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을 기억하십니까?
‘5월의 얼굴’을 기억하십니까? | |
30년 전 수배전단 속 ‘5·18’ 그늘진 ‘엄혹의 시대’ 켜켜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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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사진 속에서 앳된 표정의 ‘5·18 최장기 수배자’ 윤한봉(1948~2007)이 눈에 들어온다. ‘신장 160㎝. 얼굴이 길고 마른 편. 광주사태 관련.’ 이후 14년 동안 이어질 미국 밀항과 망명 생활을 예고라도 하듯 그의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그늘져 있다.
<한겨레>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30돌을 맞아 1980년 6월 계엄사령부가 공개 수배령을 내린 68명의 얼굴 사진과 인적사항, 혐의 내용 등이 담긴 수배전단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부터 입수했다. ‘전두환 신군부’는 80년 5월 광주를 유혈 진압한 뒤 6월17일 사회 저명인사와 운동권 학생 329명을 △국기문란 △시위 배후조종 △시위주동 △광주사태 관련 등의 혐의로 공개 수배했다. 이 전단은 자진 신고 기간인 6월30일을 넘긴 사람들을 붙잡기 위해 거리에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의 이른바 ‘민주화의 봄’과 5·18 등 한국 현대사의 한복판에 섰던 이들이 담긴 수배전단에선 낯익은 얼굴들이 많이 눈에 띈다. 재야에서 오랫동안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계훈제(1922~99) 선생을 비롯해, 당시 청년·학생 운동권의 주요 멤버였던 장기표 한국사회민주당 대표, 심재권·배기선 전 국회의원, 박계동 국회 사무총장 등이 포함돼 있다. 광주 지역 인사로는 1982년 광주교도소에서 재소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다 숨진 박관현(1952~82) 전남대 총학생회장, 이성학 제헌 국회의원 등을 확인할 수 있다.
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한 축이었던 해직기자 가운데는 김태홍(전 국회의원)·정연주(전 <한국방송> 사장)씨 등이 이름을 올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둘째아들 김홍업씨도 있다. 이들은 5·18 직후 검거를 피한 덕분에 신군부의 모진 고문을 피할 수 있었다. 정연주 전 사장은 “81년 2월 검거되고 보니 신군부의 각본에 의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 정리돼 있었다. 서울 청량리경찰서 형사가 ‘당신 일찍 잡혔다면 몸이 성치 못했을 것’이라고 말해줬던 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광주 금남로에서 만난 문승훈 광주민주동지회 사무처장은 “옛 전단을 보니 30년 전 광주의 기억이 새롭게 되살아난다. 5·18의 초심을 잊지 않고 살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말했다.
광주/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신군부 맞선 청춘들, 죄없는 도망자로 내몰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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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항쟁 30돌] 수배자들의 삶으로 본 ‘회한의 30년’
“그날 광주가 눈에 선해요. 온 도시가 축제마당 같았거든요.”
‘5·18 민중항쟁 서울기념사업회’에서 사무총장을 하고 있는 정경자(52)는 1980년 5월15일 광주 금남로 거리에 있었다. 스물둘, 꽃 같은 젊음이었다. ‘비상계엄 해제’를 외치며 거리로 나선 전남대생들은 이날 오후 2시 교문 앞 경찰 저지선을 뚫었다. 한 시간 뒤 학생 7천여명이 전남도청 앞 로터리에 모였다. 정 사무총장은 “집회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펼쳐든 대형 태극기 뒤로 50여명의 교수들이 서고, 그 뒤로 수천명 학생들의 물결이 이어졌다”고 말했다. 박관현(1952~82)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대형 태극기의 위쪽 한가운데를 잡고, 총학생회 섭외부 차장이던 정씨는 깃발의 오른쪽 끝을 그러쥐었다.
같은 시각 청년 박계동(58·국회사무처 사무총장)은 서울역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는 집권욕을 점차 노골화했고, 야당 세력은 사분오열돼 있었다. 시국은 살얼음판처럼 아슬아슬했다.
10·26 이후 70년대 유신 독재와 맞서다 군에 끌려가거나 제적된 운동권 학생들이 대거 학교로 복귀했다. 박 사무총장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노동자·농민·도시빈민들의 연대 조직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조직국장을 맡고 있었다. 14일 정오를 전후로 서울 시내 대학생 7만여명이 일제히 교문을 뚫고 거리로 밀려나왔다.
당시 전남대 복학생협회장 박몽구
열흘간의 계엄군 기습·학살
‘광주’ 모든것 생생히 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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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후 서울역에 학생 10만여명이 집결했다. 이대로 버틸 것인가, 상황을 지켜볼 것인가? 대부분 20대였던 학생 지도부는 가혹한 선택에 내몰렸다. 그들은 “시민들의 호응이 없는 상태에서 심야에 군과 충돌하는 것은 힘들다”고 의견을 모았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었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진 거리에서 신군부의 반격이 시작됐다. 신군부는 17일 자정을 기해 기습적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했다. 김대중·김종필 등 유력 정치인과 재야인사 26명이 계엄사령부로 무더기 연행됐고, 서울 세종로 네거리는 계엄군의 장갑차가 장악했다. 언론 민주화운동을 하다 75년 <동아일보>에서 대거 해직된 언론인들의 모임인 ‘동아투위’ 회원 정연주(64·전 <한국방송> 사장)는 북한산 우이동 가톨릭휴양관에서 지인들과 새로운 언론의 역할을 놓고 토론을 하다 5·18을 맞았다. 계엄군은 17일 자정 이미 그의 집을 덮친 뒤였다. 그는 “비보를 전해 듣고 선배 김종철(전 <연합뉴스> 사장)과 무작정 수유리 뒷산으로 도망쳤다”고 말했다. 5·18을 피로 진압한 신군부는 6월17일 정 전 사장 등 민주화운동 및 5·18 관련자 329명을 공개 수배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얽혀든 정 전 사장에겐 ‘현상금 200만원, 1계급 특진’의 포상이 걸렸다.
17일 밤 광주 일대에 주둔해 있던 7공수여단이 18일 새벽 2~3시께 전남대·조선대로 이동해 학교를 장악했다. ‘화려한 휴가’라는 암호로 불린 ‘충정작전’이 개시된 것이다. 6·25 전쟁 이후 가장 처참한 ‘광주의 비극’의 시작이었다.
당시 학생지도부 문승훈·정경자
수개월~수년간 도피생활
‘광주’기념 사회참여 계속
전남대 제적생·복학생 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던 박몽구(54) 시인은 “18일 새벽 뉴스를 통해 계엄령 전국 확대 소식을 들었다”고 말했다. 전남대 운동권에선 휴교령이 내려지면 그 다음날 오전 10시 학교에서 모이기로 사전 약속이 돼 있었다. 박몽구도 오전 9시께 전남대 후문으로 향했다. 7공수여단 33대대와 마주쳤다. 총에 칼을 꽂은 계엄군들은 살기등등해 학생들을 몰아냈다. “오전 10시30분께 후배들과 모여 ‘시내로 진출하자’고 의견을 모으고 금남로 가톨릭센터 앞까지 진출했어요. 그게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공식적인 출발점입니다.”
그날은 일요일이기도 했다. 80년 당시 광주 운동권의 ‘큰형님’으로 불리던 박석무(68) 한국고전번역원장은 금남로에서 열린 지인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화정동 집을 나와 시내로 가던 중이었다. 학생들과 계엄군의 공방으로 버스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계엄군들이 지나가는 젊은이들을 곤봉으로 사정없이 내리찍는 게 눈에 띄었다. 거리 곳곳에 핏자국이 선명했다.
신군부의 기습에 광주의 학생 지도부들은 당황했다. 문승훈(55) 광주민주동지회 사무처장은 “당시 운동 지도부는 다급한 일이 있으면 일단 도망치라는 교육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19일 광주 시내를 빠져나와 20일 전북 김제행 열차를 탔다. 조선대 민주투쟁위원회 총무부장이던 이무영(54) 목포 기독치과 원장도 18일 광주를 떴다. 그는 “신군부도 목숨 걸고 싸워서 손에 쥔 권력인데 학생들의 데모에 물러서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정경자씨는 가랑비가 추적대던 20일 오전 광주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그는 “지도부는 뿔뿔이 흩어지고, ‘이렇게 끝을 맞는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공안기관의 추적을 피해 적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1~2년씩 도피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박석무 원장은 “광주 시민들의 저항은 자연발생적인 것이었다”고 했다. 시민의 저항이 거세지자 신군부는 18일 11공수여단, 20일에는 3공수여단을 증파했다. 유혈진압에도 20일 금남로에는 10만여명의 인파가 모였다. ‘들불야학’ 교사 윤상원(당시 시민군의 대변인 역할 담당·27일 새벽 전남도청에서 사망) 등이 광주의 유일한 사회과학 책방이던 녹두서점을 근거지로 시민들에게 광주의 진상을 알리는 <투사회보>를 수천장씩 만들어 뿌렸다.
박몽구는 5·18의 모든 과정을 광주의 거리에서 지켜봤다. 21일 오후 5시30분께 계엄군이 광주를 포기하고 빠져나간 뒤 22일에서 25일까지 전남도청은 ‘해방구’와 같았다. 계엄군의 진압을 코앞에 둔 25일 밤 10시 시민군 지도부는 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에 모여 ‘총을 내려놓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격론을 벌였다. 박석무 원장은 “그때 ‘지금 총을 놓으면 후세에 명분이 없어진다’고 강력히 주장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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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했던 세상 요원한데…5·18은 추억일 뿐인가
26일 낮 예비군 대위 한 명이 와 시민군들에게 총 쏘는 법도 가르쳤다. 도청으로 고등학생·대학생·일반 시민을 합쳐 157명이 모였다. 26일 밤 전남도청에 남아 있던 이들은 장갑차의 캐터필러 소리를 들었다. 먼동이 터오는 27일 새벽, 공수부대의 작전 개시 한 시간 반 만에 도청은 다시 계엄군의 손에 들어갔다.
당시 광주운동권 ‘큰형님’ 박석무
“시민군 굴복아닌 죽음 선택
80년대 사회참여 거름돼”
박 시인은 “전날 두암동 친구네 집에서 하루를 지내고 27일 오전 9시쯤 시내로 나왔다”고 말했다. 밤새 “시민군이 죽어가고 있다. 젊은 생명을 지켜달라”는 애절한 여성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들려왔지만 밖으로 나가진 못했다. 그는 체포되면 총살당할 거라는 생각에 택시로 송정리까지 빠져나와 5월30일 서울로 도망쳤다.
5·18과 관련해 열흘에 걸친 광주항쟁 기간 동안 정부가 인정한 공식 피해자는 사망자 154명, 행방불명자 70명, 부상자 3028명 등이다. 5·18 기념재단이 2000년에 펴낸 <부서진 풍경>이란 책자를 보면, 이유 없이 계엄군에 끌려가 고문당한 뒤 미쳐버린 40대 가장과 여고 시절 계엄군에게 당한 성폭행의 충격을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은 20대 여성 등의 사연이 적혀 있다. 비슷한 사연이 너무 많아 일일이 글로 옮겨 적기 어려울 정도다.
박석무 원장은 “5·18의 교훈은 ‘의로운 피는 언젠가는 부활한다’는 역사의 가르침을 몸소 증명한 것”이라며 “80년대 모든 민주화운동은 결국 5·18의 자장 안에서 이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수배령을 피해 여수로 피신한 박관현은 82년 4월 뒤늦게 체포됐다. 그는 광주교도소에서 40일간 단식투쟁을 벌이다 그해 10월12일 전남대 병원에서 숨졌다. 사람들은 “그가 동지들을 버려 놓고 도피한 것에 마음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투옥된 뒤 아주 지독한 투쟁을 벌였다”고 전했다. 5·18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은 81년 4월 미국으로 밀항해 민족학교를 세우고 광주의 진실을 국외로 알리려 애썼다. 그는 1993년 8월 귀국해 민족미래연구소를 설립하고 활동하다 2007년 6월27일 숨졌다.
10·26 직후 벌어진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 시위 사건으로 수배중이던 문국주(56) DMZ평화생명동산 사무국장은 83년 2월 한국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간사로 민주화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명동성당에서 일하며 80년 광주의 참상을 처음 기록한 소설가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당시 참상을 보여주는 비디오 등을 팔았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몰려와 기록을 읽고, 영상을 확인하며 분노에 치를 떨었다.
5·18은 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을 일구는 거름이 되기도 했다. 85년 5월23일 73명의 남녀 대학생들이 5·18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거론하며 서울 을지로 입구의 미국문화원을 점거했다. 그 속에 고려대생 신정훈(5·18 당시 광주 인성고 2학년)이 있었다. 결국 73명이나 되는 대학생들이 무더기로 구속되자 ‘구속학생가족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이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의 모태가 됐다. 송영길(국회의원)·강기정(국회의원) 등 이른바 ‘386’들도 80년 5월 광주를 겪고 박석무 원장에게 배운 광주 대동고 학생이었다.
85년 9월 불거진 김근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 고문사건은 재야와 야당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 됐다. 이 민청련의 결성 구호도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였다. 이들은 2년 뒤 87년 6월항쟁의 산파 구실을 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하게 된다.
‘5·18 수배자’들은 한국 사회의 발전을 위해 저마다의 영역에서 크고 작은 활동을 벌여왔다. 김태종 뮤지컬 <화려한 휴가> 총감독과 김봉준 원주민족미술인협회 회장 등은 문화예술계로, 이필렬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심상완 창원대 교수, 정재현 충북대 교수 등은 학계로 진출했다. 정태기·김태홍·이병주·정연주 등 해직 언론인들은 88년 5월 <한겨레신문>을 창간했다.
당시 조선대 학생간부 이무영
“촛불집회 경찰진압 보며
그날의 기억 떠올라 아득”
81년 2월 계엄령이 해제된 뒤 정연주는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이미 세인의 기억에서 잊혀져 있었다. 미국 유학을 떠난 그는 88년부터 <한겨레신문> 워싱턴 특파원으로 11년 동안 일했고, 참여정부 때 <한국방송> 사장이 됐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사임 압력에 맞서다 2008년 8월 해임됐고, 배임 혐의로 기소됐으나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상태다.
정경자씨는 “시민들을 믿지 못하고 광주를 떠났다는 사실에 오랫동안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그 충격으로 82년 결혼한 뒤 사회활동을 접었다. 2002년 전남대 사대를 졸업한 뒤 10여년 만에 서울 연신중 도덕 교사로 임용됐다. 그는 “전교생 700여명 가운데 5·18에 대해 들어본 이가 15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사회가 아직 5·18을 잊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 2007년부터 5·18 민중항쟁 서울기념사업회를 지키고 있다.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는 두 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경험했다. 그 사이 5·18은 뿌연 흑백사진 속의 추억으로 변했다. 문국주 사무국장은 “우리가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아마도 6월항쟁 이후의 분열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김영삼이라는 거친 절벽 앞에서 민주화 세력이 둘로 갈라졌잖아요. 역사는 당대에 왜곡된다고 하더니…. 광주도 그런가요?” 그는 “이제는 통일로 나아가야 할 때지만 남한 사회는 남남갈등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무영 원장은 81년 6월9일 검거된 뒤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그는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건치) 광주·전남지부 회장 등을 맡으며 지역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이 원장은 “재작년 촛불집회 때 경찰의 물대포에 분노한 아들이 ‘광화문으로 달려갈 것’이라고 전화를 걸어왔다”며 “우리 사회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싶어 아득했다”고 말했다.
문승훈씨는 그동안 파편처럼 갈라졌던 광주의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지난해 모여 만든 광주민주동지회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그는 “지난 10여년 동안 광주도 우리 사회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했던 뭔가를 잊은 채 살아온 게 아닌가 싶다”며 “그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게 뭔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5·18을 현장에서 목격한 박몽구 시인은 한양대에서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시간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우리 사회가 5·18에 면역된 느낌이에요. 시민들과 괴리돼 있고…. 다시 한 번 5·18 정신으로 돌아가, 사람들이 원하는 세상을 얼마나 이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광주 목포/길윤형 홍석재 전진식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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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촛불·투표’로라도 국가폭력에 맞설 시대” | |
[‘5·18’ 항쟁 30돌] 시민군 이충영씨의 그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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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대 자퇴뒤 시민군에
변호사 아버지도 항쟁참여
규명운동 뒤 복학·개업
“아닌건 아니다고 말해야”
총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군홧발 소리가 커지자 하수구 밑으로 숨었다. 하지만 “하수구에 수류탄 던져봐” 하는 소리에 놀라 “사람 살려”라고 외치며 밖으로 기어 나왔다. 계엄군들은 바지를 벗기고 대검을 들이댔다. 무릎을 꿇고 앉자 뭇매가 쏟아졌다. 80년 5월27일 새벽 4시께 광주시 동구 계림동 계림초등학교 앞 육교 부근에서 당시 경희대 한의대생이었던 이충영(49·울산 ㄱ한의원 원장)씨는 시민군의 ‘2분대 6번 소총수 폭도’로 분류됐다.
79년 10·26 이후 자퇴하고 광주에 내려왔던 그는 5월 초부터 전남대생들 틈에 끼여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 5월26일 밤 시민군 상황실이 있던 옛 전남도청으로 들어간 이씨는 이튿날 새벽 “비상이다”라는 고함 소리를 들었다. 5월27일 새벽 3시께 옛 전남도청 입구에서 카빈 1정과 실탄 30발을 지급받은 그는 시민군 14명과 트럭을 타고 계림초등학교 쪽으로 이동했다. 총소리가 나고,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는 계엄군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지만, 노리쇠가 작동하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도 도청에 계시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요.” 나중에 이씨는 군 영창에서 우연히 아버지의 체포 소식을 전해듣고 놀랐다. 아버지 고 이종기(1917~1997) 변호사는 73년 대통령 명예훼손과 계엄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변호사 자격이 정지된 상태였다. 수습대책위원회 임시위원장을 맡기도 했던 이 변호사는 5월26일 계엄군의 강제 진압을 막기 위해 16명의 인사들이 벌인 ‘죽음의 행진’에 참여했다. 이 변호사는 5월26일 밤 집에서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부인에게 “이제 나가면 죽어서 돌아올지도 모른다”며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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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 중 도청에서 시민군과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낸 분은 이종기 변호사가 유일할 것입니다.” 시민군 기동타격대 7조장 김태찬(48·당시 석공)씨는 5월26일 밤 11시30분께 도청 2층 농림국장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노신사’(이 변호사)를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노신사는 ‘젊은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나이 먹은 내가 집에 있겄는가? 자네들하고 같이 있을라고 왔네’라고 말한 뒤 총을 침대 밑에 밀어넣었다. 이튿날 새벽 계엄군에 맞서 총을 쏘며 저항하다가 쫓겨들어온 김씨 등 어린 시민군들에게 이 변호사는 “살아서 후세에 알려야 한다. 저항하지 말라”고 설득해 목숨을 부지하도록 했다. 사로잡힌 김씨의 등엔 ‘극렬분자’라고 적혔고, 이 변호사도 체포돼 군 영창으로 끌려갔다.
아들 이씨는 80년 10월 군법회의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뒤 형 집행 면제로 출소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에게 침묵을 강요했다. 이씨는 “봤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을 풀고 싶어서” 89년까지 광주의 진실을 밝히는 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는 96년 경희대 한의대에 재입학해 2002년 한의원을 개업했다. 이씨는 요즘 침과 뜸, 부항 등 단순한 도구로 건강이 회복되는 것을 보는 재미로 산다. 그는 “그때는 부당한 국가 폭력에 대해 시민들이 총을 들고 ‘아니다’라고 말했다”며 “지금은 촛불과 투표용지로라도 ‘아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시대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황석영 기고] “슬픔의 기억 넘어 ‘광주의 진정성’ 일상화해야” | |
[‘5·18’ 항쟁 30돌] 황석영 기고 ‘광주와 우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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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30주년에 이르렀으니 이미 한 세대가 흘러갔다. 광주에서의 항쟁은 1987년 6월항쟁으로 미완의 결말에 이르렀고 이른바 ‘87체제’의 연속선상에서 민주주의의 선진화 행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역사가 나선형으로 진전되는 것이 맞다면 우리는 구부정한 길을 돌아가고 있는 길목에 서 있지 않을까.
민중 이끌 문화운동 결심
전라도 내려가 ‘농민학교’
내가 가족과 함께 전라도로 내려가기로 결정한 것은 1976년 가을이었다.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관련자 사형 등으로 유신독재가 절정을 치닫고 있을 때였다. 나는 당시의 하방 이유를 대개 두 가지로 설명해 왔다. 하나는 지식인 사회에서 민주화운동이 나아갈 방향으로 전위론과 현장론이 있었는데 나는 후자를 택했다는 것이며, 둘은 두 해째 계속하고 있던 대하소설 <장길산>을 쓰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전위적인 조직의 선두적 투쟁만이 군사독재를 끝장내는 길이라는 것과, 당시 국민의 대부분이 노동자·농민·도시빈민이므로 이들 민중을 의식화하고 그들의 힘에 의하여 민주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그들 삶의 현장으로 가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이를테면 내가 선택한 것은 작가로서의 대중노선인 셈이었다. 이미 70년대 초반에 나는 몇몇 벗들과 함께 구로공단에 취업한 적이 있었고 현장 민중의 의식화를 위한 문화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장길산>을 좋은 작품으로 완성하기 위해서도 태어나서부터 도시내기였던 내가 아직은 전통시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던 시골로 내려가야겠다고 작심한 결과였다.
개인과 조직의 행동에는 여러 단계가 있기 마련이어서 먼저 자신과 사회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며 그에 따라서 소극적이고 추상적인 의식에서부터 보다 적극적이며 구체적인 행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우리는 의식화의 첫 단계를 전통적인 몸짓과 소리를 출발점으로 하여 거기에 서사를 담고 개인의 서사를 공동체의 서사로, 과거의 이야기를 현재의 이야기로 전환시키는 촌극 마당극 형태의 현장극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현장극은 참여자나 관객을 함께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조직의 분화와 번식이 매우 빠른 대중 의식화 방식이었다.
신군부 등장뒤 항의성명
계엄법 위반으로 군감옥
우리는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전국 33개 지역에 각종의 장르가 서로 연결된 문선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그러한 현장 문화운동의 시도와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 서울 변두리 공장 지대에서의 독서회 또는 야학운동과 광주를 비롯한 남도지역의 마당극 집단들이었다.
전라남도의 끝인 해남으로 내려가니 시인 김남주가 <함성>지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낙향해 있었고, 정광훈·윤기현 등의 농민이 합세해서 ‘사랑방 농민학교’라는 느슨한 조직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현장 문화운동을 전개하던 채희완·임진택·장선우·김민기 등과 광주의 민청학련 세대인 김상윤 등이 지원하여 전남현장문화운동의 준비 조직이 결성되었다. 김남주와 김상윤은 광주의 녹두서점을 근거로 민중문화연구소를 꾸리고 서울에서 문화운동 1세대와 2세대가 번갈아 내려와 함께 숙식하면서 전남대·조선대를 중심으로 한 연희패를 습련시키고 조직했다. 결국은 이들이 민주교육지표 사건의 시위를 주동하면서 옥고와 도피 등을 겪고 성장하여 이후 광주 전남지역의 현장운동과 문화선전을 주도해 나가게 된다. 내가 낙향하고 김남주가 광주를 거쳐서 민중문화연구소의 독서회 사건 등으로 서울로 도피할 무렵에 광주 민청학련 세대의 중심인물이었던 윤한봉이 출옥한다.
우리는 그와 함께 78년 무렵부터 조직 정비를 했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선배 세대 중심의 민주청년협의회, 노동자와 학출이 만난 들불야학, 여성 중심의 송백회, 시민들이 모인 양서조합, 그리고 문선대로서 극단 광대가 있었고, 이들은 또한 개신교와 가톨릭의 농민회, 노동청년회 등과 연결되어 있었다.
상경중 ‘피의 학살’ 비보
진상 알리고 책으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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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고 신군부가 등장한 뒤에 우리는 군정의 과도기가 적어도 일 년은 갈 줄 알았다. 나는 광주의 시민사회 인사들과 더불어 군정 종식을 요구하는 항의성명을 했고 계엄법 위반으로 군감옥에 유치되었다가 몇 달 만에 석방된 뒤였다. 우리는 시민 조직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현대문화연구소를 열고 극단 광대를 위한 소극장 개소를 준비하고 있었다. 5월16일 금요일에 출판사에 계약금을 받으러 상경했는데 다음주에 다가올 소극장의 계약 기일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주말이라 월요일에 사무처리가 된다고 하여 나는 서울에 체류중이었고 17일 토요일에는 신촌 근방의 주점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와 방금 전국 학생회 간부들의 비밀집회가 있던 이화여대에서 후문 쪽으로 가까스로 탈출해 왔다며 신군부의 일제 공세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사방으로 전화를 해보니 서울의 알 만한 사람들이 모두 끌려간 뒤였다. 이튿날 18일 광주에 알아보니 역시 예비검속이 시작되어 민청협의 후배들이 거의 검거되고 몇몇은 도피했다는 소식이었다. 내 집에도 합수단 소속 수사관 칠팔 명이 구둣발로 들어와 샅샅이 뒤지고 갔다고 알려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서울에 머물러 있었고 월요일이 되자 피의 학살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는 영등포와 종로 등지에서 몇 차례의 시위가 시도되었지만 초반에 진압되었고 몇 개 그룹이 유인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나는 빈민 운동권의 허병섭 목사와 더불어 노동자와 활동가 중심으로 유인물조를 짰고 광주에서 들어오는 소식들을 기초로 유인물의 문건을 쓰고 찍었다.
광주 시민의 항쟁이 진압되고 나서 서울로 도피해 올라오는 후배들의 은신처를 마련하고 생활대책을 세우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6월 말경에야 광주 집에 돌아오니 모친은 앓아누워 계셨고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내가 수배자 명단에서 뒤늦게 빠진 것은 수사책임자로 내려온 고교 동창생 덕이었다. 마치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광주에서 제정신이 돌아온 것이 83년 무렵이었고 우리는 광주의 진상을 국내외에 알려야 한다는 결의로 차 있었다.
이때부터 문화운동의 장르적 분화가 시작되면서 마당극뿐만 아니라 판화, 사진, 영상, 오디오, 비디오 등의 매체들이 활용되기 시작했다. 홍희윤은 그때 이미 광주의 진상을 조사하는 후배들을 뒷바라지하고 있어서 몇 개 그룹이 동시에 진행중이었다. 나는 수집한 자료들과 몇몇 후배들의 도움을 받아 광주항쟁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85년 2월에 풀빛출판사의 나병식, 평론가 채광석, 민청협의 김근태·신동수, 광주사회단체협의회 정상용 등이 대학과 시민사회, 학원가, 서점 중심으로 출판, 배포를 논의했다. 이미 3월에 기록의 일부가 복사되어 대학가에 배포되고 5월에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아래 사진)라는 제목으로 지하출판되었다.
당시 그 장소 그 시민들
‘오늘의 우리’ 지켜봐
우리는 광주항쟁의 주요 수배자였던 윤한봉과 박효선을 해외에 망명시킬 준비를 해오고 있었다. 해외와의 연대가 시급한 일이기도 했고 기존의 해외 민주화통일운동이 안전지역에서 오히려 급진적인 편향성에 치우쳐 있어서 ‘한국적’인 자생성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광주를 알리는 일과 함께 조정과 재편성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조직가로서의 윤한봉과 광주에서 산화한 윤상원에 이어서 문선대를 이끌었던 박효선이 함께 나간다면 효과적일 것이라고 논의가 되었다. 서울의 기독교 측과 협의하여 윤한봉을 호주를 경유하여 미국 시애틀로 가는 화물선 레오파드호에 승선시키기로 하고 재미 기독교 인권단체와 케네디 인권센터 등과 연결할 수 있었다. 박효선은 유럽 쪽으로 결정되었고 어떤 나라의 대사관과 협의가 되어 역시 선박편으로 거의 출발하려는 즈음에 본인이 승선을 포기했다. 미국 망명에 성공한 윤한봉은 스스로 조직한 ‘한국청년연합’을 기반으로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본에 이르는 해외 조직망을 통하여 한국의 민주화 투쟁과 광주의 진상을 온 세계에 알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와 만나서 해외 문선대를 조직하고 이를 아시아 여러 나라와 연결하기 시작한 것은 1985년 이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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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년이 지난 지금쯤은 우리 모두가 광주를 기억하고 알고 있을까. 거리마다 넘쳐나는 소비사회의 젊은이들은 현대사 연표에 나오는 몇 줄조차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광주의 5월은 직전에 그들을 깨우쳤던 부마항쟁과 만나지 못했고, 양쪽이 번갈아 정권까지 잡으면서 풍요로운 기념과 보상문제로 얼룩졌다. 그리고 세월이 가면서 지역적으로 사유화했던 존재감은 사라지고 반목과 회한이 깊어갔다. 나는 광주 시민사회의 불평분자이며 잔소리꾼이었던 윤한봉의 노심초사를 잊지 않는다.
이제 처참과 슬픔의 기념식이 아니라 그때 그 장소 그 시민들의 진정성을 일상화하자. 5월 광주는 이 탐욕스런 욕망의 시대에도 우리의 등 뒤에서 뜨거운 눈빛으로 우리를 눈바래기하고 있다.
황석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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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도청을 지킬 결의가 되신 분들로 기동타격대를 모집합니다. 뜻있는 동지들은 1층 회의실로 모여주십시오.”
회의실에 모인 60여 명에게는 전투경찰복과 방석모가 지급됐다. 대원증도 줬다. 제각각의 사연은 달랐지만 목적은 하나였다. “도망가지 말고 끝까지 싸우자”는 것이었다. “죽자”는 것이었다. 밤 11시께에는 마지막 식사가 주어졌다. 빨간 육개장을 먹으며 “요상허게 피 같소”라는 누군가의 농담에 웃음소리도 났다. 100명이 채 안 되는 기동타격대의 결의는 공수부대로 구성된 계엄군(3공수)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1980년대를 넘어 2000년대까지 관통하는 힘이 됐다. 폭압적인 권력에 맞서 도청을 지켰던 이들에 대한 부채 의식은 이후 수많은 민주화운동 세력을 규합하는 원동력이었다. 민주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광주는, 도청은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단어였다.
30년 전의 ‘찐빵’ ‘시계’ ‘범’ ‘백곰’ 등은 여전히 그날의 새벽을 살고 있었다. 그들을 만났다.
“그때 죽었어야 했는디…, 죽지 못해 살고 있소. 광주항쟁 일주일만 갖고 그때 갔어야 했소.”
5·18 광주 민주화운동 30주년. 기동타격대는 누군가에 의해 사주를 받았다는 ‘폭도론’으로 호도되고, 부당한 공권력에 의한 희생자라는 ‘희생 담론’으로 가려지면서 잊힌 존재들이었다. 특히 희생 담론은 엄혹한 전두환 정권 아래서 광주를 경험하지 않은 일반 시민들에게 정서적 공감대를 얻기 위한 노력이기도 했다. 희생이라는 단어가 앞서면서 5·18의 연구의 주제에서 항쟁·항거의 주역들은 후순위로 자연스레 밀려난 것이다. “민주화 ‘운동’만 남고 목심 걸고 싸웠던 ‘항쟁’은 어디 갔소. 어디 광주가 운동이오, 항쟁이재!” 기동타격대의 고함은 아직도 쟁쟁했다.
모집방송 듣고 자발적으로 모여
‘광주 민중민주항쟁지도부 기동타격대’. 광주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조차 기동타격대는 낯선 이름이다. 당시 도청에 있었던 인원은 500명~600명, 사망자도 160명~400명으로 큰 편차를 보인다. 30년동안 도청을 지킨 사람들의 숫자는 아직까지 명확하지 않다. 불변의 사실은 항쟁지도부가 존재했으며 이들이 꾸린 유일한 준군사조직이 기동타격대라는 것이다. 나머지는 도청수비대로 통칭되는 총을 든 시민들로 추정된다. 기동타격대는 진압작전 새벽까지 계엄군의 정황을 살피기 위해 정찰임무를 수행하는 등 군사조직으로 기능했다. 또 도청 진압작전을 펼친 공수부대는 기동타격대가 배치된 정면이 아니라 주로 도청수비대가 있었던 후면으로 진입했다.
공식 조직이었음에도 기동타격대만을 다룬 기록은 찾기 힘들다. 구체적인 기록은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이하 현사연)의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이 거의 유일하다. 윤상원·박관현이나 들불야학에 대한 재조명과는 사뭇 다르다. 허연식 5·18연구센터 책임연구위원은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5·18의 본질은 희생이 아니라 항쟁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며 “기동타격대 이야기부터 다시 기록하자”고 말한다. 이들에 대한 기록이 부족한 것은 1980년대 정부에 의한 폭도 담론도 한 이유다. 당시만 해도 폭도라는 규정은 ‘빨갱이’라는 돌이킬수 없는 낙인을 의미했다.
있는 자료마저 부정확한 경우가 많다. 현사연에는 기동타격대는 거의 노동자 출신의 20살 전후 젊은이로만 이루어진 동질성을 지향한 조직이었으며, 대학생은 기동타격대에 배속되지 않으면서 자발적으로 총을 들고 도청을 지켰던 도청수비대에만 배속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정체성과 관련된 내용에서부터 기동타격대 경험자들은 다른 목소리를 낸다.
“모집방송을 듣고 모인 초면의 사람들이었어요. 동네 친구 4명이 모여서 만든 1조를 제외하면 나머지 조들은 서로 이름도 나이도 몰랐으니까요. 대학생이나 교수 등 이른바 지식인이 없었다는 것은 나중에 잡혀가고 나서 알았던 것이죠. 총 잡는 데 자격 보나요.”
7조 조장으로 ‘찐빵’으로 불렸던 김태찬씨의 증언이다. 또 준군사조직이었지만 운용·구성 등 대부분의 활동이 자율적이었다. 특히 김씨의 7조는 임의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조는 나중에 꾸려졌어요. 기동타격대가 꾸려진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을 모아서 제가 7조를 하겠다고 했고, 박 실장이 그렇게 하라고 하는 정도였죠.”
1조부터 6조까지 5∼6명씩, 7조는 30명 정도가 꾸려져 총 60명 정도였다. 8조, 9조 등도 조직됐다고 알려졌지만 공식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들은 각자의 신원을 파악하지 않고, 별명을 썼다. 믿음 하나만으로 총을 든 군사조직이 된 것이다. 이들은 전투만 수행한 것이 아니다. 계엄군 동향 파악과 정찰에서부터 긴급환자 구조까지 나섰다. 광주 시민에게 이미 계엄군은 ‘적’이었고, 자신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도청에 있는 ‘누군가’였다.
“전화가 와요. 계엄군이 주변에 있는 것 같아 무서워서 병원에 못 가겠다고. 그러면 우리가 실으러 가서 병원으로 데려다주기도 했어요.”(1조 운전병 ‘시계’ 양동남)
이들은 이른바 ‘각성된 잡색 부대’였다.
“이들을 지켜야 겠다, 그런 생각뿐”
“살면서 단 한 번도 잘한다는 소리를 못 듣고 자랐죠. 내가 무엇을 하면서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조차 못하고 그냥 반건달로 살다가 갑자기 옆에서 박수를 쳐주고 젊은이가 고생헌다는 말을 듣는다고 생각해보세요.”
7조 조장 ‘찐빵’은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거 하지 마라, 저런 거 하지 마라라는 말만 듣다가 누가 뭐라고 안 해도 내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어린 여학생은 헌혈을 하고, 할머니는 주먹밥과 죽을 내오고…. 그런 거 봤소?”
그날 먹었던 주먹밥에 대한 기억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순찰을 도는데 사재기가 없더란 말이에요. 슈퍼 주인까지 먹고살 물건들을 풀었으니까요. 이런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총을 드는 일밖에 없다고 자연스럽게 느꼈어요. 처음으로 제구실을 하면서 살게 됐죠. 거기에서 자유라는 게 느껴지더란 말이에요. 틀에 매어 있다가 다른 틀로 확 풀려서 들어간 것처럼. 거기서 도망을 가요? 아니죠. 지켜야죠.”
1조 운전병 ‘시계’ 또한 그날의 선택에 대해 스스럼없다. “나중에 내란죄라고, 반역자라고 하던데…, 저는 그날 시민들의 얼굴이 또렷허게 기억나요. 총을 들고 다니는 우리들헌티 어느 누구 하나 반감을 갖는 사람들이 없었으니까. 모두가 박수를 쳐줬으니까. ‘이 사람들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죽어도, 아니 혹시나 죽더라도 이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줄 거다, 그런 생각뿐이었죠.”
이를 ‘절대 공동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지켜야 할 세상인 거 같았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진압 이후 기동타격대에 남은 것은 ‘간첩 사주,’ ‘김대중 지령’ 등의 시나리오에 꿰맞추기 위한 온갖 고문과 구타였다. 이것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폭도라는 굴레였다. 그때와 같은 경험을 다시는 하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었다. 변한 세상에 대한 원망이었다.
10여년 경찰 감시, 정상적 생활 불가능
당시 광주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간 이들은 150여명, 이 가운대 기동타격대의 숫자는 50여명으로 추정될 뿐 지금도 정확하지 않다. 끌려간 그 순간부터 이들을 두고 내란의 수족으로 몰기 위한 고문과 수사가 진행됐다. 고문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양동남씨가 체포 과정에서 엉덩이를 대검으로 찔렸음에도 며칠 동안 그 상처 부위의 고통을 느끼지 못해 살이 썩어들고 나서야 병원에 실려갔다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함께 붙잡혀온 사람들은 이제 별명이 아닌 이름을 알아가며, 그들에게 가족이 있었고 죽지 못해 끌려왔다는 것을 이야기해가며 ‘다시’ 뭉쳤다. 결국 이들은 군법재판에서 <투사의 노래>를 불렀다. 계엄군에 잡혀온 폭도가 아니라 광주를 지킨 기동타격대라는 자부심이 용기를 북돋았다. 이렇게 재판을 방해하고 나면 온갖 고문과 가혹 행위가 뒤따랐다. 기동타격대였다면 ‘전두환’이라는 이름보다 ‘형무반장 박춘배’를 더욱 깊게 새기고 있었다. “전두환이나 박춘배나 다 똑같이 내 세금으로 먹고사는 놈들이 나한테 부당허게 가허는 폭력이었응게요. 사실 ‘전두환 물러가라’고 말하지만 나는 전두환이 누군지 몰랐지요. 민주주의가 뭔지도 몰랐고, 우리를 투사라고 불렀지만 그것도 뭔지 또 몰랐고. 다만 우리가 잘못한 게 없고, 기특헌 일을 했다는 것만 알았죠.”(2조 ‘범’ 안선옥)
상처로 남은 것은 폭력의 결과만이 아니다. 동지적 관계로 아낌없이 나누던 사람들이 세상이 달라지자 자기 것을 챙기기 시작한 것이다. 당장 군통합병원과 상무대 영창에서부터였다. 100명 정도가 한꺼번에 수용된 통합병원은 병상 배치부터 이상했다. 한 줄에는 기동타격대 출신 사람들, 한 줄에는 교수·학생 등이 나란히 누웠다. 이때의 경험을 ‘시계’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치부한다. “항쟁 때는 없는 것도 나누던 사람들이 자기 병상 옆에서 먹을 것이 썩어도 나누지 않더라고요. 싸우고 희생당허는 것은 우리처럼 힘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어요.” 상무대 영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왜 싸웠는지 우리가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영창에서 그들이 말해줘서 많이 배웠지요.” 영창에서 병원에서 ‘배운’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들은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 계기는 됐지만 밥을 앞에 두고 입었던 그 때의 상처는 여전히 안에 담아두고 있는 듯했다.
상무대 영창과 통합병원을 오가는 생활은 6개월여 계속됐다. 훈방됐던 사람들도 기동타격대 출신이라는 것이 뒤늦게 밝혀지면 재수감돼 내란죄가 적용됐다. 가담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적게는 1년부터 무기징역까지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다가 1982년 전격적으로 단행된 형집행정지로 대부분 출감하게 된다. 여전히 서슬 퍼런 5공 시절, 이들은 경찰의 온갖 방해를 넘어 기동타격대라는 이름으로 82년 다시 모였다. 그 뒤로 30년 동안 5·18 진상 규명 투쟁부터 암매장 발굴까지 5·18과 관련된 일에 앞장서왔다.
“4월만 되면 직장을 다닐 수가 없었어요. 거리로 나섰죠. 그걸 어떤 논리로 설명하나요. 30년 전 5월27일 이후 저에게는 패배의 고통만 있어요. 그것이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죠. 하지만 그래도 27일 이전 일주일의 경험은 ‘우리’만 한 거예요. 내가 사는 세상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저는 몸으로 겪은 거죠. 누군지는 모르지만 나를 믿고 총을 든 동료가 죽어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니까, 그 생각도 잊히지 않고….”(김태찬)
5·18이라는 경험, 그 정신적·육체적 충격은 기동타격대 개개인에게는 비극을 가져왔다. 5·18 관련 단체에서 일하는 한 관계자는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낸다. “이분들의 삶이 5·18을 대표하기 힘든 것은 개인의 삶이 올바르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에요. 몇몇은 자신이 한 일을 영웅화하거나 미화하기도 했고요.”
기동타격대 스스로 이런 지적을 비껴가지 않았다. 이름을 밝히기 꺼린 한 당사자는 말했다. “죽음을 목격하고 무차별한 폭력을 경험한 상태에서 10여 년 경찰 감시가 지속되자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어요. 피해의식을 고스란히 자기 집으로 가져가서 가정을 파탄으로 몰고 가거나, 안으로 곪아 알코올중독이 되거나…, 5월만 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고…. 나도 30년 동안 마누라 등골만 빼먹고 산 셈이오. 그렇게 살았소.” 이렇게 스스로 망가지면서 내부 갈등도 생겨났다. 기동타격대가 속한 5·18 구속부상자동지회의 한 회원은 울분을 토로했다. “당신들은 투사요, 5월 정신을 잊지 마시오, 이렇게 말한 사람들이 생계 대책을 세워야 하는 순간에는 다 입을 다물었어요. 그게 끝이죠.” 그래서 보훈처에 속해 지원받는 공법단체로, 회원들의 복리를 우선하는 이익단체로 거듭나자는 의견이 탄력을 받았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이견은 있다. “자본주의 아니냐, 어쩔 수 없다고 허지만, 우리가 북파 공작원이랑은 다르지 않소.”
“함께 죽지 못했다” 부채의식만 남아
지난 5월11일 양동남씨와 도청을 찾았다. 금남로가 내려다보이는 도청 2층의 창문에 기대 잠시 생각에 잠긴다. “30년 동안 의식적으로라도 가지 않은 곳이어요.” 돌아서더니 갑자기 한 사무실 문을 두드린다. “이 문이었는데…. 여기 숨었다가 잡혔소. 꼭 살아남아서 진실을 알리자고 허면서….” 자신이 총을 겨눴던 자리에서 변한 금남로를 바라보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이들의 부채 의식은 유난하고 특별했다.
“그때는 몰랐어요. 왜 총을 쏘고 나면 죽어가는지…. 몇 년이 지난 다음 알았죠. 예광탄이 세 발에 한 발씩 발사되는데 미리 배치된 저격수들이 예광탄이 발사된 자리로 집중사격을 했던 거예요.”
그날 새벽 1조 ‘시계’는 결국 마지막에 총을 쏘지 못했다. 7조 ‘찐빵’도 총을 버렸다. 총을 맞은 동료는 바로 죽지 않았다. 쌕… 쌕, 거친 숨소리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30년 만의 ‘특별한’ 고백도 있었다. 2조 ‘범’이었다.
“5월27일 새벽 1시쯤 됐을라나. 임동 쪽에 상황이 생겼다고 지가 속헌 2조 출동이 떨어졌고 1조랑 같이 나갔지라. 운전 미숙이었는지 우리가 탔던 지프가 전복이 됐소. 우리 조장이 이마허고 허벅지에 부상을 당해부렀죠. 다들 가까스로 차를 다시 뒤집고 병원에 들렀다가 복귀허라고 허는디…, 가는 길에 여인숙 하나가 보이는디…. 919여인숙이라고. 그때 대한극장 뒤 말이어요. 조장을 눕혀놓고 잠깐 눈을 붙였소. 그리고 기억이 없당게요.”
기동타격대 2조 6명은 대로변에 떡하니 지프차를 세워두고 여인숙에서 잠이 들었다. “그래도 총은 놓지 않았소.” 말은 자꾸만 끊어진다. “옆집으로 담을 타고 넘는디 건물 위로 계엄군들이 보여요. 얼핏 봐도 40명은 되아 보이는디. 아, 죽었구나…, 셋은 마루 밑으로 들어가고 셋은 부엌으로 들어갔어라. 갑자기 밖에서 두들겨 맞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허고, 아 잡혔구나…, 부엌으로 들어오믄 쏴서 죽여야것다고 생각혔지요, 그리고 나도 죽어뿌러야것다. 문이 활짝 열리고 상사 하나가 들어오등만요. 컴컴헌 부엌으로 허옇게 빛이 쏟아지고…, 그게 끝이어요.”
지금도 그는 5월 구속부상자동지회에서 일한다. 30년 동안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했다. 5·18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대열을 따라 거리에 섰다. “봄만 되믄 5월에 어디 붙어 있을 수 있간디요.”
그의 고백은 아이러니했다. 학살의 책임이 있는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있는 30주년, 그는 “함께 죽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2조 ‘범,’ 동네 형들 따라서 도청으로 갔다는, 백운동 안씨 집안의 5남1녀 막둥이는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더듬거렸다. 30년 된 이야기를 어제의 잘못인 양 낱낱이 털어놨다. 그래서 그 상사를 쐈느냐고 물었다.
“얼굴을 대면허고 쏠 수는 없드랑게요. 조용허니 ‘총을 버리면 살려주것다’고 허등만. 어찌헐 수가 없어서, 그냥 총을 겨누고 대성통곡을 했어라. 셋 다 그렇게 울다가 잡혀갔당게요.”
당시 열여덟에서 이제 쉰 살이 된 2조 ‘범’은 그게 그렇게 죄스러웠느냐는 말에 자꾸 “그래도 끝까지 총은 놓지 않았노라”고 답했다.
2008년에서 2009년까지 그들은 다시 도청을 지켰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추진의 일환으로 진행하던 광주 도청 별관 철거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기동타격대가 가장 먼저 농성에 나섰다. 생계를 포기한 8개월이었다. 하지만 다른 피해자 단체보다 앞서 철수했다. 배신이라며 욕도 많이 먹었다. 철수를 두고 내부적으로 찬반 대립을 겪으면서 감정싸움으로까지 번졌다. 기동타격대 회원들은 자신의 의견과는 별개로 이 일 자체를 힘겨워했다. 한 회원은 “8개월 동안 쳐다보지도 않던 단체들이 우리가 나간다니까 들어오더라고요. 그래도 결과적으로 막아냈으니까 우리 몫은 했다고 봐야죠”라며 한숨을 내쉰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다. “도청 허물자면서 빠져나간다고 ‘허문 벽돌로 묻어줄랑게, 이리 오소’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런 말을 듣는 수모를 왜 당해야것소. 나오면 안 되는 일이었소.”
“무명 열사 재단 만들자” 다시 뭉친다
상처는 계속됐다. 먹고사는 문제가 걸렸다. “우리에게 투사라고 치켜세우면서 앞장서라고 주장한 사람들 모두 자기 것 챙겨가며 높은 양반 돼서 잘살고 있어요. 그때 우리가 폭도로 몰려 보상·배상은커녕 정상적인 사회생활도 못할 때 그 사람들 뭐했어요. 우린 대부분 가정을 제대로 꾸린 사람이 없어요. 이제 정치적인 일은 그만할랍니다. 앞으로는 그냥 매년 5월27일 우리가 목숨 내놓고 도청을 지킨 날, 서로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서로 돕는 게 우선입니다.” 세파에 시달린 냉소가 짙었다.
늦게나마 이들에 대한 조명이 새롭게 시도되고 있다. 조정환 ‘다중지성의 정원’ 대표는 그의 책 <공통도시-광주민중항쟁과 제헌권력>에서 “이들은 전두환의 계엄군이 총을 버리고 다르게 살도록 강요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인간적 존엄을 회복한 사람들”이라며 “이들의 등장은 지역공동체가 현존하는 주권질서와 화해할 수 없는 공동체로 변모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조 대표는 한걸음 나아가 “영세기업체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무직자가 대부분인 기동타격대는 각자의 직업이나 신분을 벗어나, 어떠한 이해관계에서도 자유로운 투쟁을 만들어냈다”고 표현했다.
최정운 서울대 교수(외교학)는 저서 <오월의 사회과학>를 통해 “기동타격대가 끝까지 싸웠던 이유는 진실을 아는 사람들만이라도 끝까지 싸울 수 있는 자유, 선택의 자유를 인정받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 스스로 도청이라는 자리를 내주면 진실은 영원히 파괴되고 모든 광주 시민들은 폭도로 생매장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끝까지 저항해 진실을 땅 속에 감추고 훗날 진실로 부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기동타격대는 기동타격대다. ‘찐빵’과 ‘시계’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사무라이’라고 부르던 친구가 있었죠. 넝마주이였는데, 본명은 당연히 모르죠. 당시는 생긴 대로 별명만 부르니까.”
결국 사무라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상무대 영창에서도, 82년 기동타격대 모임이 재결성되고 나서 짱돌을 던졌던 수많은 거리 현장에서도, 사무라이는 없었다. “죽었것죠.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면…. 요즘 더욱 사무라이처럼 이름 없이 도청을 지켰던 사람들,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데 묻어버린 망월동 묘역의 무명 열사들이 진짜 5·18이라는 생각이 드요. 넝마주이, 부랑아, 이렇게 천시허면서 5·18의 바깥 존재인 것처럼 취급된 그 사람들을 어떻게든 꼭 기억해야 하지 않것어요?” 그들은 “용산에서, 대추리에서 5월 단체의 깃발이 없었던 이유도 더 이상 사무라이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 그들은 ‘무명 열사 재단’을 만들려 의견을 모으고 있다. 5·18은 기동타격대 몇몇이 기억하는 이름 없는 사람들로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다. 30년 만이다.
광주=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참고 문헌: <공통도시-광주 민중항쟁과 제헌권력>(조정환·갈무리), <오월의 사회과학>(최정운·풀빛), <윤상원 평전>(박호재, 임낙평·풀빛),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풀빛),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황석영·풀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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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중항쟁이 발발한 지 한 세대가 흘렀다. 1980년 5월21일 사망자와 부상자로 가득한 기독교병원에서 헌혈을 하고 돌아오다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 박금희의 친구들은 47살이 됐다. 그녀의 삶과 죽음을 소재로 <금희의 오월>이라는 연극의 각본을 쓰고 연출한 박효선은 1998년 병으로 이승과 이별을 고했다. 5·18 당시 시민학생투쟁위원회 홍보부장이던 그는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이루어진 5월27일 새벽 2시께 전남도청을 탈출한 것을 평생 부끄럽게 생각하고 5·18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몸부림쳤다.
한 세대를 넘은 5·18은 다양한 기억 공간을 남겼고, 당시를 회상하고 계승하기 위해 건립된 장소와 시설들이 원초적 현장성을 대체해가는 추세다. 기억 공간에는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과 직후에 형성된 전남도청, 상무대 영창 그리고 망월묘지, 추모 및 기념 등을 목적으로 조성된 5·18묘지와 공원 및 표지석 등이 있다. 5·18의 기억 공간들은 매해 5월 행사에서 그 가치를 발현해왔다. 특히 10년을 주기로 한 대규모 5월 행사에는 망월묘지가 중심에 있었다. 광주와 전국에서 모여든 시민들은 1천여 평에 불과한 망월동 묘지에서의 추모제와 기념식에 참여해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항쟁 담론을 공유했다. 1990년 5월 행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87년 출범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는 5·18의 제도적 청산이 임박한 10주년에 광주로 집결해 당시 쟁점이던 ‘민자당 해체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주장하며 5월 행사의 의미와 현재적 과제를 결합했다.
하지만 1997년 5월 5·18 묘지가 조성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신묘지’라고도 명명되는 5·18묘지는 시민의 접근성과 공동체성보다는 국가 차원의 행사를 염두에 둔 구조로 건축됐고, 희생과 추모의 담론이 가득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공간 조성의 결정권이 주류 또는 지배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에게 일임되면서 기념사업 과정에 편입돼야 할 항쟁 담론은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지적이다. 조성 과정에서 5·18 관련 단체를 비롯한 시민사회는 소통과 토론보다는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됐으며, 국가와 시민사회의 반목도 끊이지 않았다. 이런 논란은 묘지 조성에 이어 다른 기억 공간을 조성하는 과정에서도 유사하게 재연됐다. 망월묘지와 함께 5·18의 원초적 항쟁 공간이던 금남로와 충장로를 포함한 전남도청 일대의 기념사업도 마찬가지다. 항쟁과 계승의 의미가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함에도, 추모와 제도화의 편의성을 앞세운 탈정치화된 형태로 재조성되는 상황이다.
시민의 자발성에 토대를 둬야
5·18 기념사업이 대규모 공원과 시설 조성에 집중되는 과정에서 역사성·사회성의 탈피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5·18의 원초적 공간이 해체되고 당시의 현장성을 잃어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흐름도 확산됐다. 이 과정에서 5월의 반복적인 재연과 회고는 시민의 무관심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광주에 인접한 지역들에서 5·18을 기념하는 작업도 다르지 않다. 전남 화순군의 5·18 기념시설은 5·18의 기억 공간이 처한 현주소를 보여준다. 기념물의 재질을 교체하고 접근을 제한하는 시설을 추가로 설치했지만 친근성, 미적 감각, 장소 접근성 등 사회·문화적 고려가 부족했다. 쓰레기와 각종 기물에 둘러싸인 경찰서 사거리 표지석이나 구석에 숨겨져 찾기 힘든 화순경찰서 표지석, 시민의 접근이 거의 불가능한 역청공장 표지석 등 기본적인 기능조차 잃어버린 경우도 적지 않았다.
지금까지 30년 동안 상처를 치유한다는 명목으로 엄청난 예산을 들여 여러 공간과 시설을 건립했지만 무엇을 얻으려 했는지 의문이 든다. 동원과 보여주기가 아니라, 시민의 자발성에 토대하고 지지를 받아 5·18의 기억 공간들이 영구화될 수 있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 5·18을 기념하는 문제에서 법과 제도, 관행이라는 잣대는 그다음이다. 국립5·18민주묘지에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집단으로 줄지어 참배하고 되돌아나오며 그들끼리 하던 “입장료 안 내는 곳만 데리고 다녀”라는 얘기가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이들의 방문을 통계로 정리하고 발표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
기사등록 : 2010-05-17 오후 10:0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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