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 신자유주의 신랄 성토 진보적 법철학자 로널드 드워킨
토론으로 민주주의 복원 모색 <중산층은 응답하라>
톰 하트만 지음, 한상연 옮김/부키·1만4800원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로널드 드워킨 지음, 홍한별 옮김/문학과지성사·1만2000원
1830년대 초에 미국 사회를 돌아봤던 프랑스 역사학자 알렉시스 토크빌이 여행 도중 어느 돼지 농장 주인을 만났다. 농부와 얘기를 나눠 본 토크빌은 민주주의에는 제대로 교육받은 대중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놀랍게도 미국에선 시골 농장 주인조차 프랑스 정치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을 정도의 식견과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토크빌이 대표작 <미국의 민주주의>(1835)에서 예찬한 미국 민주주의는 그런 ‘시민적 농민’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당시 농업국가 미국에서 그들은 일반적이고 평범한 미국인들이었다. 대체로 자급자족할 수 있었고, 대단한 부자도 지독한 가난뱅이도 없었다. 누구나 글을 읽고 쓸 줄 알았으며, 정치나 국제사회 문제에도 상당한 지식을 과시했다.
톰 하트만의 <중산층은 응답하라>에 따르면, 미국 역사에는 두 번의 ‘위대한 중산층 시대’가 등장한다. 토크빌이 주목한 그들이 바로 첫 번째 시대의 주역이었다. 1700년대에서 1800년대 중반까지 지속된 첫 시대의 물적 토대는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의 땅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온 정착민들은 원주민들 토지를 헐값에 취득할 수 있었다. 사실상 공짜 약탈에 가까웠지만, 그렇게 해서 시민적 농민층, 곧 중산층 자영농이 성장했고 토크빌이 부러워한 미국 민주주의도 그 토대 위에 세워졌다.
그러나 그 시대는 남북전쟁(1861~65) 직후 끝났다. 그 무렵 공짜 토지가 거의 사라진데다 산업혁명으로 소농장 중심의 중산층 자영농들은 급속히 몰락했다. 오늘날 세계 곡물시장을 좌우하는 카길 같은 거대 농업회사들이 나타나 농산물 판매·유통망을 장악했다. 저항이 있었지만 철도의 밴더빌트, 철강의 카네기, 석유의 록펠러, 금융의 모건 같은 막강한 산업·금융 독점자본이 선도한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다. 이른바 악덕 자본가시대 또는 도금시대(Gilded Age)가 시작됐다. 그 시절 미국은 급속히 부강해졌지만 부의 대부분은 거대자본가들 차지였고 노동대중은 가난했다. 대기업에 대항하는 그레인지 운동과 여성 선거권 운동이 일어나고 셔먼 독점금지법이 제정됐으나 부의 양극화와 민주주의 파탄을 피할 수 없었다.
두 번째 중산층 시대는 1929년 대공황과 함께 열렸다. 대공황은 양극화와 민주주의 파탄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대권을 쥔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흐름을 되돌렸다. 누진세 비중을 높이고 사회보장 제도를 도입했다. 강력한 기업규제 장치를 만들고 독점금지법의 실효성을 강화했다. 특히 노동자 세력 강화에 많은 힘을 쏟았다. 공정노동기준법으로 최저임금제를 도입하고, ‘와그너법’이라 불린 전국노동관계법을 제정해 노동자가 직접 노조위원장을 선출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사상 처음 노동자들이 생활임금을 놓고 고용주와 협상을 벌일 수 있게 됐다. 2차 대전 중에는 누진세 체제를 더욱 강화해 고소득층에겐 최고 90%의 소득세율을 적용했다.
하트만은 이런 조처들이 그냥 된 게 아니라, 기업 권력의 횡포를 막고 노동계급을 그에 대항하는 중산층으로 육성하려는 강력한 의지의 소산으로 본다. 루스벨트가 강력한 정부 개입으로 중산층을 의도적으로 창출함으로써 미국 민주주의도 소생시켰다는 것이다. 중산층 없이 민주주의 없고, 민주주의 없이 중산층 없다는 얘기다. 고소득층 누진세율은 70년대 카터 정권 때까지 최고 79%선(88년엔 25%로 급락)을 유지했다. 이 제2의 중산층 시대는 80년대에 부자감세·작은 정부·시장제일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앞세운 레이건 정권 등장과 함께 저물기 시작해 이 책이 출간된 2006년 당시 부시 정권에 이르는 약 30년의 공화당 집권기간(하트만은 90년대 클린턴의 민주당 정권도 친기업적 신자유주의를 추구한 점에선 공화당과 큰 차이가 없다고 본다)에 완전히 무너졌다. 그와 함께 미국 민주주의도 망가졌다. 하트만은 ‘세대전쟁’도 고령자 복지와 젊은 세대 취업난을 대비시켜 젊은 세대를 민주당에서 떼어 놓으려는 공화당의 책략으로 본다. <중산층은 응답하라>는 미국 사회의 처참한 몰골을 구체적 수치까지 제시하며 보여주지만, 2008년 금융공황 이후를 경험한 우리에겐 이미 익숙한 풍경이 됐다.
뉴딜과는 거꾸로 ‘기업 프렌들리’로 치달은 공화당 신자유주의자들은 스스로 ‘보수’ 또는 ‘신보수’를 자처한다. 하지만 하트만은 그들이 보수가 아니라 “사기꾼”이라고 일갈한다. <중산층은 응답하라>의 원제 ‘스크루드’(Screwed)가 바로 사기당하다는 뜻을 지녔다. 부제는 ‘(공화당의) 내밀한 중산층 파괴전쟁, 우리는 거기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다. 여기서 진보적 라디오 진행자 하트만의 민주당 편향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민주주의는 가능한가>의 지은이 로널드 드워킨을, 이 책의 번역판 해제를 쓴 정치학자 박상훈씨는 “존 롤스의 뒤를 잇는 가장 권위 있는 법철학자이자 진보적 자유주의 관점에서 현실문제에 비중있는 발언을 해온 실천적 지식인”이라 소개했다. 드워킨 역시 민주당 취향일 수밖에 없는 자유주의자(리버럴)다. ‘레이건 혁명’으로 불린 공화당의 반격과 정치적 양극화는 60년대부터 시작되는데, 박씨는 이를 ‘보수적 반작용’이라 부르면서 김대중·노무현 정부 뒤의 보수적 반작용 및 정치적 양극화와 비교했다. 미국처럼 한국의 보수정객과 보수언론들도 정치적 반대파를 정책 비판이 아니라 개인적 특성·약점에 대한 경멸, 이념적 비난, 비이성적 야유로 대했다. 진보 쪽도 맞대응했다. 그리하여 합리적 논쟁이 사라진 곳에 남은 것은 목청 큰 다수, 다수결주의의 횡포뿐이었다.
<민주주의는 가능한가>는 공화당을 대놓고 성토하는 <중산층은 응답하라>와 달리 토론과 논쟁을 통한 정치와 민주주의의 복원을 모색한다. 논쟁을 통한 의견 형성 과정을 민주주의의 진정한 가치로 보는 드워킨은 정치적 양극화 속에서 논쟁 자체를 가능케 해줄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원칙, 곧 논쟁의 규범적 기초 두 가지를 설정한다. “첫째, 모든 인간의 삶에는 본질적 잠재가치가 있다. 둘째, 누구나 그 가치를 자기 삶에서 실현할 책임이 있다.”
드워킨은 논쟁 성립의 공통기반인 이 두 원칙을 ‘존엄의 원칙 또는 조건’이라 부르면서, 그 원칙 위에서 ‘테러와 인권’ ‘종교와 존엄’ ‘낙태와 동성결혼’ ‘과세와 정당성’ 등의 민감한 논쟁거리들을 치밀하게 살핀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