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urvey of public opinion

창간24돌 기획:가난한 민주주의

시놉티콘 2012. 5. 15. 19:50

 

 

빈곤층은 왜 보수정당을 지지하는가

등록 : 2012.05.14 19:38 수정 : 2012.05.15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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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24돌 기획:가난한 민주주의
800명 조사…“난 보수” 26.8% 최고
새누리당 지지도 중층·상층 제쳐

한국 빈곤층의 보수 성향이 중산층·상류층보다 더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가난할수록 진보·개혁 정당을 덜 선호하고 보수 정당을 더 지지한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한겨레>가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와 함께 ‘한국사회여론연구소’에 의뢰해 성인 남녀 800명을 상대로 여론조사한 결과, 스스로 경제적 ‘하층’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이들 가운데 26.8%가 자신의 정치성향을 ‘보수’라고 답했다. 자신이 보수 성향이라고 밝힌 응답자는 ‘상층’에서 21.6%, ‘중층’에서 19.1%로 나타났다. 보수 성향의 비중이 중간층·상류층보다 빈곤층에서 더 높은 것이다.

새누리당 지지도 역시 하층으로 갈수록 높아졌다. 지난 4·11 총선에서 어느 정당에 투표했는지 묻는 질문에 상층의 44.6%, 중층의 45.1%, 하층의 46.2%가 새누리당을 선택했다고 응답했다. 민주통합당을 지지했다는 응답은 상층(45.3%)이 가장 많았고, 하층(40.7%), 중층(38.5%)이 뒤를 이었다. 통합진보당 지지는 중층(12.8%)에서 가장 높았고, 다음이 상층(8.8%), 하층(8.4%)의 차례였다. 민주당 또는 진보당 지지자의 바탕은 빈곤층이 아니라 중산층 이상인 셈이다.

개혁 또는 진보 정치에 대한 빈곤층의 선호도가 낮은 것은 대선 후보 지지도에서도 확인됐다. 야권 통합 대선 후보로 유력시되는 안철수 교수를 선택한 응답자의 비율은 상층(21.1%), 중층(21.0%), 하층(16.9%) 차례로 나타났다. 반면 하층의 25.8%가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지지하겠다고 밝혔다. 상층 가운데 박근혜 지지자는 24.5%, 중층은 28.2%로 나타났다.

정영태 인하대 교수(정치학)는 저소득층의 보수화 현상에 대해 “자신의 처지에서 자긍심을 느끼지 못하는 소외계층은 국가·민족으로부터 자아정체성을 찾는 경향이 있는데, 강력한 국가를 표방하는 보수정당이 자아정체성을 찾는 수단으로 작용한다”고 분석했다. 정 교수는 또 “소외계층은 자신들에게 관심을 갖고 연탄 한장이라도 주는 쪽을 선호하게 돼 있는데,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보수 정치인의 존재가 이들에게 매력을 주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번 여론조사는 지난 6일 전국 성인 남녀 800명에게 임의전화걸기(RDD) 방식으로 진행됐으며, 신뢰수준 95%, 오차범위 ±3.5%다. 소득수준·재산상태에 기초하여 응답자 스스로 자신의 경제적 지위를 선택하게 한 뒤, 정치의식을 조사했다. 전체 응답자 가운데 하층은 22.3%, 중층은 43.4%, 상층은 33.5%를 차지했다.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은 “일반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빈곤층 정치의식을 재분석한 적은 있지만, 이 자체를 주제 삼아 여론조사를 벌인 것은 국내에선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정국 정환봉 기자 jglee@hani.co.kr

 

 

투표해서 뭐해? 없는 사람은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등록 : 2012.05.15 19:03 수정 : 2012.05.15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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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때마다 찍어달라고 정치인들이 머리를 숙인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갈수록 사는 건 어려워지고
“정치인들이 괘씸해요 말만 번지르르하고 우리를 진심으로 생각할까”

가난한 계층일수록 시민 참여로 정치를 바꿀 수 있다는 ‘정치 효능감’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빈곤층 가운데도 인터넷 등 뉴미디어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진보 성향도 강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겨레>가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와 함께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에 의뢰해 성인 남녀 800명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경제적 하층의 28.5%가 “내가 정치에 대해 발언하는 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상층은 40.5%, 중층은 30.0%로 나타났다. “시민이 참여하면 세상이 좋아진다”고 생각하는 하층은 37.6%로 역시 상층(54.9%), 중층(47.8%)에 비해 낮았다.

이에 대해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는 “빈곤층 등 사회경제적 소외집단이 보기에는 정치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고 느끼고 있음을 드러내는 조사”라고 분석했다.

정치정보를 얻는 방법에 따라 빈곤층의 정치 성향이 달라진다는 점도 새롭게 드러났다. 경제적 하층 가운데 인터넷 등을 통해 정치정보를 주로 얻는 이들 가운데 35.3%가 오는 12월 대선에서 안철수 서울대 교수를 지지하겠다고 답했다. 문재인(17.6%), 박근혜(11.8%), 김문수(8.8%)가 뒤를 이었다. 반면 텔레비전·라디오로 정치정보를 주로 얻는 하층의 34.0%가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지지했다. 안철수(12.3%), 문재인(5.7%), 김문수(1.9%)는 큰 격차로 뒤로 밀렸다.

이에 대해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사회학)는 “현 정권 들어 보수화된 지상파 방송이 저소득층의 공적 소통 공간을 장악했고, 신문을 구독하는 일부 저소득층 역시 조중동 등 보수 매체의 강한 영향권 안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저소득층이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만드는 진보 미디어의 노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정국 정환봉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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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3%. 지난 4·11 총선의 투표율이다. 45.7%의 유권자들은 투표를 하지 않았다. 선거 결과는 ‘정권심판론’을 앞세웠던 야당의 참패였다. <한겨레>가 주목한 것은 보수정당에 표를 던지거나 아예 투표를 하지 않았던 빈곤층이다. <한겨레>가 실시한 정치의식 여론조사에서도 경제적 하층의 절반(46.2%)이 지난 총선에서 새누리당에 표를 던졌다고 밝혔다. 또한 평소 정치에 관심이 있다고 밝힌 하층(34.8%)은 상층(39.9%)보다 적었다.

왜 그들은 빈곤층을 위한다는 민주·진보 정당을 버리고 ‘자기배반적 투표’를 하는 걸까. 나아가 왜 정치로부터 멀어지는 걸까. 서울 강서구 방화동 영구임대아파트에서 만난 20대 유민영(가명)씨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투표를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빌려 빈곤층 정치의식의 단면을 들여다봤다.

가난한 이들의 투표 참여가 낮은 것은 신자유주의와 양극화 흐름 속에서 정치 참여보다는 생계에 주력하기 때문이다. 사진은 지난 4·11 총선을 앞둔 선거운동 기간 동안, 시장 상인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위 사진)과 당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뉴스1

“투표요? 안 했어요. 단 한번도. 일부러 안 했어요.”

유민영(가명·29)씨의 말투는 차가웠다. 그는 서울 강서구 방화동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자활후견기관에서 목공일을 배우고 있다. 미래를 위한 준비다. 그 미래를 위해 투표한 적은 없다. 그의 정치적 무관심은 정치적 불신에서 비롯했다. “뽑아주면 뭐해요. 공약을 실천하는 것도 아니고. 나한테 도움 안 되잖아요.”

선거 때마다 자기를 찍어달라는 정치인들이 유씨 주변에 북적였다. 그들은 어려운 이들을 찾아가 머리 숙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들이 국회의원, 구청장, 시의원이 되었어도 유씨와 이웃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정치인들이 괘씸해요. 우리보다 어렵지도 않으면서 어려운 사람 사정을 잘 아는 것처럼 말하잖아요. 말만 번지르르한 거죠.” 유씨는 정치인에 대해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 “속으론 다른 생각을 하는 인간들”이라는 표현을 썼다. ①

갈수록 사는 게 어려워진다고 20대 후반의 유씨는 생각한다. 어려운 이들을 돕자는 것이 복지정책이지만, 유씨는 복지의 이념을 신뢰하지 않는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지정책이요? 정치인들이 우리를 진심으로 생각하기나 할까요? 선거 때나 한 표 달라는 생색 아닌가요?” 유씨는 영구임대아파트 입주를 신청했다가 4번이나 떨어졌다. 정부, 국회, 지자체 등은 유씨가 몸 누일 작은 방 한칸 마련해주지 못했다. ②

경상남도의 작은 산골 마을에서 유씨는 태어났다. 7살 때 서울로 올라왔다. 아버지는 일찍 죽었다. 아버지는 유씨를 싫어했다. ‘딸’이라는 이유였다. 한번은 아버지가 술 먹고 들어와선 갓난아이였던 유씨를 보더니 “얘는 왜 여기 있냐, 왜 사냐”고 말했다.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아버지는 홧김에 갓난아이를 던졌다. 그때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넌 죽다 살아났다”고 늘상 말했다. 어릴 때 세상을 뜬 아버지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별로 보고 싶지도 않다.

홀어머니는 페인트칠, 미장일 등을 하면서 유씨를 키웠다. 유전적 요인이었는지, 고생을 너무 해서 그랬는지 어머니는 일찍 당뇨에 걸렸다. 가난한데다 몸까지 아프니 삶은 더 고단했다. 그때부터 ‘나라’에 대한 불신이 싹텄다. ‘왜 우리처럼 힘든 사람들을 아무도 안 도와줄까.’ 어린 사춘기 소녀는 의문을 품었다.

유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출했다. 그 뒤로 혼자 살았다.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강원도에도 가고 충청도에도 갔다. 주차 안내,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 여러 임시직을 거쳤다. 21살 때 남자를 만나 임신하고 애를 낳았다. 출산 1년 뒤에 결혼했다. 지금은 이혼했다. 초등학생 아이를 혼자 키운다.

제대로 된 직장에서 일해본 적 없는 유씨는 전전긍긍하다가 자활후견기관의 잡무를 도우며 목공 기술을 익히고 있다. 한달에 80만원을 받는다. “나는 왜 이리도 복이 없나요.” 유씨는 한숨을 쉬었다. 몇년 전,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염을 하는데, 한없이 쪼그라든 어머니의 몸뚱이를 보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사는 건 나까지 딱 끊고 싶어요.” 그의 꿈에 정치인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유씨는 잘 알지 못한다.

“정치에 관심 가져 보려고 노력은 해봤어요. 그런데 돈이 없어 신문을 보기 힘들어요. 요즘 나꼼수인가 뭔가 유행이라고 하던데 들어보고 싶긴 해요.” 좋은 직장이 생기면 스마트폰을 사고 싶다는 유씨가 손에 든 구형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③

더운 날이면 영구임대아파트 주민들은 문을 활짝 열어놓는다. 어느 주민은 “(도둑이 들어도) 가져갈 게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먹을거리는 함부로 내놓지 않는다. “이곳에선 노트북을 길가에 놓고 가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데, 빵 같은 것을 놓고 오면 몇 분 안에 바로 사라진다”고 지역 복지회관에서 근무하는 한 활동가가 말했다. 강영만(가명·54)씨도 아파트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복도 간이의자에 앉아 있었다.

강씨는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프레스 일을 하다가 다리가 말려 들어갔다. 그 뒤로 일을 접었다. “투표라…안 한 지 꽤 됐수다. 다리가 이래서 일단 밖에 다니는 걸 싫어하고, 예전엔 김대중씨를 지지하긴 했는데 다 헛일이더라고.” 그는 “김대중에게 속았다”고 말했다. “김대중이 대통령 되면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잘살게 될 줄 알았지.” 앞으로 누가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강씨는 “누가 되어도 똑같다”고 말했다. ④

한찬영(가명·46)씨의 평생은 가난 그 자체다. 그는 용산 판자촌에서 태어나 약수동 판자촌, 아현동 판자촌을 거쳐 방화동 임대아파트에 터를 잡았다. 주로 공사판 일만 했다. 그마저도 이제는 술에 찌들어 아픈 몸 때문에 못하고 있다. 지난 4·11 총선 때는 “술 먹고 자느라 투표 못했다”고 한씨는 말했다. 지난 대선 때도 투표하지 않았다. 그때는 모든 후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투표 대신 잠을 택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사는 게 어려우니까 서로 정치 이야기는 하지도 않아요. 막걸리 한잔 먹고 자는 게 속 편하다고 다들 생각하지. 사는 게 재미가 없으니까….” ⑤

이정국 정환봉 기자 jglee@hani.co.kr

참고

① 임대아파트 주민을 대상으로 ‘정치 문제에 관해 이웃과 토론하는가’란 질문을 던졌더니 “안 한다”는 응답이 절반을 넘는 51.5%였다. “해도 바뀌는 게 없다”, “정치에 관심 없다”는 설명이 많았다. 하지만 유씨처럼 20~40대 사이에 있는 젊은 계층에서는 탈보수화의 흐름도 일부 확인됐다. <한겨레> 정치의식 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 총선에서 20~49살의 빈곤층 가운데 12.8%가 새누리당을 지지한 반면 같은 집단에서 민주통합당은 61.5%의 지지를 받았다. 통합진보당도 25.6%의 지지를 받았다. 이는 50대 이상 빈곤층의 61.7%가 새누리당을 지지한 것과 비교된다.

② <한겨레> 정치의식 조사에서 ‘지난 4월 총선 때 투표했느냐’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77.9%가 “투표했다”고 응답했다. 하층의 경우엔 이보다 더 많은 79.2%가 “투표에 참여했다”고 답했다. 지난 총선의 실제 투표율 54.3%보다 월등히 높다. 조사를 진행한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은 “투표 참여를 ‘규범’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투표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를 부끄럽게 여긴다”며 “이 때문에 실제와 달리 투표했다고 일단 응답하고 보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조사 결과만 보면 ‘가난할수록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가설을 확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같은 조사에서 “정치에 관심 없다”고 답한 하층은 62.9%로 나타났다.

③ 임대아파트 주민들 가운데도 인터넷을 사용한다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이들은 다른 주민에 비해 상대적으로 풍부한 정치적 정보를 갖고 있었다. 보수 성향을 띠더라도 미세하나마 다른 결을 드러냈다. 새누리당을 지지하긴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를 지지할지는 좀더 생각해 보겠다”며 유보적 태도를 취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한겨레> 정치의식 조사에서는 인터넷으로 정치 정보를 얻는 빈곤층의 35.3%가 안철수 서울대 교수를 지지해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11.8%)보다 높았다.

④ 오가며 대화를 나눈 모든 임대아파트 주민들은 기본적으로 정치를 불신하고 있었다. 70명에 대한 심층면접에서도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정치 문제에 대해 가족·이웃과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화제로 삼을 만한 정치 정보를 구하는 것도 이들에겐 막막한 일이었다. 심층면접에 응한 주민의 90%가 텔레비전·라디오를 통해 정치 정보를 구하고 있었다.

⑤ 70대 이상 고령층을 제외하면 임대아파트 주민 대다수는 인터넷을 ‘새로운 매체’로 인식하면서 큰 호기심을 보였다. 그러나 인터넷을 이용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인터넷 회선 설치에 따르는 비용에 대해 그들은 걱정을 많이 했다. 새로운 정치 정보를 구하는 일이 그들에겐 큰 부담이었다.

이정국 정환봉 기자 jglee@hani.co.kr

 

누가 목소리 없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줄 것인가

등록 : 2012.05.15 18:41 수정 : 2012.05.15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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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의 진단과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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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소득층이 ‘자기배반적’ 정치의식을 갖고 있다는 이번 <한겨레> 조사에 대해 학계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들은 사회경제적 약자에 대한 민주·진보 정당 및 언론의 각별하고도 전략적인 관심을 주문했다. 정리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자신의 자긍심을 외부에서 찾아

정영태 인하대 교수
■ 정영태 인하대 교수(정치학) 한국 저소득층이 보수 성향을 띠는 것은 1930년대 독일에서 나치가 등장한 것과 1860년대 미국 남북전쟁 당시 농민들이 노예해방을 반대한 남부를 지지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저소득층은 자긍심을 외부에서 찾는다. 박정희를 존경하는 저소득층이 많은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외형적 국가발전이 그들에게 만족감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국 저소득층에겐 보수정당이 자아 정체성을 찾게 해주는 하나의 수단이다. 전국적 풀뿌리 조직망이 탄탄한 보수정당이 현실 선거에서도 빈곤층의 지지를 얻고 있는 것이다.

선택가능한 대안 제시 노력부터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
■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는 “상당수의 투표 불참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체제에서 해소되지 않은 역사적 긴장의 본질에 대해 통찰력을 갖게 한다”고 말했다. 투표 불참자의 수는 결국 그들이 “기대하는 대안이 억압된 크기”를 말해준다는 것이다. 그동안 정치활동에 대한 과도한 규제와 대중 참여를 불온시한 분위기가 합쳐져 빈곤층의 정치적 무관심과 투표율의 급락이 나타났다. 민주화 이후 20년 동안 30% 가까이 투표율이 떨어졌는데, 전세계 민주주의 역사에서 이처럼 급격히 투표율이 떨어진 나라는 찾기 힘들다. 선거는 경쟁하는 정치조직 가운데 하나를 보통의 시민이 선택하는 행위다. 그런 면에서 유권자에게 표를 요구하는 정치세력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선택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는 노력이다. (민주·진보 정당 등이) 민주·정치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고찰과 비판적 반성 없이 유권자에게 표를 달라고 일방적으로 강조한다면 지금의 나쁜 상황을 변화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사명을 ‘목소리 없는 사람에게 목소리를 주는 것’으로 정했다. 우리의 경우, 누가 목소리 없는 다수 유권자들에게 목소리를 갖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빈곤층의 사회경제적 요구 주목을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공적 소통의 공간이 조중동 등 보수적 매체의 강한 영향권 안에 있고, 그 틈새를 뚫고 진보적 소통을 매개하는 진보적 신문이나 온라인 매체가 저소득층과 충분히 결합되어 있지 못하다. 보수정당은 지속적 이미지 혁신을 통해 저소득층의 불만을 부단히 끌어안고 있는 데 비해 진보개혁정당은 그렇지 못하다. 국가보안법 폐지와 같은 의제들은 기존 반공·보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있는 빈곤층에게 호소력이 떨어진다. 빈곤층의 사회경제적 요구·이해를 수용하여 이 지점에서 보수정당과 첨예한 대치선을 만들어야 한다. 진보개혁정당은 이제 ‘정치적 개혁주의’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개혁주의’ 이슈를 부각시켜야 한다.

투표동기 갖도록 정당이 노력해야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
■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이라면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투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확신, 즉 투표 동기를 갖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체감할 수 있는 이슈를 쟁점화해 보수정당과 선명하게 차별화하는 정치적 리더십이 중요하다. 정치적 대안이 있어야 계층적 자각이 있다. 따라서 정당의 노력이 무엇보다 우선적인 과제다. 지금 통합진보당 사태로 인해 “진보세력은 믿음직하다”는 신뢰마저 잃어버렸다. 대안을 바라는 대중들에게 전혀 매력이 없어진 정치세력이 된 것이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민주통합당의 중도 논쟁은 정말로 한가한 이야기다. 통합진보당이 몰락한다면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일을 민주당에서 끌어안아야 한다. 민주당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박근혜 왜 지지하냐고? 박정희 잘했잖아…그 딸이니까”

등록 : 2012.05.14 19:46 수정 : 2012.05.15 08:53

가난한 민주주의 상. 빈자의 꿈-보수 집권
임대아파트 주민 정치의식 르포

때이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5월 초 어느날 오후, 서울 강서구 방화동의 한 아파트 단지 앞 정자는 더위를 피하려는 주민들로 북적였다. 여느 아파트 단지와 다르지 않았다. 방화2·3동에 넓게 자리잡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는 2011년 12월31일 현재 1만2564가구가 둥지를 틀고 있다. 대부분 중산층이다.

단지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들,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중년 남성들, 힘없이 그늘에 퍼질러 앉은 노인들이 나타난다. 그들의 외양은 다른 아파트 주민들과 다르다. 1065가구가 모여 사는 방화2동 11단지에는 기초생활수급자, 장애인 등이 모여 산다. 영구임대아파트다. 이곳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있다. 단지 곳곳에 마주보며 들어선 영구임대아파트와 일반아파트를 가르는 경계선이다. 영구임대아파트 주민들은 그 경계선 밖으로 좀체 나오지 않는다. 그들의 공간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산다. 그들은 별말이 없다.

박근혜 지지 이유 묻는데
“박정희 화끈하게 했잖아”
아버지 그림자 짙게 드리워
호남 출신 50대 무직자
“새누리당에서 나와야지”

유일한 스마트폰 사용 40대
“인터넷 시대…안철수 지지”

정자에서 쉬고 있던 박말순(가명·65)씨는 처음부터 퉁명스러웠다. “그건 뭐하러 물어?” 정치의식 설문을 시작하려 하자, 박씨는 단칼에 잘랐다. “이런 거 안 해.” 설문에 응하는 사례로 라면 5개가 들어 있는 꾸러미를 드린다고 하자, 박씨는 마지못한 듯 말문을 열었다. “나는 (오는 12월 대선 때) 박근혜 찍을 거야. 다른 사람들은 ‘깜’이 안 돼. 대통령은 아무나 하나. 내가 보기엔 대통령 할 만한 사람 (박근혜 말고) 아무도 없어.”

따로 묻지 않았는데도 뒤이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박 대통령이 얼마나 잘했어. 그땐 살기 좋았다고. 그 정도는 해야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냐?” 작고 마른 체형의 박씨는 꾀죄죄한 일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의 생애 어느 시기에 잘살았던 적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정치성향이 보수인지 진보인지 물었더니 그의 눈이 둥그레졌다. “보수가 뭐여?”

김명철(가명·76)씨는 단조롭게 지어진 영구임대아파트 단지를 산책하고 있었다. 김씨는 주변 이웃에게 쑥뜸을 놓아주며 푼돈을 벌고 있다.

김씨 역시 박근혜를 지지한다. “보릿고개 없앤 박정희 대통령이 잘하긴 잘했어, 도둑질도 안 하고 말이야. 그 딸이니깐 잘하지 않겠어?” 박근혜가 내세운 정책 공약 가운데 그가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텔레비전에서 멱살잡고 싸우는 꼴이 보기 싫어. 그냥…(박근혜가) 꼼꼼하게 정치 잘할 거야.”

가난한 이들은 이유와 근거를 대진 못했다. 그들의 판단은 직관적이었고 단순명쾌했다. 노인들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좁은 부엌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던 백찬영(가명·48)씨도 박근혜를 지지했다. 가장 좋아하는 역대 대통령으로 박정희를 꼽았다. “화끈하잖아.” 박정희가 ‘화끈하게’ 정치를 하던 시절, 백씨는 10대였다. “박통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박통 말고 다른 대통령을 떠올려본 적이 없다”고 백씨는 말했다.

“부패가 없어질 것 같아서” 박근혜를 지지한다는 그는 유력한 야권 후보인 안철수 서울대 교수에 대해선 “샌님 같아서 정치를 잘 못할 거 같다”고 평가했다.

빈곤층의 보수성향은 출신 지역의 구분조차 무의미하게 만드는 듯했다.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박자순(가명·68)씨는 낮잠을 자다 깼다. 지지하는 대선 후보를 묻자, 박씨는 기자를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여긴 전부 김대중 당 사람들만 있어서 누가 들으면 큰일나.” 그는 손가락을 제 입술에 댔다가 귓속말로 말했다. “나는 박근혜야.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

박씨는 오해하고 있었다. 주민들끼리 정치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니, 이웃한 빈곤층의 민심을 잘 모르는 듯했다. 그는 구석진 곳에서 박근혜 지지 의사를 밝힐 필요가 없다. 기자가 만나본 임대아파트 주민 70명 가운데 절반이 박근혜를 지지하고 있었다. 전남 출신의 그는 경상도 출신의 또다른 정치인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박정희 정도면 괜찮아, 박정희가 정치를 잘하긴 했어. 이명박보다는 전두환이 훨씬 낫고.”

»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4월13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 참석해 인사를 하고 있다. 박 위원장은 19대 총선을 ‘반전 드라마’로 이끌어 명실상부한 대선주자로서 날개를 달았다. 뉴시스
가난한 이들의 정치의식 속에서 박정희가 잘했다는 단순한 기억은 박근혜도 잘할 것이라는 명쾌한 전망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합리적이라기보다 감정적이었다. 그래서 더 굳건해 보였다. 그들의 굳건한 판단에 변화가 생기려면 다른 요소가 필요하다.

전북 장수 출신인 김명석(52·무직)씨는 대파가 담긴 노란 비닐봉지를 들고 집에 막 들어가던 참이었다. 혼자 살고 있는 김씨는 새누리당을 지지하고, 박정희를 존경한다. 그러나 박근혜를 지지하진 않는다. “저쪽에서 젊은 안철수가 나올 텐데, 그러면 남경필 정도가 (새누리당에서) 나서야 하지 않겠어?”

다른 주민들과 달리 김씨는 20여년 동안 시멘트회사에서 봉급 받으며 일한 경험이 있다. 김씨는 “정몽준 의원은 너무 친재벌적”이라는 말도 했다. 심층면접을 한 임대아파트 주민 70명 가운데 ‘친재벌’이라는 단어를 쓴 사람은 김씨가 유일했다.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그런 단어를 구사하지 않았다. 다만 친재벌을 비판하는 김씨조차 새누리당 안에서 대안을 찾고 있었다.

다른 대안을 생각하는 이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건설 막노동을 하는 김용업(43)씨는 “안철수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앞으로 인터넷이 주류가 되는 세상인데 안철수의 강점이 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김씨는 스마트폰을 쓰고 있었다. 심층면접한 70명 가운데 유일했다.

스마트폰 덕분에 김씨는 영구임대아파트 주변에 둘러쳐진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넘어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날품을 파는 일이긴 하지만, 비교적 안정된 수입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강서구 방화동 영구임대아파트의 다른 주민들에게 그런 기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들은 스마트폰을 구입할 돈이 없다. 신문을 정기구독할 여유가 없고, 이웃과 어울려 다가오는 대선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을 여력이 없다.

이정국 정환봉 기자 jglee@hani.co.kr

빈곤층, 상류층보다 복지정책 ‘불신’

등록 : 2012.05.14 19:35 수정 : 2012.05.15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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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층은 자신들을 위한 복지정책에도 불신을 보냈다. <한겨레> 정치의식 조사를 보면 “복지가 확충되면 나의 삶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상층 집단에선 54.5%, 하층에선 49.7%로 나타났다. 복지에 대한 기대가 하층보다 상층이 더 높은 것이다.

복지정책의 구체적인 방향에 대해선 하층의 57.5%가 “보편적 복지보다 선별적 복지가 바람직하다”고 답했다. 같은 대답을 한 상층은 43.4%였다. 상층 집단은 보편적 복지를 더 지지했다. 상층의 55.4%가 “선별적 복지보다 보편적 복지가 바람직하다”고 답했다. 같은 대답을 한 하층은 40.8%였다. 보편적 복지는 개혁·진보정당, 선별적 복지는 보수정당의 정책 방향이다. 가난한 이들이 보수주의 복지정책을 더 선호하는 셈이다.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은 “그동안 조금씩이나마 확대되어온 복지정책이 그들의 삶의 질을 그다지 개선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에 대한 인식에서도 하층은 보수적 성향을 보였다. 상층에서는 50.2%가 재협상을 추진해야 한다고 대답했지만, 하층에서는 43.3%만 재협상을 추진해야 한다고 답했다. 최근 새누리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당선된 이자스민씨와 관련된 질문도 던져봤다. “외국인이 한국 국회에 진출해도 좋다”는 물음에 상층은 65.5%가 동의를 보냈지만, 하층에서는 43.6%만 찬성했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