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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1~5]

시놉티콘 2012. 10. 25. 15:46

 

 

처음 가본 북한... 숨이나 제대로 쉴 수 있을까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①] 고려항공, 타보니 괜찮던데

12.06.16 14:15l최종 업데이트 12.07.27 13:54l
저는 오래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가게 됐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기게 됐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어머, 돌았나봐. 거기가 어디라고 여행을 가!"

기독교 신자이면서 보수·반공주의자인 한 평범한 아줌마가 북한으로 여행을 간다니까 주위 사람들로 부터 나온 첫 반응이다. 그것도 남한 여행사가 안내하는, 예전의 금강산 관광 같은 안전한 단체 여행도 아니고, 남편과 단둘이서 안내원들과 함께 열흘 동안 북한의 여기저기를 돌아보는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평소 여행을 아주 좋아하는 남편이 다음 여행지로 찾다 찾다 결정 내린 곳이었다. 북한 관광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남편이 인터넷을 통해 알아낸 것은 북한이 한국 국적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광을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미국 국적을 갖고 있는 우리 두 부부도 갈 수 있었다.

내키지 않았던 여행의 시작

북한 관광증은 이렇게 생겼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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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에 철저하고 세심한 남편은 여행지가 결정되면 몇 개월 전부터 그 나라에 대해 꼼꼼하게 연구한다. 그러니 여행가서 낭패를 보는 등의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가려는 북한은 우리가 남한에서 받은 '반공교육' 때문에 아직도 머릿속에는 무시무시한 곳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더구나 남북관계 그리고 북미관계가 지난 몇 년간 최악이지 않았는가. 미 국무성 누리집에 들어가 보니 북한은 위험한 곳이므로 여행을 자제하라고 적혀 있었다. 신변 보장도 되지 않으며 만일의 사태에도 국무성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극히 제한돼 있다고도 적혀 있었다.

내게는 썩 내키지 않는 여행이었지만, 이미 북한이 여행지로 결정됨에 따라 그냥 따라나서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 나름대로 북한 여행에 의미를 부여해 보기도 했다. 그들은 우리와 얼마나 다른지, 그 이질감은 어느 정도며 그들은 정말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실제 가서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여행사는 열흘동안 차 안에서 먹을 만한 스낵류, 그리고 운전기사와 안내원들을 위한 약간의 선물을 준비해 갈 것을 권했다. 또 북한 사람들은 자존심이 아주 세니 선물을 줄 때는 조심스럽게 예의를 갖추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빈틈 없던 남편이 변했다

북한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다고 하니 몇 사람의 북한 동포를 만나게 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가능한 많은 선물을 사서 나눠주기로 했다. 우리의 선물을 받고 기뻐할 북한 동포들의 얼굴을 떠올리며(베풀면서 얻게 될 만족 역시 미리 느끼면서) 들뜬 마음으로 우리 부부는 선물을 준비했다. 최대한 많이 준비했다. 하나라도 더 많이 사서 그곳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베풀 수 있는 자'의 오만한 자기만족이 나를 움직였다.

하지만 내 남편의 동정 어린 눈빛과 말투에서는 진실함과 순수한 마음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순간,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서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못마땅했다.

'오랜 세월 동고동락하며 살아온 아내, 자식, 형제, 자매 그리고 친구들에게는 매사 빈틈없는 모습만 보여주는 날카로운 사람이 어떻게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머릿속에만 있는 아련한 존재들에게 이렇게 애틋할 수 있을까.'

한편, 내 마음 속에서는 순수함으로 북한 동포를 대하다 상처를 받을 지도 모를 남편을 생각하니 측은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쩌나, 저 꿈이 깨져 버리면 가슴이 아플텐데. 그래, 지금 얼마 남지 않은 순간이라도 순수한 마음을 만끽하게 해주자.'

측은지심에 너그러운 마음까지 생겨 남편의 모든 요구사항에 토를 달지 않고 열심히 내조했다. 앞으로 남편에게 닥칠 실망스런 현실에 대해 나름 위로의 말들을, 꽤 멋들어진 문구로 생각하면서 말이다.

평소 남편은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통해 식량부족으로 북한 주민들이 고생한다는 뉴스를 들을 때마다 슬퍼하며 경제적으로 윤택한 남한이 좀 도와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남북관계, 그리고 북미관계가 좀 더 발전해 평화롭고 안정된 관계를 유지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남편은 2008년 미국 대선 때 "평화를 위해서는 세계의 어떤 지도자와도 직접 만나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천명한 민주당 후보 버락 오바마에게 주저 없이 한 표를 던졌다(보수적인 나는 대북강경론자였던 공화당 후보 존 매케인을 택했다). 비록 그는 당선 후 북미관계 개선을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지만.

'고려항공'... 솔직히 두려웠다

우리 부부는 일단 베이징에 도착해 북한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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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1년 10월 2일. 드디어 우리 부부는 터질 것 같은 가방 4개를 들고 집을 나섰다. 물론 마음속에는 서로의 호기심 보따리를 마음 가방에 챙겼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출발해 먼저 중국 베이징으로 향했다. 베이징 공항에서 평양으로 가는 북한 고려항공 탑승구에 이르자 귀국하는 북한 사람들과 여행객을 보이는 사람들, 그리고 외교관 혹은 비즈니스맨으로 보이는 서양인들이 탑승 시간을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북한 사람들은 대부분 남성이었다. 그들과 섞여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혹시라도 말을 시키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일기도 했다. 가슴에 김일성 주석 배지를 달고 있는 북한 남성들을 막상 처음 접하고 나니 두려움과 긴장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비행기에 오르자 온몸에 전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태어나서 막연히 우리의 반쪽 민족이 북녘땅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된 건 초등학교 때였다. 그런데 40여 년이 흐른 뒤에 처음으로 북한에 간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전율이 느껴질 수밖에.

고려항공 비행기 승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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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박하고 자그마한 러시아산 비행기 좌석에 착석했다. 예쁘고 얌전한 북한 승무원이 다니면서 승객들에게 인사했다. 한국에 가는 비행기에서 보던 우리 딸들과 다를 게 없었다. 가식이 보이지 않는 순수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승무원들은 외국인들을 자주 대하는 직업이므로 모종의 훈련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됐다. 이들에게서는 아직 북한 동포들의 참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비행기 안에 있는 모니터에서는 내게 너무 익숙한 베르디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를 대표하는 이중창 <축배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북한의 성악가들과 오케스트라단이 함께 음악회를 하고 있었다. 무대 뒤편에 붓글씨체의 붉은 글씨들만 없었다면, 한국의 음악인들이 공연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세련된 성악가들, 그리고 외국에서 초빙해온 음악가들까지... 실력이 아주 우수했다. 나도 성악을 전공했고, 무대에서 많은 연주를 했던 사람이라 속으로 오페라의 익숙한 선율을 따라 부르며 깊은 향수에 빠져들고 말았다. 베이징에서부터 1시간 반 남짓한 비행시간 동안 북한 여행에 대한 긴장과 호기심을 한순간 잊게 됐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비행기 안내 방송에서 나의 안락함을 깨워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곧 도착하니 준비하란다. 그런데 말씨가 한국의 어떤 코미디언이 북한 아나운서를 흉내 내던 그 말투였다.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내 지금의 현실을 직시하며 몽롱해져 있던 내 마음은 다시 재정비 상태에 들어갔다.

순박한 미소가 우릴 반겨주네

고려항공 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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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짝 졸여진, 긴장된 마음으로 비행기 트랙을 걸어 내려왔다.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어릴 때 나는 리틀엔젤스(국위선양을 목적으로 1960년대 창설된 어린이예술단)의 단원으로 세계 각국을 여행했는데, 당시 김포공항으로 귀국할 때 꼭 이렇게 비행기로부터 트랙을 걸어 내려왔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김일성 주석의 사진이 커다랗게 걸려있는 것을 보니 북한에 도착했음이 분명했다. 공항청사는 수리 중이어서 임시로 마련된 청사에 들어섰다. 임시청사는 조그맣고 소박한 읍내의 버스터미널 같았다. 외국 관광객들, 그리고 해외 출장에서 귀국하는 것처럼 보이는 북한사람들... 의외로 많은 사람들로 임시청사는 북적거렸다.

공항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어두침침한 색의 군복과 같은 옷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짙은 청색 유니폼을 입은 여성근무자들이 훨씬 더 멋있게 보였지만, 내 눈에는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무뚝뚝한 군인들로 보였다.

공항의 첫인상은 전쟁 당시의 역전을 배경으로 찍은 지루한 흑백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나의 흥분된 마음과 긴장감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듯한 무심한 얼굴 표정들. 오색찬란한 내 감정들이 철저히 외면당하는 것 같았다. 세관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다시 긴장하게 됐다. 내 인격이 말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공항에서 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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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우리 부부 차례가 됐다. 흑백 다큐멘터리 영화에 나올 것만 같았던 풍경 속 세관 직원이 갑자기 시골 마을의 순박한 역장 아저씨처럼 보였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옛사람을 반갑게 맞이하는 듯한 함박웃음. 그는 그렇게 우리 부부를 맞아줬다. 늘 영화에서 봐왔던 무뚝뚝하고 무서울 것만 같았던 인민군의 모습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 지쳐 보이는듯한 겉모습과는 달리 순박한 미소 속에는 따스하고 정겨운, 천상 없는 우리네 아저씨들의 미소가 담겨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관 수속은 솔직히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단했다. 나는 이들이 우리 가방을 열고 샅샅이 검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비행기 안에서 작성한 신고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끝났다. 다만, 신고서에 적혀있는 휴대전화는 가지고 들어갈 수 없으니 공항에 맡겨 놓고 출국 때 찾아가라고 했다.

세관을 통과하고 보니 바로 5미터 남짓한 거리에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그 문을 통과하고 나면 지구가 아닌 생소한 행성이 있을 것만 같은 호기심과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과연 어떤 사람, 어떤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편안한 마음으로 숨이나 제대로 쉴 수가 있을까.

조촐하고 평범한 작은 문이 열렸다. 마치 막이 올라가면 노래를 부르러 무대에 나가는 가수의 심정으로 심호흡을 하고 북한으로의 첫발을 내디뎠다.

 

'동무'? 남편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②] 평양에서의 첫날밤

12.06.18 14:24l최종 업데이트 12.07.27 13:54l
저는 오래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가게 됐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기게 됐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북한이라는 '미지의 세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우리의 여행을 준비해줬던 미국 여행사로부터 얻은 정보에 따르면 두 명의 안내원과 한 명의 운전기사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우리 부부가 세관을 통과하고 난 뒤, 공항에서 우리를 금방 알아챈 두 선남선녀가 뛰어오듯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부부가 낑낑거리며 끌고 온 가방들을 얼른 들었다. 두 남녀는 걸어가는 동안 우리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머나먼 미국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힘이 드셨느냐"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여 잠시 착각했다" "휴가 여행으로 조국을 찾아주신 우리 동포님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등등. 졸지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우리의 '조국'이 돼 버렸다.

그들은 우리 부부의 어색함을 덜어주기 위해서인지 쉬지 않고 말을 걸었다. 그동안 일부 재미동포들이 이산 가족을 만나기 위해 또는 친선을 목적으로 한 대표단으로 평양에 오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우리처럼 순수히 관광을 목적으로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우리의 운전기사는 '로동당원'

왼쪽부터 남편, 운전사 리인덕씨, 남성 안내원 리만룡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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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긴장을 많이 했는지 내 의지를 조절하는 뇌 신경기능이 잠시 멈춰버린 것 같았다. 마치 무중력 상태인 달나라에서 허공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자동차 앞에 도착해서야 의식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마 나의 무의식 속에는 북한 사람들이 이럴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래서 내 머릿속의 프로그램이 리셋되고 있었던 것 같다.

자동차에 오르기 전 우리는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자동차 속 좁은 공간에서 서로에 대한 어색한 탐색전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 손으로 우리 손을 꼭 잡으며 반가움을 전했다.

호남형인 남성 안내원의 이름은 리만룡. 평양외국어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나이는 서른다섯. 그는 약사인 아내와 두 아이가 있다고 했다. 웃는 인상이 친근감을 더 해줬다. 그리고 아주 예의가 밝았다.

첫눈에 봐도 단정하고 멋을 잘 내는 여성 안내원은 김설경. 하얀 눈처럼 깨끗한 성품을 가지면 좋겠다는 뜻으로 아버지께서 직접 이름을 지어주셨단다. 나이는 스물다섯이며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했다. 아직은 미혼이지만, 앞으로 결혼할 사람이 있다며 남자친구에 대한 은근한 자랑을 덧붙였다. 그때, 내 머릿속 정보입력 담당 기관이 다시 한 번 기능을 멈췄다. 북한 여성으로부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와 말투를 들었기 때문이다. 의외였다.

순박한 아저씨 같은 운전사의 이름은 리인덕이다. 나이는 마흔하나이며, 고등학교 졸업 후 줄곧 운전을 했다고 말했다. 기혼이며 두 아이의 아빠로 아이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겁단다. 내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순간 나는 스스로 되뇌었다. '아니, 난 대체 어떤 모습의 아빠를 이곳 북한에서 찾으려 했던 거지? 왜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모습에서 갑자기 배신감이 느껴지는 거지?'라고. 내 머릿속 신경세포가 갈피를 못 잡는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여성 안내원이 말했다.

"앞으로 우리를 위해 운전해 줄 리인덕 동무는 운전을 시작한 후 지금껏 사고가 한 번도 나지 않았습네다. 리인덕 동무는 조선 로동당 당원입네다. 리만룡 동무와 저는 아직 당원이 아닙네다."

이말을 듣자 몸둘 바를 모르고 수줍어하며 부끄러워 하는 운전수 리인덕 아저씨의 모습은 내 뇌리에 박혀 있는 노동당원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마 내 감춰둔 의식 세계에서 북한은 우주 밖, 외계인들이 사는 나라이길 기대했었나 보다. 아니면, 속세와 단절돼 있어 그 어떤 평범한 상식도 통용되지 않는, 도깨비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신기한 나라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공산 혁명의 수도' 평양의 퇴근길

전기버스가 보인다. 버스 안에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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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와 열흘 동안 함께 북한을 다닐 자동차는 은색 7인승 밴이다. 북한에서 생산되는 남북합작기업인 평화자동차에서 생산됐다고 들었다. 운전사 아저씨가 잘 관리한 흔적이 배어 있었다.

자동차가 평양 시내를 향해 가고 있는 모양이다. 여성 안내원은 내게 남성 안내원은 남편에게 뭔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열심히 듣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 아무 소리도 알아듣지 못했다.

5명을 태운 자동차는 회색 아스팔트 길을 무표정으로 달린다. 표정을 달리할 어떤 장애물도 없이 온통 회색빛인 세상을 달린다. 드디어 눈에 익숙한 건축물이 보인다. 파리의 상징인 개선문보다 더 규모가 큰 개선문이라는 설명이 들린다. 파리 개선문은 컬러 사진 속에 있는 것 같다면 평양 개선문은 흑백 사진 속에 있는 것 같았다.

평양 개선문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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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 봤다. 멀리서 보던 것보다 훨씬 웅장하고 멋있다. 먼 발치서 지레짐작하고 그냥 지나치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비단 건축물뿐만 아니라 인생사 모든 면에서 범하기 쉬운 교훈이 아닌가 싶다.

안내원들은 개선문의 역사적 의미를 열심히 설명해줬지만, 내 눈과 귀는 주위 사람들의 모습과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들과 청바지 차림의 여성이 눈에 띄었다. 개선역(지하철역이라고 함) 앞에 서 있는 전기버스, 광장 끝에 보이는 벽화, 그리고 주위 건물 위에 적혀 있는 구호들이 눈에 보였다.

그러나 정작 '내가 지금 평양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것은 시내로 들어가면서 본 창밖 풍경이었다. 퇴근 시간이 돼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역사책이나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공산주의 국가, 바로 그 모습이었다.

평양의 퇴근길. 사람들은 주로 국방색이나 진한 고동색 인민복 차림에 일부는 모택동 기록영화에서 봤던 모자(붉은 별이 붙어 있는 둥근 모자)를 쓰고 있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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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주로 국방색이나 진한 고동색 인민복 차림에 일부는 모택동 기록영화에서 봤던 모자(붉은 별이 붙어 있는 둥근 모자)를 쓰고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옷과 거의 비슷한 색깔의 배낭을 메고 집을 향해, 아니면 버스정류장을 향해 걷고 있었다. 자본주의 국가의 거리 풍경에만 익숙한 내 눈에 비친 평양 퇴근길 풍경. 이 풍경 속 사람들의 모습은 사람들의 영혼마저도 위축돼 정지 상태인 것처럼 보였다.

이 놀라운 풍경은 영원히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구상에서 이곳에서만 유일하게 볼 수 있는 풍경 하나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고저 '동무'라고 부르시면 됩네다"

여성 안내원 '설경이'(왼쪽)와 함께 찍은 사진. 설경이는 후일 우리 부부가 평양에 두고 온 딸이 돼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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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곧바로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이 음식점 이름은 '민족식당'. 남편이 미리 조사해놨던 평양 유명 식당 중 하나였다. 식당 내부는 조화들로 나름 신경 써서 치장해놨다. 외국 관광객들이 오면 무조건 한 번은 들르게 하는 식당인 모양이다. 옆 테이블에서는 중국말 소리가 들린다.

이곳에서는 여러 종류의 북한 민속음식을 맛볼 수 있다고 했다. 너무 많은 종류의 음식들이 뒤섞여 있어 음식 고르기를 포기하고 안내원들에게 음식 주문을 맡겼다. 두 안내원은 우리를 위해 정성껏 음식을 주문했다. '조국에 관광 온 재미동포 부부'에게 선보일 음식이니 오죽 신경 써서 고르고 싶었을까. 우리 부부의 환영 파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구이와 냉면으로 식사를 마친 뒤 안내원들은 자신들이 속해있는 조선국제여행사를 소개했다.

조선국제여행사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안내하는 일을 맡고 있으며 영어과, 독일어과, 프랑스어과, 스페인어과, 러시아어과, 중국어과, 일본어과 등이 있는데 자신들은 영어과 직원들이라고 했다. 우리가 미국에서 왔기 때문에 영어과 직원들이 나왔지만, 우리는 정겨운 우리말로 대화를 나눴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남북 간의 언어가 이질감이 커져 이러다가 통일 후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던 어느 학자의 말이 생각났다. 기우도 그런 기우가 없다. 우리의 의사소통은 완벽했으며 이들의 억양에서 나는 우리 언어의 다양성을 다시 한 번 실감했을 뿐이다.

식사 중 나온 대동강맥주 몇 잔이 돌자 벌써 남자들은 경계심을 풀고 친근한 자세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로서는 전혀 재미없는 이야기, 북한의 맥주맛은 어떤지, 담뱃맛은 어떤지 등에 대해서다.

남성 안내원과 운전기사는 내 남편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남편도 남성 안내원을 '리 선생님'이라고 칭하자 그는 "선생님이라니요?"라며 거북해했다. 그러자 남편은 연하인 안내원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그들에게 "그러면 어떻게 부르는 것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고저 '리 동무'라고 부르시면 됩네다."

'동무'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섬뜩했다. 나는 어렸을 때 '친구'라는 말 대신 '동무'라는 말을 썼다. 어렸을 적 '동무들아 모여라'라는 노랫말로 시작하는 동요를 부른 기억도 있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게 언제부터인가 '친구'라는 말을 사용했다. 반공교육이 판치고 있을 때, '동무'라는 말은 공산당원이나 쓰는 말로,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남편은 알겠다고는 대답했으나 좀처럼 '동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인지 말을 꺼내려다 상대를 쳐다보며 "있지요..."라는 말을 꺼냈다. 나는 스물다섯 여성 안내원을 '설경이'라고 불렀다.

"터졌습네다! 관광 봇물이 터졌습네다!"

멀리서 찍은 양각도 호텔. 왼쪽 뒤로 보이는 섬에 있는 건물이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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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각도 호텔에 도착했다. 양각도는 대동강에 있는 섬으로 이곳에는 호텔, 경기장, 그리고 극장이 있다고 했는데 주위가 컴컴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둡고 서늘했던 거리 풍경과는 달리 호텔 안에는 수많은 외국 관광객, 특히 중국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호텔 커피숍에서 우리는 여행 일정을 보고 받았다. 안내원들은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변경할 수 있으니 주저 말고 얘기해달라고 했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용 없는 말이었지만, 상당히 의외였다.

사실상 우리 모두는 여행 일정을 넘어 어딘가에 있을, 함께 공유하고 싶은 다른 세상을 갈망하고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침묵 속에 흐르는 교감은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이제 미국에서 이 세 사람을 생각하며 준비한 선물 꾸러미만 전달하면 오늘 하루 일정이 끝날 것이다. 선물을 주기 위해 사람들이 덜 붐비는 곳을 찾아 짐을 풀었다. 마치 친정엄마가 자식들 주려고 고향서부터 몇 날을 싸 짊어지고 온 심정이 이럴 것 같았다. 커다란 보따리 세 개를 꺼내고 나니 가방 하나가 텅 비었다. 보따리 속에는 초콜릿을 비롯해 각종 과자, 화장품, 약품, 비누 등등이 있었다. 조그마한 잡화점 같았다. 차 안에 방치해두면 내용물이 변질될 수도 있기 때문에 지금 바로 집에다 갖다 두라고 남편이 말했다. 마침 이들의 집이 호텔 근처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안내원과 운전사가 진심으로 감격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며칠 동안 이리저리 선물을 사러 다녔던 노고가 스르르 풀린다. 무엇보다 선물을 받고 기뻐할 집 안의 아이들 생각에 내 마음도 흥분됐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돼버린 미지의 세계에서의 첫날밤을 보내기 위해 호텔방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앞은 마치 헐값 처분을 하는 상점 같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저 많은 사람들이 오늘 안에 각자의 방으로 올라갈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최근 들어 중국 관광객들이 밀물 들어오듯 북한을 찾는다는 설명이다. 호텔 직원은 "마침내 터졌습네다. 관광 봇물이 터졌습네다!"라고 말했다. 한 번만 더 터졌다가는 호텔 로비에 이불 펴고 자야 할 지경일 듯싶었다.

마냥 좋아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수용 가능한 숙박시설과 쾌적한 환경을 일관성 있게 제공해야 관광객들이 북한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우리는 겨우 엘리베이터를 타고 '미지의 첫날밤'을 보내러 방으로 향했다

 

팔짱 낀 평양 연인들, 상상해보셨나요?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③] 평양을 뒤로하고 원산으로

12.06.21 09:21l최종 업데이트 12.06.29 18:33l
기분 좋게 빛이 들어온다. 몇 달 만에 빛을 보는 듯한 이 느낌은 도대체 왜일까. 엉성하게 쳐 있는 커튼을 활짝 제치고 밖을 내다봤다. 전날 밤 봤던 희미한 형광 불빛 위의 양각도 호텔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지금 나는 사방이 은빛 물결로 찰랑거리는 외딴 섬에 둥실 떠 있다. 호텔 주위는 온통 햇빛에 반짝이는 대동강 물빛으로 눈부시다. 잠시동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그저 그 물빛 위에 몸과 마음을 싣고 있었다.

남편이 샤워하면서 샴푸를 좀 갖다 달란다.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호텔에 샴푸도 없고 비누도 한 개밖에 없었다. 갑자기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미처 준비되지 않았나 싶다. 갖다 달라고 하면 가져다 주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마 다른 나라에서 이런 상황이 생겼더라면 마구 불평을 쏟아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오늘 한마디의 불평도 털어놓지 않았다. 불평 대신 생기는 이 쓰라린 마음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평양에서 맞은 아침

평양의 아침, 아이의 얼굴이 환하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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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날 북한땅을 가로질러 원산으로 간다. 우리의 여행을 담당해줬던 미국 여행사 말에 의하면 원산 가는 육로는 관광객들에게 잘 공개되지 않는 곳이라 귀한 경험이 될 것이라고 했다. 남편 말로는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상륙 작전지로 인천과 원산을 놓고 인천을 택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한다.

'원산'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전쟁과 연결돼 이야기되니 대체 이번 여행은 미지에 대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 폐허의 잔영을 상상하며 다녀야 하는 모양이다.

일찌감치 짐을 꾸려 안내원들과의 약속 시각보다 일찍 로비로 내려갔다. 그런데 우리보다 더 일찍 남자 안내원이 말끔히 옷을 차려입고 내려와 있었다. 얼굴 표정이 기분 좋게 상기돼 있었다. "밤새 편안히 주무셨습네까?"라면서 우리의 짐을 얼른 가져간다.

남편은 보자마자 전날 준 선물은 집에 가져다줬는지 물어봤다. 남자 안내원은 "어젯밤, 아이들이 다들 자는 시간에 갖다 주고 왔는데, 오늘 새벽 아이들이 눈뜨자 마자 선물을 발견하고는 흥분들해서 난리법석이 났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설명해줬다. 자신도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했을는지 상상이 된다며 기분이 들떠 있었다. 우리 부부 또한 그 광경을 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남자 안내원이 출발하기 전 아침 식사를 하고 오라며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같이 식사하자고 했더니 이미 다른 곳에서 식사를 했다고 한다. "앞으로 우리와 같이 식사를 하지 않으면 우리도 식사를 하지 않겠다"라며 남편이 엄포를 놨다. 다음부터는 같이 할 수 있도록 해보겠단다. 아마 손님 대접용 음식과 자신들의 음식에 차등을 두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 귀한 손님이 오시면 손님 상과 우리의 상을 분리해 따로 차리던 생각이 났다. 그럴 때면 언니가 나를 부추겨 친선대사 마냥 부엌으로 가 간신히 몇 조각의 반찬을 구해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식당 안에는 주로 중국 관광객들, 그리고 약간의 서양 관광객들로 차 있었다. 메뉴는 죽과 밥, 그리고 나물류가 주를 이뤘다. 또한, 서양인 관광객들을 의식해서 인지 토스트와 버터, 배를 갈아 만든 잼, 아주 어렸을 적 어머니가 만들어줬던 밀가루 지짐이가 설탕과 함께 있었다. 옛날 생각에 감회가 새로워 밀가루 지짐이를 세 조각이나 먹었다. 당연, 지금은 성인병의 원인 중에 하나로 금기시된 하얀 설탕을 솔솔 뿌려서 말이다.

음료수로는 인스턴트 커피와 따끈하게 데운 우유가 있었다. 과일이 먹고 싶어서 과일 대신 주스라도 마실 생각에 혹시 오렌지 주스가 있냐고 물었다. "물론 있습네다"라며 소녀 아가씨가 씩씩하게 가지러 갔다. 시간이 제법 지나서야 캔에 들어있는 환타 오렌지맛 소다를 갖다줬다. 아마 다른 곳에서 구해 온 모양이다. 시려오는 가슴을 숨기기 위해 숨도 쉬지 않은 채 꿀꺽꿀꺽 마셔버렸다. 호텔 봉사원들의 순박하고 가식없는 친절에 편안한 마음으로 식당을 나섰다.

안내원들의 농담에 할 말을 잃다

평양의 아침,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여학생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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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로 다시 내려와 보니 단정하게 차려 입은 여자 안내원, 설경이가 활짝 웃으면서 우리를 맞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그리웠던 사람들 마냥 서로 반가워했다.

옆에 서 있던 리만룡 안내원이 설경이에게 "오늘 따라 얼굴이 활짝 더 핀 것을 보니 남자친구라도 지금 만나고 온 것 아닌가, 늦게 내려온 것을 보니 좀 수상하다"며 능청스럽게 농담을 건냈다.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지금 남자친구도 외국 손님들을 모시고 사리원에 가 있어서 전화로 겨우 음성만을 들어 너무나 아쉬웠다"며 능숙하게 농담을 받아쳤다.

이들이 주고받는 농담에 나는 살짝 충격받았다. 어린 시절 한국에서 받은 반공 교육으로 인해 생겨난 선입견에 의하면 북한 사람들은 이런 농담을 주고받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어야 했기 때문이다. 들어보니 설경이의 남자친구도 같은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했으며, 외국인 담당 기관에서 근무하고 있단다. 아마 캠퍼스 커플이었나 보다.

이런저런 우스갯소리들을 나누며 호텔 밖으로 나와 보니 운전기사 아저씨가 열심히 자동차를 닦으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푸근한 옆집 아저씨를 만난 듯 낯설지 않았다. 여러 해를 봐왔던 사람들처럼 모든 것이 친근하고 익숙하다. 같은 말, 같은 정서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분명 다른 나라 여행지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평양의 출근길... 생각보다 밝았습니다

평양시내, 다정히 손을 잡고 출근하는 부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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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모습의 두 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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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밖이 잘 내다보이는 창가에 앉았다. 오늘은 어떤 사람, 어떤 광경, 어떤 생각들을 마음에 담게 될 것인가. 내 마음은 벌써 호기심과 기대감의 날개를 달고 저만치 날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아직 평양을 제대로 구경도 하지 못한 채 원산으로 향했다. 같은 방향으로 평양교외에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릉이 있다며 그곳부터 참관한 후에 원산으로 갈 계획이란다.

출근 시간이었기 때문인지 전날보다 거리가 훨씬 활기차 보인다. 온통 흑백으로만 보였던 거리의 모습들이 오늘은 밝은 색상의 물감으로 색채를 가미한 듯하다. 학생들이 화려한 색깔의 한복을 곱게 차려입거나, 교복을 입고 삼삼오오 짝지어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다정히 손을 잡고 출근하는 부부의 모습, 애인의 팔짱을 다소곳이 끼고 속삭이는 연인들의 모습도 클로즈업이 돼 내 눈에 번쩍 띄었다. 상상해보지 못한 이 광경은 한 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우리 부부는 북한 여행을 앞두고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는 과정에서 평양의 거리 모습 사진들을 많이 봤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이런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진들이 남루한 옷차림에 인상을 쓰고 있는 사람들, 텅 빈 거리 등을 담은 그런 것들이었다. 또 심지어 '북한 사람들은 공개된 장소에서 손을 잡는다든가 하는 애정 표현도 할 수 없다'는 글을 읽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광경은 과연 내가 지금 평양에 있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내 눈을 의심케 했다.

유관순 언니를 연상케 하는 학생들

노동당 창당일 행사를 준비하는 북한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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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학생들. 곱게 입은 한복이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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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설경이가 "며칠 후에 있을 노동당 창당일 기념 준비로 학교마다 학생들이 광장에 모여 연습을 하러 간다"고 설명해줬다. 아닌 게 아니라 큰 광장을 지나가면서 보니 정말 많은 남녀 학생들이 모여 선생님의 지도 하에 춤 연습을 하고 있었다. 며칠 후에 있을 노동당 창당일은 북한의 큰 명절 중 하나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거리를 오가는 여학생들은 대부분이 한복 차림이었다. 화려한 색깔의 한복 치마 밑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높은 굽의 하이힐을 신고 한껏 멋을 부렸다. 그리고는 친구들과 손을 잡고 무슨 얘기가 저리도 재미있는지 잡은 손을 흔들어가며 웃는다. 학창 시절의 내 모습을 보는 듯해 나도 절로 웃음이 났다.

다채로운 색상의 한복 차림 속에 간혹 흰 저고리에 무릎 밑 길이의 검정색 치마를 입은 학생들이 섞여 있었다. 북한 대학생들의 교복 중 하나라고 설경이가 설명해줬다. 유관순 언니가 생각났다. 예쁘고 당당해 보였다. 그리고 왠지 곧은 절개 같은 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무심코 지나쳐 버린 생각들이다.

평양에서 벗어나 동명왕릉에 닿다

동명왕릉 앞에서. 동명왕릉은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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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릉에서 만난 해설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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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내를 벗어나니 금세 푸른 빛깔의 세상으로 바뀌었다. 도로에는 차들이 몇 대 없어서 우리만의 세상이 됐다. 방해물 없이 신나게 달린다. 가끔 차를 태워 달라고 손짓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일 때면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태워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추수할 때가 돼서인지 들판은 누렇다. 아스팔트 길가에는 형형색색의 코스모스들이 예쁘게 피어 있다. 군데군데 논밭 사이에 붉은 깃발과 구호들만 없다면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외가에 가며 봤던 그때 그 풍경과 꼭 같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동명왕릉. 동명왕릉은 웅장하고 잘 관리돼 있었다. 주위에 흩어져 있는 고구려의 고분들이 왕릉의 역사성을 한층 더 깊게 한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현지 해설원이 차분히, 그리고 민족적 자부심을 갖고 고구려의 건국과 주몽에 대해 열심히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다른 나라의 역사가 아니라 바로 내 나라, 내가 한국에서 학교 다닐 때 이미 다 배운 우리의 역사가 아닌가. 가슴이 아려온다.

동명왕릉을 떠나 한 시간쯤 가자 차가 고지대의 전망대에 멈춰 섰다. 아름다운 경치도 경치지만 공기가 정말 신선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도 공기가 좋은 편인데,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다래 건네던 아주머니... 그 아름답고 슬픈 눈빛

우리가 산 다래. 우리 부부는 바구니째 들고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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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는 근처 주민으로 보이는 듯한 인민복 차림의 아주머니 한 분과 여자애들 몇몇이서 산열매를 팔고 있었다. 남편은 뭐든지 사고 싶은 마음에 그 중 붉은 색깔의 열매를 사겠다고 했다. 남편은 입에 넣어 맛을 보더니 이내 뱉어 버리고 말았다. 오미자였다. 남편은 그것이 일종의 과일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운전기사 당원 아저씨가 "선생님, 오미자는 과일이 아니라 차를 만들거나 술을 담글 때 쓰는 열매입네다"라고 했다. 다른 안내원들과 함께 당황해 하는 모습이었다.

남편이 아주머니에게 입에 댄 한 송이 값이 얼마냐고 묻자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으며 손사래 쳤다. 너무 미안해 남편이 차에 가서 초콜릿을 한움큼 건넸더니 이번에는 까지 않은 잣을 두손에 담아 남편에게 그냥 가져가라는 몸짓을 했다. 남편이 "나는 이가 안 좋아 잣껍질을 깨지 못합니다. 고맙습니다. 먹은 거나 다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주머니의 손을 자루로 가져가 두 손에 담긴 잣을 털어놓았다. 설경이가 여자 아이들에게 가서 다래 한 바구니를 사 가져왔다.

미소를 지으며 물끄러미 우리를 쳐다보던 아주머니는 차를 향해 걸어가는 우리에게 눈빛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아마도 우리의 이 만남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다. 내가 차에 오르기 전 고개를 돌려 눈이 마추쳤을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서로를 슬프게 하는 눈빛을 경험했다.

차 안에서 남편과 나는 설경이가 사온 다래를 바구니째 들고 마구 먹었다. 정말 달았다. 운전기사 당원 아저씨가 "낯선 땅에서 물이 안 맞으실 텐데 너무 드시면 배탈이 날지도 모릅네다"라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1시간 정도를 더 달렸을까 휴게소에 도착했다. 아름다운 강이 멋진 산을 병풍 삼고, 한가히 하늘을 우러러 슬픈 듯 눈물을 머금은 채 누워 있다. 하늘과 얼굴을 맞대고 무언의 말을 주고받는 듯하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슬프다. 이유 없이 눈물이 날 것 같아 덩그러니 서 있는 휴게소에 들어갔다.

휴게소 안에는 손님을 기다리는 몇 개의 과자와 음료수들이 외롭게 놓여 있었다. 한 직원이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반기듯 어디선가 뛰어나온다. 나도 모르게 잠시 '아는 사람이었던가'라며 주춤했다. 단정하고 순하게 생긴 아가씨의 모습에서, 예전 대학에서 가르쳤던 한 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기야 이 북녘 땅에 내가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그리고 그 학생도 이미 저 아가씨의 나이를 훌쩍 넘겼을 텐데... 그런데 왜 이리 친근한 마음이 드는 걸까.

순박한 미소 뒤로하고 원산으로 향하다

평양을 벗어났다. 추수 때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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빤히 쳐다보기가 난처해 화장실을 물어봤다. 그녀는 바로 내 눈앞에 있는 화장실로 친절히 안내해 줬다. 그러더니 "불편하시겠지만, 손은 세숫대야에다가 물을 퍼서 씻으십시오"라며 미안한 낯빛을 띤다. 지하수를 끌어다가 쓰는 것 같았다. 똑. 똑. 똑. 약숫물처럼 떨어지는 지하수가 커다란 물통에 채워지고 있었다. 늘상 봐왔던 복잡하고 화려한 휴게소보다 훨씬 친근함이 느껴졌다.

우리 일행이 자동차를 다시 타고 목적지로 떠날 때까지 휴게소 안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자동차가 휴게소를 빠져나올 때까지 그 순하게 생긴 아가씨가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마음 한구석은 계속해서 슬펐다.

아랑곳하지 않는 우리의 자동차는 또 다시 무표정하게 원산으로 향한다.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저는 오래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가게 됐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기게 됐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논 그리고 길가의 핀 코스모스. 논 끝에 희미하게 동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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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이 가까워질수록 자동차가 마차로 변하는 듯하다. '이랴, 이랴' 소리가 절로 나온다. 내 엉덩이가 적어도 30cm쯤 공중으로 마구 뛰어오른다. 포장도로지만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다. 설경이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당황해 했다. 나는 "말 타고 신나게 달리는 기분이 이렇겠구나"라는 빈말로 넘겨 버렸다.

한 시간쯤 달렸을까. 원산시가 가까워지고 있는 듯했다.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엄마와 손잡고 걸어가는 아이의 모습이 마냥 천진스럽다. 엄마는 한 손으로 뭔가를 머리에 이고 한 손으로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있다. 그리고 등에는 따스한 밥을 해줄 모양인지 나무를 한 짐 등에 지고 부지런히 걸어간다.

어린아이는 쫄랑쫄랑 뛰듯 마냥 신나서 쫓아간다. 엄마 걸음이 급해 보이는 걸 보니 집에서 기다리는 아가가 더 있는 모양이다. 나도 엄마니 그 엄마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 할머니가 구부정한 허리로 열심히 걸어 간다. 머리에 손도 안 잡은 채 보따리를 이고, 양 손에는 두 개의 꾸러미를 들었다. 그리고 등에는 국방색 개나리 봇짐을 메고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예쁜 손주들에게 주려고 뭔가 잔뜩 이고 가나 보다.

갑자기 돌아가신 나의 외할머니 생각에 눈물이 핑 돈다. 나의 외할아버지께서는 당시 포항에 지역구를 둔 여당의 3선 중진 국회의원이었지만, 나의 외할머니는 인사차 찾아오는 지역 공무원들이 집안 하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기운 옷에 컴컴한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열심히 일하시던 분이었다. 외할머니가 우리집에 올 때면, 항상 뭔가 버거워 보이는 짐보따리를 이고 왔다. 바로 저 할머니처럼.

북한의 휴대전화 사업, 이럴 줄 몰랐네

전화통화를 하며 걸어가는 여성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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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남편과 리만룡 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둘 다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말이 잘 통하는 모양이다. 세상 경제를 논하고 있다. 게다가 마냥 심각하게 앞으로 남한, 북한 그리고 미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모색하고 있다. 우리의 운전기사 당원 아저씨는 그 열띤 토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전 운행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내 옆에서는 설경이가 속삭이며 전화하고 있다. 남자친구와 전화하는 것이 분명하다. 얼굴에 띈 미소와 나긋나긋 한 목소리가 이를 증명한다. 핸드폰 성능이 좋은 모양이다. 저렇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데도 다 들리는걸 보니... 열띤 토론을 하던 리만룡 안내원도 알아 차렸는지 뒤를 돌아보며 설경이에게 말했다.

"목소리가 바뀐 것을 보니 남자 친구인 게지? 좋을 때다."

남편은 한술 더 뜬다. "내년에 결혼한 후에도 저 목소리로 전화 받을지 궁금해서 다시 와 봐야겠다"고 했다. 설경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친구와의 전화 통화에 휴대전화 속으로 들어갈 지경이다. 북한에서 목격하리라 상상하지 못한 광경이다.

북한에 와서 놀란 것 중 하나가 바로 휴대전화다. 북한에 오기 전에는 언론을 통해 평양에서도 휴대전화를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특수한 계층에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만 가지고 있지 이렇게까지 일반화돼 있는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두 안내원은 물론 운전기사 모두 휴대전화를 갖고 있다. 2011년 10월 현재 가입자가 80만 명 정도인데, 연말께 100만 명을 넘을 것이라고 한다. 북한 인구가 2000만 명이 조금 넘으니 가구당 식구를 너댓으로 계산하면 대충 다섯 가구당 한 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리만룡 안내원의 말로는 이집트의 오라스콤이란 회사가 휴대전화 사업을 맡아서 추진하고 있는데, 아주 빠른 속도로 가입자가 늘고 있단다. 그러자 남편이 곧바로 "이동통신 기술은 남한이 최고인데, 다른 나라 회사가 북한에 들어와 사업을 하고 있다니 안타깝다"고 말한다.

리만룡 안내원 또한 "네, 맞습네다. 북남이 서로 장단점을 보완해 협력하면 좋을 텐데..."라며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가 남한 출신이라서 그랬는지 두 대통령에 대해 깍듯한 예의를 갖춰 이야기한다.

남자친구와의 통화를 마친 설경이의 말에 따르면 2011년 여름 북한에 엄청난 홍수가 있었으며 특히 곡창지대인 황해도에 피해가 막심했다고 한다. 국제적십자 대표단이 실태조사를 하고 있는데 통역을 위해 남자친구가 대표단과 함께 황해도 사리원에 가 있다고 한다.

당시 서울에도 우면산이 무너져 인명피해가 나고 북한에도 홍수가 났는데, 북한이 국제지원을 많이 받기 위해 피해를 과장한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설경이의 얘기를 들으니 내가 미국에서 뉴스를 보고 생각했던 것 보다 피해가 훨씬 더 큰 것으로 느껴졌다.

문득 '남북이 이제는 서로를 헐뜯는 비방은 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아픔을 다독이며 통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북한 여행 이틀만에 하게 되다니... 소위 '꼴통 보수'라고 불리던 내 자신이 믿겨지지 않는다.

북한 아이들의 슬픈 인사 "헬로, 헬로"

지나가는 우리 차를 보며 손을 흔드는 원산의 초등학생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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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시내로 들어온 모양이다. 오는 길에 뜨문뜨문 지나쳤던 사람들이 이제는 많이 보인다. 내 눈에는 어디를 보나 같은 사람들처럼 보인다. 아마 비슷한 색상의 옷들과 비슷한 스타일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원산시가 대도시 중 하나라고 하나 내 첫 인상은 어린시절 아버지를 따라가 본 충청도의 어느 조그마한 도시 같은 느낌이었다.

한 광장을 지나니 이곳에서도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학생들이 보인다. 앞으로 다가올 노동당 창당 기념일에 할 매스게임 연습에 한창이다.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 얇은 스타킹들을 입고 추운 줄 모르고 열심히 연습한다. 얼굴에는 장난꾸러기 아이들의 모습이 역력히 보인다. 조를 짜서 교대로 연습하는 것 같다. 쉬고 있는 아이들은 마치 소풍을 나온 것마냥 보따리를 열어놓고 친구들과 모여 도시락을 먹으면서 신나게 재잘거린다. 아침에 도시락을 싸며 아이가 맛있게 먹을 생각에 기뻐했을 엄마의 미소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우리가 탄 자동차가 지나가니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손을 흔든다. 우리가 외국에서 온 손님임을 알고 반겨주는 듯했다. 우리의 얼굴은 분명히 자기네들 부모와 같은 생김새일 텐데 연신 "헬로, 헬로"라는 소리가 차창 너머로 들려온다. 깜짝 놀랐다. 어린 초등학교 학생들이 영어를 하다니...

설경이 얘기로는 북한에서도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를 배운다고 한다. 믿겨지지 않았다. '철천지 원쑤 미제국주의자 놈들'의 말을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다니.

스쳐 지나가는 우리 모습에서 그 어린아이들은 이질감을 느끼나 보다. 하기야 60년 세월 동안 멀디 먼 거리서 살던 사람들이 왔으니 우리를 낯설게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선조들을 모시고 있으며, 같은 역사를 공유한 우리인데 왜 이렇게 서로 멀어져만 간 것일까.

"헬로"라는 소리에 비탄의 눈물이 찔끔한다. 아마 우리가 타고 있는 차에 쓰여진 'Korea International Travel Company'(조선국제려행사)라는 영어를 보고 그랬겠지...

인민군을 보다 문득 아들 생각이 나다

원산의 해산물 식당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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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달리고 달려 조선국제려행사에서 직접 운영한다는 해산물 식당에 도착했다. 그곳의 식당 책임자로 보이는 한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었다"며 반갑게 맞아줬다.

식당 안에는 유럽관광객 한 팀이 식사를 하고 있었으며, 우리를 위한 오찬이 차려져 있었다. 남편이 시원한 맥주를 곁들여 감자전을 한 점 입에 넣더니 탄성을 지른다. 어릴 적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어머니께서 만들어준 감자전과 맛이 똑같다며 말이다.

남편은 "그 친구의 부모님들은 함경도가 고향인데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피난 온 분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리만룡 안내원은 "지금은 행정구역상 강원도로 바뀌었지만, 여기가 예전의 함경남도"라고 답했다. 남편은 감자전만 세 접시를 비우고 나머지 음식은 제대로 손도 대지 못했다.

조개구이, 그리고 북한에서는 별미 중 하나라는 음식이 나왔다. '팔팔하게 살아서 아가미를 움직이는 가물치회'가 바로 그것. 나는 낚시광인 남편이 수시로 샌디에이고 앞바다에서, 때로는 멕시코 청정해역에서 잡은 활어회에 입맛이 망가져 있던 터라 먹는 시늉만 하며 인사치레를 했다. 그러나, 된장을 풀고 고춧가루를 넣어 끓인 가물치 매운탕은 정말 일품이었다.

낚시를 하고 있는 원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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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자동차에 오르기 전, 소화도 시킬 겸 식당 바로 앞에 있는 부둣가를 거닐기로 했다. 한가로이 낚시들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한 아빠가 아들에게 낚시 미끼를 끼워주면서 낚시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아이는 집중해서 아빠가 하라는 대로 열심히 따라한다. 흐뭇하고 보기좋은 장면이다.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북한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무엇이 이토록 당연한 부자의 모습을 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을까. 내 머릿속은 마치 판단 오류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정신이 혼미해져가고 있는 느낌이다.

자동차는 또 다시 남쪽을 향해 묵묵히 달린다. 몇천 번은 노래로 불렀을 <그리운 금강산>을 향해서 말이다.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동해 바다는 마치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처럼 아무 말이 없다. 너무 조용하고 잔잔해 숨도 크게 쉴 수 없을 정도. 모래사장은 붓으로 물감을 칠해 놓은 것처럼 깨끗하고 가지런하다. 모든 풍경이 그림 같다.

저 아름다운 그림에 심술 궂은 아이가 서투른 솜씨로 장난친 듯 바닷가 도로를 따라 쭉 쳐 놓은 철조망이 그림을 망쳐 놓았다. 원망스럽다. 그림처럼 평온한 풍경에 저 철조망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착잡한 심경에 마음이 터질 것 같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운전기사 아저씨는 잠시 쉬어간다고 한다.

그림 같은 동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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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로 들어갈 수 있게 철조망이 쳐 있지 않은 곳도 있었다. 아름다운 그림속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림이 이내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파도소리, 모래 밟는 소리, 사람들의 탄성 소리, 바닷새 지나가며 우는 소리... 모든 소리가 생동감 있다. 정말 아름답다. 내가 살아 숨 쉬고 있음에 감사했다. 철조망 너머 가까이 들어와 보니 이렇게 좋은 것을... 터질 것 같았던 마음이 조금은 후련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내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이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자동차는 슬프디 아름다운 동해를 끼고 금강산으로 다시 향한다. '통천'이라는 이정표가 보이자 리만룡 안내원이 "이곳이 고인이 된 현대 정주영 회장의 고향"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고인께서 생전에 금강산에 관심을 두셨구나, 산수가 수려한 곳에서 태어나셨네'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어둑어둑한 시간이 됐고, 군인 아저씨가 지키는 검문소가 나왔다. 금강산에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검문소의 군인 아저씨는 텔레비전에서 보던 로봇 같은 살벌한 얼굴이 아니었다. 늘 봐왔던 숫기 없는 얼굴, 바로 우리 아들의 모습이었다. 늠름한 척, 씩씩한 척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대학교 근처 아파트로, 기숙사로 나가 있는 보고픈 내 아들들의 모습이었다. 이내 나의 마음은 저 아들의 부모가 됐다. 얼마나 보고 싶고 걱정이 될까. 가슴이 찡해온다.

"남조선 관광객들이 붐비던 시절이 꿈만 같습니다"

다시 문을 연 금강산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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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린 가슴을 움켜안고 쓸쓸한 어둠 속을 10분 정도 달렸을까. 호텔 불빛이 보인다. 마음에도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몇 년 전 서울에 사는 엄마가 이모들과 함께 금강산 구경 가신다고 했을 때도 내겐 그저 노래 속에서만 존재하는 금강산일 뿐이었다. 노랫말이 현실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서서히 피부로 느끼고 있다.

호텔에 도착하니 말끔하게 정복을 차려입은 훤칠한 아저씨가 자동차 문을 열어주며 반갑게 맞는다. 그런데 말씨가 내가 기억하는 강원도 억양과 비슷하다. 아! 그렇구나. 남한이 지척이구나. 순간 설악산의 한 호텔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내 젊은 시절 친구들과 단풍구경 가자며, 가을바다 보자며 몇날 며칠 계획짜고 부모님께 허락을 받기 위해 단체로 의기 투합해 집집을 찾아 다니던 그 때 생각이 난다. 그 추억의 장소가 이곳에서 약 1시간 정도만 더 가면 된다니.

호텔은 나무랄 데 없이 깨끗히 정돈돼 있었다. 이 호텔이 현대 아산에서 리모델링한 호텔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서울의 어느 호텔에 온 것처럼 친근하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샹들리에, 멋진 꽃장식들, 그리고 남한 스타일의 안내문들... 마치 순간 이동이라도 한 듯했다.

말쑥하게 꾸며져 있는 호텔 안은 너무 한산해 화려한 불빛이 쓸쓸해 보인다. 체크인을 하려고 기다리는 사이 몇십 명의 중국 관광객들이 들어왔다. 호텔이 생기를 띠는가 싶더니 이곳저곳에서 사진만 찍고 우르르 나가 버렸다. 잠은 다른 곳에서 자는가 보다. 다시 호텔은 침묵 속에 빠졌다.

우리의 짐을 들어줬던 아저씨가 말했다.

"원래는 남조선 관광객들을 위한 호텔이었는데, 관광이 두절돼 쓸쓸하게 텅 비어 있다가 바로 얼마 전부터 약간의 외국 관광객들을 투숙시키고 있습니다. 예전 남조선 관광객들이 붐비던 그 시절이 꿈만 같습니다. 너무나 그립습니다."

진심 어린 눈빛 속에서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호텔 방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속에서 나는 흥분과 감회 속에 들떠 있었을 많은 사람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 두 부부를 싣고 올라가는, 정성들여 치장한 이 엘리베이터는 마치 관객 없는 무대 위의 무희처럼 느껴져 측은한 마음이 든다.

방 안은 세련되면서도 말끔하다. 텔레비전도, 냉장고도, 욕실의 액세서리들도... 모두 친숙한 남한 제품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어우러진다. 언제쯤이면 이 쓸쓸한 어우러짐이 완벽한 조화를 이뤄 한반도 전역에 메아리칠 수 있을까. 마음속 어렴풋한 소망이 절실함으로 내 심장 속에 파고든다.

 

헉! 큰일났다, 남편이 '탈북자' 얘길 꺼냈다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⑤] 금강산 아가씨들 "사진 찍읍시다"

12.06.25 20:53l최종 업데이트 12.06.29 18:33l
저는 오래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가게 됐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기게 됐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아침은 내 마음의 어두운 커튼을 활짝 걷어줬다. 발코니 문을 여니 코를 톡 쏘는 신선한 내음이 마음속을 훤히 밝혀 준다. 오늘은 드디어 노래로만 만났던 금강산에 가는 날이다.

남편과 나는 들뜬 마음으로 서둘러 준비를 하고 아침식사를 하러 갔다. 식당은 큰 연회를 치르고도 남을 정도로 시원하고 널찍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그 큰 식당 안에는 우리 부부와 유럽 관광팀 몇 명만이 있었다. 우리 몇 사람끼리만 식사하기에 어색할 정도로 식당은 크고 화려하다. 단정한 용모의 종업원들이 환한 미소로 우리를 반기며 음식을 가져다준다.

호텔 로비로 내려오니 만룡 안내원과 설경이가 산뜻한 옷차림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잠만 따로 자고 만났을 뿐인데 이산가족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 기쁘다. 바깥에서는 늘 그랬듯이 리인덕 운전사 당원 아저씨가 자동차를 닦고 있다. 말도 별로 없이 수줍은 표정으로 우리를 반겨 준다. 웃는 얼굴에는 건실함과 진실됨이 묻어난다.

산보다 아름다운 금강산 소녀

설경이와 팔장을 끼고 많은 얘기를 나누며 하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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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가는 길에 우리에게 안내를 맡아줄 해설원을 데리러 갔다. 빨간 점퍼를 입은 앳된 소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막내 딸아이 정도로 보였는데, 스무 살이 넘었단다. 볼이 발그스름하며 눈이 초롱초롱했다.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착한 주인공을 연상케 하는 예쁜 소녀의 이름은 전은심이었다.

수줍음을 많이 타서 설명을 잘 못할 줄 알았는데, 자동차에 타자마자 차분한 목소리로 금강산에 대해 줄줄 설명을 시작한다. 아름다운 금강산에 대한 자부심이 조용하지만 또박또박 느껴졌다. 금강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동그란 두 눈을 힘줘 뜨고 설명을 듣는 내내 소녀의 자부심이 전해진다.

내 입가에 왠지 모를 흐뭇한 미소가 피어난다. 금강산의 모습보다도 내게는 이 소녀의 모습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금강산의 수려한 절경 속에 빠져 이 순간만은 어떠한 원망도 미움도 슬픔도 아쉬움도 아무 생각도 나질 않는다. 그저 자연의 초연함과 아름다움에 겸손해질 뿐이다.

북한에서 <타이타닉>을 봤다고?

금강산 계곡에서. 왼쪽 부터 남편, 금강산 해설원 전은심, 필자, 여성 안내원 설경이, 남성 안내원 리만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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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훨훨 날아오르고 싶으나 나이가 잘 따라주지 않는가 보다. 금강산에 들어가는데, 힘들어하는 기색이 우리 두 부부 얼굴에서 나타난 모양이다. 설경이는 팔짱을 끼며 부축해주고, 금강산 해설원 소녀는 남편을 부축한다. 오랜만에 팔짱을 껴 본다. 다정함이 느껴진다.

설경이와 나는 금강산을 내려오는 내내 팔짱을 낀 채로 많은 얘기를 나눴다. 남자친구와의 결혼 준비 이야기, 그리고 우리 아이들 이야기와 설경이네 부모님 이야기... 그중에서도 영어가 전공이었던 설경이가 대학수업 시간에 본 영화 <타이타닉> 이야기는 우리 둘 모두를 영화 속에 다시 한 번 흠뻑 빠져들게 했다. 덕분에 힘들 새 없이 하산했다.

산을 거의 다 내려왔을 무렵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가만 있어봐... 여기가 북한인데, 이 아이가 <타이타닉>을 봤다고?' 내가 깜짝 놀라 "그 영화를 어디서 봤다고? 수업시간에 봤다고?"라고 묻자 설경이가 답했다.

"네. 영어시간에 그 영화를 교재로 썼습네다. 그런 영화는 극장에서 상영하지 않습네다."

그렇다. 설경이와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며 하산하는 동안 나는 여기가 북한이라는 것과 설경이가 북한사람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설경이와 <타이타닉> 영화 얘기를 하면서도 산을 거의 다 내려와서야 '이 아이가 어떻게 그 영화를 볼 수 있었단 말인가'라고 의아해하며 제정신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금강산의 아름다움보다, 지금 내 눈은 남편을 부축하며 함께 걸어가던 현지 해설원의 모습, 그리고 내 머릿속은 방금 설경이와의 나눴던 정담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남쪽의 산들과 마찬가지로 산 밑에는 시원한 음료수들과 고소한 지짐이가 갈증과 허기진 배를 채우고 가라고 유혹한다. 우리는 점심식사를 '목란관'이라는 식당에서 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고소한 냄새를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전식이라고 위로하면서 먹고 가도 되겠다는 정당성을 마련했다. 산행 후 맛본 대동강 맥주와 녹두 지짐이는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순식간에 달려든 아가씨들... "사진 찍읍시다"

목란관 식당 앞에서. 식사도 하기 전에 남편은 이미 대동강 맥주에 취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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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배를 움켜쥐고, 목란관에 닿으니 오색 금강산 나물들이 한 상 차려져 있다. 이곳에서 먹은 산도라지와 고사리, 그리고 녹두묵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을 것만 같다. 특히 산도라지의 향 내음은 금강산을 온통 품은 맛으로 기억될 것이다.

금강산의 내음에 취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려오려고 할 때, 어디선가 유니폼을 차려입은 발랄한 아가씨 세 명이 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목란관 기념품 상점'이라고 쓰인 작은 건물에서 말이다. 그들은 다름 아닌 기념품 가게 아가씨들이었다.

그들은 너무 반가워하면서 같이 사진을 찍자고 자신들의 카메라를 들이민다. 순간 '이들이 무슨 일로 우리에게 이러는 걸까?'라며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북한사람들이 우리에게 먼저 다가와 사진 찍자고 할 것이라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순간 당황해 내 마음의 방패막이로 반사시켜 버린 그들의 마음을 다시 살펴봤다. 다시 보니 반가움과 기쁜 마음으로 사진을 찍고자 하는 게 보였다. 우리가 금강산의 호텔에 처음 도착했을 때 차문을 열어주던 아저씨가 떠올랐다. 남한의 관광객들을 진심으로 그리워 하던 그 아저씨 말이다.

사진을 찍자마자 세 사람이 카메라에 고개를 들이대며 잘 나왔는지 들여다본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리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활짝 열린 가슴으로 나 또한 기쁘게 사진을 찍었다. 한 아가씨가 잠시 숨겨놨던 내 '당혹감'을 눈치챘는지 "남조선에서 오셨나요?"라고 말을 붙인다. 설경이가 "미국에서 오신 동포이십네다"라고 답하니 그 아가씨가 말을 잇는다.

'너희는 절대 서로 총을 겨누지 말거라'

함께 사진 찍기를 원했던 기념품상점 아가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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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에 휴가 온 북한의 한 가족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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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까. 반갑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요즘은 남조선 관광객들이 전혀 오지를 않습니다. 오랜만에 우리 동포들을 보니 너무 반가워서... 전에는 남조선 동포들이 수도 없이 왔는데, 그때는 곧 통일될 줄 알았어요. 얼마나 흥분했는지..."

북한의 주민들이 정말로 '민족 통일'을 갈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솔직히 나는 북한에 오기 전까지 통일이라는 것에 관심은커녕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의 말투며 행동거지가 우리 남한의 발랄한 젊은 딸들을 보는 것 같아서 한층 더 친근한 마음이 든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런저런 포즈를 취하며 찍는 게 그저 젊은 우리 아이들 같다. 아가씨들은 "같이 사진을 찍어줘서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한다. "우리도 너무 좋았다"며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내 등이 슬펐다. 뒤돌아보니 계속해서 세 아가씨가 "또 오십시오"라며 손을 흔든다. "그러겠노라"는 지킬 수 없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하염없이 손만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기념품 가게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자동차로 돌아오는 길에 소풍을 즐기는 여러 명의 가족들을 발견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빠와 엄마 앞에서 노래와 춤을 추며 아이들이 재롱을 부린다. 보기 좋고 행복한 모습이다. 오래 간직하고 싶은 귀중한 모습이라 얼른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애기 아빠가 선뜻 응해준다. 남편과 내가 아이들을 무릎 위에 앉히고 포즈를 취하며 마음속으로 아이들에게 속삭였다.

'남북의 사랑스런 아이들아. 너희들은 절대로 서로 총을 겨누지 마라. 손에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며 행복의 노래를 아름답게 부르거라.'

금강산 인근에 있는 삼일포에서 호수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는 금강산 해설원 전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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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에서 내려와 우리는 근처에 있는 삼일포라는 호수에 들렀다. 금강산 해설원 소녀는 삼일포에 얽힌 역사적 사연들을 우리에게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열심히 설명한다. 사실 나는 삼일포에 얽힌 역사적 설명보다 곧 헤어질 것을 생각하며 금강산 소녀의 사진만 열심히 사진기에 담았다. 차분하고도 정겨운 그 목소리와 선한 눈빛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금강산의 예쁜 소녀와 작별할 시간이 다가왔다. 몇 시간 동안의 만남이 이리도 가슴 깊이 새겨졌을 줄이야... 우리 부부는 자동차에서 내리는 소녀를 꼭 안아줬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작별의 인사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애써 미소 지었지만, 가슴 속은 이미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자동차가 모습을 감출 때까지 소녀는 손을 흔든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던 내 마음속의 금강산이 선명한 색상의 사진이 돼 머릿속 사진첩에 간직됐다. 그 사진 속에는 헤어지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던 예쁜 소녀의 모습이 담겨 있다. 가슴이 또 미어져 온다. 어째 이 여행은 눈물의 연속이다.

'전마선'을 마주하다

 

 

동해안의 어촌마을. 포구에 전마선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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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으로 동해바다를 끼고 자동차가 산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니 작은 목선들이 정박하고 있는 포구가 보였다. 노려 보듯 포구를 바라보던 남편이 갑자기 설경이에게 물었다.

"저 배들이 혹시 '전마선'이라고 부르는 배들인가?"
"네, 맞습네다."
"아... 아주 작구나. 아... 저걸 타고..."
"저걸 타 보시고 싶습네까?"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가끔 이곳 동포들이 저 작은 배를 타고 남으로 내려와. 우리가 여기 오기 바로 전에도 저 전마선을 타고 한 열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함경도 어진가를 떠나 남으로 가려고 했는데, 파도에 떠밀렸다지. 그 사람들은 일본 앞바다에서 구조됐는데... 지금 일본에 있는지 아니면 남으로 갔는지 뉴스를 못 봐서 모르겠네."

남편이 탈북자 이야기를 꺼내자 나는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천진난만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속이 없다고 해야 할지... 사실 남편은 마음에 있는 말을 서슴지 않고 마구 하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북한에 가기 전에 시어머님께서 했던 말씀이 떠올랐다.

"얘야. 아범 입조심 단단히 시켜라. 괜히 가서 변이라도 당하지 않게. 아이고, 나는 불안해서 못 견디겠네... 아니, 갈 데가 없어서 북한으로 관광을 가?"

아니나 다를까 드디어 남편이 본격적으로 탈북자 이야기를 설경이에게 계속한다.

"남으로 온 북한 동포들을 탈북자라고 부르는데, 지금 남쪽에 약 2만 명 이상이 살고 있대."
"그 사람들은 남에서 잘 살고 있습네까?"

"우리는 미국서 살고 있으니까 잘 몰라. 주로 인터넷에서 그 사람들의 소식을 듣는 정도인데, 한 사람당 미국 돈으로 한 2만 달러 정도의 정착 지원금을 받는 것 같아. 일부는 그 돈으로 잘 정착해 살기도 하고, 일부는 갑자기 돈이 좀 생기니까 흥청망청 써 버리고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야. 그중 몇몇 사람들은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왔다'고 후회하는 사람도 있고... 또 극소수지만 제3국으로 떠나는 사람들도 있대. 그럴 거면 무엇하러 고생하며 내려갔는지."
"아무리 돈을 준다고 해도 그렇지 고향만 하겠습네까?"

설경이는 전혀 놀라지 않고 차분한 반응을 보여 조금은 안심이 됐다. 남편이 그저 이 정도에서 멈췄으면 하고 있는데... 남편은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북한식 '사교육'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

작은 고깃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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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남쪽은 경제적으로 잘살고 있거든.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시골에 가도 집에 차 한 대씩은 다 갖고 있어. 대중교통이 세계에서 제일 잘 발달돼 있는데도 말이야. 그래도 사는 것이 쉽지 만은 않아. 아파트, 자동차 등 매달 나가는 돈이 많아. 또 학비도 많이 들어. 특히 학교 공부 외에 따로 공부를 더 시키는데, 그걸 '과외' 또는 '사교육'이라고 불러. 거기에 돈이 많이 들어가. 우리 민족은 교육이라면 껌뻑하잖아."

"여기서도 학교 공부 외에 더 공부를 하기도 하지만, 돈을 주고 하는 경우는 없습네다. 주위에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는데 고저 때 되면 선물하는 정도입네다."

"하여간 탈북자들이 살기에 쉽지 만은 않을 거야. 특히 사회주의 생활방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거야. 남에서는 모든 걸 자기가 혼자 감당해야 하니까. 게다가 탈북자들이 북에서 받은 교육이라든가 경력이라든가 이 모든 것들이 남에서는 인정 받지 못하거든. 그러니까 많은 탈북자들이 자기 전공분야를 살리지 못하고 막노동을 하는 것 같아. 물론 북에서 교육을 높게까지 받은 탈북자들이 많지는 않다고 하던 걸."

"그런데, '막노동'이란 무슨 일을 하는겁네까?"
"응. 소위 3D 업종이라는 것인데... 설경이도 영어를 잘 하니까 금세 이해할 거야. Difficult(힘들고), Dirty(더럽고), Dangerous(위험하고)의 첫 영어 글자를 따서 3D 업종이라고 부르는데, 말 그대로 고생은 있는 대로 하고 돈은 적게 받는 일을 막노동이라고 불러. 예를 들어 청소일, 공사장이나 공장에서 하는 힘든 일, 고기잡이 배 타고 하는 일..."

"저는 리해가 잘 되질 않습네다. 여기서는 무슨 일이든 보상도 다 비슷하고, 또 힘들고 위험한 로동을 하는 인민들은 오히려 존경을 받으니까 말입네다. 많은 영화나 노래들이 그들을 위해 만든 것들입네다. 물론 여기도 가능하면 편한 일을 하려고 하는 경향은 있습네다. 무슨 일을 하든 보상에 차이가 없으니까.

치과의사였던 우리 어머니와 제가 조선려행사에서 처음 받았던 월급이 거의 차이가 없었습네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외국 관광객 안내원일도, 뭐 이 일이 편해서 하는 것은 아니고 고저 제가 외국어를 좋아하다 보니까 하게 됐는데 보상은 다른 일과 별로 차이가 없습네다. 게다가 광부들이나 어부, 공장의 로동자들, 이런 일꾼들을 위해서 만든 노래나 영화는 수도 없이 많지만 우리 외국 관광객 안내원들을 위해 만든 예술작품은 하나도 없습네다. 우리도 나름대로 조국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봉사하고 있는데 말입네다."

설경이가 웃어가며 자기들의 노고에 대한 노래나 영화는 없다고 불평한다. 설경이의 의문은 계속 이어졌다.

"남조선에서는 2만 달러로 뭘 할 수 있는지..."

자연 그대로의 동해안. 양식장 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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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탈북자들이 2만 달러나 받는다고 하는데 그 많은 돈을 갖고 있으면서 어떻게 남조선에서 사는 것이 쉽지 않은지 리해가 안 됩네다. 그거면 여기 북조선에서 일생을 살 수 있습네다. 2만 달러나 갖고도 살기 힘들다면 대체 얼마가 있어야 살 수 있습네까? 남조선에서는 2만 달러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합네다."

"글쎄, 상대적인 거라서 물가를 비교해야 하는데, 나는 이곳의 물가를 전혀 모르니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하여간 남에서 저소득층 수준으로 산다고 할 경우 2년 정도는 살 수가 있는데... 문제는 집이라든가 가재도구라든가 하는 것을 모두 본인이 마련해야 하니 그 돈 갖고는 생활이 어려울 수 밖에 없지.

게다가 물가가 비싸. 그런데 좋은 직장은 구하기가 힘들고... 좋은 직장을 얻지 못하면 아까 얘기한 막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일은 힘들고 보수는 적어. 그러다보니 '괜히 왔다'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거겠지. 소수지만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번 사람도 있대."

"어쨌든 전마선을 타고 남으로 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겁네다. 탈북자라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인데, 사실 조선과 중국의 국경지역은 비교적 자유롭게 왔다갔다 했었습네다. 조그만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고난의 행군 시절 식량을 구하기 위해 간 사람들도 있었고. 또 중국에 살다가 다시 조선에 와서 살기도 하고 그랬었습네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우린 탈남자들이네"

설경이의 말을 들으면서 두 가지 사실에 놀라웠다. 나는 설경이가 탈북자에 대해서 거의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설경이는 이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남편이 탈북자에 대해서 열심히 얘기를 할 때도 차분히 들으며 의연히 대응했던 것이다. 또 하나는 탈북자들을 소위 '배신자들'이라든가 아니면 애국심이 없는 형편없는 인간들이라고 폄하할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설경이는 그들을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로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들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남편이 설경이에게 물었다.

"허가를 받지 않고 국경을 넘어도 괜찮은 건가?"
"아닙네다. 선생님. 허가없이 국경을 넘는 것은 공화국의 법을 위반하는 일입네다."
"그러다가 잡히면 어떻게 되지?"
"저도 잘은 모르겠는데 처음일 경우 대부분이 경고 정도를 받을 겁네다."
"응, 그래? 밖에 알려지기로는 탈북하다 잡히면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심하면 사형까지 시킨다고 알려져 있거든."
"그건 순전히 공화국에 악의를 품고 하는 악선전입네다. 10번 이상이나 단속에 걸린 사람들도 있습네다. 우리는 오히려 처벌이 너무 가벼워 그렇다고들 말합네다. 형벌이 무섭다면 어떻게 여러 번이나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네까?"

설사 형벌이 무겁다고 해도 우리에게 그렇다고 얘기하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수긍할 수는 있었다. 일전에 여러 번 탈북을 시도한 끝에 남으로 들어온 한 탈북자의 수기를 인터넷에서 읽은 적이 있다. 당시 나도 그 사람이 '어떻게 여러 번 잡혔다가 풀려 나왔다가 하면서 남으로 올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 적이 있었다. 어쨌든 남쪽에 많은 탈북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니 이곳의 삶이 어려운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앞 자리에서 남편과 설경이의 대화를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리만룡 안내원이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경제적으로 잘사는 남조선에 어째서 그렇게 자살률이 높습네까?"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남편이 머뭇거리며 답했다. 나도 똑같은 의문이 들었다. 잠시 조용하다 싶더니 남편이 또 한마디 한다.

"여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남한을 떠나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러면 '탈남자'들이네. 안 그래?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 차는 원산을 경유해 평양으로 돌아가기 위해 산길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