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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네바의 유기농협동조합인 코카뉴에서 야채꾸러미를 공급받는 소비자 조합원들이 아이들과 함께 농장을 찾아왔다. 2 코카뉴의 생산자 조합원인 루디 베를리는 월 460만원의 안정적인 급여를 받는다. 3 베겐슈테텐에서 만난 젊은 농부 실반 슈라이버는 아버지와 함께 3대째 소를 키우면서 밭농사를 짓고 있다. (※ 클릭하면 이미지가 크게 보입니다.) |
[나는 농부다] 스위스 농업 왜 강한가
스위스의 지리적 농사 여건은 우리보다도 못하다. 국토 면적이 우리의 40%에 불과하고, 그중 70%가 농사를 짓지 않는 초지이다. 그런데도 식량 자급률은 60%나 된다. 우리의 22.6%보다 훨씬 높다. 농사 수입만으로 먹고살기 어렵기는 스위스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농사를 포기하는 농민이 많지 않고 농가 경제도 안정적이다. 농업을 살리는 데 온 나라가 힘을 모은 덕분이다.특히 1993년부터 실시한 직불금(개별 농가에 현금으로 지급하는 정부 보조금)의 효과가 컸다. 2011년에 스위스 농가의 직불금 수입은 농가총소득의 60%를 넘어섰다. 평야지대에서 54%, 경사지는 69%, 산악지대로 올가가면 직불금이 농가총소득의 95%에 이른다. 농가총소득에서 농업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1999년 37%에서 2010년 10%로 급하게 떨어졌지만, 농가의 살림살이는 나빠지지 않았다. 여러 명목의 다양한 직불금이 스위스 농가의 95%를 차지하는 가족농들의 비어가는 곳간을 채워준 것이다.
스위스 아르가우주 베겐슈테텐에 있는 농장 ‘그륀델레마트 스톤랜치’. 1983년부터 슈라이버 집안이 3대째 소를 기르면서 60㏊ 규모의 밭농사를 짓고 있다. 지금은 2세대인 슈테판 슈라이버가 아들 실반, 딸 야스민과 함께 농장을 꾸려가고 있다. 슈라이버 농장의 가장 큰 수입은 정부에서 받는 직불금이었다. 슈라이버 가족은 1㏊당 410스위스프랑(48만원)의 경사지 직불금을 정부에서 지급받고 있었다. 농장 땅이 18도를 넘는 경사지이기 때문이다. 직불금은 경사도에 따라 차등 지급된다. 35도 이상의 급경사지에서 농사지으면, 1㏊당 620스위스프랑(72만5000원)의 직불금을 받을 수 있다.
슈라이버 가족은 1995년 유기농으로 전환하면서 생태 직불금도 받고 있다. 생태 보조금을 받는 농가들이 지켜야 하는 조건은 만만치 않았다. 질소와 인 비료의 사용량을 제한받고 5㏊ 이상 농지에서는 반드시 네가지 이상 다른 작물을 재배해야 한다. 작물에 따라 3.5~7%의 휴경지도 두어야 한다. 땅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물론 휴경에 따른 보조금은 지원받는다. 슈라이버 농장에서는 법 기준을 넘어 땅의 21%를 휴경하고 감자, 해바라기, 포도, 밀 등을 기르고 있었다. 또 일부 농지에 사과나무를 심고 추가로 생태 직불금을 지원받고 있었다. 아들 실반 슈라이버는 “사과나무를 심으면 주위에 다양한 식물이 자라 생물종다양성이 보존되고,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 결국 토양이 튼튼해진다”고 설명했다.
축산에서 나오는 동물복지형 직불금 수입도 쏠쏠했다. 5월부터 10월까지 한달에 26일 이상 방목하고, 소 1마리당 연 21만원의 정기 방목직불금 혜택을 누렸다. 여름철이면 알프스 고지대로 소를 옮겨 방목하고 연 38만원의 여름방목직불금을 추가로 받는다. 스위스의 알프스에서는 여름방목이 끝나는 9월 말이면 전통 복장을 한 목동이 꽃단장한 소떼를 이끌고 농장으로 돌아가는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 무렵 여러 마을에서 축제가 벌어진다. 가축에게는 싱싱한 풀을 먹이고, 저지대의 초지를 보호하면서, 관광수입을 올리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내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스위스 농업의 진면목이다.
스위스는 농업의 다원적 기능 보호를 명시적인 헌법조항(104조)으로 못박고 있다. 안정적인 식량공급, 자연환경 보호, 농촌 경관과 농촌 인구 유지 등을 위해 과감하게 농업 직불금을 공급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를 이룬 것이다. 농지의 건축면적을 5% 이내로 제한하는 등의 엄격한 농지보호 장치도 두고 있다. 농사짓지 않는 사람의 농지 보유는 당연히 법으로 금지된다.
정부의 직불금 보조 못지않게, 스위스 농부와 시민의 자발적인 농업 살리기 움직임도 활발하다. 레 자르댕 드 코카뉴는 1976년 제네바 지역에서 가장 먼저 제철야채꾸러미 사업을 시작한 농민과 소비자들의 유기농 협동조합이다. 지금은 코카뉴처럼 매주 꾸러미 상자를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사업체(또는 농가)가 제네바 지역에서만 48곳으로 늘어났다. 코카뉴는 10가구의 농민 생산자들이 소비자 조합원 420명의 밥상을 책임진다. 대신 소비자들은 농민이 공급해 주는 그대로 믿고 받아 먹는다. 농부는 마음 놓고 농사를 지을 수 있어 좋고, 소비자는 제철 먹을거리를 먹어서 좋다. 코카뉴는 끈끈한 신뢰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소비자 조합원 수를 더 늘리지도 않는다. 꾸러미를 받는 소비자들은 1년에 3일 반을 의무적으로 농장에서 일해야 한다. 농부는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소비자는 농부가 어떻게 농사짓는지 누구보다 서로를 잘 이해한다.
4 농장에서 젖소를 사육하는 모습. 5 슈라이버 가족 농장의 전경. |
다양한 정부 보조금이
가족농의 빈 곳간을 채워준다
농가 총소득의 60%를 넘었다 농민·소비자 유기농 협동조합은
농사계획을 함께 세우고
1년치 꾸러미 값을 선지불한다
협동조합 사업체로 일하는 코카뉴 농부들은 직불금을 지원받지 못한다. 개별 농가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 4000프랑(466만원)을 받는 월급 농부들로, 가장 안정적인 소득을 누린다. 도시노동자 월급인 5500프랑(640만원)에는 못 미치지만, 농업노동자 평균 임금보다는 25%가량 높은 수준이다. 복지제도도 잘 갖추고 있다. 사람에 따라 여름 또는 겨울에만 일하기도 한다. 코카뉴 농부 루디 베를리는 “우리는 생산하기 전에 다 판다”는 말로, 월급 농부가 가능한 이유를 설명했다. 농민과 소비자가 함께 1년 농사계획을 세우고, 소비자들은 매주 받게 될 1년치 꾸러미 가격을 한꺼번에 선지불하는 것이다.
꾸러미 가격은 큰 것이 연 1300프랑(151만원), 작은 것이 930프랑(108만원)이다. 12월과 1월을 빼고 열달 동안 매주 한차례 공급한다. 주머니가 가벼운 학생들은 노동으로 꾸러미 값을 대신 치르기도 한다. 14일을 일하면 1년치 값을 지급하는 것으로 친다. 제네바 시내의 40군데 거점에 부려놓으면 소비자 조합원들이 각자 찾아와서 꾸러미를 가져간다.
농업정책이 잘 짜인 스위스 농촌에서도 젊은 인력이 부족해지고 있다. 텔레비전에서는 젊은 농부가 아내를 찾는 공개 구혼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받는 코카뉴의 농부들은 평균 30대 중반의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코카뉴 방식에 농촌 고령화 문제를 푸는 해법이 담겨 있진 않을까?
스위스 정부는 전체 농업 예산의 무려 82%에 이르는 직불금 규모를 2017년까지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신농업법 시행 10년을 맞아 2009년 펴낸 자료에서는 거듭 ‘농업의 가치’를 강조했다. “농업의 가치를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만으로 평가하는 시각은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 자연환경과 토질 등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는 농업의 생산성을 다른 산업과 똑같은 기준으로 비교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제네바 베겐슈테텐/글·사진 김세진 도서출판한살림 편집자 ※필자는 7월 중순 한살림생협의 연수단으로 스위스 농업 현장을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