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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러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

시놉티콘 2010. 10. 16. 17:45

 

 

공감하라, 그래야 공존할 것이니
프로이트의 ‘리비도론’ 비판
“인류문명은 공감확장 과정
만연한 폭력은 예외적 현상
‘공감 본성’이 지구 살릴 것”
한겨레
» 제러미 리프킨은 인간은 공감능력의 확장을 통해서 문명을 진전시켜 왔다고 말한다. 민음사 제공
〈공감의 시대〉
제러미 리프킨 지음·이경남 옮김/민음사·3만3000원
 

<공감의 시대>는 미국의 문명비평가 제러미 리프킨(65·사진·펜실베이니아대 워튼경영대학원 교수)이 2009년 말에 내놓은 신작이다.

 

그는 그간 왕성하게 과학기술 발전이 인류문명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때론 그 폐해를 비판하며 에너지 대안을 탐색해왔는데 <공감의 시대>(The Empathic Civilization)는 기왕의 저작들을 아울러 인류문명의 과거와 미래의 진로에 대한 견해를 집대성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때로 그의 견해는 지나치게 비관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는데, 그는 육십대 중반, 노년의 길목에서 집필한 이 책에서 인간과 인류 문명의 ‘결말’에 대한 낙관을 부여잡고, 절멸의 위기에 처한 문명의 현재상태를 조망하고 그 문명의 지속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자고 역설한다.

 

그의 낙관은 문명의 행위자인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천착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은 공감능력이 있으며 공감이야말로 인간 본성의 1차적 특성이라는 게 리프킨의 기본 생각이다. <공감의 시대>는 그 원제목이 드러내는 대로 인류 문명을 ‘공감의 문명’으로 파악한다. 리프킨은 인류 문명사를 공감이란 열쇳말로 새로이 직조할 뿐 아니라, 문명의 진전은 공감의 확장 과정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인간은 공감하는 존재, 곧 ‘호모 엠파티쿠스’다. 리프킨은 고대 이래 1700년 동안 인간을 본질적으로 타락한 존재라 못박았던 기독교 문명, 18~19세기 유럽과 미국의 사상가들의 견해를 차례차례 반박하면서 공감하는 인간, 호모 엠파티쿠스를 정립시킨다.

 

인간을 공격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보았던 토머스 홉스, 태생적으로 탐욕적인 존재로 파악했던 존 로크, 인간은 물질주의적인 존재여서 쾌락을 최대화하려 한다고 보았던 제러미 벤담 등 공리주의자들이 차례로 비판받는다.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도 그 연장선상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리프킨이 가장 공들여 비판하는 사상가는 정신분석학의 태두 지그문트 프로이트다. “흔히 프로이트를 여러 면에서 사상의 물길을 바꿔놓은 독창적 사상가로 여긴다. 하지만 그 역시 물질주의라는 대본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는 인간을 타락한 존재로 보았던 고대와 중세 교회적 관념을 18세기 계몽주의의 물질주의적 화법에 교묘하게 연결시켜 세속화했다. 그가 그린 인간 본성은 너무 추하여 오히려 그 점이 세간의 관심을 자극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리비도(성충동)이며, 리비도에 의해 움직이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격적이라고 생각했다. 리프킨은 그를 보수의 최후 주자로 규정한다. “고대의 가부장 설화를 세속적으로 포장”하여 “무의식이라는 넘치는 힘을 휘두르면서 남성 지배는 자연적 질서라고 우겼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프로이트 역시 5천년 이상 버텨온 가부장적 문명의 기반을 흔드는 역사의 대세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고 리프킨은 말한다. 곧 19세기 1차산업혁명과 20세기 2차산업혁명에 수반된 인쇄술·전기통신 등 새로운 커뮤니케이션과 에너지 혁명이 “프로이트 인성론의 가부장적 아성”을 허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공감의 시대〉
첫 포문을 연 것은 그 제자 멜라니 클라인의 ‘대상관계’(object relatoins)’ 이론이다. 이를 발판으로 20세기 초중반 젊은 세대 심리학자 및 아동발달학자들이 프로이트의 시각에 의문을 제기했는데, 리프킨은 윌리엄 페어베언, 하인츠 코후트 등의 견해를 차용하여 프로이트의 인간본성론을 비판한다. 이들은 아기가 날 때부터 리비도를 추구하면서 빼앗고 파괴한다는 프로이트의 전제를 정면 반박했다. 이들은 사회성을 1차적 충동으로 보았다. 인간이 공격성과 파괴성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욕구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 좌절된 데 대한 보상반응이라는 것이다. 곧 ‘대상’과의 ‘관계’는 리비도를 충족시키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랑·유대감·인적 교제를 바라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페어베언은 ‘아기는 왜 엄지손가락을 빠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프로이트를 비판했다. 프로이트는 아기가 손가락을 빠는 것은 “입이 성감대이고 빠는 것이 에로틱한 쾌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페어베언은 “(엄마의) 빨 젖가슴이 없기 때문”이라고 반박한다. 손가락을 빠는 행위는 아기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엄마(양육자)와의 관계를 거절당했기 때문에 자신을 대체 대상관계로 제공하는 것이다. 코후트는 나아가 아기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친밀한 사회적 관계, 곧 공감이라고 정식화한다.
 

공감은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의 정서적 상태로 들어가 이를 자신의 고통인 것처럼 느끼는 것을 뜻한다. 수동적인 입장의 동정(sympathy)과 달리 공감은 적극적인 참여다. 생물학자들은 최근 공감 의식을 가능케 하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이라 할 ‘공감뉴런’(거울신경세포)의 존재를 발견함으로써 인간 진화의 본성에 관한 통념을 흔들었다.

 

리프킨은 “지금 세계적으로 만연한 폭력은 인류사에서 흔한 일이 아니”며 “예외적 현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2차대전의 홀로코스트를 겪은 뒤 지난 반세기에 걸쳐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된다는 ‘공감’이 보편화됐으며, 지금 이 시기 우리는 세계적 차원의 공감 의식에 바짝 다가섰다고 주장한다.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 유색인종, 소수민족, 소수 종교 신봉자 등 종전엔 동료로 생각지 않았던 다른 인간에게까지 공감의 범위를 확대했다. 심지어 동물보호법이라는 형태로 우리의 공감적 감성을 확산시켰다. “우리는 ‘다른 사람’, ‘외부인’을 몰아내는 게임의 막바지에 와 있다.”

 

그러면 인류문명의 미래는 낙관적인가. 요컨대 리프킨은 지금 우리가 공감의 보편화, 세계화에 바짝 다가선 만큼이나 우리 자신의 멸종도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역설에 놓여 있다고 답한다. 이는 ‘공감·엔트로피의 역설’이다. 역사를 통틀어 새 에너지 제도는 커뮤니케이션 혁명을 통해 훨씬 복잡한 사회를 만들어내고 이 기술 진보 사회는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공감적 감수성을 고조시켰다. 그런데 그럴수록 에너지 사용은 급증하고 지구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다. 리프킨은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손실, 곧 엔트로피의 증가라는 위기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인류 미래가 놓여 있다고 말한다.

 

리프킨은 고대 수메르 문명이 관개 기술을 통해 공감적 유대감을 확산시켰으되 바로 그 기술이 주변 환경에 영향을 끼쳐 토양 염류화(엔트로피의 증가)를 불러와 문명 자체가 몰락했듯이, 석유 에너지에 바탕을 둔 현대문명이 에너지 고갈로 인해 절멸의 위기 앞에 서 있다고 진단한다. 인간이 본래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존재라면 이 역설을 해결할 가망은 없다. 리프킨의 소망대로 공감을 추구하는 인류가 이 역설을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를 열 수 있을 것인가.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 세상을 움직인 리프킨의 책들

‘전방위적’ 집필…비판 넘어선 대안찾기

문명비평가, 사회사상가, 미래학자, 환경철학자. 그 이름 앞에 이렇듯 여러 지칭이 붙는 제러미 리프킨은 주지하다시피 세계적 베스트셀러 저술가다. 그의 책들은 20개 언어로 번역되어 광범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리프킨의 <유러피안 드림>을 서거 직전까지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는 유명한 일화는 그 영향력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 할 것이다.

<유러피안 드림>은 식민지 신대륙에서 세계 최강국으로 번성해온 미국에 젖줄을 댄 저술가로서 리프킨이 ‘자율성과 부의 축적’, ‘자수성가 신화’에 기반한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에 메스를 들이댄 책이다. 그는 세계화 시대에 아메리칸 드림은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며 그 종언을 고하고, ‘구대륙’ 유럽에서 태동하는 유럽적 가치, 곧 사회적 집단책임을 강조하는 ‘유러피안 드림’에서 새 시대의 비전을 찾고자 했다.

그는 젊은 시절 대학에서 경제학과 국제관계학을 공부했다. 그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세계 경제와 사회, 환경에 끼치는 영향을 화두 삼아 방대한 분야에 걸쳐 연구·저술활동을 계속해왔는데, 정식으로 과학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는 점 때문에 때로 그의 견해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비판받기도 했다.

리프킨의 출세작은 1981년 서른여섯 살에 발표한 <엔트로피>다. 엔트로피는 에너지 총량은 일정한데 인류가 에너지를 사용하면 할수록 사용 가능한 에너지는 그 과정에서 손실된다는 개념이다. 곧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손실이 엔트로피다. 현대문명의 에너지 과잉 소비로 인한 엔트로피의 증가가 불러올 재앙을 경고한 이 책으로 그는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 <육식의 종말>, <소유의 종말>, <노동의 종말> 등 ‘종말 시리즈가 연달아 이 2000년대 초중반에 국내에도 소개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육식의 종말>은 육식 문명에 대한 반성을 불러 국내에도 이 책을 읽고 채식주의로 돌아선 이들도 꽤 생겨났다. <노동의 종말>은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사회운동의 기폭제 구실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공감의 시대>에선 20세기를 제2차 산업혁명의 시대로 규정짓고 그 시대는 석유라는 ‘엘리트’ 에너지를 기반으로 했기에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는 경제체제였다고 말한다. 지구온난화와 엔트로피의 증가로 그 체제는 위기에 직면했으며 이미 체제의 황혼기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그는 다윈주의가 인간의 충동을 자신의 개인적 생존과 번식을 보장하기 위한 생물학적 필요의 구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고 비판하면서, ‘적자생존’과 ‘경쟁’, ‘부의 집중’을 부른 낡은 경제 패러다임 대신 이제 세계는 ‘협력과 네트워크, 오픈 소스, 경제적 이타주의’에 기반한 새로운 체제, 곧 ‘분산 자본주의’라는 제3차 산업혁명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2002년 <수소혁명>을 통해서 대안 에너지로 수소의 가능성을 주창했던 그는 <공감의 시대>에서도 우리 집 마당에서 누구나 구할 수 있는 햇빛과 바람, 지열 등 ‘분산 에너지’를 이용하여 수소 연료를 만들어 쓰는 경제체제로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허미경 기자

기사등록 : 2010-10-15 오후 06: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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