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경제학 권위자’ 프리먼 교수를 만나다
“세부담 늘려 보편복지로 가야 사회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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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031 21: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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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혁 KDI 국제개발협력센터 실장 ‘노동경제학 권위자’ 프리먼 교수를 만나다
정당한 소득분배 권리 요구 월가 시위대는 미국의 양심
정규직-비정규직 문제 임금격차 줄이는게 우선 여성의 경제활동 늘리려면 입시 등 교육문제 개선해야
“월가 시위대는 좌파도 이데올로그도 아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에 맞서 정당한 소득분배의 권리와 책임을 요구하는 평범한 서민(folks)들이다.”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 개원 40주년 기념 국제회의 참석차 방한한 리처드 프리먼(68) 하버드대 교수(경제학)는 ‘99% 행동’을 표방한 월가 점령 시위를 “미국의 양심”으로 규정했다. 노동경제학의 권위자인 그는 “제조업과 서비스의 엄청난 생산성 격차 해소”를 우리 경제의 최대 과제로 꼽았다. 최근의 복지 논쟁에 대해서는 “세부담을 늘려 보편적 복지를 확충하는” 방향에 찬성했고, 정규직-비정규직 문제는 “좀더 공평한 임금체제”가 우선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프리먼 교수는 2009년 방한 때 한국의 노동 현안에 대한 주제 발표를 하는 등 우리 경제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지한파’다. 학계와 행정부를 오가며 주요 경제 정책 입안에 참여해왔고, 현재 전미경제연구소(NBER)의 과학 및 기술인력 프로젝트장을 맡고 있다. 지난 25일 임원혁 박사(KDI 국제개발협력센터 개발협력실장)와 국내외 경제 이슈 전반에 대해 폭넓은 얘기를 나눴다.
임원혁 실장(이하 임): 2008년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각국은 전통적인 경기부양책을 썼다. 정책 입안가들은 돈을 풀면 위기가 해결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이번 위기는 훨씬 더 심각한 것 같다. 프리먼 교수(이하 프리먼): 이번 경기침체(리세션)가 과거보다 훨씬 나쁜 이유는, 이것이 정상적인 금융위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유럽과 달리 미국 경제는 오랜 기간 일반 근로자들의 실질 임금이 오르지 못했다. 그리고 굉장히 소수의 사람들에게 많은 소득이 몰렸다. 이미 질병이 존재하고 있었던 거다.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오래전부터 금융규제 완화를 추진했고, 이것이 결국 미국과 세계에 재앙이라는 것이 이번 위기로 드러났다.
임: 금융위기에 대처하는 미국 정부와 의회의 태도에 놀랐다. 금융회사에 강도 높은 책임 추궁을 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별다른 조처가 없었다.
프리먼: 동의한다. 나 역시 국가가 납세자 돈으로 구제를 받은 금융 회사에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고,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특히 금융 회사들은 반성은커녕 오히려 위험성이 큰 자산을 숨기는 등 계속해서 소비자 권익을 배반하는 행위를 지속했다. 또 구제금융을 받고 살아난 뒤 입에 시가를 물고 ‘이제 다시 우리가 나라를 운영하겠다’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위기가 닥치면 또다시 구제금융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단호하게 한마디 하고 싶다. 절대로 두 번은 없다고.
임: 미국 월가의 ‘점령 시위’를 어떻게 규정하고 전망하나?
프리먼: 월가 시위는 ‘국가(미국)의 양심’이라고 말하고 싶다. 미국의 정치권은 선거에 엄청난 도움을 주는 월가 사람들이 곧 친구이기에, 그들이 미국 국내총생산의 상당 부분을 가져가는 것에 별다른 이의를 달지 않아왔다. 그런데 일반 시민들은 ‘잠깐! 아무도 금융 회사에 책임을 묻지 않잖아’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다. 합법적인 은행 시스템이 부의 독점에 이용되고, 그 시스템이 여전히 자기 소득을 통제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거다. 예전 같으면 월가 시위자들은 이데올로그나 좌파로 치부되면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거다. 이번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경제학자도 아니고 좌파도 아니다. 부자들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정당한 소득분배의 권리와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소득격차가 지속된다면 우리는 중세 시대로 돌아갈 수도 있다.
임: 국경을 넘나드는 금융거래에 과세하고 규제를 강화하자는 목소리가 높지만 늘 미국의 반대가 강하다. 미국의 이익이 침해될 것을 우려한 때문으로 보인다.
프리먼: 정확히 말하면, 금융 자유화의 가장 큰 혜택은 미국인들이 아니고 미국 은행들이 가져간 것이다. 이들은 차입(레버리지)을 통해 위험부담을 엄청나게 키웠고,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리스크를 공유하도록 만들었다. 위험을 분산한다는 주장은 거짓말이다. 바로 그 부분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
임: 한국 경제의 중요한 이슈 중 하나가 노동시장의 이중성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도입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임금피크제가 도입됐지만 연공서열에 따른 임금 체제는 여전하다. 성과 기반의 임금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도 쉽지 않은 문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격차도 문제다.
프리먼: 나 역시 갑자기 학교에서 잘리면 피자집을 열거나 김치를 담아 팔아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사업에 관한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능력도 없기 때문에 곧 망할 것이다. 이는 생산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한국 경제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제조업과 서비스 부문의 엄청난 생산성 격차다. 다른 나라에서 찾아 보기 힘들 정도다. 한국의 연구개발(R&D)은 대부분이 제조업에서 일어나고 있다. 서비스 부문의 연구개발은 미흡하다. 예컨대 한국에서 누군가 장사를 시작할 때 과연 누구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는가? 한국에는 국가적으로 이런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은 더 많이 일을 하면 더 안정적인 보상과 직업적인 안정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정규직이냐 아니냐’라는 고용계약 형태가 중요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임금 격차를 줄이고 평평하게 가는 게 중요하다.
임: 여성들은 일을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보육·육아 환경이 열악하고 연공서열 중심의 임금제와 장시간 근로 등의 문제로 고용시장에서 완전히 이탈하는 경우가 많다.
프리먼: 한국 학생들은 일과의 대부분을 학교와 학원에서 보낸다. 그렇다면 자녀를 둔 여성들이 일을 하기에 더 편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어머니와 자녀 둘 다 엄청난 부담과 불행을 안고 사는 것이다. 결국 입시 부담 등 교육 문제를 개선하는 게 여성의 경제활동을 제고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독일은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선진국 가운데 가장 낮았지만 지금은 미국 수준으로 높아졌다. 반면 독일 여성들의 근로시간은 매우 짧다. 여성들이 노동시장을 떠나지 않고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임: 한국은 사회적인 지출이 크지 않다. 국민들의 세금 부담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매우 낮다. 정부의 재정으로 사회적인 서비스 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최근 3년 동안 세금 부담은 점점 더 완화돼왔다. 이와 관련해 보편 복지냐, 선택 복지냐는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프리먼: 문제에 관해서는 잘못된 이분법이 있다. 선진국의 경험을 보면, 보편 복지와 선택 복지는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문제는 세부담을 늘려 어느 정도 복지의 보편성을 확충하는 동시에 중산층의 지지도 확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보편 복지에 찬성한다. 모든 이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고 사회적 안정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대가는 모두가 갹출해야 한다. 고령화 사회에 대비하려면, 안타깝게도 젊은 사람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낼 수밖에 없다. 이런 조처를 매우 신속하게 취해야 한다.
임: 한국인들은 대기업에 대해 양면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대기업들이 국제무대에서 좋은 성과를 보이고 혁신을 주도하지만, 국내에선 거버넌스와 규제 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다. 이들이 혁신적인 신생 기업의 성장을 저해한다는 우려도 나온다.
프리먼: 한국의 재벌과 비슷한 기업 형태를 가진 나라에서 가장 균형을 잘 잡은 게 스웨덴이다. 스웨덴의 대기업 노동자들은 대부분 노조에 가입돼 있고 고임금을 받는다. 정부와 기업은 노조와 싸우지 않고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자세를 보인다. 한국처럼 재무와 관련된 부정행위가 일어나는 건 매우 찾아보기 어렵다. 또 한가지 스웨덴 대기업들은 사실상 재벌가가 운영하지 않는다. 일부 가족 경영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전문 경영인이 기업을 책임지는 구조다. 스웨덴의 사례에 한국의 대기업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가 있다.
임: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두 번째로 빨리 늙어가는 나라다. 한국이 사회적 부담을 감내할 수 있는 성장을 지속할 수 있을까?
프리먼: 경제 성장 측면에서 노령화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민을 많이 받아들이거나 더 많은 아이를 낳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이주 노동자 문제에 대해 일본과 달리 약간 주춤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학자들 중에 ‘한국에도 이주 노동자가 있느냐’고 묻는 이들이 종종 있을 정도다. 이주 노동자들이 분노하지 않도록, 거절당했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들을 사회 구성원의 일원으로 융합시키는 것이 큰 과제가 될 것이다.
정리/김회승 기자 honesty@hani.co.kr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