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산업화를 겪은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는 초호화 생활을 영위하는 부유층 지역과 절망의 수렁을 헤매는 빈곤층 지역이 교차한다. 이곳에선 ‘위험한 계급’이 사회에서 소외받고, 부자가 자선과 자비를 통해 질서유지를 영속할 수 있다고 믿던 19세기를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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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래스고>, 1995-마틴 파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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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클럽이 엘리트나 부자, 고귀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맞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1) 글래스고의 번화가, 웨딩드레스 숍과 고위층을 대상으로 하는 고급 펍(영국식 술집-역자) 사이에 있는 ‘글래스고 아트클럽’은 흔히 글래스고의 가치를 가장 잘 간직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영국 빅토리아풍의 호화로운 건물 입구에 들어선 순간 정장을 갖춰 입은 지배인이 문을 열어주고 로비까지 안내해준다. 이 엘리트 클럽에서 매주 개최되는 자선행사에는 유명 인사들이 참석한다.
1912년 설립되어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글래스고 로터리클럽은 자선 및 사회 환원 같은 사회 활동과 관련 토론회를 정기적으로 주최한다.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1867년, 면화나 설탕 상인에게서 후원받아 예술 활동을 영위하던 아마추어 예술가들이 창단한 클럽도 있다. 이들은 특정한 장소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며, 필요한 경우 고결하고 훌륭한 목적을 위해 기꺼이 수표책을 꺼내 든다.
상석에 앉아 있던 로터리클럽 마이클 기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색하게 검은 멜빵을 추켜올리고 나서 식탁 위의 은종을 울렸다. 2010년 6월 22일 화요일 오후 1시, 성대한 오찬이 시작되었다. 은행가와 보험업자, 변호사, 기업가 등을 포함한 40여 명의 내빈이 일제히 일어나 여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67살 회장의 배꼽까지 처져 있는 목걸이에는 선임 회장의 이름을 하나씩 새긴 98개 금속판이 달려 있다. 기 회장은 “이 훌륭한 목걸이의 가치는 3만8천 파운드(약 4만6천 유로)에 달한다. 오늘날에도 이 가치는 무시할 수 없다”고 유쾌하게 말하며 막 서빙된 로스트비프를 잘랐다.
유명 인사들 호화 자선행사
결국 목걸이를 멜빵 안쪽에 고정시켜 무게 부담을 줄인 기 회장은 불편한 자세로 글래스고, 특히 동부 지역의 심각한 빈곤 상태에 대해 개괄적으로 진단했다. “우리도 알고 있다. 글래스고 일부 지역의 평균수명이 이라크보다 낮다. 생활수준이 열악하다는 것도 안다. 이미 오래전부터 글래스고에서는 빈곤층과 부유층이 더불어 살아왔다. 무엇보다 아일랜드에서 이주해온 이민자가 여러 통계 수치를 하락시키는 주범이다. 하지만 그렇게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빈곤 지역이 존재하지만 활기찬 글래스고에는 환상적인 박물관과 콘서트, 훌륭한 시민이 있다.”
2008년 8월, 세계보건기구(WHO)는 글래스고의 부유한 지역(남부와 서부) 주민과 빈곤한 지역(동부) 주민 간 평균 기대수명 격차가 28살에 달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2) ‘한 세대 내에 격차 줄이기’란 제목의 보고서를 보면, 글래스고 남성의 평균수명은 54살, 그나마 열악한 생활 조건에 영향을 덜 받는 여성의 평균수명은 75살로 유럽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이와 함께 보고서는 식수, 식생활, 주거, 의료, 전기 같은 기본 생활 조건의 향상뿐 아니라 교육과 문화의 접근성 확대, 조화로운 도시계획, 노동조건 개선 같은 권고안을 제시했다.(3) WHO의 발표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켜야 했지만, 실제 반향은 미미했다.
기 회장이 ‘로터리클럽에서 가장 부유한 회원 중 한 명이라고 말한 피터 스티븐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벽 곳곳에 걸려 있는 값비싼 나무 조각을 응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곳 부유층과 빈곤층의 평균수명이 차이 나는 이유를 아는가? 그건 빈곤층이 제대로 식사를 하지 않고, 부모의 나쁜 습관을 답습하기 때문이다. 바로 교육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 로터리클럽은 빈곤한 지역에서 교내 말하기 대회 같은 사회 활동을 벌이고 있다. 우리는 이런 활동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빈곤층 대다수는 별다른 수입 없이 사회 수당만으로 생활한다.”
평균수명 28년 짧은 빈곤층 지역
이 만찬 의식을 갖기 몇 시간 전, 데이비드 캐머론 영국 총리는 ‘2015년까지 공공 지출을 1100억 유로 감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강도 높은 긴축정책이다.(4) 빈민가 학교 지원을 동결(41억 유로)하는 대신, 마이클 고브 교육부 장관은 자선단체 ‘티치 퍼스트’에 470만 유로를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이 단체는 빈곤 지역 학생이 ‘우수 교사’에게 교육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있다.(5) 오른손으로는 지원을 대폭 삭감하고, 왼손으로는 자비를 베푸는 셈이다. 글래스고의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을까?
다국적 통신 기업을 은퇴했다는 조지 러셀은 달콤한 초콜릿으로 기력을 되찾고는 “공공서비스를 단축하려는 연립정부의 공격에 맞선 폭발적인 자선 활동”을 운운했다. “데이비드 캐머론 총리는 예산 삭감에 대한 보완책으로 자선 활동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균등한 사회를 만들려면 우리는 모두 각자 맡은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우리처럼 돈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베풀어야 함은 자명하다”며 자신도 젊은 시절에는 ‘사회주의자’였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기 회장은 겉보기에 그럴듯한 현실로 화제를 돌리려 했다. “알다시피, 글래스고는 수많은 사업을 끌어들이고 있다. 콜센터, 보험, 금융 등 분야는 다양하지만 무엇보다 호텔업의 성장이 눈부시다. 최근에는 클라이드 강변을 따라 오성급 호텔이 새로 들어섰다. 아주 환상적인 호텔이다.”
1980~90년대 글래스고 하늘을 시커멓게 뒤덮던 제철소의 미세먼지는 대규모 지원금 덕분에 간신히 제거되었다. 이후 조선소와 탄광, 제강소가 문을 닫으면서, 스코틀랜드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던 도시는 리모델링과 개량을 통해 예술과 문화의 도시, 우아한 도시로 탈바꿈했다. 이제 ‘세련된 도시, 글래스고’를 선전하는 포스터가 상업지구를 비롯한 도시 곳곳에서 눈에 띈다. 글래스고대학 사회학 교수인 브리짓 파울러는 “빈곤층은 외곽 지역으로 쫓겨나고, 저소득층을 위한 공공 임대주택은 사기업에 넘어갔다. 이 모든 것이 임대주택을 끔찍이 혐오했던 마거릿 대처 전 총리 덕분이다. 이와 함께 글래스고에서는 이른바 ‘카푸치노화’라 부르는 주택 고급화가 시작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직접지원금 끊고 1000분의 1 자선
1990년 ‘유럽 문화 중심지’라는 명성을 얻은 지 20년이 지난 오늘날, 건축가 찰스 레니 매킨토시의 고향인 글래스고는 유럽 현대예술의 세 중심지 중 한 곳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라고 있다. 글래스고는 온갖 대회에서 상을 휩쓸고(1999년 영국의 ‘건축과 디자인 도시’로 선정) 메이저급 스포츠 대회(6)를 개최하며, 7개 골프장과 5개 오성급 호텔(총 1358개 최고급 객실을 갖추고 있다)로 부유한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이에 대해 유럽 언론은 찬사를 쏟아내느라 평균연령의 격차 문제 따위는 자연스레 잊어버렸다.(7)
글래스고는 실업률, 마약 과다복용으로 인한 사망률, 폐암 발병률, 흉기에 의한 살인율이 높은 도시이자, 대부호가 집중된 도시다. 2007년 ‘영국 백만장자 리스트’(8)에서, 1만1288명의 백만장자가 사는 글래스고는 백만장자가 많은 도시로 전국에서 7위를 차지했다. 부르주아 도시 에든버러는 9738명의 백만장자‘만’ 거주해 12위에 그쳤다.
가난한 도시에서 어떻게 부자들이 살 수 있을까? 53살의 수백만장자 윌리엄 호이가 말했다. “나는 인도 출신이다. 글래스고 동부 주민은 인도인에 비해 잘사는 편이다. 글래스고 빈곤층도 말라위 주민보다 부자다.” 그가 운영 중인 ‘시티 리프리저레이션 홀딩’은 설비 운영 관리 위탁회사로, 전세계적으로 직원 1만2천 명을 고용하고 있다. 그는 이곳 주민에 대한 WHO의 발표 내용에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글래스고에는 기근도 위생 문제도 없다. 건강 수치가 나쁜 것은 도시 빈곤 때문이 아니며, 더욱이 사회적 이유 때문도 아니다. 내 생각에 그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이곳 빈곤층은 인도인보다 잘산다”
회사 5층에 위치한 호이의 사무실에는 ‘올해의 기업인’, ‘글래스고의 상’, ‘올해의 사업가’ 등의 문구가 새겨진 트로피가 전시되어 있다. 카타르에서 잠시 머문 뒤 라스베이거스에서 2주일간 휴가를 보내며 포커게임을 즐길 것이라는 호이는 자신의 사회계급에 대해 언급했다. 단순 기능공 집안에서 태어나 고발스라는 서민 동네에서 성장한 호이는 글래스고 부유층의 폐쇄적인 클럽에 가입한 뒤 부자와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 “부자들은 누구든지 무언가로부터 강요받는 것을 싫어한다. 따라서 그들에게 세금을 많이 부과하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나처럼 돈 많고 성공한 사람, 기업가를 설득해야 한다. 그들이 선행, 자선 활동에 더 많이 참여하도록 납득시켜야 한다.” 적어도 1억8천만 유로(9)의 재산을 보유한 호이는, 그 많은 재산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는 글래스고에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큰 주택을 지을 계획이지만 아직 건축허가를 받지 못했다. 또한 자신의 다국적기업을 이전하고 재산 일부(약 6%)를 자선단체에 기부할 계획이었다.
“우리는 자선 활동을 대외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나는 ‘시티 셔리터블 트러스트’라는 자체적 자선재단을 통해 1천만 파운드(약 1200만 유로)를 기부했다.” 장애 아동 지원, 아프리카 우물 설치 및 병원 설립, 극빈곤 지역 학교 재정 지원 등 호이는 글래스고나 말라위의 ‘공동체에 재산을 환원하는 것’을 명예로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플로리다에 위치한 자신의 고급 빌라에 매달 ‘이달의 직원과 가족들’을 초대한다고 덧붙였다. 최근에는 지지율이 부진한 노동당을 구원해준 것으로 유명세를 탔다. 호이는 최근 선거에서 연달아 고배를 마신 노동당에 130만 유로 이상을 후원하며 스코틀랜드에서 노동당 최대의 후원자가 되었다. 이에 따라 고든 브라운 전 총리는 2009년 호이의 새로운 지사 오픈식에 참석했다. “최근 10년 사이에 윌리엄 호이를 비롯해 글래스고 자산이 크게 증가한 것의 일부는 공공 재정을 이용해 뒷받침해준 고든 브라운의 후한 인심 덕택이었다”고 영국 일간지 <타임스>는 지적했다(2010년 3월 14일).
클라이드강 건너, 세계에서 7번째로 집값이 비싼 뷰캐넌 거리를 캐빈과 마이클, 윌리엄이 활보하고 있다. 그들의 가방 안에는 이력서가 들어 있고 손에는 햄버거가 들려 있다. 이들은 캐슬밀크와 이스터하우스라는 글래스고의 유명한 빈민가 출신으로, 언론에서는 이들을 ‘갱스터’라고 부른다. 이들은 이 호칭에 거부감이 없었다. “우리 갱단의 이름은 ‘영 바이어 플리토’다. 우리는 줄여서 YHF나 YBF, HF 라고 부른다”고 18살 소년이 말했다. 그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솔직하게 자신의 무용담과 분노의 발작 증세를 이야기했다. 다양한 소식통에 따르면, 글래스고 빈민가에는 150개에서 200개의 갱단이 활동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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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려짐>, 2008-션 그라운드워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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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 소년 “진짜 악질 갱은 누군가”
윌리엄은 “나는 실업수당으로 자랐다. 아버지는 얼굴을 본 적이 없고 어머니는 직장이 없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일자리를 알아보는 것을 포기한 채, 18살 나이에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캐빈과 함께 일상적인 오후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들이 콜라를 섞은 위스키 두 잔과 맥주 네 잔을 마시고 나자 종업원이 더 이상 주문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식료품점에서 사온 사과주에 신경안정제 몇 알을 삼켰다. 온몸의 흉터에 대해 묻자, 윌리엄은 “다른 갱단과 다투면서 생겼다. 여기서는 누구나 칼을 갖고 다니고 서로 전쟁을 벌인다”고 설명해주었다.
클라이드강 앞에 있는 크리스털 팰리스 술집에서 만난 마이클은 “갱 문화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가 다가와 아들의 등을 토닥거리며 “나도 어릴 적에는 갱에 가입했었다. 교도소에도 갔다 왔다”고 말한 뒤 맥주 한 잔을 들이키고는 경찰서를 손으로 가리키며 자리를 떴다. 마이클은 패싸움에 연루된 혐의로 현재 보호관찰 중에 있다. “우리가 나쁘다고 생각하나?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말투, 옷차림, 행동을 보고 바로 낙인을 찍어버린다.” 글래스고 축구클럽인 셀틱의 전 구단주로 유명한 호이의 이름이 나오자 마이클은 흥분했다. “봐라, 그가 진짜 갱스터다!”
로열 익스체인지 광장에 있는 로가노 레스토랑은 글래스고의 최고급 레스토랑 중 하나다. 이곳에서 톰 헌터는 자신의 성공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많은 돈을 벌었다. 나와 가족이 충분히 쓰고도 남을 만큼 벌었다.” “5천 파운드짜리 수표 2장을 밑천 삼아 승합차 뒷좌석에서 운동화를 팔기 시작해”(10) 스포츠 용품의 선두 주자까지 오른 헌터는 1998년 자신의 브랜드를 경쟁사인 JJB스포츠에 매각했다. 그는 자신을 ‘모험을 즐기는 자본가’로 묘사하며, “국가는 가능한 한 최소 규모로 존재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고 말했다. 매각을 통해 약 3억4500만 유로의 차익을 남긴 헌터는 10년 후인 2008년에 총자산이 12억6천 유로로 급증해 스코틀랜드 최고의 억만장자가 되었다.
‘교양을 쌓기로’ 결심한 헌터는 뉴욕 카네기재단 이사장인 바탄 그레고리언을 만났다. “그레고리언 이사장을 통해 ‘부자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는 카네기의 명언을 접하게 되었다. 이 말은 내게 큰 울림을 주었고, ‘왜 대의를 위해 돈을 쓰지 않고 죽으려 하는가’라고 자문해보았다. 기부는 대단히 만족스럽고 기분 좋은 일이다. 이렇게 즐거운 일을 왜 남에게 미루겠는가?”(11) 실제로 톰 헌터는 ‘벼락 부자’ 앤드루 카네기와 공통점이 많다. ‘철강왕’ 카네기는 자신의 재산을 기부해 2500개 도서관과 미국 내 유명한 콘서트홀을 설립했다. 사모펀드인 웨스트 코스트 캐피털을 창설한 헌터는 부실기업을 매입한 뒤 구조조정으로 기업가치를 높여 다시 매각하는 방법으로 2001년부터 40억 유로에 가까운 차익을 남기고, “현재는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1만500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다.
헌터가 2005년 영국 여왕에게서 기사 작위를 받고 대규모 기부금에 대한 계획을 밝힌 뒤부터 인원 감축 등 ‘폐해’ 따위는 부차적인 문제로 밀려났다. 그는 “헌터재단을 통해 교육과 경제발전에 5천만 파운드를 기부”했을 뿐만 아니라 말라위와 르완다에 병원과 공장을 설립했다. 스코틀랜드의 빈민 지역 학교를 지원하며, 글래스고대학에 기업가 정신 육성을 위한 재단을 설립하고, 글래스고박물관의 문화행사를 후원하고 있다. “사모펀드의 논리와 마찬가지로 나는 자선사업의 투자를 통해 최대 효과를 기대한다.” 헌터의 이런 사고는 교육과 보건 분야의 정부 예산 삭감의 여파가 부유한 자선가의 기부로 충당된다는 데이비드 캐머론의 생각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2008년 헌터 경이 ‘대의’에 바친 5천만 파운드 역시 캅 페라의 주택을 러시아인에게 팔아 남긴 이익이었다.(12) 몇 달 뒤 금융위기가 불어닥쳤다. 그는 당시를 ‘자본주의의 규제 강화’에 대해 “우리는 면역력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위기의 한파에 부딪힌 헌터 경은 자선 활동을 중단하고 자신의 요트를 팔아야 했다.
구조조정으로 돈 벌고 행복한 기부
부자는 도덕적이고 세심하며 자비로운 반면,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고 마약과 알코올중독자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진부한 편견이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어떤 정치세력이 굳이 스스로 자신의 목을 비틀려고 애를 쓰겠는가? 누군가의 부유함은 다른 이의 빈곤과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은 여기서 허용되지 않는다. 빈곤한 그들이 안쓰럽지만, 교양 있는 계급에게는 가난의 원인이 그들 스스로에게 있다고 여겨진다.
“사람들이 일찍 죽는다는 가난한 도시, 타락한 도시의 이미지를 왜 우리와 결부시키는가?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글래스고에 비가 내린다는 소식으로 시작하는 <BBC> 기상예보가 떠오른다.” 웨스트엔드의 바이어 도로 끝에 위치한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극장식 레스토랑 ‘오란모’ 테라스에 연극배우 션 스캘런과 바바라 래퍼티가 앉아 있다. 이 레스토랑은 예전의 근본주의 교회를 리모델링한 곳이다. 그들은 몰리에르 작품인 <타르튀프>에 출연 중이다. 진주 목걸이에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바바라는 오렌지 주스를 음미하고 있고, 그녀의 파트너 스캘런은 긴 의자 위에 팔을 걸쳐놓았다. 60대 두 배우에게 WHO가 발표한 수치는 못마땅해 보였다. 스스로를 ‘프티 부르주아’라고 밝혔지만 이 단어에 바바라는 심기가 불편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의 아버지는 수십만 명의 평범한 글래스고인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소의 노동자였다. 글래스고의 조선소는 1970년대에 폐쇄되었다.
사각 사파이어 반지를 낀 바바라는 빈곤 지역을 ‘타락’으로 이끈 근원이 ‘술’, ‘헤로인’, ‘피시 앤 칩스’라고 했다. “그쪽 지역 사람들은 채소나 과일을 전혀 먹지 않는다. 영양가 없는 가공식품만 지나치게 먹는다. 따라서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1930년대만 해도 노동자는 수프를 먹었기 때문에 더 오래 살았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튀긴 소시지와 기름진 타르트만 먹는다”고 말했다. 기름진 음식에서 탈피하려고 바바라와 션은 1년에 3~4번 니스의 별장으로 가 “다른 일은 하지 않고 해변가를 산책하고 과일을 먹는다”고 했다.
“그들은 채소 안 먹어 일찍 죽는 것”
성을 소유한 데이비드 켈번은 “현대사회에서 부유한 사업가는 영웅으로 추앙받는 반면, 우리 같은 귀족은 적으로 인식된다”며 주방에서 불만을 터뜨렸다. 글래스고 백작의 아들인 32살 켈번 자작은 자신은 ‘진짜 부자’가 아니라고 했다. “우리는 아침에 샴페인을 마시지 않고, 호텔을 소유하지도 않으며, 무릎 꿇고 시중 드는 하인도 없다.” 대신에 그는 작위의 명예와 유산을 소유하고 있다. 3ha의 대지에 15개 방을 갖춘 그의 성의 가치는 400만 파운드를 웃돈다. 그는 아이폰으로 “내가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인지 매일 생각한다”는 말이 담긴 문자메시지를 내게 보내왔다.
백만장자가 노숙자의 삶을 경험해보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더 시크릿 밀리언에어>나 <라이브8>(13) 같은 자선 활동 프로그램을 통해서 켈번 자작은 성 밖의 계급투쟁을 목격했다. 그는 “돈과 명성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계급이 세상의 우위를 점하는 듯하다”며, “물론 우리 귀족은 선조로부터 부를 물려받았지만, 현재 사업가들이 대형 저택 등의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고 주장했다. 자선사업은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는 그는 “부자들은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이 세계를 구원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그들이 스스로 자선 활동이라고 말하는 기부금은 그들의 엄청난 재산 중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건 매우 비양심적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열변을 토했다.
자칭 ‘자유로운 휴머니스트’인 켈번(새로 출범한 연립정부를 지지한다고 밝혔다)은 가끔 고독함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내게 성이 오랜 마음의 짐이자 근심거리라는 것을 글래스고 빈민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성이 넓으면 그만큼 겨울에 춥기 때문에 한 해 유지비만 적어도 6만 파운드가 든다. 물론 내가 성을 팔면 해결될 것이지만 이곳은 우리 가문이 1140년부터 살아왔다”고 설명했다. 2007년, 데이비드는 성을 새롭게 예술적으로 단장하기로 결심하고 어느 화창한 날에 성벽을 그래피티로 꾸미기 시작했다. “브라질 예술가들이 작업을 맡았다. 그들은 리오 빈민가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영감을 받았다. 말하자면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것이다.” 당연히 문화적 혼합도 담겨 있다. 허공에다 주먹을 쥐는 여성들, 누군가의 목을 발로 조르는 ‘브라질인들’, 굴뚝 위에 앉아 있는 부엉이들…. “서로 절대 교류하지 않는 두 계급이 존재하는 시스템을 현실적으로 표현했다. 그렇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하지만 현실을 외면함으로써 상황은 악화되고, 계급 간 증오는 더욱 커지고 있다.”
하지만 글래스고에서는 ‘계급 간 증오’가 교묘히 감춰져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지역 간 평균연령 격차 문제는 정치계와 공적 영역에서 소외되어 현실 속에 갇혀 있다. 별다른 소란 없이 유지되어온 일종의 사회적 아파르트헤이트가 지난 30여 년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해 갈등의 초점은 흐려졌다. 타락한 빈민과 자비로운 부자가 공존한다는 19세기의 전통적이고 익숙한 표현으로 부자들은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글래스고대학 교수던 사회학자 폴 리틀우드는 “1980년대 말, 글래스고의 부유층이 계급에 대한 연구를 거부하고 계급이란 개념 자체를 부정했기 때문에 이곳 부유층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가 전혀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분석했다.
은폐된 사회적 아파르트헤이트
이곳에서는 누군가의 암울한 미래가 다른 이의 찬란한 미래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글래스고 시내에서 ‘다이아몬드 스튜디오’라는 보석상을 운영하는 수메라 샤힌은“명품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글래스고는 대단하다. 롤렉스를 비롯해 랄프 로렌, 베르사체 등 모든 고급 브랜드가 이미 이곳에 들어섰다. 글래스고는 런던의 뒤를 잇는 영국 최대의 쇼핑도시로 자리잡았다”고 강조했다. 지난 3월 초 샤힌은 명품 브랜드의 친목단체인 ‘러브 럭셔리 글래스고’를 창단했다. 리무진, 스파, 명품 부티크, 골프 라운드 등 다양한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 “물론 스코틀랜드인이 주 고객이지만 러시아의 신부호들도 대상이다”라고 밝혔다. WHO의 발표에 그녀는 불만을 내비쳤다. “어쨌든, 당신이 말하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 고객이 될 리는 만무하다. 우범 지역은 대부분 시내 외곽에 있다. 그리고 알다시피, 글래스고 시민은 마음이 착하다. 이번 주에만 시내에서 자선 행사가 세 개나 잡혀 있다.” 가난한 도시에서 부자로 살려면 현실을 회피하고, 특히 카메라 앞에서 자비로움을 드러내면 충분할 것이다.
그 수익으로 과연 국가재정이 충당될까? 새로 출범한 보수당과 자유민주당 연립정부에는 영국 정치 역사상 이례적으로 대규모 백만장자가 집중되어 있다. ‘긴축 내각’의 각료 23명 중 18명이 100만 파운드 이상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 영국 <선데이 타임스>에 따르면, 내각 총 자산은 5천만 파운드에 이른다.(14) 뻔히 예견된 수순에 따라 정부의 대규모 긴축정책이 발표된 이튿날, 각료는 재산의 극히 일부분을 내놓으며 정책의 파급효과를 메우려 했다.
글•쥘리앵 브리고 Julien Brygo 신문기자이자 사진작가. 공동 저서로 <파리-코나크리 1958~2008>(카르탈라·2008) 등이 있다.
번역•배영미 youngmib@gmail.com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졸.
<각주> (1) 글래스고아트클럽 사이트 www.glasgowartclub.co.uk. (2) 피에르 랭베르, ‘사회적 불평등으로 죽어간다’, 외교문서, www.monde-diplomatique.fr, 2008년 9월 2일. (3) 세계보건기구(WHO), ‘건강의 사회적 결정 요인 위원회, 최종 보고서’, www.who.int, 2009. (4) 공립학교 지원 동결 및 공립병원 건축 중단, 고용 지원금 삭감, 부가가치세(VAT) 17.5%에서 20%로 인상 등을 포함한다. (5) Nicolas Watt, ‘Michael Gove freezes rebuilding of schools in ?3.5bn savings’, <가디언>, 런던, 2010년 7월 4일. (6) 2010년 영국육상선수권대회 Super 8 개최, 2012년 런던올림픽, 2014년 영연방 경기대회 개최 등. (7) 영국 <인디펜던트>의 기사를 번역한 <쿠리에 앵테르나시오날>의 ‘성장하는 도시’에서도 이런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글래스고에는 예술과 건축물, 음악, 음식이 넘쳐나며 여기에는 이 도시만의 투지와 현실성이 깃들어 있다’(2009년 10월 15일). ‘대형 브랜드가 대부분인 상점들과 보행자 도로에는 일주일 내내 사람들이 넘쳐난다!’(2008년 4월 18일)는 기사는 <프랑스 앵포>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8) <Scottish Snippets> n° 539, www.rampantscotland.com, 2007년 8월 11일. (9) <타임스>(런던)가 매년 발표하는 영국 부자 리스트 참조. (10) Jenny Davey, ‘The humbling of Tom Hunter’, <타임스>, 런던, 2009년 1월 4일. (11) 6월 중순, 워런 버핏은 “재산의 99%를 사회에 환원하고 40여 명의 억만장자를 설득해 기부 운동에 동참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는 톰 헌터와 윌리엄 호이에게 최후통첩 같은 큰 충격을 주었다. 전세계적으로 긴축정책이 확산되는 가운데 마치 예수가 부활한 것처럼 인도주의적 재벌들이 돈과 문화를 통해 세계의 구원투수를 자처하고 나섰다. (12) 2007년 7월, 이 빌라의 정원에서 톰 헌터는 “살아 있는 동안 10억 파운드를 기부하겠다”는 계획을 <BBC>와의 생방송 인터뷰에서 밝혔다. (13) ‘빈곤 퇴치’를 주제로 매년 전세계에서 개최되는 <라이브8> 콘서트에는 사회 비판에 목마른 예술가들이 참여한다. (14) Gabriel Milland, Georgia Warren, ‘Austerity Cabinet has 18 millionnaires’, <선데이 타임스>, 런던, 2010년 5월 23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