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nsitivity

진보진영, 뼈를 깍는 자기성찰에 착수해야 한다

시놉티콘 2011. 1. 12. 14:44

 

 

 

 [비빔툰]을 보며 느껴지는 단상

비빔툰은 즐거운 웃음과 착한 미소를 만들어주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뒤통수를 치며 나를 반성하게 하는 해학이 깃들어 있다.

'기준점'이란 제목의 이번호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기성이라는 말이 권위주의와 억압의 상징인 사회에서 미래를 희망할 수 있을까?

저 어린아이들의 교육현장을 보면서, 20대의 절규와 자괴를 보면서, 우리가 대한민국의 선진화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도덕이라는 말, 죄짓지 마라, 공부해라, 책 봐라, 커서 뭐가 될래라는 도덕군자로 군림하는 기성세대의 일상은 어떻게 진행될까?

삶이 거짓이고 죄고 성찰하지 않고 세상과 자본이 만들어 놓은 욕망의 불구덩이로 뛰어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이 모순과 역설의 풍광으로 가득찬 일상을 그대로 방치하고 소위 사람들이 부르짖는 진보요 생태요 민주주의요 평화요 복지요라는 말들이 진정성을 가질 수 있을까?

진보는 무엇인가?

이성을 가진 인간은 무엇이든 개척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또 다른 권위주의의 산물아닌가?

그 위대한 이성의 시대에 전개된 저 처절한 전쟁의 역사, 자연파괴의 역사를 보며 진정 이성이 위대한 것인지 되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실제 진보일까?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독재와 싸워야만 했던 그 시대의 투사들이 진정으로 제대로 된 인간일 수 있었을까?

독재와 싸우기 위해 부대를 편성할 수밖에 없었고, 가혹한 시기를 견디기 위해 내부 규율을 강제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에 우리는 진정 제대로 된 인간이었을까?

시대가 요청하는 것이 있다. 분명. 그리고 그 요청에 부응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고 나서 우리는 성찰해야 한다. 나를 치유해야 한다.

시대 소명을 위해 처절하게 이질화된 우리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여전히 진보진영에는 질식할 것 같은 권위주의와 위계질서가 엄존하고,

창의성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보수주의가 뿌리박혀 있고,

그렇게 부정하던 자기 우월의식이 만연하고,

대중을 외치며 대중 위에 올라타려 하고

대중을 주인이라고 말하면서도 돌아서서 그들을 교육시키려고 하고

이 질식...그래 다 좋다고 하자. 그러면 제대로 된 통치라도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든지...그것도 못했다.

그래 그래서 이제 진보의 시대는 가고 보수의 시대는 왔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말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집권을 해야한다는 당위적 발언은 있지만 자신감은 사라졌다.

그놈의 여론조사로 인해 퍼진 이명박에 이은 박근혜 대세론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비빔툰'에 나온 것 처럼 성찰을 통한 일상의 변화가 진보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폭력없는 문화혁명이 필요하다.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사물을 대하는 자세가 바뀌어야 한다.

자연은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그 극단적 합리주의의 몽상에서 탈출해야 한다.

자연은 파괴하고 자연이 재앙을 주는 것을 봐야만 자연을 다시 생각하는 악순환을 이제 끝내야 한다.

대중이 주인이라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줄줄 외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펼쳐지는 일상에서 대중이 스스로 주인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세상을 만들어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다.

언제까지 이 질식할 것 같은 정치권의 권위주의,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권력을 가진 자들의 권위주의가 중단될 것인가.

신자유주의라는 말도 안되는 이데올로기가 도처를 휘감고 자본의 횡포 속에 그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당하는 세상을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이제 성찰이 시작되어야 한다. 21세기 판 문화혁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일상이다. 살아가고 숨쉬고 자연과 어우러지는 생생한 공간인 일상..그곳이 반전의 지점이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많이 방치해뒀다. 그것이 기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