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놉틱 정치 읽기

[용산 아리랑 3] 진보주의자여, 공간을 방치하지 말라!!!

시놉티콘 2009. 11. 2. 15:16

 

 

 

[용산 아리랑 3] 진보주의자여, 공간을 방치하지 말라!!!

 

도시의 빛과 어둠

 

 

 

* 출처 : 한겨레신문 2009년 10월 29일

 

모델하우스의 럭셔리한 인테리어 속에서 우리들은 편안함과 안락함으로 느낀다. 욕망은 들끓고 그곳에 살고 싶은 소망은 움틀 거린다. 그곳에서는 재개발의 모든 기억과 기록은 사라져 있고, 그 대신 럭셔리가 들어앉아 있다. 조감도의 밝은 미래가 내 것이라고 느끼는 그 일체감은 삶의 만족으로 다가오지만, 잠시만 고개를 돌리면 불가능한 현실과 조응한다. 평당 2,000만원에서 4,000만원에 이르는 고가의 아파트는 나의 현실과 동떨어진 ‘신화’에 불과하다.

 

도시라는 공간은 이렇게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양극화의 공간으로 진화되고 있다. 항상 화려한 재개발 아파트의 위용 뒤에는 슬픈 ‘공간 난민’들의 편린들이 숨겨져 있다. 앞으로 만들어질 용산의 거대한 건물 숲 속에는 용산참사라는 아픈 기억이 숨겨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공간 난민’의 삶의 절규와 슬픔, 애환 위에 새로운 건축물들이 들어서고 있는, 이 역설적인 상황을 방치하고서 미래를 얘기하는 것은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

 

 

 

* 출처 : 그치지 않는 ‘용산의 통곡’ ‘용산 참사’로 구속기소된 이충연 용산철거민대책위원장이 28일 1심 재판에서 징역 6년의 중형을 선고받자, 이 위원장의 어머니 전재숙씨가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오열하고 있다. 고 이상림씨의 부인인 전씨는 “제 아비를 죽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울부짖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한겨레신문 2009년 10월 29일)

 

빛과 어둠이 교차되는 도시 공간은 항상 자본과 권력의 승리로 귀결되는 결정론의 사회를 반영한다. 재개발의 온갖 과실은 자본과 권력의 수중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뒤이어 줄줄이 입주하는 ‘공간 이주민’들은 작은 차액을 얻기 위해 부동산이라는 도깨비 방망이가 휘둘려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공간 난민’은 어느새 그 공간에 사라져간다.

 

그 뒤를 이은 것이 재건축이었다. 자본과 결합되고 권력의 정보를 알 수 있는 위치에 사람들은 재건축아파트에 눈독을 들였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 둘씩 사들이고 재건축 이후의 시세차익을 획득했다. 강남 재건축 아파트는 부동산 폭동의 원인이 되었고, 그 폭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전세를 구하지 못하고 집장만의 꿈을 버려야만 했다. 이것은 야만 그 자체다. 어둠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춥고 매서운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재건축마저도 집주인을 몰아내고 있는 형국이니 이제 도시에 남은 것은 무엇일까? 자본과 권력만 존재하고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공간은 이미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잃어버린 황무지에 불과하다.

 

음습한 테러리스트의 양성소, 도시

 

 

 

* 지난 8월5일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 투입된 경찰특공대가 조립3·4공장 옥상에서 체포한 농성 노조원을 곤봉으로 내리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제공

 

도시재개발의 외양은 장밋빛 청사진으로 포장되지만 그 속살은 ‘도시 테러리스트’를 만들어내는 저장소가 되고 있다. 즉 국가에 의해 도시빈민(또는 재개발 등에 반대하여 투쟁하는 사람들)은 신념과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만 하는 ‘21세기 도시형 테러리스트’로 규정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테러리즘(Terrorism, 문화어: 테로)은 “정치, 종교, 사상적 목적을 위해 폭력적 방법의 수단을 통해 민간인이나 비무장의 개인, 단체, 국가를 상대로 사망 혹은 신체적 상해를 입히는 행위를 함으로써 이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어떤 행동을 강요하거나 혹은 어떤 행동을 중단하게끔 강요하는 행위이다. 이런 테러행위를 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믿는 이념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민간인이나 관련되지 않은 사람들의 희생이 어쩔 수 없다는 가치 판단을 내리며 그 자신 혹은 자신들의 동조자들의 생명 또한 희생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또한 요인의 암살과 같은 폭력적 행위로 인한 직접적 효과 보다 이로 말미암아 발생되는 대중의 공포심을 더 큰 효과로 보며 이러한 효과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한다(출처 : http://search.daum.net/search?w=tot&t__nil_searchbox=btn&nil_id=tot&stype=tot&q=%C5%D7%B7%AF%B8%AE%BD%BA%C6%AE)”라고 규정되어 있다.

 

21세기 도시 공간 문제와 관련해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재개발과 강제철거에 반대하는 평범한 주민은 ‘도시 테러리스트’라는 딱지가 붙는다. 국가는 이제 개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테러 음모자들’의 공포를 과장하고 이들에 대한 선제공격과 예방구금을 통해 안전을 보장하겠노라고 약속하면서 스스로의 역할에 만족한다. 국가는 공포로부터 보호의 초점을 사회보장 대신 개인안보로 이동한 것이다(정일준, “‘쓰레기는 쫓겨난다’ 지구화의 근원 공포에 메스,” 한겨레신문 2009년 10월 17일)”라고 분석했다.

 

도시재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저항은 그 폭력적 양태를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핵심이다. 문제의 근원을 제거하지 않으면서 법치만을 강조하는 것은 쫓겨나는 자들을 범법자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용산사건에 대한 재판부의 태도다.

 

재판부는 용산참사에 대한 판결에서 "서울 주요 간선도로 중 하나인 한강대로변의 건물에 무단 침입해 망루를 설치하고 화염병과 쇠구슬 등을 새총으로 쏴 행인들을 위협하는 위험한 농성을 벌이는 농성자들을 신속하게 진압하기 위해 경찰이 특공대를 조기에 투입할 필요가 있었다"라고 판단했다. 또한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 해도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불법 점거농성을 벌이고 공무집행 중인 경찰을 향해 화염병을 던져 사상에 이르게 한 것은 국가 법질서의 근본을 유린하는 행위로 법치국가에서 용인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어떠한 행위도 그 과정과 무관하게 결과론적으로 법치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고 해도 개인의 인내와 법치에 근거한 행동 이외에는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합법적인 테두리에서 저항할 수 있었을까? 용역업체를 동원한 강제철거 과정에서 그들의 힘을 당해낼 재간이 있었을까? 그러면 그들은 그저 결정된 그대로 인정하고 순순히 물러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제 법치라는 괴물이 등장한다. 항상 법이란 것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속성을 담고 있다. 과거에 만들어진 법이 현실을 제대로 규정할 수 있을까?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 근본문제를 해소하지 못하고 현실을 법치로 재단하는 것은 문제다.

 

그리고 재판에서 중형을 내린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판시했다. "경찰과 철거용역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아무런 피해보상을 하지 않은데다 정치적 목적으로 재판 진행을 방해하는 등 범죄 후 정황도 좋지 않아 중형이 불가피하다." 피해를 보상할 정도의 자산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런 저항을 전개했을까? 생존을 위한 투쟁이 정치적 목적으로 변환된다. 이제 재개발에 반대하는 행위는 정치적 투쟁이 되어버렸다. 고로 공간은 정치적 쟁투가 벌어지는 대상이 되었다. 법원은 이제 공간을 정치적 쟁투의 장으로 규정했다. 따라서 앞으로 진행되는 모든 공간관련 분쟁은 정치적 쟁투가 된다. 정치적 목적을 둘러싼 적-아 간의 충돌이 되는 것이다. 이제 공간을 둘러싼 공권력과 저항세력 간의 충돌은 공권력과 테러리스트 간의 전투로 전환된다. 따라서 공간은 ‘도시 테러리스트’를 양산하는 저장고가 되고, 공권력을 이것을 막기 위한 ‘반테러 전쟁’을 전개하게 된다.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

 

자본과 권력은 끊임없이 자본의 재구축과 권력의 확장을 위해 메트로폴리탄(어떤 대도시가 중·소도시와 그 밖의 지역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쳐 통합의 중심을 이루었을 때, 그 대도시와 주변 지역 전체를 이르는 말)의 꿈을 키워간다.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지역까지 확장되고 있는 메트로폴리탄은 견고한 성이다.

 

 

 

* 출처 : 동탄신도시 조감도(헤럴드경제 2009년 5월 27일)

 

메인도시의 자본과 권력 속에 편입되는 공간, 공간의 확장은 부와 권력의 확장을 의미한다. 수도권 규제 완화의 이유는 이것에 있다. 더 많은 권력과 자본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다. 이들에게 균형발전은 거추장스러운 것에 다름 아니다.

 

 

 

수도권이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어서고 있는 상황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국가 전체의 모든 자본과 권력을 자신의 빨판으로 계속 빨아들이는 메트로폴리탄은 지역의 황폐화로 직결된다. 그리고 지속적인 도시의 슬럼화와 공동화, 그리고 재개발, 재건축으로 이어지고 녹지와 숨 쉴 공간을 없애버린다. 살기 위한 도시 리빌딩이 이제 결국은 우리의 삶을 황폐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수도권의 메트로폴리탄에 대한 진보주의자들이 대안이 없다면 그것은 서글픈 현실이며 재앙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도시공간의 공동체를 복원하고 공간의 공공성을 되살려야 한다. 무한확장의 악순환은 이제 근절되어야 한다. 그것은 절망이며 진보주의자들의 무기력을 다시 확인해 주는 것이다. ‘절망의 공간’을 진보가 회생하고 재생산되는 ‘희망의 공간’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아젠다이며 우리가 연구해야 할 대상이며, 우리가 실천해야 할 방향이다.

 

* copyright(c) All rights reserved by w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