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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

시놉티콘 2012. 11. 18. 15:01

 

 

 

이분법 벗고…정치·과학 ‘밀착’에 주목

등록 : 2012.11.16 20:12수정 : 2012.11.16 20:12

브뤼노 라투르(65)

인간-사물 상호작용 분석 라투르
경구피임약 개발과정 등 예시로
기술·경제·사회 얽힌 관계 풀어내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
브뤼노 라투르 지음, 이세진 옮김/사월의책·1만5000원

흔히 과학과 기술은 정치나 사회, 종교, 이데올로기와 분리된 ‘자율적인 것’이라고들 생각한다. 과학과 기술에 직접 ‘연루’되지 않은 사람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감탄을 보낼 뿐이고, 과학과 기술에 모든 가치를 거는 사람들은 “과학과 기술만큼은 자율적이기 때문에 참이거나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구 전체를 위협하는 생태적 위기부터 당장의 일상생활까지 오늘날 과학·기술이 없는 인간의 삶 자체가 가능하지 않은데, 이런 생각들은 과연 온당한 것일까?

과학기술학·인문학·사회과학·자연과학 등 다양한 학문 영역의 경계를 넘나드는 프랑스 ‘과학인문학자’ 브뤼노 라투르(사진·65)는 아예 “과학 없는 인문학은 개코원숭이들의 인문학일 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인간에만 초점을 맞췄던 그동안의 학문적 경향에 반발해, ‘비인간’, 곧 사물에 주목하는 독창적인 학문적 흐름을 만들어낸 학자다. 특히 현대사회와 과학기술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사물을 인간과 같은 ‘행위자’로 파악하고 각각의 행위자들이 벌이는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행위자 연결망 이론’(ANT)을 창안해,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주목받고 있다. 대표 저작인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갈무리)가 국내 출간된 바 있다.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는 편지 형식을 빌려 라투르의 생각을 쉽게 집약적으로 이야기해주는 책이다. 그는 독일인 학생에게 보내는 여섯 통 편지 속에 우회·번역·구성 등 자신이 창안한 개념들과 그 맥락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책에서 라투르는 지구의 역사를 해석하는 두 가지 경향을 제시한다. 하나는 역사의 각 단계마다 과거와 근본적인 결별을 상정하고, 그에 힘입어 주체와 객체, 정치와 과학,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을 심화시켜왔다고 보는 ‘해방과 근대화’다. 다른 하나는 각 단계에서 점점 더 크고 더 밀접한 ‘연루’를 상정하고, 기술과 과학과 정치가 매번 더욱 복잡하게 얽히고설켰다고 보는 ‘밀착과 생태화’다. 서구 근대주의가 해방과 근대화 이야기에 집착해 과학기술의 자율성을 강변해왔다면, 라투르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밀착과 생태화 이야기에 주목해보라고 권한다. 이 두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서로 합의를 볼 수 없지만, “공동의 삶 전체는 이 불가능한 합의에 달려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브뤼노 라투르 지음, 이세진 옮김/사월의책·1만5000원
이를 위해 라투르는 서구 근대주의가 상정해온 방법들과는 다른 다양한 개념과 접근법을 제시한다. 예컨대 경구피임약 개발을 보면, 사회적 풍속, 페미니스트의 행동주의, 자산가의 돈, 스테로이드 원자고리의 화학적 연결구조, 국회의 찬반 논쟁 등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다양한 행위자들의 상호작용을 발견할 수 있다. 관념적으로는 과학과 정치·경제 등을 따로 떼어놓고 보는 게 편하지만, 현실을 보면 뗄 수 없이 얽히고설켜 있다는 것이다.

라투르는 이를 ‘공통세계’(cosmos)로, 이 속에 담긴 행위자들의 다양한 입장과 연결망을 그려보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코스모그램’(cosmogramme)으로 명명한다. 그는 “인간 존재와 비인간 존재 사이의 조화·공존·대립·배제의 결합들을 기술하는 법을 익혀야 하며, 인간과 비인간의 존재 조건은 분쟁의 시험을 통해서 차츰 명시적으로 드러난다”고 말한다. 얼핏 어려운 말 같지만, 그가 제시하는 ‘실험실’의 개념은 이를 쉽게 풀이해준다. 실험실은 인간과 온갖 실험 대상이 되는 사물들이 서로에게 상호작용을 주는 공간으로, 인간의 허구적 관념을 잊고 인간과 사물이 함께 만들어내는 ‘실제’가 무엇인지 드러내어준다는 것이다. 라투르는 “오직 구불구불한 ‘메티스’(기술)만이 ‘에피스테메’(학문)를 똑바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라투르의 문제의식은 책의 원제목인 ‘코기타무스’(cogitamus)로 압축된다. 인간 정신과 자연의 사물을 분리해냈던 철학자 데카르트의 명제 ‘코기토’(cogito, 나는 생각한다)를 ‘우리는 생각한다’(코기타무스)로 바꾼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뿐 아니라 사물과 같이 공통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행위자를 가리킨다. 이를 통해 라투르는 과학과 사회, 정치 등을 서로 완전히 분리할 수도, 완전히 결합할 수도 없는 모호한 지점을 짚어낸다. 이로부터 과학을 세속화하고, 더 많은 ‘견제와 균형’을 요구하는 ‘과학민주주의’를 실천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사진 출판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