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부패·빈부격차 해소 ‘충칭모델’ …보시라이 사건 뒤 위축
권력교체 앞두고 노선투쟁 양상…개방개혁 ‘광둥모델’ 부각
지난 6일 왕리쥔 충칭시 부시장이 미국영사관에 진입한 의문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중국 최고지도부 진입을 목표로 한 보시라이 충칭시 당서기의 현란한 질주와 그가 제시한 ‘충칭모델’의 미래는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충칭모델’은 중국인들의 민심을 정확히 짚었다. 분노의 초점이 되고 있는 부정부패와 빈부격차의 해법을 제시한 것이다. 왕리쥔이 지휘한 ‘범죄와의 전쟁’을 통해 범죄조직을 비호해 온 고위 관리들까지 엄단했고, 국유기업의 수익을 사회로 돌려 저소득층에게 저렴한 임대주택과 도시 후커우(호구)를 제공했다. ‘평등하고 청렴했던 사회’의 향수를 되살리기 위해 혁명가요 부르기 등 ‘홍색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이기도 했다.
자유주의자(우파)와 민영기업가들은 ‘문화대혁명의 부활’이라며 보시라이와 충칭모델을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불평등과 불공정에 분노하는 많은 중국인들에게 보시라이는 영웅이 됐다. 초고속 성장의 부작용을 치유하려면 좌파적 노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신좌파 지식인들도 보시라이를 적극 지지했다.
개혁개방 이후 30여년간 중국은 덩샤오핑의 선부론에 기초해 경제개혁을 통해 화려한 성공을 거뒀으나,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시위 유혈진압 이후 정치·사회 개혁은 중단했다. 그 후유증으로 견제받지 않는 권력과 부의 집중이라는 문제가 중국 사회를 누르는 거대한 종양이 됐다. 현실을 자각한 농민공들의 파업과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의 시위 등 사회 불만이 곳곳에서 분출하고 있다.
‘더는 개혁을 미룰 수 없다’는 위기감과 공감대가 형성되는 가운데, 중국은 왼쪽으로 갈 것인가, 오른쪽으로 갈 것인가? 올가을 18차 당대회의 권력 교체를 앞두고 차기 10년의 통치이념을 둘러싼 논쟁이 백화제방 식으로 펼쳐지면서 노선 투쟁도 점점 가열되고 있다.
그 와중에 터진 ‘왕리쥔 사건’은 보시라이의 차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진입에 치명타를 가했을 뿐 아니라, 화려한 조명을 받던 ‘충칭모델’의 미래도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홍색 캠페인에 투입된 막대한 예산, ‘범죄와의 전쟁’ 과정에서 가혹수사로 억울한 이들을 범죄조직원으로 둔갑시켜 민영기업가들의 재산을 몰수했다는 비난, 실제로는 정치적 라이벌이자 전임 충칭 당서기였던 왕양 광둥성 당서기의 측근들을 겨냥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보시라이가 위기에 처하면서 라이벌인 왕양 광둥성 당서기의 ‘행복광둥’ 모델은 더욱 부각되는 모양새다. 광둥은 개혁개방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으로, 그 결과 토지 문제와 농민공들의 불만, 환경오염 등 경제 성장의 부작용이 가장 집중적으로 폭발하고 있는 지역이다. 왕양 서기는 경제 구조조정으로 저임금·저부가가치 수출산업 탈피, 비정부기구 역할 강화를 추진하고, 사회 불만 처리에서도 무력진압 대신 타협적 정책을 채택했다. 지난해 말 부패한 촌 간부들의 토지 불법 매각에 항의해 일어난 우칸촌 시위에서 그가 촌민들의 요구를 수용하자, 자유주의자들의 지지가 잇따르고 있다.
중국 정치 전문가인 조지프 청 홍콩시티대 교수는 “왕리쥔 사건은 권력투쟁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차기 통치이념을 둘러싼 노선투쟁으로 번졌다”고 진단했다. 그는 “시진핑 시대의 통치이념으로 중국 지도부가 지향하는 것은 ‘민주주의 없는 좋은 통치(거버넌스)’를 통해 좀더 공정·공평한 국가를 만들려는 것”이라며 “중국 지도부는 보시라이식 포퓰리즘 모델은 위험하다고 판단했고, 왕양의 정책은 그런 방향에 맞는 안전한 싱가포르식 모델로 판단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홍콩 베이징/박민희 특파원 minggu@hani.co.kr
태자당 ‘중국식 신민주주의’ 깃발 들다 |
등록 : 2012.02.27 22:10 수정 : 2012.02.28 19:16
입법기구 역할강화 방안 등
정치개혁 로드맵 제안 부각
“공산당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고, 신민주주의만이 공산당을 구할 수 있다.”
‘시진핑 시대’를 앞두고 태자당(혁명지도자와 고관 자제들)의 대표적 이론가인 장무성이 제시한 신민주주의론이 ‘중국식 정치개혁의 로드맵’으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태자당인 시진핑 부주석이 차기 중국 지도자가 되자, 태자당 세력이 중국 정치의 전면에 부상하고 있다. 태자당 내부에선 차기 통치이념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경쟁도 치열하다.
저우언라이 전 총리의 비서였던 리잉지의 아들인 장무성은 지난해 <우리의 문화역사관을 개조한다>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신민주주의’의 깃발을 꺼내들었다. 신민주주의론은 원래 1940년 마오쩌둥이 제기한 개념으로 공산당 외에도 노동자와 농민, 소자산계급, 민족자산계급 등 광범위한 사회세력이 연합하는 단계다.
장무성의 ‘신민주주의 되살리기’의 핵심은 공산당 집권체제 유지를 전제로, △입법기구(전국인민대표대회) 역할 강화 △공산당 내 파벌간 공개적 논쟁 △노조와 농민조직의 자율성 강화 △언론의 견제 역할 강화 등이다. 그는 중국이 경제개혁만 추진하고 정치개혁을 미룬 결과 “관료와 자본의 결탁, 탐관오리 문제, 정치의 산업화, 권력의 자본화, 정권이 범죄 조직화한 문제가 매우 심각한 상태”라고 진단한다.
특히 군부 내 대표적 태자당 지도자인 류위안 인민해방군 총후근부 정치위원(상장)은 장무성의 책에 직접 서문을 쓰는 등 신민주주의론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류위안은 문화대혁명 당시 박해를 받아 숨진 류샤오치 전 국가주석의 아들로, 시진핑 부주석과도 절친한 관계로 알려져 있다. 류위안은 최근 부정부패에 연루된 인민해방군 고위 장성의 해임을 주도하며, 군내 부정부패 척결을 지휘하는 등 역할을 확대하고 있다.
태자당내 자유주의파(우파)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은 후더핑 정협 상무위원이다. 그는 1980년대 개혁개방을 이끌다 보수파에 밀려 실각한 후야오방 전 공산당 총서기의 아들이다. 후더핑은 지난해부터 여러차례 개혁개방을 강조하는 토론회를 개최해 자유주의 세력을 결집시키고 있다. 지난달 18일에는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20주년을 기념하는 토론회를 베이징에서 열었는데, 태자당의 주요 인물 등 200여명이 참석해 중국이 전면적 정치개혁을 통해 다당제, 민주선거, 언론자유를 실현하고, 공산당의 군대인 인민해방군을 국가의 군대로 전환할 것을 주장했다.
베이징/박민희 특파원
위기의 보시라이, 후진타오와 코드 맞추기 |
등록 : 2012.02.27 22:10 수정 : 2012.02.28 19:16
개혁개방·과학발전 역설나서
지도부, ‘명예퇴진’ 허용할 듯
보 서기는 지난 24일 열린 충칭시 공산당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3·14 총체부서를 총강령으로 삼아 개혁개방을 심화시키고 충칭의 과학적 발전을 촉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관영 <충칭일보> 등이 26일 보도했다. ‘3·14 총체부서’란 후진타오 주석이 2007년 제시한 충칭 발전 계획이다. 당시 충칭시 당서기는 보시라이의 라이벌인 왕양 현 광둥성 당서기였고, 이는 후 주석이 자신의 최측근인 왕양을 지원하는 내용으로 해석됐다. 보시라이는 2007년 충칭시 서기로 부임한 이후 ‘3·14 총체부서’를 거론한 적이 거의 없다.
‘왕리쥔 사건’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보시라이 서기의 공개 행보가 활발해지고 있지만, 코드가 달라졌다. 떠들썩하게 자신의 업적인 ‘창훙다헤이’(혁명가요 부르기·범죄와의 전쟁)를 선전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개혁개방, 과학적 발전관, 공동부유 등 후진타오 주석의 노선에 맞추겠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다.
중국 지도부도 보시라이 서기의 ‘명예로운 퇴진’을 보장하는 해법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는 3일 중국 전국의 지도부가 베이징에 집결하는 양회(정협·전인대) 개막을 앞두고 보시라이의 정치적 운명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지만, 보 서기가 처벌을 받거나 충칭 서기 자리에서 갑자기 밀려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해지고 있다.
싱가포르 <연합조보>는 베이징의 소식통을 인용해 “왕리쥔 문제는 그의 간헐성정신병 발작으로 정리될 가능성이 높고, 사건이 보시라이에 미치는 영향도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할 가능성이 대폭 낮아지는 정도일 것”이라며, “보시라이의 충칭 통치 경험은 계속 지지를 받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자오치정 정협 대변인도 지난 24일 ‘보 서기가 양회에 출석하느냐’는 질문에 “출석할 것으로 본다. 그러지 못할 이유가 있느냐”고 답했다. 권력 교체를 앞두고 공산당 내 파벌간 타협이 중요한 민감한 시기에 태자당의 대표적 인물인 보시라이를 너무 강하게 처벌하기에는 부담이 크다는 해석이다.
베이징/박민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