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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부자들 동국대 북한일상생활연구센터 공동 조사
시놉티콘
2010. 8. 6. 16:13
평양엔 권력형 ‘돈주’, 회령엔 장사로 돈 번 ‘달러돈궤 아바이’
북한의 부자들 동국대 북한일상생활연구센터 공동 조사
특별취재팀 | 제125호 | 20090801 입력
청진의 한 시장에서 매대를 차려놓고 옷가지를 팔고 있다. 시장 울타리 밖 메뚜기상인의 매대로 보인다. 북한 당국이 시장을 외부에 잘 공개하지 않은 상태에서 몰래 촬영해 화질이 안 좋다. |
2004년 평양시 중구역 련화동에 60평형 20층짜리 3개 동 아파트 공사가 시작됐다. 서울 강남의 압구정쯤 되는 중심가에 들어서는 당·내각 간부용 아파트다. 그런데 중앙당이 발주한 이 공사에 아파트당 3만5000달러씩 모두 10채에 35만 달러라는 ‘북한에선 엄청난 개인 돈’이 몰렸다. 분양 공고를 한 것도 아닌데 그랬다. 공사비가 달린 건설사가 ‘돈주 10명’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공사 뒤 건설사는 10명 돈주에게 아파트 10채를 줬다. 물론 돈주가 원하는 마감재도 썼다(고위 탈북자 한수산씨 증언. 이하 탈북자 이름은 모두 가명).개인의 외환 소유가 불법으로 돼 있는 북한에서 3만5000달러씩이나 내고 정부 아파트를 불하받는 ‘돈주’는 어떤 사람일까.평양 중구역 아파트에 사는 김한수씨의 살림은 남한 기준으로도 세련됐다. 남한·중국·일본·미국제 냉장고·세탁기·컬러TV·녹음기·컴퓨터들이 있다. 된장·간장· 조미료는 중국산, 옷은 중국·일본 원단으로 맞춰 입는다. 교육비까지 합해 한 달 생활비 1000달러 정도. 주식인 고기는 도살장에서 직접 가져다 줬고, 비만인 부인은 ‘대체로 마른 보통 평양 사람의 눈’ 때문에 외출이 거북할 정도였다. 북한 평균 월급 2000원, 암시장 환율이 달러당 3000원 정도인 평양에서 김씨는 상상을 넘는 호사를 하고 있다.
함경북도 청진 수남시장 내부. | |
수십만 달러 쌓아놓기도비결은 그가 김정일 비자금을 관리하는 노동당 39호실 산하 5호 관리소의 사금 담당 간부라는 데 있었다. 2007년 이혼하자마자 탈북한 김씨의 전 부인 박연혜씨는 “남편이 금을 빼돌려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상인들에게 넘겼다”며 “규모를 밝히기는 곤란하다”고 했다. 북한 주민이 1년에 ‘충성의 자금’으로 바치는 140g의 금을 슬쩍 한 것이다. 한씨는 “평양의 신흥 부자로 등장하는 돈주들은 이렇게 주로 외화를 빼돌린 사람들”이라며 “언제라도 이렇게 할 수 있는 권력층이 평양 250만 주민의 3~5% 정도”라고 했다. 지방에도 돈주가 있다.중국의 싼허(三河)를 마주보는 함경북도 회령시는 김 위원장의 어머니 김정숙의 고향이자 혁명 도시다. 시내 강안동에 사는 ‘종희 아바이’는 중국과 수산물 장사를 오래한 뒤 돈주가 된 사람이다. 그 집 가까이 살다 2007년 탈북한 김옥연씨는 “현찰로 수십만 달러를 쌓아놨다는 소문이 있다”며 “북에서 살 때 아버지는 늘 ‘종희아바이는 철궤에 달러를 쌓아놨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높은 대문을 세우고 담도 높게 둘러쳤다. 부러운 것 없이 살며 아들 종수·종희가 ‘보위부를 갖고 놀아’ 간섭도 없다.청진 출신 안신옥씨는 ‘두부집 박탄실네’의 이웃에 살았는데 “90년대 중반부터 두부집은 현물로 치면 남한돈 20억~30억원 되는 북한돈 2만~3만원을 갖고 있어 큰돈도 턱턱 빌려주며 돈놀이도 했다”고 했다. 안씨는 “회령의 역전동·성천동에는 중국과 장사해서 돈 번 사람이 많은데 종희 아바이 같은 사람도 몇몇 더 있다”고 했다.북한에서 ‘돈주’라고 불리는 북한판 백만장자가 늘어나면서 경제 지도가 바뀌고 있다. 중앙SUNDAY와 동국대 북한학과 북한일상생활연구센터(센터장 박순성 교수)의 공동 조사에 따른 결과다. 센터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2008~2009년에 걸쳐 25명 탈북자를 심층 면담했으며, 중앙SUNDAY는 이를 토대로 10여 명을 추가로 심층 인터뷰했다.그 가운데 장사를 하다 탈북한 사람들은 “지역마다 돈주들이 있다. 평양이 가장 많고 재산도 세다”고 꼽았다. 돈주가 있는 지역으로 나진·신의주·평성·원산·해주·사리원·회령·함흥 등 대도시와 온성군·무산군 등 전국을 망라했다. ‘누가 돈주인가’에 대해 장사했던 사람들은 같은 ‘장사꾼’을, 다른 이들은 ‘외화벌이꾼과 당 비자금 관리자’들을 꼽았다.처형 걱정에 재산규모는 비밀‘돈주의 재산 규모’에 대해 탈북자들은 ‘90년대에는 수만 달러 정도, 최근엔 훨씬 더 많은 액수’라고 기준을 제시했다. 한씨는 “평양은 권력형 돈주, 지방은 시장을 통해 큰 자생형 돈주가 많은데 들키면 시범 케이스로 처형될 수 있기 때문에 재산 규모는 절대 비밀”이라고 했다.홍민 박사는 “황해도의 도시에선 5000~1만 달러 정도를 꼽기도 하지만 지역에 따라 80년대 이미 1만 달러, 90년대는 3만~5만 달러를 가져야 돈주로 봤다는 말도 있다”고 했다. 1만 달러는 최근 암시장 환율로 3000만원, 평균 월급 2500원인 근로자의 1만200개월치 월급, 1000년치 연봉이다. 사회주의 체제라 전기료나 교육비·의료비 등이 무료라 북에선 엄청난 돈이다.홍 박사는 “9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상인 가운데 부를 축적한 ‘돈주’는 2002년 7월 1일 경제관리개선조치, 2003년 5월 ‘종합시장 운영에 관한 조치’가 나온 뒤 상업자본가로 진화하고 있으며 북한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중요한 온도계가 되고 있다”고 했다. 또 “돈주가 북한 전체 대외 교역의 70%를 장악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들은 북한 상업 유통의 모든 단계에서 개입해 돈을 굴리거나 뒷돈을 댄다”고 했다.탈북자들은 돈주의 기원을 ‘권력형과 생계형’으로 나눴다. 평양에서 살다 2000년대 중반 탈북한 고위층 출신 한시연(남·30대 중반)씨는 “평양의 돈주는 해외 거주자, 해외 교포, 중앙당·외화벌이기관 같은 권력기관 간부 등 세 그룹으로 나뉜다”고 했다.한씨는 “친구의 친척이 이란의 테헤란에서 북한 회사에 근무한 해외 거주자인데 10년간 무기를 취급하다 개인 계좌로 100만 달러를 빼돌렸다 요덕 수용소에 들어갔다”고 했다. 또 “조선쏘프트웨어산업총국 한우철 총국장 같은 교포 출신은 몇 백만 달러를 갖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한우철은 사망한 전 조총련 의장 한덕수의 장남이다. 또 “평양시 보통강 구역에는 60평짜리 아파트 두 개를 터 사는 북송 교포가 있는데 가정부도 있고 애들도 사교육을 시킨다”고 했다.온성에서는 ‘5부자’ 소문지방 돈주는 장사꾼 출신이 주류다. 권력자들과 관계를 하지만 권력 자체는 아니다. 중국산 옷장사를 하다 2006년 탈북한 함북 온성군 출신 임한오씨는 ‘온성 5부자’를 꼽았다. 30대 김창룡은 주석궁 경리부를 배경으로 온성에 무역회사를 차렸는데 소문에 따르면 ‘일제 레일·마약·귀금속’ 같은 것을 팔았다. 임씨는 “집에 가봤는데 33평 아파트에 일반인은 엄두도 못 내는 개인 전화를 놓고, 남한제 TV, 일제 옷장·녹음기·소파·침대가 들어찼다”며 “대개는 전기 사정이 안 좋은데 어디서 따로 공급받는지 에어컨도 켜고 살았다”고 했다. 명절 때는 구하기 어려운 털게를 먹고, 수입산 바나나와 과일을 즐기며, 외국산 개도 애완용으로 키웠다. 그외에 국가보위부를 끼고 무역하는 진길(40대), 온성군 국가보위부장의 운전수 문화(30대), 인민무력부 답사단에 적을 걸어둔 영삼(30대), 여관 지배인 채현기(50대)를 거론했다. 문화의 부인은 고리대금업을 했고, 영삼의 딸은 북한에서 좀처럼 배우기 힘든 피겨 스케이팅을 배웠다.청진 출신 선동화씨는 95년부터 포항시장 땅바닥에서 삶은 계란 장사를 했다. 2000년엔 매대를 사서 중국산 잡화를 떼다 팔았고 2004년 말엔 ‘실컷 먹고 쓰고도’ 한국돈 1000만원 정도의 자본이 생겼다. 그 가운데 100만원은 2부 이자 놀이를 하면서 ‘새끼 돈주’가 됐다. 그런데 그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돈이 많은 아줌마 돈주가 청진에 있었다”고 했다. 역시 청진 출신으로 90년대 말 입국한 정인호씨는 “북에서 달러를 마룻바닥 밑에 20㎝씩 쌓아놓고 산다는 돈주 얘기도 들었다”고 했다. 선씨는 “고난의 행군 때 못 먹고 못살다 장삿길에 나선 사람들이 이제는 토대를 잡아 진짜 돈주가 됐다”고 했다.돈주의 성장과 북한 체제의 변화 전망에 대해 박순성 교수는 “돈주가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에 위협적 요소이긴 하지만 기존 체제에 순응하며 부를 축적한 것이기 때문에 체제를 유지하고 변형된 상태로 유지하려는 속성도 크다”고 말했다. 돈주는 탈북하지 않는다는 점을 눈여겨 봐야 한다는 것이다.
평남 평성시장엔 매대만 5000개, 하루 유동 인구 10만 명
‘돈주’들 키운 원천, 북한 8대 도매시장
특별취재팀 | 제125호 | 20090801 입력
“명절 전날 시장이니까 정신이 없죠. 도매 떼기로 옷을 사러 온성에서 기차를 타고 청진 수남시장에 갔는데 사람들이 바글바글해요. 온성도 명절을 앞두고 시장 매상이 오를 테니 미리 준비해야죠.”2005년 12월 30일 오전 11시쯤. 함북 최대 도매시장인 수남시장은 북새통이다. 온성시장에서 수입옷을 파는 한길녀(여·2006년 탈북, 이하 탈북자들 모두 가명)씨는 역에서 한 시간쯤 걸어 시장에 도착했다. 한 달에 두 번쯤 옷을 떼러 오는데, 이번엔 명절 대목이라 더 사야 한다.수남시장은 ‘고양이 뿔도 구하는 곳’으로 통한다. 함북에서 소비하는 중국제는 거의 여기서 나간다. 옷·가전제품·생필품은 다 있고, 손님과 상인을 겨냥한 잡상인도 들끓는다.
시장 입구 천막 식당에서 국밥 할머니가 “국밥 드시오”라고 부른다. 장세를 내지 않는 불법식당이지만 아랑곳 않는다. 메뚜기라 불리는 그런 상인이 수없이 많다. 호호 불어가며 뜨거운 개고기 국밥을 먹고, 관리인이 지키는 입구를 지나 장마당 건물로 들어섰다. 건물은 3층 높이 단층인데 지붕은 나무로 덮었고, 벽은 콘크리트다. 한씨는 “축구장보다 훨씬 크다”고 했다. 그 속에 3500여 개 매대가 있다. 겨울, 난방도 없이 영하 15도 추위에서 대개 30~40대인 매대의 여성 주인들이 볼을 얼려가며 장사한다.한씨는 돌아다니며 수십 벌을 사 대형 짐가방을 채웠다. 낑낑거리며 장마당을 나서자 ‘구르마꾼’이 달라붙는다. 역까지 가방당 1만원(이하 1달러당 암시장 환율 3000원)에 흥정을 마쳤다.한씨는 1995년부터 함북 온성에서 옷장사를 했다. 수남시장에서 주로 중국산 옷을 떼와 판다. 그는 “신의주처럼 주로 중국 접경 지역에서 트럭에 물건이 실려와 청진·나진 등 대도시에 도매로 넘겨진다”고 했다. 국경을 넘은 중국 물건이 도매시장을 거쳐 지역 소매시장으로 퍼지는 것이다. 성균관대 박영자 교수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한씨와 같은 상인을 포함해 90%의 북한 주민이 시장과 직·간접적인 생업 관계를 갖고 있다.평성시장 없애려다 손들어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시장이 8대 도매시장과 300여 개 소매시장으로 분화하면서 전국 상권이 형성되는 등 규모가 커지고 있다. 북한 당국이 시장 확산을 막기 위해 규제를 가하지만 역부족이다. 중앙SUNDAY와 동국대 북한학과 일상생활연구센터(센터장 박순성 교수)의 공동조사에 따른 연구 결과다.센터의 홍민 박사는 “북한에는 8대 도매 시장을 중심으로 전국에 300~350개의 시장이 있다”며 “148개 군(郡)마다 1~2개, 27개 시(市)마다 2~5개 시장이 공식 운영된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은 시장과 체제가 공존하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며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펴기 시작한 78~84년 양상과 비슷하지만, 개혁·개방을 공식으로 정책화하지 않은 점에서 다르다”고 덧붙였다. 8대 시장은 평양 통일거리 시장, 평안남도 평성시장, 평안북도 신의주 시장, 함경남도 함흥 사포시장, 함경북도 나진선봉시장, 청진 수남시장, 온성 온성시장, 회령 남문시장 등이다. 주로 중국과 국경을 접하는 지역에 발달해 있다. 8대 시장 중 6개 시장이 국경지역이나 중국 상인들이 들어오기 쉬운 항구를 끼고 있다.8대 시장은 대형 도매시장이다. 최대 도매시장인 평성시장은 매대가 5000개나 된다. 유동인구는 하루 10만여 명. 평양 북쪽으로 10㎞, 순안·은정 구역과 맞닿은 길목에 있다. 평양과 가까워 통일거리시장 등 평양 상인들이 평성 시장에서 물건을 떼온다. 평성은 공급 기지여서 이 시장 물가가 평양 통일거리 시장 물가를 결정할 정도다. 수남·사포와 같은 다른 시장도 도매 기능을 한다.도매시장으론 중국 물건이 밀려든다. 신의주 시장 물건은 주로 단둥을 통해 들어오고, 청진 수남 시장으론 옌지 같은 중국 동북 지역 물건이 들어오는 식이다. 다만 신의주 시장에선 신발은 북한산을 최고로 친다. 도매시장 모습은 남한과 큰 차이가 없다. 수남시장은 동대문 시장을 떠올리면 된다. 2004년 12월 수남시장을 들른 홍 박사는 “입구에서 건너편 끝이 안 보일 만큼 넓은 시장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고 말했다. 영업 시간은 오전 9시~오후 5시. 주로 중국제를 취급하고, 중고 옷 거래도 활발하다. 일본·한국산을 파는 것은 불법이지만 그래도 판다. 수남시장에 자주 들렀다는 고미영(여)씨는 “1m×1.5m 크기의 콘크리트 매대에 물건을 늘어놓고 파는데 장세를 내고 허가받은 사람은 그렇게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시장 바깥 바닥에 좌판을 깔고 채소·생선·반찬·음식 등 먹을 것을 주로 판다”고 했다. 소매시장은 특화되기도 한다. 청진의 포항시장은 ‘고급 물품’ 시장이다. 포항시장에서 장사를 했던 김효수(여)씨는 “포항시장은 매대가 1500개 정도 되는 중간 규모지만 도매 시장에 없는 일제 중고품을 살 수 있다”며 “당기관·국가보위부 관리들도 평양 출장 전에 들러 선물을 산다”고 했다. 그는 “수남시장이 잡화를 취급하는 동대문시장이라면, 포항시장은 고급 일본 물건을 파는 백화점인 셈”이라고 했다.도매소매시장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제 몫을 한다. 차들이꾼·행방꾼·달리기꾼·되거리꾼·데꼬·메뚜기 같은 이들이다.
차들이꾼은 물건을 ‘차떼기’로 들여온다. 중국 상인에게 받기도 하고 북한에서 사기도 한다. 평양 출신 탈북자 김수영(여)씨는 “내 친구는 함북 신포 어시장에서 ‘배떼기’로 생선을 사서 전세 낸 냉동차로 넘기는 행방꾼이었다”며 “냉동차는 원산을 거쳐 평양까지 ‘날 듯이’ 달려 싱싱한 생선을 평성 도매시장에 풀었다”고 말했다. 친구는 한꺼번에 5000~1만 달러를 동원하는 돈주였다.
행방꾼은 차들이꾼에게 받은 물건을 도매상에게 연결한다. 북한 내 유통 구조에서 꼭대기에 있는 차들이꾼과 행방꾼의 물건은 달리기꾼과 되거리꾼에게 넘어간다. 달리기꾼은 큰 도매시장에서 중간 규모 도매시장으로 물건을 넘겨주는 작은 행방꾼, 민첩한 행방꾼이다. 되거리꾼은 물건을 소매상으로 넘기는 보따리 장사다. 데꼬는 주로 도시 시장 주변 길목에서 농촌에서 올라오는 소규모 보따리상의 물건을 사서 시장 매대에서 판다. 포항시장 소매상 출신 김효수(여)씨는 “시장에 강냉이를 팔러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데꼬는 길목에 까맣게 앉아 있다. 강냉이를 사서 시장으로 넘기고 수수료를 챙기는 식”이라고 했다. ‘메뚜기’는 장세를 못내 울타리 밖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다. 홍 박사는 “2004년 12월 청진 수남시장에 들렀을 때 단속이 불가능할 정도로 수많은 메뚜기 상인이 시장 주변에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통 구조를 꼬박 거치게 되면 가격이 높아져 경쟁력이 낮아지기 때문에 중간 단계를 생략하고 산지와 소비재가 직접 연결되는 구조도 발생한다. 한길여씨도 “행방꾼을 거치지 않고 직접 농촌에서 쌀을 사와 도시에 팔았다”며 “쌀을 미리 사뒀다가 7, 8월 보릿고개 때 한꺼번에 파는 식으로 남한 돈으로 1000만원까지 벌어봤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1000만원은 평생 먹고사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한 돈이다.
북한 당국은 시장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사회주의 근간을 흔드는 세력’으로 보고 통제의 끈을 조인다. 상인은 북한에서 ‘동요 계층’이기 때문에 두 겹 세 겹으로 통제한다. 장세를 걷고, 인허가 수수료를 받고, 금지 품목을 내걸고, 가격을 통제하며 끊임없이 단속을 한다. 시장에는 인민위원회 상업과 소속의 시장관리소가 있고 소장이 임명된다. 시장장·관리원·경비원도 있다. 관리소는 장세를 걷고 매대를 관리한다. 홍영희(여)씨는 “매대마다 장세가 다른데 좋은 데서 하려면 더 내야 한다”고 했다.
명절 때마다 뇌물은 필수
물품과 가격도 통제 대상이다. 고미영씨는 “‘가격표를 붙여라’ ‘칠부바지를 팔지 마라’는 둥 규제가 많고 어기면 ‘자본주의 물을 먹었다’는 비난을 받는다”고 했다. 상인마다 사로청 같이 소속 조직이 있는데 조직의 집회에 꼬박 나가서 자아비판도 한다.
그러나 규제는 잘 안 먹힌다. 북한은 올 1월 종합시장을 폐쇄하고 농민시장으로 쪼개려다 주민 반발로 결정을 미뤘다. 4월 중순에는 평성시장을 폐쇄하려고 했으나 무산됐다. 상표나 가격 규제도 효력이 없다. 한씨는 “북에서도 남한제·미국제가 인기”라며 “상표를 봐야 믿기 때문에 감춰놨다 살짝 보여준다”고 말했다.
규제는 부패를 부른다. 지역 시장을 관리·감독하는 구역당, 인민위원회, 군대 같은 기관들이 기생하며 뇌물·편의를 받거나 통행세를 갈취한다. 청진과 온성을 오가며 장사했던 한씨는 “청진시로 들어가는 통행증을 끊을 때부터 기차 안, 검문소에서 걸릴 때마다 북한돈 1만원씩 줬다”고 했다.
시장관리소는 뇌물 집합소다. 포항시장 출신 홍영희씨는 “식품 매대 상인 120명 중 10명 정도는 명절 때 꼬박꼬박 소장에게 뇌물을 바쳤다. 한 사람당 북한 돈으로 2만원 정도의 고급 술·담배·달력을 꾸러미로 만들었다”고 했다. 명절이나 대형 공사 선전이 있으면 무조건 선물이다. 또 “구역당 책임비서의 딸이 보름 동안 평양으로 시험 치러 갈 때 먹을거리, 옷가지, 선물로 줄 일본 상품 같은 걸 모두 챙겨줬다. 지역 비서는 왕이었다”고 했다.
시장의 양적·질적 성장이 체제 변화의 동인이 될 수 있다는 전망에 대해 홍 박사는 “시장이 크기는 했지만 체제에 도전하지 않고 공존하고 있다”며 “체제는 시장에, 시장은 체제에 의존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체제 변화는 누구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