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일상 담론

기억이 공간과 만나면 13-2) 슈타지박물관 : 1989년의 현장

시놉티콘 2009. 10. 19. 17:55

 

 

 

기억이 공간과 만나면

 

13-2) 슈타지(Stasi) 박물관 : 1989년의 현장

 

*** 우선 우리에게 너무나 인자한 설명을 해주신 슈타지박물관의 Renate Stefanck 선생님과 죄송스럽게도 성함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1989년 시위현장에서 직접 시민위원회의 중요한 일원으로 활동하셨던 선생님께 거듭 감사드린다. ***

 

1989년을 기억하는 사람

 

* copyright(c) All rights reserved by humanpark.com * 당시 슈타지 복장

 

* copyright(c) All rights reserved by humanpark.com * 당시 라이프찌히 슈타지 조직도

 

슈타지박물관 건물은 최초 1906년 유대인 보험회사(라이프찌히 보험회사)에서 세운 것이었다. 1945년 미군이 이 건물을 넘겨받았고 다시 소련에 넘겨졌다. 그리고 구동독시절인 1950년 슈타지가 만들어지면서 이 건물에 입주하게 된 것이다. 슈타지는 소련방식을 그대로 도용했다고 한다. 당시 라이프찌히 인구가 53만 명이었는데, 2401명의 요원과 1만 명의 보조요원이 있었다고 하니 슈타지의 조직력을 가늠할 만한다. 그리고 당시 구동독 인구가 1,600만 명이었는데 전지역에 9만 명의 요원이 있었다고 한다.

 

도처에 슈타지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감시의 눈, 그것이 동독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감시하지 않고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까? 그런 감시와 통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지키기 위해서인가? 사회주의는 인민이 주인되는 권력 아닌가, 주인을 믿지 못해 감시하는 세상이라면 이미 사회주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슈타지박물관 안에는 구동독시절의 역사가 내장되어 있다. 이곳은 슈타지와 시민들이 격렬하게 맞서있었던 공간이다. 한쪽은 지나온 기록을 없애기 위해, 한쪽은 지나온 기록을 남기기 위해 맞섰다. 슈타지의 복장과 조직을 통해 두려움을 조장하고, 보이지 않는 감시와 통제의 힘으로 두려움을 조장하는 동독정부의 강압에 맞서 시민의 단합된 힘을 보여준 것이다.

 

1989년 라이프찌히의 월요시위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 시위를 통해 라이프찌히 시민들은 슈타지건물을 접수했다. 문서를 없애려는 것을 막기 위해 시민들은 4개의 방을 접수했다. 그리고 시민위원회가 이 건물의 사무실 두 곳을 사용했다고 한다. 시민들은 밤 새워 서류를 지켰다. 그 결실이 지금 우리가 구동독시절의 자료를 볼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989년부터 1990년까지 내무부장관에 의해 일부 자료가 파기되기도 했단다.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질렀으면 그렇게 까지 했을까? 역시 기록의 중대함을 다시금 생각게 한다.

 

라이프찌히는 시민의 힘에 의해 자료를 지켰지만 다른 지역의 경우는 상당분량의 자료가 파기되었다고 한다. 라이프찌히는 시민의 힘에 의해 외국으로 나간 스파이의 기록이 현재도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당시 슈타지 활동가들 중에는 유명인이 많았다. 훔볼트대학의 교수들, 당시 의사들 중의 많은 사람들도 부역을 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라이프찌히 대학교수가 슈타지 활동으로 해고되었으나 다른 지역에서 교수로 고용되어 교수직을 다시 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기억과 공개

 

통일이 된 이후 통일조약 안에 문서관련 내용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즉 문서에 관한 법령에 의해 법으로 기록을 보존토록 한 것이다. 첫째, 누구나 이 문서를 볼 권리가 있다. 둘째, 그 당시 정치범들의 복권에 관한 내용(정치범들에게 부당했다는 확인서), 셋째, 체포된 사람들에 대한 물질적 보상 등을 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당시 감옥에 갔던 사람들에게 확인서를 줬다고 한다. 과거 구동독시절 감옥에서 나오면 석방된 카드를 받는데 그것은 일종의 낙인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동독시절 공적기구에 근무한 사람들 경력을 전부 조사․검증하는 절차를 거쳤는데, 현 공직선거에서 이 검증을 전제로 했다고 한다. 즉 만약 슈타지에 부역한 것이 드러나면 그 지위를 박탈했다. 일례로 슈타지 밀정을 했던 기록이 발견되면 현직 선생을 해직시키는 방식이다.

 

그리고 자기를 감시한 사람의 이름은 대부분 가명이었는데 그 가명을 추적해서 실명을 찾을 경우 동일한 방식으로 해고를 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일들이 많이 잊어졌다고 한다.

 

1989년 현장에 참여했던 기억

 

위에 밝힌 익명(?)의 선생님은 1989년 현장에 계셨던 분이다. 이 분은 지금도 그 당시의 기억을 너무나 자랑스러워하며 그 기억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감각적으로 느껴졌다. 이 선생님은 1989년 시위가 발생한 이유에 대해 시민들의 바꿔야겠다는 자발적인 움직임과 당시 소련 고르바쵸프의 글라스노스트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 copyright(c) All rights reserved by humanpark.com  * 1989년 구동독 라이프찌히 시위 모습

 

1989년 5월 지역선거 결과를 둘러싸고 시민들이 재검표를 진행했다. 그 결과 선거가 실제로 부정선거라는 것이 1990년에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런 문제들은 시민들의 민주주의 필요성에 눈뜨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신학공부를 하던 한 학생이 뮤직 페스티벌을 제안했고, 관청에 신청을 했으나 당국에 의해 금지되었다. 그러나 그 행사를 예정대로 강행했다. 1989년 뮤직 페스티벌은 라이프찌히 주민들에게 ‘할 수 있다’는 큰 경험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경찰과 슈타지에 의해 100여명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보통 사람들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 하나의 계기였다.

 

* copyright(c) All rights reserved by humanpark.com  * 니콜라이 성당의 전경

 

* copyright(c) All rights reserved by humanpark.com  * 니콜라이 성당 내부의 모습

 

9월부터 니콜라이 교회에서 월요일 5시부터 평화를 위한 기도회가 열렸고, 기도회 이후 시위를 진행했는데 약 2만여 명 정도가 참가했다고 한다. 동독공산당은 신문을 통해 월요시위를 묵과하지 않겠다고 보도하면서 라이프찌히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그런 과정이 축적되다가 1989년 10월 9일 월요일 슈타지 건물을 둘러싸고 7만여 명의 시민들이 평화적 시위를 전개했다. 그리고 이 시민들은 인간 사슬을 만들어서 건물을 둘러싸고 평화적 시위를 전개했다. 그리고 마침내 12월 4일 슈타지 건물을 시민들이 접수했다. 그 접수과정을 둘러싸고 슈타지 요원들은 문서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 copyright(c) All rights reserved by humanpark.com  * 니콜라이 성당 외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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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이성당 옆 면, 지금도 사람들이 그 시절을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민들은 슈타지 대표와 협상을 전개했고 시민위원회 30명이 슈타지 건물에 들어가서 시민위원회 사무실로 활용했다. 이렇게 라이프찌히의 민주화시위는 성공적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리고 1990년 8~9월 사이에 현재 슈타지 공간에서 전시(주 5회 오후)가 가능했고, 1990년 12월 ABM(공무원은 아니지만 공적 지원금을 주는 제도)이 지원되면서 시민위원회가 전시를 책임지게 되었다. 이 형태는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즉 연방차원의 지원(2001)과 시민의 자발적 성금을 통해 슈타지박물관이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신 선생님은 이 공간을 시민들의 참여와 자원봉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자발적인 시민정치 교육장이라고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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