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최장집 교수] 촛불의 힘이 투표참여로 확대된 게 지방선거 의미

시놉티콘 2010. 6. 21. 15:39

 

 

 

“촛불의 힘이 투표참여로 확대된 게 지방선거 의미”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경향신문
 
ㆍ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인터뷰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퇴임 이후 서울 내수동의 한 오피스텔을 빌려 연구실로 쓰고 있다. 지난 14일 연구실을 찾았을 때 테이블에는 가위로 오려놓은 국내외 신문이 놓여 있었다. 학술대회 기사부터 사회면 기사, 칼럼까지 여러 종류다. 이렇게 모은 신문 스크랩북도 여러 권이다. ‘현실’에 기반한 정치학자를 표상하는 사물로 보였다. 최 교수는 원로이자 대가의 반열에 든 정치학자이면서도 고전과 원전에만 파묻히지 않는다. 한국 정치·사회 현실을 끊임없이 스크린하며 자신의 정치 이론과 원칙을 다져나가는 학자다.

최 교수는 2002년 11월 출간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2차 개정판을 최근 발간했다. 노무현 정부 이후의 정치 현상과 수치·통계를 꼼꼼히 업데이트하면서 민주 정권 10년의 특징과 패턴을 차분히 분석해 반영했다. 지난 11일 한림대 주최로 열린 학술대회에서는 ‘자유주의’라는 정치 이론·원론을 한국 정치·현실과 접목해 ‘진보적 자유주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14일 오후 2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에서 최 교수는 ‘자유주의’와 대의제민주주의에 대한 생각과 입장 등을 두루 풀어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지난 14일 연구실에서 진보적 자유주의의 가능성과 6·2 지방선거 의미 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 최근 학술대회에서 자유주의 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왜 지금 자유주의입니까.

“‘이제는 자유주의다’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유주의 관점에서 문제를 보는 게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분단국가 이후 자유민주주의가 새로운 국가의 공식 이념이 됐지만, 그 이념은 냉전 반공주의로 변질돼 권위주의나 군부독재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자유주의는 구호나 슬로건으로만 존재했습니다. 자유주의 전통이 뿌리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민주화가 먼저 됐습니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기틀이 어느 정도 잡혔는데 민주화, 현대사를 생각하면서 자유주의를 성찰할 수 있는 조건이 됐다고 봅니다.”

- 자유주의란 무엇입니까. 보수, 진보 등 여러 갈래의 이념 세력들이 여러 뜻으로 쓰고 있는데요.

“자유주의는 보편적 이념이기 때문에 범위가 넓습니다. 한국 정치를 발전시키려면 선별적으로 추려야 하는 작업이 필요한데요. 우선 자유주의가 인간 역사 발전에서 가장 크게 기여한 게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인간평등의 보편 사상, 즉 자연권 사상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합니다. 두 번째 자유주의 원칙에는 국가 권력을 제대로 견제하는 가치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원칙은 3권 분립이라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로 나타납니다. 또 한국 현실에선 진보파들에게 정열을 식히는 해독제 역할을 하는 측면에서도 중요합니다. (진보파들은) 민주주의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 결과 민주주의가 모두 이뤄낼 수 있다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고 현실적으로 이뤄낼 수 있는 정치에 대한 이해 방법과 태도를 자유주의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 한국의 정치·사회 맥락에서 자유주의는 보수의 용어였습니다.

“고전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는 구분됩니다. 자유주의는 어떻게 정치권력을 제도화하고 인간의 자유·평등을 구현할 수 있느냐는 이론입니다. 로크, 몽테스키외 등은 자율적 시장경제를 지지·옹호한 적이 없어요.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동일하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자유주의는 평등사상입니다. 민주주의 평등사상의 기초는 정치적 평등이고, 1인1표의 대의제가 기초가 되는 건데요. 평등이라고 하는 기본 원리가 동일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하고 상통합니다.”

- 자유주의가 한국에서 하나의 보편 이념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한국 현실을 볼 때 자유주의는 진보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정치적 힘으로 조직·실천하느냐에 따라 사민주의 내용까지 포괄할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 그동안 보수파들이 자유주의 이념의 핵심 요소들, 즉 법의 지배, 법 앞의 평등, 인간 평등사상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자유주의는 정치적으로 이해 관계가 다른 세력을 관용하고, 공존을 강조했던 이념입니다. 이념이 다르다고 서로를 용인하지 않는 태도나 행동 양식들은 자유주의의 가치가 확산될 때 많이 완화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 최근 급진민주주의 등을 강조하는 진보 지식인들의 논의에 비판적 견해를 내셨는데요.

“정치를 ‘냉정한 열정’이라고도 말합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과도한 열정과 결합한 걸 두고 ‘정서적 급진주의’란 말을 쓴 적이 있습니다. 정부와 정당이 보수적으로 되면서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걸 대의제 민주주의의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이상적 대안으로 직접 민주주의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의제 민주주의가 문제가 아닙니다. 대의제는 잘하면 됩니다. 권위주의로부터 민주주의를 만드는 데는, 운동과 같은 급진적 방법이 필요할 때도 있겠지만 민주주의를 운영하고 평상시 실천하는 것과는 방법이 다릅니다. 민주주의는 이익 갈등과 결정에 이르는 설득과 타협이 필연적으로 전제되는 겁니다. 민중주의 이념으로 급진적으로 성취하려는 열정이 얼마나 민주주의 작동 원리와 잘 상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6·2 지방선거의 의미는 무엇인지요.

“많은 사람들이 투표의 힘이 크다는 걸 느꼈을 겁니다. 2008년 촛불집회 때 수백만명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와 정부를 비판·성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투표의) 힘이 더 강하다는 걸 보여준 사례입니다. 민주주의에서 투표만큼 정당성을 강하게 부여하는 게 없습니다. 그간 이명박 정부가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우리는 다수 국민의 힘에 선출된 정부이고, 위임받아 통치하는 것이다. 일부 과격분자 이야기한다고 수용할 수 없다’는 것 아니겠어요. 그 힘을 제약하고 견제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민주주의 투표입니다. 투표 참여 없이 운동 참여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그래서 부족한 거죠. 이번 선거에서 촛불이라는 운동의 힘이 투표 참여의 에너지로 확대된 게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 여당 패배 원인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견제되지 않은 권력이 필연적으로 보여주었던 권력의 독선과 오만에 대한 투표자의 반응이었다고 봅니다. 정부 여당을 위해서도 지난 대선, 총선과 같은 일방적 승리는 좋은 것일 수 없습니다. 민주화를 경험한 많은 시민들에게 현 정부는 여러 측면에서 민주주의 규범과 원리를 존중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4대강 사업, 세종시 문제, 대북정책 등 중대 이슈와 정부정책이 일방적이었습니다. 선거에서 승리한 다수당이라도 민주주의는 항상 시민들의 요구에 반응하는 자세가 필요하고, 공론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국민을 겸손하게 설득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최상층 소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책을 폈고, 대북정책에서 평화와 공존이라는 보이지 않는 넓은 사회적 합의를 무시하고, 전쟁 위협을 느낄 정도로 남북 문제를 악화시켰습니다. 정부 여당이 집권 이후 왜 짧은 시간에 국민을 실망시켰느냐는 문제는 민주화 이후 늘 되풀이된 패턴으로 보입니다. 한국 국가권력이 크다는 것이 중요한 요인이 아닌가 합니다. 반대자들은 물론, 자신의 지지자들의 요구나 의사를 폭넓게 수용하지 않고서도 통치가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는 정치적 자원을 만들어주는 것이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선거 때 투표자들은 쉽게 소외되는 것이지요.”

- 선거 과정에서 민주대연합, 민주 대 반민주 논리에 동의하지 않으셨는데요.

“국가 권력이 강하기 때문에 견제하려면 모든 힘을 다 결합해야 한다고 하니까, 일종의 양당제적 모양새가 만들어졌죠. 이렇게 경쟁 틀이 잡히면 소수 정당, 소수 의사들이 대표될 수 없죠. 그래서 비판적이었던 겁니다. 한국 정치 경쟁 구조에서 견제와 균형을 만들려면 연합이 필요하다는 걸 부정하진 않아요. 다만 이기는 데 가치와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러려면 소수 의사 대표가 제대로 되어야 하고요. 정책 차이를 빼고 무턱대고 연합, 연대를 추진하면 억압적 요소를 가질 수 있습니다. 진보·군소정당에 일방적 후보 단일화 압력을 넣는 건 곤란하다고 봐요. 지방선거에 승리했다고 다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 진보신당 문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대중을 대변할 수 있는 현실적 진보정당을 건설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식인과 운동권 중심이고, 현실적 기반이 약합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가면 진보정당의 미래가 없다고 봐요. 누구와 무엇을 대변하는지 불분명합니다. 무상급식 같은 몇몇 정책을 말하는데, 지엽적인 거죠. 정당은 일관된 틀과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당장 집권은 못해도 힘을 가질 때 이런 저런 정책을 구현하겠다고 말해야죠. 한두가지 공약 같은 건 정당의 목표가 될 수 없죠. 진보소수정당을 발전할 수 있는 한국 사회의 근본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 민주당의 승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이번 선거 결과는 과도한 정부 권력에 대한 중간평가이고, 권력에 대한 견제라고 봐야죠. 민주당이 대안이라 지지한 게 아니라 견제를 위해 소극적 지지를 한 거죠. 국가·정부가 권력을 남용하고, 투표로써 야당이 견제하게끔 하는 게 우리 선거 패턴입니다. 민주당이 다음 총선, 대선에서 이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예요. 쇄신해야 합니다. 한나라당과 비슷한 정책을 갖고 가면 적극적으로 선택하기 힘듭니다.

- 투표율이 높아졌지만 45% 정도가 투표를 안한 걸로 나타났습니다.

“민주화 이후 한국 정당체제가 시민들의 적극적 선택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정당 체제가 희망을 주고, 요구를 대변할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투표율은 한국민주주의의 현 위치를 보여주는 거죠. 기존 제도권 정당들이 제 역할을 못한다는 말이죠.

- 선거에서 드러난 건 ‘냉전 이념 불러내기’였던 것 같습니다. 마침 6·15 10주년이기도 한데요.

“정부가 선거 가까이 천안함 같은 이슈를 만들고 여론을 동원하는 스타일을 보여줬는데, 과거 권위주의 정권이 하던 걸 재현한거죠. 퇴행입니다. 지금 온세계가 평화를 지향하고 있는데,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 가능성이 운위된다는 건 곤란하죠. 세계 시대정신이 평화입니다. 남한이 평화 이니셔티브를 쥐고 다른 나라를 설득해도 시원치 않은 판입니다. 지금 다른 나라는 제발 한반도 평화가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하는데, 한국이 나서서 북한을 혼내줘야겠다고 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보수 기득권층들이 너무 쉽게 통치하려 냉전 이념을 불러내요. 시대착오인 거죠. 탈냉전 시기에 맞게 평화적으로 안정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는 틀 안에서 북한을 다루는 게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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