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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히 벡의 경제위기의 정치학

시놉티콘 2013. 6. 3. 14:00

 

 

유럽연합 흔드는 ‘메르키아벨리즘’

등록 : 2013.06.02 20:01 수정 : 2013.06.02 20:01

 

 

경제위기의 정치학
울리히 벡 지음·김희상 옮김
돌베개·1만2000원

그리스의 경제적 파산을 두고 한국의 보수 우파는 그 원인을 ‘복지 과다’에서 찾았다. 포르투갈, 아일랜드, 이탈리아, 스페인 등이 뒤이어 연쇄 부도위기에 몰리자 이들 국명의 첫 글자를 따 ‘돼지들’(PIIGS)이라 이름붙이고, 일은 하지 않고 흥청망청 놀면서 복지 타령이나 하다 망조가 든 것처럼 몰아붙였다. 물론 사실이 아니지만, 그들에게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국 보수 우파가 그 나라들을 그런 식으로 싸잡아 비판한 것은 당시 국내에 대두되고 있던 심각한 불평등 해소와 경제 민주화, 복지 강화 요구를 희석시키려는 일종의 맞불작전이었다.

 

앙겔라 메르켈. AP 뉴시스

 

<위험사회>로 유명한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지난해 출간한 <경제위기의 정치학>은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도 초미의 관심사가 됐던 유럽연합의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느냐에 대한 나름의 해법을 담고 있다.

 

그리스 지원 문제를 놓고 독일에서도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다수는 왜 자신들이 낸 세금을 빈털터리가 된 그리스를 위해 허비해야 하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유럽연합 최강의 경제국 독일은 지원 여부에 대한 사실상의 결정권을 쥐고 있었다. 앙겔라 메르켈(사진) 정부는 회원국들에 “아껴라!”는 요구와 함께 예산을 대폭 깎는 긴축정책을 주문했다. 긴축정책을 지원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우면서 좀체 실행에 나서지 않는 ‘망설임’을 통해 상대를 길들였고 국내 선거전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울리히 벡은 마키아벨리적 기민한 처신을 결합시킨 메르켈의 이런 수법을 ‘메르키아벨리’ 모델이라고 불렀다. “국내에서 사랑받는 비결은 간단하다. 외국에 두려움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것이다. 밖으로는 잔인할 정도의 신자유주의를, 내부에는 사회민주주의를 강조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야말로 메르키아벨리가 자신의 권력 위상과 독일 중심 유럽을 구축해온 성공 공식이다.”

 

울리히 벡은 그러나 이런 성공이야말로 유럽연합뿐만 아니라 독일 자신에도 치명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유럽연합의 역사가 독일이 유럽의 강자, ‘독일의 유럽’을 만들기 위해 일으킨 두 차례의 참혹한 전쟁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된 것임을 상기시킨다. 말하자면 유럽연합은 그런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로 고안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럽의 독일’이 돼야지 독일의 유럽이 돼선 안 된다. 민족 또는 민족국가를 단위로 우열이 갈리고 갈등하는 유럽연합은 새로운 전쟁과 파멸의 씨앗을 잉태하게 된다.

 

경제학적 사고방식에 대한 그의 비판은 단호하다. “경제학은 사회와 정치 분야에서만큼은 문맹과 다름없다. 다시 말해서 경제학의 안목은 사회와 정치를 알아보지 못하게 만든다. 위기를 둘러싼 토론에서 난무하는 경제학자의 충고는 정치와 사회를 전혀 알지 못하는 ‘문맹’에 기초한다.”

 

일상적인 위험(리스크)사회에서의 생존방식은 ‘우리 아니면 적’이라는 카를 슈미트적 흑백논리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보는 울리히 벡은 상대를 파멸시켜야 할 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협력의 파트너로, 민주주의의 동반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류라는 말은 제국주의가 그 팽창을 위해 써먹는 이데올로기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인류를 말하는 자, 그는 사기꾼이다”라고 슈미트는 주장했지만, 울리히 벡은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타인을 지키는 책임감 있는 태도는 바로 자신의 생존도 가능하게 해 준다며 이를 뒤집는다. “인류를 말하는 자, 그는 자기 자신을 구원한다!”

 

결국 해법은 더 큰 자유와 더 나은 민주주의로 무장한 더 안정적인 유럽연합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것은 민족이나 인종 또는 국가 단위가 아니라 개인을 단위로 한 ‘개인들의 유럽사회’를 통해 완성될 수 있다고 울리히 벡은 얘기한다. 이를 위한 자금은 조세 회피를 위해 국경을 넘나드는 금융거래 세금, 은행에 부과하는 세금, 기업 수익 일부 갹출 등으로 조달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고삐 풀린 위험 자본주의도 길들일 수 있다고 본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