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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진 교수, ‘위험사회론’ 울리히 벡을 만나다

시놉티콘 2012. 7. 13. 16:32

 

 

“동양·서구 ‘제2근대’ 진입 경쟁…관건은 위험 거버넌스”

등록 : 2012.07.12 18:50 수정 : 2012.07.12 22:10

 

 

지난달 25일 독일 뮌헨의 한 카페에서 만난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와 울리히 벡 뮌헨대 교수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한상진 교수 제공

한상진 교수, ‘위험사회론’ 울리히 벡을 만나다

사회학자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지난달 25일 독일 뮌헨에서 ‘위험사회론’으로 유명한 울리히 벡 뮌헨대 교수를 만나 제2근대화와 동서양의 대화를 주제로 삼아 대화했다. 벡 교수는 근대의 창조적 파괴의 결과로 제2근대가 열리고 있으며, 서구와 동아시아가 ‘제2근대’를 향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경합을 벌이고 있는 만큼 서로 더 많은 대화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교수의 울리히 벡 탐방기를 싣는다.

“동아시아의 자기파괴·혁신
에너지가 넘쳐 인상적이다
중국, 서구 바람대론 안갈 것”

“서구 제2근대 EU가 좋은 예
독일의 안하무인에 반대한다
유럽 전통은 차이 존중해야”

 

“정부는 마치 위험을 정확히 예측하고 관리할 수 있는 듯 떠들지만, 실제로는 위험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시민의 위험 감수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불확실성 시대의 정치는 시민이 위험관리에 참여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는 위험 거버넌스(협치)로 나아가야 합니다.”

 

‘위험사회론’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석학 울리히 벡에게 한국만큼 뜨거운 반응을 보인 나라가 있을까? 1994~95년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잇따라 붕괴했을 때 많은 사람이 그의 이론과 진단을 찾았고, 2008년 그의 첫 방한 역시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공교롭게도 그가 떠난 뒤 곧바로 광우병 위험 담론이 계기가 돼 두 달 동안 700만명의 시민이 촛불시위에 나서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벡 자신도 한국과 동아시아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는 2010년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학술대회에 나와 인상적인 제안을 했다. “서구는 오랫동안 서구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편향된 시각입니다. 한국·일본·중국 학자들이 동아시아가 걸어간 근대의 궤적을 풍부하게 포착하여 서구의 경험이 결코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한 조합이었다는 점을 가르쳐주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나는 그의 확 트인 대화 주문에 가슴이 뛰었다. 세계적 학자인 그가 스스로 서구의 경험에 갇혀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고백한 것이다. 서구 보편주의의 한계를 통렬하게 느끼고 탈출구를 찾으려 노력하는 인물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나는 왜 동아시아에 그토록 주목하는지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려고 동반자인 심영희 한양대 교수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세계사회학회 모임에 참석하는 길에 독일 뮌헨에 들렀다.

 

지난 6월25일 뮌헨의 아담한 카페에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동아시아가 인상적인 것은 근대의 자기파괴적인 경향과 함께 자기혁신적인 에너지가 넘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서구에서는 ‘소진된’ 근대 또는 ‘갈 데까지 다 간’ 근대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습니다. 나는 이런 생각에 반대합니다. 서구에서도 근대 자체의 내적 변화가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것을 ‘제2근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서구 못지않게 그 변동의 힘이 동아시아에서도 강렬합니다.”

 

서구에서 제2근대의 좋은 사례는 ‘유럽연합’의 등장이다. 그러나 민주적 정치통합을 이루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유럽연합의 경제강국이 된 독일은 안하무인입니다. 경제위기가 왔는데 다른 회원국들의 말을 듣기보다 이들에게 변화의 방향을 일방적으로 지시하려고만 해요.”

이런 경향에 반대하여 그는 <독일이 곧 유럽>(German Europe)이라는 도발적 제목의 저술을 다음달에 출간할 예정이다. ‘유럽을 지향했던 독일’이 이제는 ‘유럽을 주무르는 독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치의 표현을 연상시키는 책 제목에 사람들이 충격을 받겠지만, 나는 내 길을 갑니다.”

 

벡의 요지는 근대의 창조적 파괴가 제2근대를 낳고 있으며,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은 코즈모폴리턴적인(세계시민주의적인) 변동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유럽에는 그리스 문명으로 되돌아가는 세계시민주의적인 전통이 있다. “내가 재구성하는 유럽의 전통은 미국 중심의 패권적 세계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다양성·차이를 존중하고 타자들과 공존해야 합니다.” 서구가 그리는 제2근대의 이미지는 최첨단을 달리는 전위적 모습이다. 이것을 벡은 근대성의 급진화로 설명한다. 급진화는 항상 자기 파괴를 수반한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발전 경로는 서구와 다르다. 따라서 제2근대의 경로도 다를 수밖에 없다. 서양은 계몽주의의 자생적 전통 위에서 근대를 열었지만 동양은 자신의 문화를 팽개친 채 서구를 모방하는 근대화의 길을 걸었다. 때문에 창조적 파괴와 같은 직선적인 모델만으로 제2근대를 포착하기 힘들다.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가 훨씬 복합적이다. 최첨단을 응시하기 전에 정체성의 회복, 균형과 조화가 요구된다.

 

분명한 사실은 돌진적 근대화가 거둔 엄청난 성공의 뒷면에서 미증유의 위험사회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한국이나 중국과는 달리 일본은 나의 ‘위험사회론’보다 ‘개인화 이론’을 더 적극 수용했습니다. 그러나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누출 사고 이후 상황이 바뀌었어요. 시민의 위험감각이 매우 높아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은 더는 정책의 방관자나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적극적인 행위주체로 변하고 있다.

“신의 세계를 부수고 근대가 태동한 이래 우리는 과학기술에 의한 진보를 믿었습니다. 민주주의가 삶의 복지를 증가시킬 것으로 가정했어요. 그러나 이 믿음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불확실성의 위험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초미의 관심사는 누가 어떻게 위험을 적절히 예방 또는 관리하는 ‘위험 거버넌스’를 구축하느냐에 있지요.”

 

벡이 내린 결론은 서구와 동아시아가 제2근대를 향한 경쟁에 이미 돌입했다는 것이다.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세계적인 경제위기 관리에서 독보적 능력을 과시한 중국이다. 벡은 중국은 서구와 달리 자신의 고유한 발전경로를 따라갈 것이라 예측한다.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하더라도, 사회 협의 체제를 더욱 발전시켜 경쟁력 있는 위험관리 정부를 만드는 것은 가능할 것입니다.”

 

화제가 그의 ‘개인화 이론’으로 옮아가자 논쟁이 붙었다. “서구의 개인화는 복지국가·문화민주주의·개인주의 위에서 발전한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고유한 삶을 자신의 뜻대로 사는 독립된 주체로 변하지요. 자유의 급진화는 가족 형태의 다양화로 나타납니다.”

 

벡의 이런 주장에 대해 나와 심영희 교수는 한국과 중국의 연구 내용을 들어가며 반론을 폈다. 즉 개인화로 인한 공동체의 소실은 동아시아의 문화에는 상당히 낯설다. 중국의 개인화는 서구와는 달리, 빈곤 탈출을 위한 강한 가족연대를 수반한다. 한국 젊은이의 개인화는 다양한 참여적 네트워크와 함께 움직인다. 개인과 공동체가 같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벡은 또 개인화를 촉진하는 요인으로 인터넷을 들었고, 나는 한국에서 일고 있는 시민소통혁명을 사례로 들며 제2근대의 동력으로 개인화보다 소통양식의 변화가 더 의미있지 않겠냐는 의견을 폈다. “신문·방송 같은 일방통행의 대중매체가 근대를 열었다면, 인터넷으로 시작한 쌍방향 소통의 뉴미디어가 제2근대를 연다고 보는 것이 더 구조적이고 의미심장하지 않을까요?”

 

벡 역시 여기에 공감을 표시했다. 그렇다면 제2근대 경쟁에서 인터넷 강국은 상당히 유리할 것이다. 민주주의와 시민참여의 기반 위에서 새로운 ‘위험 거버넌스’ 모델을 구축하는 모범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벡은 나고야에서 제안했던 ‘동서양의 적극적 대화’를 위해 2014년 봄에 다시 서울에 올 것으로 보인다.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

■ 울리히 벡은 누구?

울리히 벡(1944~ )은 위르겐 하버마스, 앤서니 기든스 등과 함께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회학자로 꼽힌다. 독일 뮌헨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뮌헨대 사회학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1986년 출간한 저서 <위험사회>를 통해 합리성에 매몰된 근대화가 현대사회에 통제할 수 없는 일상적 위험을 초래했으며, 이런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사회적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90년대 이후에도 <성찰적 근대화>(1995), <정치의 재발견>(1996) 등의 저작을 발표하며 성찰에 바탕한 ‘새로운 근대’ 담론으로 효율과 합리성에 치중하는 신자유주의화 흐름을 비판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