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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33>새마을운동

시놉티콘 2013. 3. 25. 13:13

 

 

그 덕에 농민들은 정말 잘~ 살게 됐나요?

등록 : 2013.03.22 20:35 수정 : 2013.03.22 21:22

 

 

재고가 넘치는 시멘트를 무상으로 나눠주면서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관 주도의 관제운동으로 변질됐다. 한국의 농촌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과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을 거치면서 국가의 동원체계에 편입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33>새마을운동

‘가난한 농민의 아들’ 구호와
각하에게 부름받았다는 사실은
순박한 농민들을 감동시켰다
땅·노동력을 조건없이 내놓았다
장기집권을 위해 시골을 겨냥한
박정희에겐 뜻밖의 성과였다

정부는 마을에 시멘트 나눠주고
성과를 못 내면 지원을 끊었다
경쟁심이 불타오르면서
두레·품앗이 공동체가 깨졌다
게다가 박정희의 공업화는
그들을 더 힘들게만 만들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새벽종이 울릴 때만이 아니었다. 왜색 가요라고 ‘동백아가씨’를 금지시킨 나라에서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친히 작곡하셨다는 일본 창가풍의 ‘새마을 노래’는 날이 저물도록 온 나라에 울려 퍼졌다. 유신 쿠데타로 또다시 헌법을 짓밟은 직후인 1973년 1월의 연두 기자회견에서 박정희는 “10월유신이라고 하는 것은 곧 새마을운동이고, 새마을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곧 10월유신”이라고 선언했다. 박정희의 말이 아니더라도 유신시대는 곧 새마을운동의 시대였다. 거의 모든 공무원들이 새마을 모자를 쓰고 새마을 완장을 두르고 ‘새마을 노래’를 부르며 새마을 연수교육을 다녀왔다. 기왕에 정부가 추진해온 대부분의 사업도 새마을운동으로 재편되어 새마을이라는 딱지를 붙이게 되었다. 새마을운동은 “초가집도 고치고 마을길도 넓히고”라는 노래가사가 상징하듯이 농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도시새마을운동, 공장새마을운동, 학교새마을운동 등등이 시작되면서 하늘 아래 새마을이 아닌 곳이 없게 되었다. 자연히 사람들은 무엇이 새마을운동이고 무엇이 새마을운동이 아닌지를 알 수 없었다. 1979년 10월26일 저녁 몇 발의 총성과 함께 박정희가 죽으면서 아래로부터의 열정을 담았던 ‘새마을운동’도 사실상 막을 내렸다. 새마을 이름을 단 관변단체가 즐비하고 관공서마다 새마을 깃발이 나부끼고 있지만, 한때 유신을 반대하던 대학생들조차 감동시키던 절절한 사연을 지닌 그 많던 새마을 지도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야말로 이것 또한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이다.

 

박정희에 의한, 박정희를 위한, 박정희의…

 

박정희는 1969년 8월4일 수해를 입은 지역의 복구사업을 순시하다가 경북 청도군 청도읍 신도리 마을 사람들이 “쓰러진 마을을 복구할 바에야 이 기회에 좀더 환경을 잘 가꾸어 깨끗하고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보자”며 마을길도 넓히고 지붕도 개량한 것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그는 이듬해 4월22일 한해대책 지방장관 회의에서 이 마을 사례를 들며 농촌에서 ‘새마을가꾸기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새마을운동이 구체화된 것은 1970년 10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정부가 전국 3만5000개 마을에 각각 300여 포대의 시멘트를 무상으로 나누어주면서 시작되었다. 흥미있는 것은 박정희가 각 마을에 막대한 예산을 들여 시멘트를 나누어준 계기가 쌍용시멘트 소유주였던 김성곤이 박정희에게 시멘트업계의 재고과잉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줄 것을 호소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김성곤은 당시 공화당 재정위원장으로 박정희의 정치자금을 관리하는 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자였다. “남아도는 시멘트를 부진한 새마을가꾸기운동에 돌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라는 박정희의 지시를 받은 당국은 배급받은 시멘트는 반드시 마을 진입로 확장, 작은 교량 건설, 농가 지붕 개량, 우물 개선, 공동 목욕탕 건립, 공동 빨래터 만들기 등 정부가 예시한 20여개의 새마을사업에 한정해서 쓰라는 조건을 달아 시멘트를 내려보냈다.

 

물자가 귀했던 시절, 뜻하지 않게 시멘트를 받아든 농민들은 여기에 자신들의 자금과 노동력을 더하여 마을의 숙원사업을 해결하려 한 경우가 많았다. 정부 입장에서는 기대 밖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박정희는 이에 내무부에 지시하여 각 마을단위의 사업을 면밀하게 평가하도록 한 결과, 약 3만5000개 마을 중 1만6000곳에서 우수한 성과를 얻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박정희는 이 보고를 바탕으로 전국의 마을들을 주민의 참여도와 사업성과에 따라 기초·자조·자립 마을로 나누어 ‘차별적이고 단계적인 지원’을 하도록 했다. 박정희는 좋은 성과를 거둔 마을 1만6000곳에는 마을당 평균 시멘트 500부대와 철근 1t을 지원하도록 하고, 나머지 1만8000개 마을은 전혀 지원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1971년은 대통령선거와 8대 국회의원선거가 있던 해였다. 여당인 공화당은 지원을 받지 못하는 마을의 반발을 우려했지만, 박정희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며 선별지원을 밀어붙였다. 마을끼리의 경쟁심을 자극한 박정희의 도박은 주효했다. 박정희 식으로 표현하면 “경쟁으로 더욱 잘살아보겠다고 노력을 하는 기운이 방방곡곡에 가득” 차게 되었다. 이런 변화가 꼭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경쟁의 기운이 몰아치는 과정에서 마을을 넘는 공동체적 유대는 파괴되었고, 마을 내에서도 열악한 경제적 처지로 인하여 마을단위의 경쟁에 노동력을 제공하지 못하는 집들은 마을에서 점점 살기 힘든 처지가 되었다.

 

김정렴을 비롯한 유신정권의 핵심요인들이 입을 모아 증언하듯이 새마을운동은 “순전히 박 대통령의 개인 구상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새마을 교육에서 활용되던 교재를 보면 “각하께서는 (…) 새마을운동의 개념에서부터 사업 내용, 그리고 전개 방향에 이르기까지의 자세한 지침을 손수 구상하셨고, 때에 맞추어 국민 앞에 제시·설명하셨다”고 한다. 박진도와 한도현이 잘 설명했듯이 “새마을운동은 처음부터 정연한 이론이나 체계를 갖고 시작된 것이 아니고, 최고지도자의 소박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한때 국정의 최고 정치철학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그렇기에 새마을운동은 “박정희라는 개인 그리고 유신체제를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다”.

 

조선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을 빼닮아

 

많은 관찰자들은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이 1930년대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농촌진흥운동을 빼닮았다고 지적한다. 박정희가 1970년 제창한 ‘새마을 가꾸기’란 조선총독부의 ‘아타라시이 무라 쓰쿠리’를 글자 그대로 번역한 것이었다. 박정희가 1937년부터 만 3년간 교사로 근무했던 문경공립보통학교는 농촌진흥운동의 일환으로 두곳의 갱생농원을 경영했고, 박정희는 이 농원에 나가 40여일간 지도를 했다고 한다. 농촌진흥운동이 박정희에게 미친 영향을 가장 상세히 기술한 것은 조갑제였다. 최길성 교수의 연구성과를 인용하여 조갑제는 새마을운동과 농촌진흥운동의 유사성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운동의 이념은,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이 ‘자조, 자립, 협동, 충효애국’이고 그것의 집약적 표현이 국민교육헌장이었던 데 대해서 우가키 총독의 농촌 진흥은 ‘자립, 근검, 협동공영, 충군애국’과 교육칙어였다. 박정희, 우가키 두 사람 다 농촌 출신 군인이었다. 두 운동의 현장 지도자들은 새마을연수원과 농도강습소에 의해 각각 양성되었다. 새마을노래와 농촌진흥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농가경제 5개년 계획, 육림일과 애림일, 모범 부락의 선정 등 공통점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박정희의 새마을운동과 조선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이 ‘관제 국민운동’으로서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둘 사이의 중요한 차이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운동이 벌어질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매우 달랐다. 우가키가 농촌진흥운동을 시작할 때는 세계 대공황의 피해가 조선의 농촌을 덮쳐 소작쟁의, 수리조합 반대투쟁, 부역 반대투쟁 등 농민들의 자생적인 생존권 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고, 사회주의자들은 적극적으로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여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적색농민조합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때였다. 총독부 당국은 전국 80여곳에서 120여건의 적색농조운동을 적발하여 6000여명을 검사국에 송치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체제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지수걸에 따르면 1932년 7월에 시작된 농촌진흥운동은 이런 상황에서 추진된 ‘비상한 시기’의 ‘비상한 정책’이었다.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는 시점에도 분명 위기는 존재했다. 박정희의 수출주도형 경제발전 전략은 농촌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었기에, 경제가 발전할수록 농민들의 처지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농가소득이 도시근로자 가구소득보다 많았지만 1970년에 접어들면서 농가소득은 도시근로자 가구소득의 70% 선으로 급락했다.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을 시작한 시기는 전태일의 분신(1970년 11월)과 광주 대단지 사건(1971년 8월) 등 도시에서 노동자와 도시 빈민들의 불만이 한껏 고조된 시기였다. 박정희에게는 다행히 아직 농촌에서는 도시와 같이 불만이 폭발적으로 분출하지는 않았다. 한국전쟁과 그 전후의 민간인 학살을 거치면서 농촌 내부의 ‘불안 요인’이 철저히 거세되었을 뿐 아니라, 도시로 도시로 향하는 이농의 대열은 불만이 농촌에 폭발할 정도로 쌓일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상황은 좋지 않았다. 농가의 호당 평균부채는 1962년 4751원에서 1969년 1만2518원으로 크게 늘어났다. 1971년 총선에서 여촌야도 현상은 여전히 존재하여 박정희의 정권을 지탱해 주었지만, 농촌에서 여당의 지지율은 1963년과 1967년 총선의 67% 선에서 1971년 총선에서는 58%로 크게 감소했다. 박정희가 계속 집권하기 위해서는 농촌에서의 지지율이 더이상 하락하는 것을 방지하고 도시의 반정부 분위기가 농촌에 확산되지 못하도록 예방해야 했다.

 

박정희가 아직 살아있을 때인 1979년 7월에 발간된 <신동아>에 실린 글은 새마을운동이 성공적인 농촌 근대화 전략이었다면 “1960년대 전반에 농촌인구 100명 가운데 1.3명이 ‘헌 마을’을 떠났는데 왜 1970년대 후반에는 해마다 3.7명이 ‘새마을’이 된 농촌을 떠났는지 설명할 수 없게 된다”고 꼬집었다. 박정희는 늘 “새마을운동은 한마디로 ‘잘살기 운동’이다”라고 강조했지만, 농업의 희생을 전제로 한 공업화, 농업과 공업 간의 불균등 발전, 농가부채, 비민주적 농정, 저농산물 가격 정책과 외국 농산물 수입 등 구조적인 문제는 손대지 않고 소득 증대를 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새마을운동이 전시행정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으로 농가의 소득 증대를 이뤘다면 지금의 농촌이 저렇게 텅 비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면 국가 입장에서 볼 때, 또는 박정희 정권 입장에서 볼 때 새마을운동은 매우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도로의 포장이나 보수, 교량의 건설 등과 같은 사업은 정상적인 근대 국민국가에서라면 마땅히 국가의 예산으로 수행되어야 할 사업들이었다. 마을길을 낼 때 많은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한 푼의 토지보상금도 받지 않고 자기 땅을 기꺼이 내놓았다. 1960년대의 사회간접자본 건설 내용과 비교해 볼 때 새마을운동을 통해서 정부는 아래로부터 무상으로 사회간접자본 건설을 위한 토지와 물자와 엄청난 노동력을 조달받은 것이다. 이렇게 창출된 잉여는 “국가를 매개로 하여 국내외 독점자본에 이전”되었다. 초기에는 새마을운동에서 농민들의 자발성이 매우 두드러졌지만 해가 갈수록 농민들은 의사결정 구조에서 배제되었고 새마을운동의 수행은 거의 공무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정부는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를 설치했고, 그 산하에 도-군-면-리로 이어지는 하부 체계를 건설했다. 대통령의 초미의 관심사가 새마을운동이다 보니 각 공무원들이 새마을운동에서 거둔 실적은 그들의 승진과 직결되었다. 유신체제의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공무원들이 여름에 덥고 돈도 많이 드는 슬레이트 지붕보다 초가지붕이 더 좋다며 지붕 ‘개량’을 하지 않는 집 지붕을 갈고리로 뜯어내거나, 통일벼를 심지 않은 못자리를 장홧발로 짓밟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초가지붕 뜯어버리고 못자리 밟아버리고

 

새마을운동의 관 주도성, 강압성, 전시행정, 성과주의 등은 박정희 사후에 내무부조차 공식적으로 인정한 새마을운동의 대표적인 문제점이었다. 그렇지만 새마을운동 지도자 대회에서 연설하는 내용이나 연설하는 모습이나 각 마을에 배포된 기관지 <새마을>에 소개된 새마을 지도자의 모습은 종교집회에서의 성령이 차고 넘치는 간증을 보는 듯한 뜨거움을 갖고 있다. 그것이 새마을운동의 가장 큰 힘인지도 모른다. 사실 박정희는 농민들이 “무지와 빈곤 속에서 살면서도 더 잘살아보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나태와 질시 속에서 음주와 도박으로 소일하고” 있다고 비난하곤 했다. 농촌이 궁핍한 원인을 들판에 나가 온종일 일하는 농민들이 게으르거나 자포자기한 탓으로 돌리는 것은 박정희의 새마을운동과 ‘자력갱생’을 부르짖었던 농촌진흥운동이 유사한 대목이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농민들이 ‘잘살아보세’를 부르짖은 박정희의 호소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호응했던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박정희는 연설에서 자주 “나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라는 말을 하곤 했다. 한국의 정치사에서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최고지도자는 박정희가 처음이었다. 이승만은 서양 여성과 같이 사는 미국 박사님이었다. 오죽하면 호칭이 이 대통령이 아니라 이 박사였을까. 윤보선은 서울 안국동의 대궐 같은 집에 사는 명문귀족 대지주 가문의 후예였다. 농민들은 자신을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규정하면서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를 노래하며 촌로들과 모내기를 하고 막걸리를 마시는 박정희에게서 이승만과 윤보선에게서 찾을 수 없던 동질감을 느꼈다.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을 설파하는 과정에서 농민들을 게으르다고 탓하기도 했지만, 그들을 운동의 주역으로 불러냈다. 대통령에게 직접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 무언가 중요한 존재로 대우받았다는 것은 농민들, 특히 사회적으로 열악한 처지였지만 새마을운동에 적극 가담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경험이었다. 때로 이들은 새마을 모자와 완장을 통해 권력을 부여받기도 했다. 종의 딸로 태어났지만 부녀회장이 된 여성 지도자는 도박 추방의 구호를 높이 들고 남자들이 모인 사랑방 문을 열어젖히고 화투판을 엎을 수 있었다.

 

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에 이어 새마을운동을 거치면서 국가의 동원체계는 마을 속으로 깊숙이 침투했다. 국가가 자원배분을 통해 마을 안팎의 경쟁을 부추기면서 두레나 품앗이같이 공동체 내에서 서로 돕고 돌보는 농민들 자신들의 조직은 모두 깨져버렸다. 유신체제가 요구한 것과는 다른 방향에서 농민들을 조직하고 생활의 향상을 꾀했던 움직임, 예컨대 강원도 원주에서 장일순 등이 조직한 협동조합운동은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이 통과된 것은 새마을운동이 쓸어버린 ‘사회적 경제’가 부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박정희의 유산을 이어받으려는 박근혜 대통령이 가장 주목하는 것은 새마을운동이다. 감히 제2의 5·16을 하겠다거나 제2의 유신을 하겠다고 말할 수 없는 박근혜 대통령이 내세울 수 있는 박정희표 정치는 ‘제2의 새마을운동’밖에 없다. 또다시 시대착오적으로 하면 된다고 밀어붙여 아래로부터의 자발성을 쓸어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