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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자서전

시놉티콘 2010. 8. 1. 19:19

 

 

“민주주의 후퇴하면 죽어서도 호통칠 것”
김대중 전 대통령 자서전 어떤 내용 담겼나
“이원집정부제·내각책임제 도입 나쁘지 않아”
“최대 암적존재는 검찰…보복적이고 정치적”
한겨레 송호진 기자기자블로그
»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씨(왼쪽 둘째)가 29일 오전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김 전 대통령 자서전 출판 언론 설명회에서 발간에 도움을 준 인사들에게 감사의 뜻을 담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29일 공개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 1·2권.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꿈을 꾸는 것 같다. 군사독재 정치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이 나라 최대 암적 존재는 검찰…권력에 굴종하다 약해지면 물어뜯는다.
이원집정부제와 내각책임제를 도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민주주의가 후퇴한다면 죽어서도 어찌 편히 눈을 감을 것인가…. 눈물을 닦고 다시 호통을 칠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의 삶과 굴곡진 현대사를 돌아본 자서전 곳곳에서 이명박 정부의 일방통행식 국정운영에 깊은 우려를 내려놓지 못했다.

김 전 대통령은 “국민의 힘으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뤄 나와 노무현의 민주화시대 10년이 펼쳐졌다”며 “민주주의가 반석에 선 것처럼 보였고 국민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통탄했다. 김 전 대통령은 “믿을 수 없고 꿈을 꾸는 것 같다. 군사독재 정치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고 걱정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의 ‘실용’과 관련해선 “나라와 국민을 위해 가장 보편적인 길을 찾는 것이 실용인데, 그는 실용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김 전 대통령은 용산참사 등을 떠올리며 “국민을 적으로 아는 정권, 권세만 있고 부자만 위하는 정권, 권력의 만능 의식이 통탄스럽다”고 개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가져온 검찰 수사에 대해선 “이 나라의 최대 암적 존재는 검찰”이라며 “너무도 보복적이고 정치적이며, 권력에 굴종하다가 약해지면 물어뜯는다”고 검찰의 자성과 변화를 촉구했다.
 


 

» 29일 공개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 1권과 2권 두 권으로 이뤄져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김 전 대통령은 권력이 대통령한테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다며 개헌의 필요성도 언급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제 민의를 따르지 않는 독재자는 민의로 퇴출시켜야 할 때가 됐다”며 “이원집정부제와 내각책임제를 도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10년 동안의 민주정부가 많은 것을 변화시켰고, 우리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이 매우 성숙했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이런 판단의 배경을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전후를 되돌아보며 아들들이 로비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것을 뼈아팠던 일로 기억했다. 김 전 대통령은 “(아들들의 사건이 터졌던 당시) 나는 발밑이 꺼지는 듯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졌다”며 “아들 홍업과 홍걸은 (사건 이후) 내가 찾지 않아 청와대에 발도 들여놓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의 억울함을 나중에야 알았다”며 “모든 것이 나의 부덕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자신을 탓했다.

 

자신의 재임 시절 이뤄진 ‘현대 대북송금’ 사건에 대해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수사를 진행했던 것에 대해선 진한 아쉬움도 내비쳤다. 김 전 대통령은 “2003년 4월22일 노무현 대통령 부부와 동반 만찬을 하면서 ‘현대 대북송금은 어찌된 일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몹시 황당하고 불쾌했다”며 “대북송금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는 소신엔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1987년 대선 당시 김영삼 통일민주당 후보와 야권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것과 관련해선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며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김대중 전 대통령, 살아서 못다한 말 자서전으로
“동생네가 끼니를 잇지 못하면 형이 쌀을 퍼다 주는 것은 당연”
“이명박 대통령은 남북문제에 철학이 없다” 비판도
한겨레 이제훈 기자기자블로그
»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남쪽이 잘살면 도와줘야 한다. 동생네가 끼니를 잇지 못하면 형이 쌀을 퍼다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9일 발간된 <김대중 자서전>에서 식량 등 대북 인도적 지원을 ‘퍼주기’라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 “북녘은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우리 땅으로 언젠가는 반드시 합쳐질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적어도 이 땅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남과 북이 다시 가난해지지 말아야 한다”며 “통일은 나중에 하더라도 끊어진 허리를 이어 한반도에 피가 돌게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어 “북한이 고자세로 엄포를 놓는 것도 약자의 강박관념”이라며 “설득하고 다독이고 쓰다듬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의 통일정책을 두고 “이(명박) 대통령은 남북문제에 대한 철학이 없다”고 비판했다. 또 이 대통령의 ‘비핵·개방·3000’ 구상은 “냉전적 사고방식”이자 “동족에게 굴욕을 강요하는 정책”이라고 비판하고, 현인택 통일부 장관에 대해선 “강력한 반북주의자”라고 평가했다.

 

김 전 대통령은 2002년 4월 임동원 특사 방북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2차 정상회담을 하자고 제안해 왔으나 ‘답방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며 거절한 사실을 뒤늦게 밝혔다. 또 그해 5월 박근혜 의원이 ‘유럽-코리아 재단’ 이사 자격으로 방북한 뒤 정세현 당시 통일부 장관을 통해 “나는 보수이다. 그러나 남북문제를 푸는 데는 보수, 진보가 없다. 화해협력밖에는 방법이 없다. 대북정책은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방향으로 가야 한다”라고 전해 왔다고 공개했다.

 

김 전 대통령은 “한국처럼 4대 강국에 둘러싸여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며 “외교가 우리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우리의 4강 외교는 ‘1동맹 3친선 체제’가 돼야 한다”며 “미국과 군사동맹을 견고히 하고 중국 일본 러시아와 친선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곤 “우리 경제는 중국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게 됐다”며 “뒤에 오는 이들은 내가 왜 4대국 정상외교에 심혈을 기울였는지 제발 살펴봤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이제훈 기자 nomad@hani.co.kr

 

“정부 반대로 못읽은 조사, 이제야 노무현 영전에 바친다”
김대중 전 대통령 파란만장 삶과 정치역정 다룬 자서전 출간
출생의 비밀·대통령 야권 후보 단일화 실패 등 심경 털어 놔
한겨레
»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나는 오랫동안 정치를 하면서 내 출생과 어머니에 관해서 일체 말하지 않았다. 많은 공격과 시달림을 받았지만 ‘침묵’했다. 평생 작은댁으로 사신 어머니의 명예를 지켜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을 감춘다 해서 어머니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셨고, 나 또한 누구보다 어머니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는 당신이 이 세상에서 맺었던 모든 인연과 화해하셨을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은 자서전 <김대중 자서전>이 29일 출간됐다. ‘출생에서 정치 입문까지’를 엮은 1권과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퇴임 후 서거 직전까지’를 기록한 2권으로 구성된 이 자서전에서 김 전 대통령은 그동안 숨겨왔던 출생의 비밀과 대통령 선거 당시 야권 후보 단일화 실패에 대한 회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심경 등을 담담히 털어놓았다.

 

 

 

 

김 전 대통령은 1973년 납치 사건의 와중에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회고했다. “팔목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양 손목을 묶고 있는 밧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소용없었다. 눈앞이 깜깜했다. 그때, 바로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나는 기도드릴 엄두도 못 내고 죽음 앞에 떨고 있는데 예수님이 바로 옆에 서 계셨다. 아, 예수님! 성당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고, 표정도 그대로였다. 옷도 똑같았다. 나는 예수님의 긴 옷소매를 붙들었다.”

 

자신을 죽음의 문턱으로까지 몰고갔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의원에 대해선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세월이 흘러 그의 맏딸 박근혜가 나를 찾아왔다. 박정희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 만이었다. 그녀는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의 대표였다. 2004년 8월 12일 김대중도서관에서 박 대표를 맞았다. 나는 진심으로 마음을 열어 박 대표의 손을 잡았다. 박 대표는 뜻밖에 아버지 일에 대해서 사과를 했다.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로 피해를 입고 고생하신 데 대해 딸로서 사과 말씀드립니다.’ 나는 그 말이 참으로 고마웠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했다. 박정희가 환생하여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 사과는 독재자의 딸이 했지만 정작 내가 구원을 받는 것 같았다.”

 

민주화 동지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야권 후보 단일화 실패와 관련해선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선거가 끝나자 국민들은 큰 상실감에 빠졌다. 민심은 흡사 폭격을 맞은 듯했다. 거리는 너무나 조용했고, 특히 민주 진영에서는 최악의 상황이 닥치자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진심으로 미안했다. 어찌됐든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많은 민주 인사들의 희생과 6·10 항쟁으로 어렵게 얻은 선거에서, 그것도 오랜 독재를 물리치고 16년 만에 처음으로 치른 국민의 직접 선거에서 졌다. 국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평생을 지역감정의 덫에 걸려 살았던 그는 “호남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술회했다. “나는 내가 호남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한 번도 고향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품어 본 적이 없다. 차별받는 호남 사람들을 위해 할 일을 제대로 못해 늘 가슴이 아팠다. 그렇기에 호남인들과 고통을 나누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실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때로는 지역감정을 선동한다는 오해를 받을까 봐 나는 고향인 전라도를 찾는 데 많이 망설였고 가지 않았다. 가고 싶었지만, 진정 만나고 싶었지만 고향 땅을 일부러 밟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해선 실망과 우려를 나타냈다. “이명박 당선인의 국정 운영이 걱정됐다. 과거 건설 회사에 재직할 때의 안하무인식 태도를 드러냈다. 정부 조직 개편안을 봐도 토건업식 밀어붙이기 기운이 농후했다. 통일부, 과기부, 정통부, 여성부 등이 폐지 및 축소되는 부처로 거론됐다. 내가 보기로는 현재와 미래에 우리를 먹여 살릴 부처였다. 그 단견이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특히 북한에 대해서는 ‘선 핵 폐기 후 협력’이란 부시 대통령조차 폐기한 정책을 들고 나왔다. 대통령 후보로 나를 찾아왔을 때는 햇볕 정책에 공감한다고 여러 번 말했다. 그의 말대로 실용적인 사람으로 알고 대세에 역행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는데 내가 잘못 본 것 같았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가장 보편적인 길을 찾는 것이 실용일진대, 그는 실용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는 것 같았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해선 “결국 노 대통령의 자살은 이명박 정권에 의해 강요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노 대통령은 고향 앞산에서 몸을 날려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하루하루가 너무 가혹했을 것이다. 검찰은 해도 해도 너무했다. 노 대통령의 부인, 아들, 딸, 형, 조카사위 등을 마치 소탕 작전을 하듯 조사했다. 매일 법을 어기면서까지 수사 기밀을 발표하며 언론 플레이를 했다. 그리고 노 대통령의 신병 처리에 대해서도 여러 설을 퍼뜨렸다. 결국 노 대통령의 자살은 이명박 정권에 의해서 강요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노 대통령 장례위원회 측에서 내게 조사를 부탁했다. 나는 이를 수락했다. 그런데 정부에서 반대한다고 다시 알려 왔다. 내가 준비한 조사는 결국 읽지 못했다. 이제 비로소 그의 영전에 조사를 바친다.”
 

김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역사적 인물과 동시대 인물에 대한 자신이 평가를 담았다. 녹두장군 전봉준에 대해선 전봉준 장군과 동학 농민군이 부르짖은 반봉건주의는 당시 최고의 사상이었다고 평가했다. 국제구호 활동가인 한비야씨에 대해선 여러 인종의 세 아이를 입양하였다니 고개가 숙여졌다고 썼다. 개그우먼 김미화씨에 대해선 평소 개그우먼으로 김미화씨를 높이 평가했는데 시사 자키의 자질도 상당해서 놀라웠다고 적었다.

 

그는 2009년 7월 병원에 입원하기 직전까지 정리된 자서전 원고를 읽으며 직접 고치고 부족한 부분은 추가로 구술해 반영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희호 여사가 원고를 최종 검토하고서 편지 형식으로 여는 글을 적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고르바쵸프 전소련 대통령, 폰 바이체커 전 독일 대통령이 글을 보내와 앞머리에 실었다.

 

e뉴스팀

 

 

“나의 어머니는 평생 작은댁으로 사셨다” 김대중 전 대통령 출생의 비밀 토로
한겨레
“나는 오랫동안 정치를 하면서 내 출생과 어머니에 관해서 일체 말하지 않았다. 많은 공격과 시달림을 받았지만 ‘침묵’했다. 평생 작은댁으로 사신 어머니의 명예를 지켜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을 감춘다 해서 어머니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셨고, 나 또한 누구보다 어머니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는 당신이 이 세상에서 맺었던 모든 인연과 화해하셨을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은 자서전 <김대중 자서전>이 29일 출간됐다. ‘출생에서 정치 입문까지’를 엮은 1권과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퇴임 후 서거 직전까지’를 기록한 2권으로 구성된 이 자서전에서 김 전 대통령은 그동안 숨겨왔던 출생의 비밀과 대통령 선거 당시 야권 후보 단일화 실패에 대한 회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심경 등을 담담히 털어놓았다.

 

김 전 대통령은 1973년 납치 사건의 와중에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회고했다. “팔목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양 손목을 묶고 있는 밧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소용없었다. 눈앞이 깜깜했다. 그때, 바로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나는 기도드릴 엄두도 못 내고 죽음 앞에 떨고 있는데 예수님이 바로 옆에 서 계셨다. 아, 예수님! 성당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고, 표정도 그대로였다. 옷도 똑같았다. 나는 예수님의 긴 옷소매를 붙들었다.”

 

자신을 죽음의 문턱으로까지 몰고갔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의원에 대해선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세월이 흘러 그의 맏딸 박근혜가 나를 찾아왔다. 박정희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 만이었다. 그녀는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의 대표였다. 2004년 8월 12일 김대중도서관에서 박 대표를 맞았다. 나는 진심으로 마음을 열어 박 대표의 손을 잡았다. 박 대표는 뜻밖에 아버지 일에 대해서 사과를 했다.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로 피해를 입고 고생하신 데 대해 딸로서 사과 말씀드립니다.’ 나는 그 말이 참으로 고마웠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했다. 박정희가 환생하여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 사과는 독재자의 딸이 했지만 정작 내가 구원을 받는 것 같았다.”

 

민주화 동지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야권 후보 단일화 실패와 관련해선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선거가 끝나자 국민들은 큰 상실감에 빠졌다. 민심은 흡사 폭격을 맞은 듯했다. 거리는 너무나 조용했고, 특히 민주 진영에서는 최악의 상황이 닥치자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진심으로 미안했다. 어찌됐든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많은 민주 인사들의 희생과 6·10 항쟁으로 어렵게 얻은 선거에서, 그것도 오랜 독재를 물리치고 16년 만에 처음으로 치른 국민의 직접 선거에서 졌다. 국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평생을 지역감정의 덫에 걸려 살았던 그는 “호남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술회했다. “나는 내가 호남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한 번도 고향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품어 본 적이 없다. 차별받는 호남 사람들을 위해 할 일을 제대로 못해 늘 가슴이 아팠다. 그렇기에 호남인들과 고통을 나누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실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때로는 지역감정을 선동한다는 오해를 받을까 봐 나는 고향인 전라도를 찾는 데 많이 망설였고 가지 않았다. 가고 싶었지만, 진정 만나고 싶었지만 고향 땅을 일부러 밟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해선 실망과 우려를 나타냈다. “이명박 당선인의 국정 운영이 걱정됐다. 과거 건설 회사에 재직할 때의 안하무인식 태도를 드러냈다. 정부 조직 개편안을 봐도 토건업식 밀어붙이기 기운이 농후했다. 통일부, 과기부, 정통부, 여성부 등이 폐지 및 축소되는 부처로 거론됐다. 내가 보기로는 현재와 미래에 우리를 먹여 살릴 부처였다. 그 단견이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특히 북한에 대해서는 ‘선 핵 폐기 후 협력’이란 부시 대통령조차 폐기한 정책을 들고 나왔다. 대통령 후보로 나를 찾아왔을 때는 햇볕 정책에 공감한다고 여러 번 말했다. 그의 말대로 실용적인 사람으로 알고 대세에 역행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는데 내가 잘못 본 것 같았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가장 보편적인 길을 찾는 것이 실용일진대, 그는 실용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는 것 같았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해선 “결국 노 대통령의 자살은 이명박 정권에 의해 강요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노 대통령은 고향 앞산에서 몸을 날려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하루하루가 너무 가혹했을 것이다. 검찰은 해도 해도 너무했다. 노 대통령의 부인, 아들, 딸, 형, 조카사위 등을 마치 소탕 작전을 하듯 조사했다. 매일 법을 어기면서까지 수사 기밀을 발표하며 언론 플레이를 했다. 그리고 노 대통령의 신병 처리에 대해서도 여러 설을 퍼뜨렸다. 결국 노 대통령의 자살은 이명박 정권에 의해서 강요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노 대통령 장례위원회 측에서 내게 조사를 부탁했다. 나는 이를 수락했다. 그런데 정부에서 반대한다고 다시 알려 왔다. 내가 준비한 조사는 결국 읽지 못했다. 이제 비로소 그의 영전에 조사를 바친다.”


김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역사적 인물과 동시대 인물에 대한 자신이 평가를 담았다. 녹두장군 전봉준에 대해선 전봉준 장군과 동학 농민군이 부르짖은 반봉건주의는 당시 최고의 사상이었다고 평가했다. 국제구호 활동가인 한비야씨에 대해선 여러 인종의 세 아이를 입양하였다니 고개가 숙여졌다고 썼다. 개그우먼 김미화씨에 대해선 평소 개그우먼으로 김미화씨를 높이 평가했는데 시사 자키의 자질도 상당해서 놀라웠다고 적었다.
 

그는 2009년 7월 병원에 입원하기 직전까지 정리된 자서전 원고를 읽으며 직접 고치고 부족한 부분은 추가로 구술해 반영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희호 여사가 원고를 최종 검토하고서 편지 형식으로 여는 글을 적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고르바쵸프 전소련 대통령, 폰 바이체커 전 독일 대통령이 글을 보내와 앞머리에 실었다.

 

e뉴스팀

 

“개그우먼 김미화씨 시사자키 자질도 상당해 놀라웠다”
김대중 전 대통령 자서전서 김미화·한비야씨 등 주변 인물들 품평
김구 선생에 대해선 “시한부 신탁통치 수용했어야” 아쉬움 토로
한겨레 고나무 기자기자블로그
고난이 필요한 시대 그는 고난의 화신이었다. 시인 고은이 쓴 <만인보>의 ‘김대중’편 첫 구절이다.
 

김 전 대통령 자서전에는 <만인보>만큼 다양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담겨있다. 1924년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1945년 해방 이후 정치 생활을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격렬한 좌우대립 속에 1947년 암살당한 여운형은 “해방 공간에서 민족을 구하려 동분서주했던 빼어난 인물”로 평가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이 가장 흠모한 한 사람은 김구였다. “김구 선생은 진정 애국자였다. 어른을 잃은 국민들은 위인의 자취를 기리며 비탄에 젖었다.”

 

김 전 대통령이 김구 선생을 존경한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자서전에선 김구 선생을 정치인으로 평가한 대목이 눈에 띈다. 김 전 대통령은 “김구 선생은 독립투사였고 절세의 애국자였지만 정치인으로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좌우합작 논의가 있을 때 선생은 그 속으로 뛰어들었어야 했다…신탁통치를 무조건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시한부 신탁통치를 받아들였어야했다.” 김구 선생이 5·10 총선에 참여해 권력을 잡았다면 친일파에 의한 독재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김 전 대통령은 한탄했다. 그가 볼 때 “이승만 대통령의 당선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의 시작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갔던 박 전 대통령과 딱 한번 만났다 . 국회의원 당선 뒤 1968년 새해 인사에서 선 채로 짧게 인사했다. 박 전 대통령은 매우 친절했고 성의있게 답했다. 거기까지였다. 김 전 대통령은 납치 사건을 겪는 등 박정희 정권에서 모진 탄압을 받았다.

 

화해는 뒤늦게 찾아왔다. “세월이 흘러 그의 맏딸 박근혜가 나를 찾아왔다. 박정희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 만이었다.” 2004년 8월 김대중도서관에서 두 사람은 만났다. 박 전 대표는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로 피해를 입고 고생하신 데 대해 딸로서 사과말씀드립니다”라고 사과했다. 김 전 대통령은 “나는 그 말이 참으로 고마웠다…사과는 독재자의 딸이 했지만 정작 내가 구원을 받는 것 같았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의 ‘만인보’는 서거 직전까지 멈추지 않았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선 강한 실망감을 드러냈다. “이명박 당선자의 국정운영걱정됐다. 과거 건설회사에 재직할 때의 안하무인식 태도를 드러냈다.” 자신의 일생일대 업적인 남북화해 정책을 역류한 이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도 표출했다. “대통령 후보로 나를 찾아왔을 때는 햇볕정책에 공감한다고 여러번 말했다. 그의 말대로 실용적인 사람으로 알고 대세에 역행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는데…그는 실용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은 정치인에 멈추지 않는다. 국제구호활동가 한비야씨에 대해서 “여러 인종의 세 아이를 입양하였다니 고개가 숙여졌다”고 칭찬했다. 개그우먼 김미화씨에 대해서는 “평소 개그우먼으로 김미화씨를 높이 평가했는데 시사 자키의 자질도 상당해서 놀라웠다”고 즐거워했다.


김 전 대통령의 ‘만인보’는 “내 몸의 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심정”이라는 말로 마무리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앞에서 그는 “행동하는 양심”이 되라고 역설했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기사등록 : 2010-07-29 오후 07: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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