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논쟁]'진보는 대중민주주의' '보수는 포퓰리즘' 이분법적 구분 깨야
‘진보는 대중민주주의’ ‘보수는 포퓰리즘’ 이분법적 구분 깨야 | |
[포퓰리즘 논쟁]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 반론 |
포퓰리즘을 둘러싼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포퓰리즘을 현대정치의 필수적 구성요소로 보는 학계 일각의 논의(3월18일치 23면)에 대해 지난주 신진욱 중앙대 교수가 반론(‘포퓰리즘과 대중민주주의 구분해야’)을 펼치자,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가 반박문을 기고해왔다. 다음은 안 교수의 반박문이다.
‘인민주권’ 의미는 정치적으로 구성·해석
진보 포퓰리즘 담론도 ‘동원과 배제’ 발생
이분법은 보수의 대중결합력 과소평가
한국의 보수진영은 그동안 진보파에 대한 효과적 무기였던 포퓰리즘이란 낙인을 여전히 유지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광우병이나 세종시 이슈 등에서 자주 ‘국민의 입장’을 거론해온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나 무상급식에 대한 여권 일각의 동조 움직임에 불편해한다. 이에 대해 <한겨레>의 3월18일자 기사가 포퓰리즘은 단순한 민주주의의 병리현상이 아니라 정치 현상 내부에 항존하는 구성요소라는 관점을 제기한 바 있다.
이번엔 이 기사가 포퓰리즘을 보수의 병리적 현상으로만 규정하고 자신을 민주주의자로 규정하는 진보진영 일각을 불편하게 한 것일까. 포퓰리즘을 ‘민주주의의 적’ ‘가짜 민주주의’로 규정하는 신진욱 교수의 글은 포퓰리즘을 둘러싼 논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생산적 문제제기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진보가 간직해온 포퓰리즘에 대한 과거의 감수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글로 보인다. 그의 논지대로라면 오바마나 노무현은 민주주의자이고, 매케인과 박근혜는 인민을 기만적으로 동원하는 민주주의의 적, 포퓰리스트이다.
신 교수는 ‘인민’(라틴어 populus)을 정치공동체의 주권자로 삼는 대중민주주의가 변질되면, 인민의 이름으로 인민을 기만·동원하는 포퓰리즘이란 가짜 민주주의가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예로 거론하는 것이 파시즘과 영국의 대처다. 하지만 대중민주주의 심성이 진보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변질되는 경우는 없을까? 현실에서 인민주권 사상은 다양한 정치 운동으로 나타난다.
과거 소비에트는 노동자계급 주도의 민주주의가 인민주권이라고 선언했다. 오늘날 자유주의 일각은 엘리트가 주도하는 엘리트 민주주의를 이상으로 선언한다. 또 진보 정치의 많은 경우에도 자신들이 국민 일반을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다양성의 원인은 ‘인민주권’의 의미는 그 자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맥락에서 정치적으로 구성되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보세력이 특정 계급이 아니라 국민(인민)을 대표한다는 포퓰리스트 담론을 구사할 때도 보수적 포퓰리즘에서처럼 정치적 동원과 배제는 당연히 발생한다. 왜냐하면 시민은 하나의 유기체로서 국민(인민)이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들이나 계급·계층들의 관계망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포퓰리즘이든지 인민 속의 다양함을 최대한 존중하고, 법치·견제·균형 같은 공화주의 논리와 잘 융합되도록 숙성시키는 것이다. 내가 미국 오바마의 진보적 포퓰리즘보다 공화당 매케인의 보수적 포퓰리즘을 더 강하게 비판하는 이유도 매케인의 포퓰리즘이 다양성의 존중이나 공화주의적 원리와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 오바마가 진짜 민주주의고 매케인은 ‘가짜=포퓰리즘’이라서가 아니다.
신 교수는 진보의 ‘참된 민주정치’와 보수의 ‘가짜 민주주의=포퓰리즘’이라는 절대적 이분법을 통해 “민주주의가 민주주의 적들과 너무 많은 것을 공유”하지 않도록 경계선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하지만 진보는 민주적이고 보수는 병리적이라는 테제는 그 의도와 달리 보수가 대중적 욕망과 결합하는 깊이와 정도를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아울러 이 이분법은 신 교수의 의도와 달리, 진보의 “자기성찰의 거울을 흐리게 한다.” 왜냐하면 포퓰리즘과 융합된 진보 정치 내부의 배제 메커니즘을 예리하게 인식하기보다 신비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기사등록 : 2010-03-31 오후 07:09: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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