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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논쟁 2] 대중민주주의와 포퓰리즘 구분해야

시놉티콘 2010. 3. 25. 14:48

 

 

 

 

[포퓰리즘 논쟁] 서구 학계의 포퓰리즘 재평가 움직임을 소개한 기사(3월18일자 23면)를 보고 신진욱 중앙대 교수가 반론 성격의 글을 보내 왔다. <한겨레>는 이번 기회에 엄밀한 정의 없이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비난과 경멸의 수사로 동원되는 포퓰리즘에 대해 본격적인 학술논쟁을 펼쳐보려고 한다. 뜻있는 필자들의 참여를 기다린다.

 

파시즘·신자유주의 등 정치에서도 포퓰리즘 적극 동원
현대 시민정치 가능케한 대중민주주의와 묶는건 위험

 

한국 정치담론에서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범람하고 있다. 포퓰리즘이 대체 무엇이며, 누가 정말 포퓰리스트인지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주 <한겨레> 학술면엔 “포퓰리즘, 민주주의 ‘병리현상’ 아닌 ‘필수요소’”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가 의도하는 것처럼, 포퓰리즘을 병리화하는 상투적 관점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포퓰리즘을 민주주의 외부로 밀어내는 관점이 양자의 얽힘을 은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포퓰리즘을 민주주의의 내부로 쉽게 들여놓는 것은 양자의 긴장관계를 희석시킬 수 있다.

 

포퓰리즘은 ‘인민’(populus)에서 파생한 단어다. 문자 그대로 보면 ‘피플’(people), 곧 ‘민’(民)을 받드는 정치논리다. 그러나 포퓰리즘의 의미는 ‘~하지만, 사실은~’이라는 반전의 서사로 구성된다. 따라서 그것은 국민의 이름으로 말하지만 사실은 국민을 기만하는 정치, 인민의 세상을 만들자고 하지만 사실은 인민을 동원할 뿐인 정치 등을 지칭한다. 사실상의 반민(反民)주의다. 그런데도 왜 포퓰리스트는 인민·국민·서민의 이름으로, 그들에 힘입어, 그들을 일으켜 정치를 하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현대 민주주의의 확산과 더불어 전세계 사람들의 자의식과 정치적 상상력에 깊이 각인된 대중민주주의적, 행동주의적 심성구조 때문이다. 모든 인민이 정치공동체의 주권자며, 이들이 주인 되는 세상이 돼야 하며, 인민의 힘으로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환경은 민주주의 제도와 이념을 구현할 수 있게 한 중요한 문화적 토대였다. 그것은 현대 민주공화정과 대의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정당성 기초며, 나아가 시민들이 정치과정에 일상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정치를 가능케 한 생명력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역사적 심성구조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파괴력도 갖고 있다. 내셔널리즘, 나치즘, 파시즘, 근본주의, 신자유주의 등 현대의 정치운동 대부분은 ‘포퓰러’한 요소를 적극적으로 동원했다. 1920~30년대 유럽을 휩쓴 파시즘 운동은 민중적·혁명적 요소를 강조했고, 바로 그것이 열광적 대중동원과 충성을 가능케 했다. 영국 대처 수상은 보수당의 엘리트주의적 전통과 투쟁하면서 중산층과 노동계급에게 더 나은 미래, 더 위대한 영국을 약속했다. 이들을 ‘포퓰리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피플’에 호소하여 동의의 기반을 구축하려 했지만, 실제로는 ‘피플’의 자유와 참여, 인권과 정의를 억압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은 대중민주주의적 심성구조라는 동일한 역사적 지평 위에서 서로 교차하고 또한 대립한다. 어떤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적 요소를 담고 있고, 어떤 민주주의는 그것과 대결한다. 어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 안에 있지만, 민주주의 밖으로 뛰쳐나갈 잠재성을 갖고 있다. 현대라는 역사적 시간 속에서 탄생한 상이한 정치논리를 모두 ‘포퓰리즘’이란 이름으로 묶는 것이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적들과 너무 많은 것을 공유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현실비판의 센서를 무디게 하고, 자기성찰의 거울을 흐리게 한다.

 

우리는 포퓰리즘과 참된 민주정치를 구분하기 위한 노력, 누가 진정 포퓰리즘인가를 판단하려는 노력을 포기해선 안 된다. 또한 ‘피플’을 행복하게 하고 그들의 참여를 확대하는 정치를 포퓰리즘라고 명명하는 것에 대해 단호히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 ‘나도 포퓰리즘, 너도 포퓰리즘’이라는 논리는 현명한 전략이 아니다. 포퓰리즘과 포퓰러 민주주의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