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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창간 66주년 특집]한국사회, 사회계약 다시 쓰자 Ⅱ

시놉티콘 2012. 10. 6. 15:05

 

 

[창간 66주년 특집]한국사회, 사회계약 다시 쓰자 Ⅱ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 ㆍ경향신문의 5대 제안

    “전 솔직히 공부 잘해서 대학 가거나 출세하는 것도 부모님 잘사는 것하고 다 연결돼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공부를 하다보면 자꾸 우리 엄마, 아빠, 우리 집, 우리 동네가 부끄러워져요. 솔직히 저희들은 꿈꿀 자유도 없는 것 같아요.”

    정용주 ‘오늘의교육’ 편집위원의 논문에 등장하는 한 초등학생의 말이다. 비단 이 아이에게만 국한된 얘기일까. 지난 8월 서울 여의도 흉기 난동 사건의 피의자 김모씨(30)는 2년 간격으로 4차례 이직과 퇴직을 반복했는데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계약 만료’였다. 그의 분노는 어디서 왔으며, 그를 ‘괴물’로 만든 건 누구일까.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위하여” ‘다른 사회’를 꿈꾼다. “고단하고 억울하고 불안한” 현실을 바꾸고자 한다면 새로운 사회계약이 필요하다.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서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여는 사회계약이 맺어지길 바라며 인천 남동공단의 전자부품 개발·제조업체 우인전자 임직원들이 밝은 표정으로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천정부지로 오르는 집값과 물가, 높은 사교육비와 고액 등록금, 세계 최장 노동시간과 최고 자살률…. 그간 우리는 ‘삶의 팍팍함’을 이야기해왔다. 그 때문인지 요즘 치유와 위로의 언어가 도처에 넘쳐난다. 대선을 두 달 앞둔 지금 대통령 후보인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도 저마다 따뜻한 위로의 말과 함께 꿈꾸는 나라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공약조차 발표하지 않았다.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다른 사회를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 우리는 벌써 깊이 있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아야 했다. 그런데 빈말들의 과잉 속에 실천적 대안의 빈곤이 목격되고 있다. 제헌헌법에서 현행 헌법에 이르기까지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라는 문구가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지만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었다. 아직 제대로 된 사회계약을 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거 때마다 공약이란 이름의 신뢰할 수 없는 계약서가 난무했지만 계약 당사자들이 굳은 실천의지를 담아 꾹 눌러 도장을 찍은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도 그런 상황이 재현될까.

 

경향신문은 지난해 창간 65주년을 맞아 ‘한국사회, 사회계약 다시 쓰자’는 기치로 새로운 사회계약을 맺기 위한 여덟가지 제안을 했다. 사진은 경향신문 2011년 10월4일자 1면.


사실 현시점에서 다음 5년간 국가의 향방을 가늠할 수 없다. 또 운에 맡겨야 할까. 누가 집권하더라도 국정 책임자는 시민의 의사를 배반하지 못하도록 공동체 구성원들의 합의인 ‘사회계약’에 의해 구속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자면 우선 시민들이 각자 자기 목소리를 내고 그 목소리를 담아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를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그려야 한다. 특정 세력의 힘과 이익을 우선한 계약은 결코 사회계약일 수가 없다. 어떤 국가를 만들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지는 그 사회 구성원 다수가 결정하는 것이다. 각계각층 이익의 균형이 담겨 있어야 한다.

경향신문은 지난해 ‘한국사회, 사회계약 다시 쓰자’라는 제안과 함께 여덟 가지의 의제를 던진 데 이어 올해 다시 다섯 가지 의제를 제안한다. 이 사회를 기초부터 다시 세워야 하고, 그렇게 하기에 가장 좋은 시점이 바로 대통령 선거 과정이기 때문이다.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절망과 고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에서 살기를 절실히 원한다면 새로운 사회계약을 쓰는 과정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창간 66주년 특집]5대 제안 - 칸막이를 없애자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 ㆍ[사회계약 다시 쓰자 Ⅱ]

    1963년 조기섭씨(68·가명)는 서울의 명문 사립대에 입학했다. 다들 어려운 시절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그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 생활을 힘겹게 이어갔다. 그 해 겨울방학, 그는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려고 무전여행을 결심했다. 무작정 학생처장을 찾아가 전국 각지의 교우회를 돌아보고 오겠다며 증명서를 써달라고 했다. 종이 한 장만 달랑 들고 돌아다녔는데 가는 곳마다 만난 선배들은 숙소를 잡아주고 용돈을 쥐어줬다. 30일 만에 목포에 이르러 주머니를 털어보자 소 한 마리 값의 돈이 남았다. 한 학기 등록금이었다.

    2012년 서울에 사는 김소민씨(35·가명)는 두 아이의 엄마다. ‘강남 8학군’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그는 종종 ‘대치동 엄마’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요즘은 아이가 말을 떼기도 전에 놀이터에서 얼굴을 튼 엄마들끼리 3~5명씩 그룹을 짓고 문화센터에서 어울린다. 이후 같은 영어유치원을 보낸다. 아이들의 진로는 초등학교 때부터 결정되고 일상도 달라진다. 줄넘기 급수를 높이는 데도 강사를 초빙해 함께 배운다. 그때부터는 어느 학원에 보내느냐를 묻는 것도 실례다. 수입이 얼마냐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다. 강남 일부에서는 배우자를 고를 때 본인뿐 아니라 친정 ‘엄마’도 전업주부이길 원한다. 그것은 부의 상징이다. 또 그래야만 그들만의 ‘삶의 방식’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기도 하다.

    그나마 50년 전 조씨가 살았던 시절에는 노력만 하면 ‘칸막이’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가진 것 없는 그에게 선배들은 단지 같은 대학에 입학했다는 이유로 상상할 수 없는 호의를 베풀었다. 지금도 그가 “신세를 졌다”며 교우회에서 중요 직책을 맡고 있는 이유다. 그러나 50년 후 김씨가 사는 오늘날은 다르다. ‘그들만의 리그’를 뚫기란 쉽지 않다. 최근 부정입학 비리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외국인학교는 그런 그룹의 한 단면이다. 부유층들은 연간 학비가 3000만원이 넘는 이곳에 불법으로라도 자녀를 보내 조기유학을 보낸 효과를 얻는다.

연간 학비가 수천만원에 이르는 외국인학교는 당초 취지와 달리 일부 부유층의 귀족학교가 됐다. 학벌·재산 등의 각종 칸막이가 배제와 차별을 낳고 있는 한국 사회에 또 하나의 칸막이로 작용하는 셈이다. 한 외국인학교 학생들이 5일 오전 등교를 하고 있다. |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 학벌·소득·지역 따른 구성원 무리짓기
갈수록 공고화되는 ‘그들만의 리그’로
‘배제’ 양산하는 사회구조 틀 이젠 깨야


때로는 강제적으로 분리가 이뤄지기도 한다. 임대아파트에 사는 저소득층 자녀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지 않도록 학군 조정을 요구하는 일은 빈번하다. 정용주 ‘오늘의교육’ 편집위원이 쓴 ‘초등학교에서의 사회적 배제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은 그런 사회적 배제의 과정을 보여준다. 한 엄마는 말한다. “우리 아이가 과학을 좋아해서 목동의 학원에서 고액과외를 시켰는데 몇 번 다니더니 싫다고 해요. 아이들하고 대화가 안된대요. 몇 평 집에 살고, 아버지 월급이 얼마이고, 방학에는 어느 나라를 갔다 왔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낄 내용이 없거든요.” 한 아이는 말한다. “어차피 나는 안돼 하는 생각을 6학년 때부터 갖게 돼요. 공부를 해봤자 계속 부진아라는 딱지가 붙고, 집은 못살고 무상급식 이런 것도 쪽팔리고요.”

신광영 중앙대 교수는 “학벌·지역처럼 과거에 의해 규정되는 칸막이와 소득 수준에 의해 만들어지는 현재의 칸막이가 맞물리면서 칸막이 사회는 더 공고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2012년 신입생의 61.7%가 특목고·자사고·강남3구 출신이라는 통계가 있다. 결국 성적 중심이라는 미명하에 고학력·고소득 계층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 경쟁을 시키고 이들에게 다시 학벌을 선사함으로써 그들만의 무리짓기를 공고화시키는 셈이다.

무리를 짓는 건 생존을 위한 본성이다. 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는 앞선 자가 바람을 막아줘 다른 구성원들이 힘을 아낀다. 그러나 한국 사회 구성원의 무리짓기는 언제부터인지 칸막이를 치고 상대편을 배제하기 위해 이용된다. 최재현 서강대 교수는 1990년 한 일간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1960년대 이후 비민주적인 정치구조가 출신 지방과 출신 학교를 따지는 관행을 심화시켰다. 이런 와중에 사람들은 동류들을 찾아 규합하여 일종의 칸을 이루고 다른 부류의 사람들과는 칸막이로 스스로를 차단하는 경향도 있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편견을 심화시키고 있다.” 다른 글에서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칸막이 현상이 보편화되다보니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칸을 넓히려고 혈안이 되기 마련이다. 조그만 하나의 칸으로는 신분이 위태로우니까 동시에 여러 가지 칸을 만들어가려고 애쓴다. 그러다보니 온갖 종류의 단체, 또 무슨 회들이 생겨난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룸살롱 공화국>에서 “칸막이 현상은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핵”이라며 “그걸 이해하면 지역 갈등에서부터 유흥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수께끼가 풀린다”고 주장한다. “은밀한 접대는 칸막이를 필요로 하며, 룸살롱의 가장 큰 장점은 그런 칸막이를 우아하게 구현했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각종 비리사건만 터지면 ‘영포회’니 하는 온갖 ‘칸막이’의 실체가 드러나며 룸살롱도 덩달아 회자되는 까닭이다.

통계청의 2011년 사회조사를 보면 친목·사교단체 참여율은 55.2%에 이르지만, 시민사회단체나 정치단체 참여율은 0%에 가깝다. 이재열·장덕진 서울대 교수가 지난해 ‘사회의 질’을 조사한 논문을 보면 한국은 개인의 경쟁력을 뜻하는 ‘인적 자본’과 어려운 개인들이 서로 돕는 ‘사회통합’ 부문의 순위는 높았지만 ‘사회경제적 안정성’이나 ‘정치 참여’의 순위는 낮았다. 대체로 한국 사회는 사회적 갈등과 문제해결을 공적인 조정보다는 칸막이 속 사적 수단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의 저자 엄기호씨는 ‘단속사회’라는 주제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더 이상 낯선 사람, 타자를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고 본다. 고통을 호소하거나 정치적으로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 순간 그는 낯선 존재, 다른 사람이 돼 배제될 위기에 처한다. 내가 타자를 만나는 것도 두렵고, 내가 타자가 되는 것도 두려워하는 상황에서는 사회적 고통을 공유하는 ‘정치’나 ‘사회’라는 것이 생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발적으로 칸막이를 빠져나온 김소민씨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자녀들만은 자신의 학창시절을 반복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는 그는 “아이를 바꾸는 것보다 세상을 바꾸는 게 쉽다고 정리했다”고 말했다. 그는 경향신문의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 캠페인에 서명한 약 9000명 중 한 사람이다. 칸막이를 빠져나오는 사람이 많을수록 칸막이는 초라해진다. 그만큼 더 많은 사회구성원들이 ‘정치’를 변혁하고 ‘사회적인 것’을 재구성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창간 66주년 특집]5대 제안 - 집은 ‘사는 곳’이다
박철응 기자 hero@kyunghyang.com
  • ㆍ[사회계약 다시 쓰자 Ⅱ]

    회사원 박모씨(40)가 청소년기를 보낸 집은 다락방이 있는 단칸집이었다. 박씨의 부모는 번듯한 2층짜리 건물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박씨는 좁은 단칸집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전세금을 끼고 대출을 받아 산 집이어서 실제 살 수가 없는 ‘내 집’이었던 것이다.

    박씨 가족은 비좁은 집에 살면서 매달 대출이자를 내느라 등골이 휠 지경이었지만 집값이 오를 것이란 희망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좋은 집에서 경제적인 여유를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꿈을 이뤄줄 수 있는 것은 집뿐이라고 단단히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은 산산조각났다. ‘IMF(국제통화기금)’라는 당시로는 이름도 생소한 단어 앞에 무너져 내렸다. 집값은 곤두박질치고 금리는 치솟았다. 결국 박씨의 부모는 대출이자를 견디지 못하고 헐값에 집을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집을 판 돈은 대출금을 갚고 나니 온데간데없었다. 박씨 부모가 한평생을 쏟아부은 집은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국 사회에서 집은 ‘사는 곳’이 아니라 부의 증식 수단, 신분의 상징물이 되었다. 이에 따라 주거권의 왜곡이 심각해졌다.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판자촌 너머로 한국 사회에서 1%의 상징으로 인식되는 타워팰리스 단지가 들어서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부동산 불패신화가 지배해 온 사회
너도나도 불로소득 좇아 ‘청춘을 저당’


▲ ‘몇 동 몇 호’만 기억하는 유목민으로
집으로 돈 버는 시대 사실상 막 내려
이제 ‘소유의 욕망’에서 벗어나자


박씨는 2005년 3억원을 들여 서울 상도동의 한 아파트를 샀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그만한 ‘거금’을 모으기는 힘들지만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 약혼녀까지 은행에서 돈을 빌려 겨우 집을 장만했다. 매달 100만원이 넘는 이자를 내야 했지만 두려움은 크지 않았다. 주변에서도 다들 집은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집값이 하루가 멀다 하고 오르는 시기였고, 집으로 돈을 벌지 못하면 자기만 바보가 될 것이란 조바심이 퍼져가던 때였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앞에 박씨도 무릎을 꿇었다. ‘부동산 불패 신화’가 깨지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더니, ‘하우스푸어’라는 신조어가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아차’ 싶어 뒤늦게 아파트를 내놓았지만 찾는 이가 없었다. 거래가 끊기다 보니 시세를 짐작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그동안 은행에 갖다바친 이자만 해도 1억원은 족히 될 성싶었다. 한마디로 부동산 때문에 2대에 걸쳐 수난을 당한 셈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집은 단순히 거주 공간이 아니다. 부를 창출하는 수단이자 신분을 규정하는 소유욕의 결정체다. 올해 초 피델리티자산운용이 발간한 <은퇴백서>를 보면 1955년에서 1963년 사이에 태어난 700여만명의 베이비붐 세대들은 자산의 74%가량을 부동산으로 보유하고 있다. 집값 등락에 따라 재산의 크기가 좌우되는 것이다.

집에 대한 소유욕이 커진 것과 별개로 소유를 현실화시키기는 더 어려워졌다. 소유한 주택에서 거주하는 비율인 자가점유율은 1970년 71.7%였지만 2010년에는 54.2%로 떨어졌다.

주택보급률이 2008년부터 이미 100%를 넘어섰고 인구 1000명당 주택 수가 2005년 279가구에서 2010년 302가구로 8.6% 증가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 주택을 소유한 가구 비율인 자가보유율은 60.3%에서 61.3%로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집이 늘어나는 만큼 소유자가 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주택을 여러 채 가진 다주택자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전히 집이 ‘사는 곳’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부동산 경기가 침체한 지금도 한국의 집값은 평범한 직장인이 소득을 모아 살 수 있는 수준을 훌쩍 넘어섰다. 지난 6월 기준 국민은행 조사 자료를 보면 평균 소득 대비 평균 집값(PIR)은 서울 지역의 경우 10.2배에 이른다. 소득을 한 푼도 쓰지 않고 10년 이상 모아야 집을 살 수 있다는 결과다. 생활비 등 필수적인 지출을 감안하면 사실상 서울에서 집 사기는 요원한 일이 됐다.

이처럼 비싼 집값을 떠받쳐온 것은 금융권 대출이라는 지렛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6월 말 기준으로 가계부채는 922조원에 이른다. 연체율은 8월 말 6년 만에 1%를 넘기는 등 적색신호가 켜진 상황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이 분석한 2010년 기준 하우스푸어 수는 157만가구로 추산된다. 이들은 대부분 수도권에 거주하면서 아파트를 가진 30~40대 중산층 가구다.

주택 구입이 줄면서 전·월세 시장은 최근 몇 년 새 ‘대란’이라 불릴 정도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국민은행 조사 결과 지난달 전국 전셋값 지수는 2005년 말에 비해 40% 이상 치솟았다. 그런가 하면 월세 비중은 커지고 있다. 한국인구학회가 올해 초 분석한 자료를 보면 2000년 12.6%이던 월세 비율이 2010년 20.1%로 올라섰다. 이를 반영하듯 한국의 주택 시장은 최근 질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집을 사고팔아 돈 버는 시대가 지나갔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시세 차익을 노리는 투자는 자취를 감췄고 오피스텔이나 도시형생활주택 같은 임대수익형 부동산이 인기를 끌고 있다.

집을 투자의 대상으로 삼으면 미래의 부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게 만든다. 강남이라는 이유로 낡고 비좁은 재건축 아파트에 살면서 대출이자 때문에 소비를 줄여야 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모든 투자나 투기는 원하는 결과만을 가져오진 않는다. 앞서 박씨 가족처럼 실패했을 경우 현재와 미래까지 몽땅 허비하는 셈이 된다.

집에 대한 투자는 한정된 자원을 통해 불로소득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이태경 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처장은 “땅은 노동의 결과로 생산해낼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면서 “부동산을 선점해 재테크 수단으로 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누릴 가치를 빼앗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개인과 사회 모두 집에 대한 인식과 철학을 바꿔야 한다. 이 사무처장은 “유럽은 우리처럼 집에 집착하기보다는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기는 데 삶의 초점을 맞춘다”면서 “집을 사서 돈을 벌겠다는 집착을 버리면 훨씬 더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가 공급하는 장기전세주택 ‘시프트’의 경우 내놓을 때마다 높은 경쟁률을 보이며 마감된다. 이명박 정부처럼 소수에게 혜택이 주어지는 보금자리주택분양하는 방식이 아니라, 양질의 장기임대주택 공급을 늘리고, 불로소득을 적절히 환수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중견 건축가 승효상씨는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 집이 허물어진다고 ‘경축, 재개발 확정’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희희낙락하는 민족은 우리 민족밖에 없을 거예요. 그러면서 끊임없이 유목민이 돼가는 거죠. 팔고 좋은 데로 가고 싶으니까 가풍을 만들 시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몇 동 몇 호 숫자로만 기억을 했던, 어릴 적에 자기 공간이 없었던 애들이 크면 귀소할 곳이 전혀 없는 거죠. 이런 문제가 언젠가는 반드시 사회적인 문제가 될 것입니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병석에 있던 여주인공의 아버지는 예전에 살았던 제주도 집에 돌아가면서 평안을 얻는다. 그 집은 남녀 주인공이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꿈을 상징하기도 한다. 집은 ‘사는 곳’이다. 집에 대한 순수한 가치를 깨닫는 일이 욕망에서 벗어나 순수한 삶을 찾아가는 한 갈래 길이 될 것이다.

[창간 66주년 특집]5대 제안 - 평화가 밥 먹여 준다
손제민 기자 jeje17@kyunghyang.com
  • ㆍ[사회계약 다시 쓰자 Ⅱ]

    충북 청주시에 사는 주부 오은영씨(33)의 요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내년 자녀 보육료이다. 내년에 만 1세, 4세가 되는 두 아이의 어린이집 월 보육료 52만4000원(만 1세 34만7000원 + 만 4세 17만7000원)을 모두 부담해야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오씨는 맞벌이인데다, 빚 내서 장만한 집 때문에 소득하위 70% 계층에서 제외된다.

    정부는 지난해 말 이명박 대통령의 지시로 전 계층 보육료 지원을 추진했으나, 최근 국회에 제출한 내년도 예산안에서 현행대로 하위 70%만 지원한다고 밝혔다. 전 계층에 대해 0~2세 보육료를 지원하려면 1조원가량 더 필요하다고 한다.

    “대선 후보들이 무상보육 공약을 내걸고 있고 국회 논의도 진행 중이라지만 어쨌든 정부가 아무리 예산을 짜봐도 현재로선 그 길밖에 없다는 것 아닌가요?”

정부가 차세대 전투기 사업을 위해 책정한 예산이 8조3000억원이고, 이 돈으로 미국 록히드마틴의 F-35 전투기를 40대 정도 살 수 있다는 얘기에 오씨의 눈빛이 달라졌다. “혹시 그 전투기 몇 대라도 당장 사지 않으면 국가 안보에 큰 구멍이 뚫리나요?”

평화체제가 구축되지 못하면 신무기 구입 등 군비증강이 계속되면서 복지 등에 필요한 예산 확대가 그만큼 어려워진다. 국군의날 기념행사에 참석한 국군 전차 행렬이 서울 테헤란로에서 퍼레이드를 펼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한국, 무기 수입 OECD 국가 중 최고
미사일 1발 덜 쏘면 582명 1년 보육료
한국형 복지국가 ‘평화 정착’에 달려


F-35 한 대 가격은 최소 2100억원 정도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전투기를 5대 사지 않을 경우 전국에 있는 오씨 같은 사람들 걱정을 일거에 덜어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그것은 내년 한 해에 국한된다는 점에서 제한적이긴 하다.

국산 대잠수함 어뢰 ‘홍상어’는 지난 7월 동해상에서 시범 발사에 실패했다. 군은 미사일 가격이 비싸 4발밖에 쏘지 못한 채 인수한 탓이 크다고 청와대에 보고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10발까지 쏴보고 군의 요구 성능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 구입 계약을 파기하라고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홍상어’ 한 발 가격은 20억원이라고 한다. 이 어뢰 한 발 값이면 만 1세 영아 582명의 1년치 보육료를 댈 수 있는 셈이다. 대통령이 시험 삼아 쏘아보라고 한 어뢰 10발 값이면 5827명이 내년 보육료 걱정을 덜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국방부가 지난 2일 국회에 제출한 2013년도 예산안을 보면 신무기 구매 등에 쓰이는 ‘방위력 개선비’는 10조5171억원으로 전체 국방예산의 30%를 차지한다. 국방예산 전체는 올해 대비 5.1% 증가했지만 방위력 개선비는 6.3% 늘었다. 국방부는 “북한의 현존 위협에 대응하고, 2015년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대비를 위한 핵심 전력 확보 등에 중점을 두고 방위력 개선에 좀 더 많은 재원을 배분했다”고 설명했다. 군 관계자는 차세대 전투기 사업에 대해서도 “전투기의 수명주기가 25~30년인데 우리 군 전투기의 절반이 이를 넘어섰다”면서 “이런 전투기로는 임무를 수행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반도 분단 상황에서 군의 논리 역시 쉽게 논박하기 어려운 측면이 분명 있다. 하지만 한국이 국방비와 복지비의 비율 면에서 지나치게 국방비 지출이 높다는 점 역시 엄연한 사실이다.

한국에서 마치 ‘선진화’의 기준처럼 돼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를 보면 2012년 기준으로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적 지출 가운데 공공지출은 9.7%로 최하위 멕시코(8.5%) 다음으로 낮은 33위다. 이는 OECD 평균 22.1%의 절반도 안되는 수준이다. 서유럽, 북유럽 국가들뿐만 아니라 헝가리(22.1%), 슬로바키아(17.0%)보다 훨씬 낮다.

반면 각국의 군비 지출에 관한 권위 있는 통계를 담은 스웨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 연감을 보면 한국은 OECD 국가들 중 2007~2011년 무기 수입 1위였다. 중국, 인도 등 OECD에 가입하지 않은 모든 나라들과 비교할 경우 한국은 2011년 한 해 무기 수입액에서 6위를 차지했다. 이에 국방부 관계자는 “안보와 복지는 상충하는 것이 아니다. 군 입장에서는 튼튼한 안보가 복지의 기반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언제나 세계 어디에선가 2개의 전쟁을 수행하느라 세계 1위의 국방예산을 지출해온 미국에서도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비슷한 논의가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 1월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은 향후 5년간 국방예산을 1780억달러 삭감하겠다고 발표했다. 780억달러는 총액에서 줄이고 나머지 1000억달러는 각 분야의 비용 절감으로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냉소적인 반응을 의식한 듯 방위산업체인 제너럴다이내믹스의 해병대용 수륙양용전차 생산계획만을 취소해도 144억달러를 당장 삭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F-35 통합공격전투기 수직 이착륙 버전의 생산을 유예하고 육군이 요구한 지대공미사일 생산계획을 취소하겠다고 했다.

지난해 5월 미국 뉴욕타임스가 주최한 ‘미국은 군사비 지출의 점진적 감소가 가능한가’ 토론회에서 클린턴 행정부의 백악관 예산비서관을 지낸 고든 애덤스 아메리칸대 교수는 F-35 전투기나 버지니아급 잠수함 배치 같은 낭비적 요소가 강한 프로젝트를 중단 또는 축소할 것을 제안했다.

미국이 이러한 목표를 일부라도 실행에 옮길 경우, 당장 내년에 시작될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 협상에서 한국은 더 많은 비용 부담을 요구받을 것이 확실하다. 이는 한국에 국방예산 증액 압박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한국의 내년 현실은 복지비가 늘기는커녕 삭감될 수도 있는 셈이다. 경위야 어찌됐든 한반도는 지난 5년간 평화에서 더 멀어진 것이 분명하다. 평화체제를 만들지 못해 들어가는 경제적 비용, 한반도의 긴장과 그로 인한 막대한 국방예산의 실상은 이제 우리가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더 많은 신무기를 사들여 압도적 힘으로 구축하는 평화보다 다자간 평화체제 논의를 통해 군비축소와 국방예산 감축이 이뤄질 수 있는 평화에 한 발 더 다가가야 한다. 그러면 곧 ‘평화가 밥 먹여준다’는 명제가 현실이 될 것이다. 경향신문이 “한국형 복지국가는 평화국가 만들기와 함께 가야 한다”(구갑우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명제를 진지하게 고민해보자고 제안하는 이유이다.

[창간 66주년 특집]5대 제안 - 증세를 얘기하자
박병률 기자 mypark@kyunghyang.com
  • ㆍ[사회계약 다시 쓰자 Ⅱ]

    경기 분당에 사는 하선정씨(38)는 올해 7세 딸의 유치원 학비 지원을 받고 있다. 월 25만원 정도 된다. 올해부터 유치원 학비 지원이 전 계층으로 확대됐기 때문이다. 결혼 9년차인 하씨가 정부의 지원을 받는 것은 처음이다. 남편 연봉 4500만원이 소득의 전부인 가정이지만, 경기 분당의 아파트(공시지가 3억5000만원 내외)가 매번 걸림돌이 됐다. 1억5000만원의 대출이 끼어 있는 집이다. 하씨는 “매번 소득하위 70% 규정에 걸려 각종 정부 지원에서 제외됐다”며 “동사무소에 문의하면 통상 ‘분당에 집이 있으면 지원을 못 받는다’고 하던데 우리가 소득상위 30%에 속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부가 올해부터 보육료와 유치원 학비 지원 기준을 ‘소득하위 70%’에서 ‘모든 계층’으로 확대하면서 대도시 지역에서는 하씨처럼 비로소 ‘첫 지원’을 받는 가정들이 크게 늘었다.

    소득하위 70%는 월 소득 기준으로 보면 4인가족은 월 524만원, 3인가족은 454만원 이하 정도 된다. 이러면 대부분 가정이 지원을 받을 것 같은데 실은 아니다. 소득인정금액을 따지기 때문에 집값이 비싼 서울과 광역시 거주자는 이보다 훨씬 낮은 소득을 갖고도 지원 대상에서 탈락됐다. 소득인정금액은 소득에다 재산평가액을 더한 개념이다. 현실적으로 도시 지역 맞벌이거나 서울·수도권에서 1가구를 소유하고 있으면 지원 대상에서 탈락된다고 보면 된다.

전 계층 지원은 비로소 도시 중산층 혹은 중산층 이하 가정도 정부의 보육료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월 30만원은 빠듯한 도시 가정에서는 적지 않은 돈이다. 하지만 정부는 0~2세 전 계층 보육료 지원에 대한 부담이 너무 크다며 시행 7개월 만에 내년부터 다시 소득하위 70%에게만 보육료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꾸겠다는 발표를 했다. 예산이 없다는 이유를 댔다.

박민식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원은 “대도시 가정 상당수는 이번에 처음으로 보육료 지원을 받아본 뒤 복지를 체감했다는 사람들이 많고, 세금을 더 내도 되겠다는 쪽으로 인식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며 “정치권이 지속가능한 복지정책을 정말 펴고 싶다면 보편적 복지를 유지하되 누구에게나 세금을 걷는 보편적 증세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편적 복지를 위한 재원 확보를 위해서는 증세 논의가 필수적이다. 보편적 복지의 일환인 전면 무상급식이 실시되고 있는 서울 은평구 은빛초등학교 학생들이 밝은 표정으로 점심을 먹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복지 확대 요구에 정부는 늘 예산 타령
정치권도 “표 떨어진다” 세금 얘기 꺼려
복지 체감 국민 오히려 “세금 더 내겠다”


다시 하씨 가정 얘기로 돌아가 보자. 국세청 근로소득 간이세액표로 추정해 보니 하씨 남편은 매월 11만원 정도 세금을 낸다. 월 400만원 봉급에 4인가족이라는 기준을 썼다. 하씨 가정은 월 25만원의 유치원 학비 지원을 받고 있다. 그러니까 14만원 정도 순수 정부 지원을 받고 있는 셈이다.

14만원은 어디서 지원이 될까? 자신보다 소득이 많은 고소득자와 기업이 낸 세금이다. 하씨는 “유치원 지원 제도가 유지된다는 가정하에서라면 얼마 정도는 세금을 더 낼 의향이 있다”며 “이전에는 내가 세금을 내도 지원받는 게 없어 세금을 더 내는 게 싫었다”고 말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올 정치권의 최대 이슈는 복지 확대다. 보편적 복지냐 아니냐의 논쟁은 있지만, 어쨌든 복지 확대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정치권은 증세 논의는 극히 꺼린다. “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는 이유에서다. 새누리당은 아예 증세 얘기에 입을 닫고 있다. 민주통합당은 ‘부자증세’만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정도의 논의로는 복지 확대에 필요한 재원을 다 마련할 수 없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중산층과 저소득층이 함께 부담하지 않는 부자증세는 고소득층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정권이 바뀌면 중단될 수 있다. 과거 종합부동산세 사례가 대표적이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증세를 하면) 부자가 더 많이 내겠지만 그래도 모든 사람이 세금을 더 많이 낼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장 교수는 지난달 24일 ‘프레시안 창간 특별강연회’에서 “복지는 공짜가 아니라 ‘공구’(공동구매)”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많이, 어떤 사람은 적게 낸 세금을 모아서 공급하는 재화라는 얘기다. 그는 “무상급식 논쟁에서 ‘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손자와 가난한 아이들이 똑같이 돈을 안 내고 밥을 먹는 것이냐’는 비판을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이 회장은 누진세에 따라 세금을 많이 냈기 때문에 그 손자는 더 비싸게 먹는 것이고, 돈 없는 사람들은 부가가치세만 냈기 때문에 싸게 먹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부자는 5000원, 가난한 사람은 1000원을 내고 먹는 밥이기 때문에 ‘공동구매’라는 것이다.

총선에서 내논 복지 공약 기준으로 볼 때 새누리당은 연 27조원, 민주당은 45조원 정도 추가재원이 필요하다. 이는 증세 없이는 도저히 마련할 수 없는 규모다. 증세 중에서도 소득세나 법인세 등 주요 세금을 건드려야 확보할 수 있다. 세금감면을 없애고 토목공사를 줄이는 등 아무리 짜내도 연간 15조원 이상은 마련하기 어렵다.

김정은 참여연대 복지노동팀 간사는 증세에 부정적인 인식이 퍼진 것에 대해 “1차 원인은 세금을 내는 사람들이 복지 지원을 체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여기에다 증세 얘기만 나오면 덮어놓고 ‘세금폭탄’을 주장해 중산층과 서민들까지 불안감을 키운 일부 언론들의 문제도 있다”고 말했다.

홍종학 민주통합당 의원 조사를 보자. 이명박 정부가 행한 법인세 감세의 2010년 법인 1개당 평균 감면액은 1682만원이다. 그런데 출자총액제한 대상 대기업 집단은 30억6000만원, 과표 5000억원 초과 재벌은 155억원이나 덜 냈다. 같이 세율을 내려도 감면액은 이렇게 차이가 난다. 바꿔 말하면 법인세를 그대로 유지했더라면 재벌 1개 기업당 평균 155억원을 더 걷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일반 기업이 더 내는 1682만원의 약 1000배다.

고소득층에 대한 증세도 같은 논리다. 같은 세율로만 올려도 고소득자가 세금을 더 많이 내게 된다. ‘버핏세’처럼 별도의 부자세금을 마련하지 않아도 된다. 연봉 1억원인 사람과 3000만원인 사람에게 1%포인트 세금을 올린다고 가정해 보자. 단순 계산으로도 1억원 소득자는 연간 100만원, 3000만원 소득자는 30만원을 더 낸다. 저소득자는 상당액을 복지 지원으로 돌려받으니까 순부담은 더 줄어든다. 중산·서민층 입장에서는 “세율 같이 올려 세금 더 내자”고 선수를 치고 나올 만하다는 얘기다.

정치권이 증세 논의를 피하는 또 다른 이유는 여야가 복지를 정략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작은 복지를 주장하는 새누리당과 큰 복지를 내세웠지만 복지재정을 채 마련하지 못한 민주당의 이해관계가 암묵적으로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시민사회단체에서는 정치권이 ‘복지 민심’이 달라진 것을 모르고 증세 논의에 지나치게 위축돼 있다고 지적한다. 2006년 노무현 정부가 ‘2030 정책’을 냈을 당시와 달리 지금은 보육비 지원 등을 통해 복지를 체감한 국민들이 늘었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명확한 복지 지원 내역을 마련해 국민을 설득하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오건호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공동위원장은 “화려한 복지정책을 내놓고 재원 마련 방안을 내놓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포퓰리즘”이라며 “증세는 정책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으로, 의지가 있다면 정치권이 좀 더 진정성 있게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창간 66주년 특집]5대 제안 - 보육은 사회적 책임이다
정환보 기자 botox@kyunghyang.com
  • [사회계약 다시 쓰자 Ⅱ]

    경기 안산에서 8개월 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장모씨(37)는 출산과 함께 하던 일을 그만뒀다. 음악 학원 강사를 했던 장씨는 최소한 갓난아이 때만이라도 엄마가 직접 육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경제활동을 그만뒀다. 비록 자영업을 하는 남편의 벌이가 안정적이진 않지만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시기는 20개월 이후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장씨의 결정에는 정부의 무상보육 확대 정책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정부는 돌연 ‘다른 얘기’를 꺼냈다. 지난달 24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보육지원체계 개편안은 장씨와 같은 전업주부를 ‘역차별’하는 내용이었다. 올해는 0~2세 아이를 보육시설에 맡기는 모든 가정에는 12시간의 종일반 보육비가 지급됐지만, 이번 정부 개편안은 내년부터 맞벌이 부부와 전업주부 가정을 구분해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약 7000억원의 재원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전업주부 가정 아이에게 지급해왔던 보육시설비를 절반 가까이 깎아버린 것이다.

    장씨는 “놀고 싶어서 노는 것도 아니고 돈이 넘쳐나서 경제활동을 포기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정책이 오락가락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전면 무상보육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소득상위 30% 가구는 보육비 전액 지원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정부의 얘기는 아리송하기만 하다. 당장 소득 상위 29%와 31%를 나누는 기준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는 아이 보육을 위해 맞벌이를 그만둘 수 없는 사람들까지 졸지에 고소득자로 몰려 이제껏 받아오던 보육비가 뚝 끊기는 것도 합당한 조치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다.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 가파른 고령화 속도, 이로 인한 사회 전체의 복지 부담은 진보·보수 할 것 없이 모두가 걱정하고 있는 사회문제다. 찬반 양론이 격하게 대립했던 무상급식에 비해 영유아 무상보육 정책의 필요성이 대체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이 같은 맥락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비록 정부가 제동을 걸긴 했지만 ‘경제적 부담 때문에 출산을 기피하는 사회구조는 깨뜨려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는 어느 정도 형성돼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근시안적 접근 방식이다.

아동이 좋은 환경에서 보호받고 교육받는 것, 보육은 여성이나 개별 가정이 아닌 국가와 사회가 책임져야 할 기본권이다. 서울시청 직장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육아교사들과 함께 놀고 있다. |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 사회 구조는 맞벌이가 필수인데
육아를 보는 시각 여전히 전근대적
개별 가정·여성의 문제로 바라봐


▲ 영·유아 양육 부담 덜지 못하면
출산 기피 풍조 못 벗어나


이명박 대통령은 2007년 대선 후보 시절 공약으로 “2012년까지 0~5살의 보육비를 전액 지원하겠다”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지지부진하던 무상보육 공약은 지난해 8월 여당에서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이 제기한 무상급식 찬반 주민투표를 앞두고 다시 나왔다. 반대의 목소리는 찾기 힘들었고 지난해 말 관련 법이 통과되면서 올 3월1일부터 시행됐다. 예산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절반씩 부담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준비가 부족했다. 보육비를 댈 돈이 떨어진 지자체는 국가에 손을 벌렸고 예산을 짜야 하는 기획재정부는 국회 탓을 했다. 이 같은 흐름에서 ‘선별 지원’을 골자로 하는 보육체계 개편안이 등장했고,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오락가락하는 정책에 넌더리를 내고 있다.

일단 정부의 선별 지원안이 국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예산안을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권한은 국회에 있고 야당은 물론 여당에서조차 정부의 개편안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이 조금 더 지원된다고 해서 보육 문제가 당장 해결되리라 기대하는 것 역시 힘들다.

보육을 위한 사회적 지원의 필요성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육아를 개별 가정의 문제, 특히 여성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는 시각이 우리 사회에는 강하게 남아 있다. 사회·경제 구조는 이미 기혼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와 맞벌이가 필수인 쪽으로 바뀌었는데도, 육아를 보는 관점은 아직도 전근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진공상태나 다름없는 사회적 영·유아 보육체계 아래에서 아이 엄마들은 시어머니나 친정엄마에게 통사정을 하거나 ‘조선족 아줌마’를 고용했다. 이마저도 어려운 엄마들이 급증하면서 어린이집 수요도 폭증했다. 남에게 양육을 맡기는 데 드는 비용은 고스란히 일하는 여성의 몫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아의 부담이 덜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이는 결국 여성들의 ‘출산 파업’이라고 할 정도의 심각한 저출산으로 이어졌다.


국가는 ‘돈 주면 될 것 아니냐’는 시각부터 벗어던져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민간부문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는 보육시설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정책적 접근이 필요하다. 보육비마저 차별적으로 지원할 방안을 궁리하고 있는 정부에는 어쩌면 과도한 요구일지 모른다. 하지만 시장 중심으로 형성된 현행 보육체계에서 정부가 보육비 지원액을 무작정 늘리는 것은 자칫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수 있다. 지난해 전체 보육예산 2조5600억원 가운데 79%가 보육료 지원과 양육수당 등 현금 지원에 들어간 반면, 공공시설 설립에는 불과 0.46%밖에 쓰이지 않았다. 국가가 장기적 차원에서 보육정책 수립의 책임을 방기하며 민간 영역에 의존해 온 결과, 국공립 시설은 전체 보육시설의 약 5%에 불과한 구조가 형성됐다. 지난 2월 보육료 인상을 요구하며 전국의 민간 어린이집이 집단 휴업에 돌입해 보육대란을 일으킬 뻔했던 사태는 지금 같은 과도한 시장 의존형 체계에서는 지속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는 문제다. 민간 어린이집과 유치원들도 나름대로 불만이 많다. 정부의 통제로 낮게 형성된 보육료 탓에 교사들은 저임금에 시달리고 원장은 운영에 애로를 겪으면서 폭증하는 수요를 겨우 감당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심심찮게 터져 나오는 보육시설에서의 급식사고나 안전사고, 아동폭행 등의 사건을 시설 운영자나 교사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는 이유다.

1991년 영유아보육법이 제정된 데는 단초가 있었다. 서울 망원동에 사는 맞벌이 부모가 밖에서 문을 잠그고 출근한 뒤 연립주택 지하에서 불이 나 4, 5세 자매가 죽은 사건이 그것이다. 20년이 지났지만 별반 달라진 것은 없다. 지난해 12월 인천 부평구의 한 단칸방에서는 한밤중에 불이 나 6살 여자아이가 숨졌다. 혼자서 딸을 키우던 20대 엄마는 화재 당시 아이를 재우고 문을 잠근 뒤 유흥업소에 아르바이트를 나간 상태였다.

보육비를 소득 수준에 따라 차별적으로 줘야 할지, 전면 무상으로 지원할지를 놓고 고민하는 사회에서는 이 같은 비극적인 사고가 언제든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정책 당국이 보육비 지원 대상을 어디까지로 해야 할지를 놓고 책상에서 씨름하는 동안 맞벌이 부부와 혼자 된 엄마는 한 푼을 더 벌기 위해 아이를 위험 속에 던져 놓고 문을 잠근 채 집을 나서야 한다. 부모만이 아이를 키우는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한 명의 아이가 어른이 되기까지는 사회 전체의 돌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