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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여행작가들이 뽑은 올해 최고의 여행지

시놉티콘 2009. 12. 11. 13:27

 

 

2009년 나를 사로잡은 바로 여기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여행작가들이 뽑은 올해 최고의 여행지
한겨레 이병학 기자
» 2009년 나를 사로잡은 바로 여기. 여기자 K 제공
올해는 해외여행 자유화가 만 20년이 되는 해다. 초기엔 배낭 메고 동남아시아만 둘러보고 와도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이젠 여행 다니며 글 쓰고 사진 찍어 기고하고 책 펴내는 이들이 비 온 아침 대밭의 죽순처럼 널렸다. 여행작가 양성 강좌가 생긴 지 오래고, 예비 여행작가를 겨냥한 안내서도 쏟아져나왔다. 글솜씨·사진솜씨, 신선한 기획력의 치열한 경쟁 구도 속에서, 나름대로 뿌리를 내려 먹고사는 여행작가들. 1년이면 절반 가까이를 집 밖에서 헤매다니는 이들이 꼽는 최고의 여행지는 어딜까. 〈esc〉가 연말을 맞아 잘나가는 여행작가 다섯명에게 올해 다녀온 가장 인상 깊은 여행지를 물었다. 최근 주가를 올리고 있는 이들이 꼽은 정말 환상적인 여행, 그리고 가장 황당했던 여행을 공개한다. 그리고 또 한명의 ‘여행작가’ 여기자 K가 있다. 지난해 esc 지면에, 격렬한 취재현장의 몸부림을 가련한 필체로 풀어 파헤쳤던 그는, 지난봄 홀연히 휴직계를 내고, 7개월간 세계를 떠돌아 각국을 긴장시켰다. ‘여기자 K’의 여행담도 들어보시라.
 

⊙ 불 꺼지지 않는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 | 손미나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손미나 제공.

마음에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 여행지는 결코 화려함이나 편안함을 갖춘 곳이 아니다. 가난하고 아픔을 가진 이들의 거친 삶이 있고 때로는 예기치 못한 위험도 감수해야 하는 곳, 그러나 삶의 아름다움과 사람 사는 냄새를 지닌 그런 곳이야말로 잊지 못할 여행지로 남는 경우가 많다. 오랫동안 나를 유혹해 오던 아르헨티나는 그런 의미에서 올 한해가 아니라 내 일생 동안 가장 강렬하게 기억될 여행지로 꼽을 수 있다. 그곳에서 나는 불운과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몇번이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을 만났다. 밤새 문을 닫지 않는 서점과 카페에서 문학·예술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사람들, 거리에서 즉흥 탱고를 추는 남녀들과 축구에 열광하는 사람들, 어려운 환경을 딛고 희망을 찾으려 애쓰는 빈민가의 사람들까지 감동과 굴곡진 사연을 안고 사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이민자의 후손으로, 독재정치에 희생된 이들의 가족·친구로, 경제위기로 모든 것을 잃어 본 사람으로 살아가면서도, 예술을 꽃피우고 사랑을 가슴 가득 품은 채 살고 있는 아르헨티나인들은 사는 모습 자체로 여행객의 마음에 뜨거운 열정을 불러일으켜 주었다.

 

 

 

 

 

 

 

 

 

 

 

 

 

 


 


» 진도 기상대. 노동효 제공.

⊙ 진도 기상대에서 본 바다와 섬들 | 노동효

 

반드시 전망 좋은 곳에 있어야 하는 것으론 어떤 게 있을까? 우선 전망대가 있을 테고, 초소·천문대·기상대도 이런저런 이유로 전망 좋은 곳에 자리잡는다. 군사용 초소야 당연히 일반인들에게 개방하지 않지만, 기상대도 출입할 수 없는 곳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실은 나도 그랬다. 올여름 우연찮게 진도 기상대를 가보지 않았다면 말이다. 진도는 제주도·거제도에 이은 한국의 3대 섬. 볼거리가 참 많다. 세방낙조, 신비의 바닷길, 남도석성, 용장산성 등. 그러나 진도에 갔는데 진도 기상대에 올라가 보지 않았다면 정말 후회할 일이다. 운림산방을 지나는데 산봉우리에 동그란 공을 얹어놓은 이상한 건물이 보였다. 저게 대체 뭘까? 궁금증을 갖고 고개를 넘자 샛길이 하나 나타났다. ‘진도 기상대’. 핸들을 꺾었다. 한적한 길, 오가는 차량 한 대 없자 조수석에 앉은 친구가 “출입금지구역이 아닐까?” 하고 걱정스레 혼잣말을 했다. 길은 점점 가팔라졌다. 가속페달을 밟았다. 마침내 기상대에 도착했다. 여기 왜 왔느냐고 묻는 이는 없었다. 푸른 바다 한가운데 고래처럼 굼실거리는 진도 앞바다 섬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 라오스 루앙프라방. 채지형 제공.

⊙ 천천히 흐르는 루앙프라방의 시간 | 채지형

 

여행지와 궁합은 따로 있다. ‘전생에 인연이 있던 곳이 아닐까’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여행지들이 적지 않다. 올해 다녀온 라오스 루앙프라방은 그런 느낌이 더했던 곳이다. 마냥 편해지는 마음에 여기야말로 나에게 특별한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루앙프라방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나와 잘 맞았다. 골목만 돌면 나타나는 오래된 사원들, 사원에서 승려들과 소소하게 나누는 이야기들, 현지인처럼 오렌지색 꽃을 올려놓고 드리는 기도, 정성이 담긴 수공예품들을 고르는 재미, 셋이나 되는 아이와 함께 좌판에 앉아 있는 어린 엄마와 나눈 이런저런 수다까지…. 승려들에게 공양을 올리기 위해 따뜻한 밥을 지어 새벽을 가르며 나오는 라오스 사람들. 많은 것을 갖지는 않았지만 웃음도 인심도 넉넉한 그들을 보면서 그동안 쌓아온 마음속 쓰레기들이 조금씩 사라지는 걸 느꼈다. 천천히 흐르는 루앙프라방의 시간 속에서 부질없는 욕심들을 꺼내 들여다보며 창고 정리를 했다. 그저 바라보고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 정화’가 되는 곳. 바로 루앙프라방이다. 너무 빠른 속도에 아찔해하시는 분이라면, 얼른 루앙프라방 티켓을 끊으시길.

 

 

» 미국 오리건 마운틴후드. 김산환 제공.

⊙ 스키와 와인의 성찬 미국 오리건 마운틴후드 | 김산환

 

지난 3월 미국 오리건의 스키장을 취재하러 갔다. 오리건 주정부의 초청으로 진행된 이 투어의 테마는 ‘스키와 와인’. 태평양에 접한 오리건 주는 미국 최고의 피노누아르 와인 산지다. 반면 내륙에는 3000m가 넘는 산들이 있어 스키의 메카가 된다. 그중 마운틴후드(3427m)는 스키장의 역사가 80년을 헤아린다. 마운틴후드는 적설량이 많다. 스키장의 베이스가 되는 팀벌라인 로지는 해발 2000m. 이름 그대로 수목 한계선에 있다. 로지는 겨울이면 1층이 눈에 파묻힌다. 2층의 창가도 절반은 눈에 묻힌다. 팀벌라인 로지에서 며칠을 보냈다. 낮에는 종일 스키를 타고, 밤에는 피노누아르 와인을 원없이 마셨다. 그렇게 보내는 며칠 동안 눈은 끊임없이 내렸다. 주차한 자동차가 눈에 파묻힐 만큼 내렸다. 그렇게 많이 내리는 눈은 처음이었다. 다시 스키 시즌이 돌아왔다. ‘이 죽일 놈의 스키’에 빠진 사람들은 눈만 봐도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스키 마니아를 자처하는 나도 마찬가지다. 마운틴후드에 내리던 눈과 신선한 과일향이 물씬한 피노누아르 와인이 그립다.

 

 

»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박동식 제공.

⊙ 산 기피자가 겪은 영암 월출산에서의 7시간 | 박동식

 

나는 산을 좋아하지 않는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까지 다녀왔지만 그 이유도 산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산을 좋아하지 않으니 히말라야는 딱 한 번만 오른다, 어차피 한 번만 오를 거라면 가장 높은 곳으로 가자, 이게 에베레스트를 선택한 이유다. 국내 여행도 별반 다르지 않다. 산을 좋아하지 않는 여행작가는 노래하기 싫어하는 가수처럼 보일 수도 있다. 아무튼 나에게 산이라는 곳은 돈 받고(취재^^) 가지 않으면 거의 갈 일이 없는 곳이다. 그런 내게 올해 최고의 여행지가 바로 월출산이었다. 월출산 역시 다시는 올 일이 없기 때문에 아예 7시간 종주를 해버렸다. 하지만 그 7시간이 올해 나의 여행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천황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동쪽 능선은 월출산 전망의 백미다. 등산로가 개설되지 않은 원시림 능선은 신비롭고 장중했다. 아홉 개의 물웅덩이로 이루어진 구정봉도 멋졌다. 마애여래좌상과 맞닥뜨렸을 때는 천년 동안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감동적이었다. 면적 56.1㎢에 불과한 작은 국립공원이 탄생한 이유를 절감할 수 있었다.

 

⊙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순례길 | 여기자 K

 

» 스페인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순례길. 여기자 K 제공.

지난 5월부터 39일 동안 8㎏ 배낭 메고 걸었던 길이다. 무엇보다 가장 최근 여행이라 기억이 제일 잘 난다. 뭐 별거 있겠나 싶었는데 별거 있긴 있었다. 자고 먹고 걷는 것 말고는 별로 할 일도 걱정도 없는 상태, 한 마리 태평한 짐승의 평온을 평생 처음 이 길에서 경험해 봤다. 남보다 잘날 것도 못날 것도 없는, 이동하는 공동체 속에서 혼자여도 외롭지 않았다. ‘나 이런 고민도 하는 특별한 여자야’를 무슨 훈장처럼 달고 다녔는데, 알고 보니 내 고통 별것도 아니더라. 순례길에서 만난 한 친구는 “세상에서 분리돼 8시간씩 걷기 운동을 해야 하고, 다시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는, 비슷한 사람끼리 속 이야기 털어놓는 이 길은 마치 무슨 재활센터 같다”고 말했다. 걷는다고 내가 누군지 섬광처럼 깨닫고 득도할 수 있게 될 턱 없지만, 내가 누가 됐건 뭔 상관이랴. 한번 콧구멍으로 들어오는 바람 한 가닥이라도 만끽하며 살아 있고 싶어진다. 덤으로, 손가락으로 건들기만 해도 넘어오는 중년의 위기 남녀들이 많으니 마음 있다면 연애도 걸어볼 수 있다. 단, 20대 근육질 젊은이는 가뭄에 콩 나듯 있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기사등록 : 2009-12-09 오후 07:38:02 기사수정 : 2009-12-09 오후 07:4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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