가 없는 셈이며 일본인 아내는 그러한 한국인의 아내로 일본 국적을 버리게 된다.
일본에서, 일본은 물론 남북 그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고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그야말로 생애를 건 모험이었다. 자기의 삶을 건 집필 행위가 없었다면 선생의 존재는 어느 쪽에서나 쉽사리 말살할 수 있는 하찮은 개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도 망명자의 생활을 겪어 알고 있지만 아무런 조직에 속하지 않고 더구나 그들의 배척을 받는 처지라면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삶이었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이들이 생겨나고 그를 옹호하고 도우려는 일본인과 동포들이 생겨나면서 선생은 차츰 외롭지 않게 되었다.
이때 생애 마지막의 계기가 1989년 방북이라는 외롭고 험한 길이었다. 문익환 목사와의 생애 전 기간을 통한 우정과 사상의 공유가 같은 길을 걷게 된 이유였겠지만, 누구보다도 선생은 스스로의 글과 실천을 통해서 그즈음에 방북을 결행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이심전심적으로 방북을 결심하고 동경으로 가서 그와 만났을 때 누구보다도 그는 나를 반겨 주었고 문 목사와 함께 동행할 것을 제안했지만, 나는 선생에게 너무 큰 부담이 될 것이니 우리 사건도 분리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따라서 외면적으로는 당시 일본 사회당 당수였던 도이 다카코 선생이 연결하는 것으로 하되 실제 도움은 이와나미 서점의 야스에 료스케 선생이 주선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실상 나는 선생과 처음부터 끝까지 깊은 논의를 했던 것이 사실이다.
12년 걸쳐 ‘장길산’ 일본어 번역
평양에서의 동행기는 주위에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나는 다시 귀국을 미루고 서베를린에 가서 망명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89년 11월 9일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됐고 그해 겨울, 선생은 내가 혼자서 외로운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예술인 스튜디오에 홀연히 찾아왔다. 우리는 나란히 누워서 서로가 겪은 지난 세월에 대하여 밤새도록 얘기했다. 그는 짐이 도착하지 않아서 동경으로 돌아간 뒤에야 세계를 한바퀴나 떠돌던 짐을 찾았는데 사실 그의 여행은 그의 짐만큼 기구한 것이었다. 신분상으로는 망명자이지만 임시여권을 가진 그는 재입국 비자를 얻어야만 일본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고 나를 만나러 오기 위해서 수개월 동안 일본인 지인들을 동원하며 애를 썼던 것이다. 사실 그가 일본에 망명자로 살면서 밖으로 나온 것은 세 번에 지나지 않는다. 첫 번째가 방북이고 두 번째 베를린 방문, 세 번째가 문 목사님 사후에 그 사모님(박용길 장로)과 방북한 것이 모두였다. 우리는 동서독이 합쳐진 베를린 거리의 곳곳을 돌아다니고 장벽 앞에 가서 기념사진도 찍었고 광장 앞에서 맥주도 마셨다. 동포 사회단체 사람들과 어울려 모임도 가졌는데 뒷풀이에서 그는 학생 때에 불렀다는 슈베르트의 가곡을 부르기도 했다. 그의 노래 솜씨는 어려서 교회 합창부에 있던 시절부터 알려졌던 미성의 테너였는데 일본인 친구들과 모임을 할 적에도 일본과 한국의 가곡이며 독일 가곡을 노래하곤 했다.
그는 일본어와 영어와 독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읽을 뿐만 아니라 사실 몇 권의 번역서도 냈다. 미국인 학자 브루스 커밍스와는 오랜 친구 사이일뿐 아니라 그의 명저인 <한국전쟁의 기원>을 일어로 번역했다. 그는 일한연대위원회의 와다 하루키 교수라든가 이토 나리히코 교수 그리고 작가 오타 마코토, 오에 겐사부로 선생, 화가 도미야마 다에코 선생 등과도 교류하였으며 한국의 리영희 백낙청 고은 선생 등과도 교류하였다.
그와 나는 수년에 한두번씩 주로 내가 도쿄에 갈 때마다 만나서 주변 정세에 관한 얘기도 나누고 서로의 친지들 소식도 전하면서 회포를 푸는데 십여년 전에 쓰러졌을 때에는 나도 놀랐고 우리 주위에서도 걱정이 많았다. 다행히 회복되어 산책을 나다닐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낙천적이고 단순한 생활습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림자처럼 보살펴 주시는 사모님 덕분이란 걸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는 그러한 와중에서도 12년에 걸쳐서 나의 졸작 <장길산>의 일본어 번역을 마쳤는데 이제 출간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어떻게 황 아무개의 작품을 번역하실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주 간단하게 심회를 밝혔다.
나로서는 선생님이 번역 일보다는 우선 말년의 건강을 챙기시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시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파란많은 인생을 ‘길을 찾아서’에 수백장의 원고로 집필한 것을 보면서 아직도 선생의 가슴 속에는 미쳐 다하지 못한 사연들과 열정이 남아 있다는 것을 재삼 확인하게 되었다. 선생님 부디 건강하게 오래 사시고, 생전에 나라가 통일되어 두 분이 자유롭게 고향에도 돌아올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2009년 9월 27일 일산에서 황석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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