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근대
[1894 vs 2014, 갑오년의 동아시아](3) 청일전쟁은 한·중·일 3국 전쟁
시놉티콘
2014. 1. 20. 21:12
[1894 vs 2014, 갑오년의 동아시아](3) 청일전쟁은 한·중·일 3국 전쟁
ㆍ전쟁 전야, 한·중·일 둘러싼 두 개의 ‘톈진조약’이 있었다
1885년 청나라 리훙장(직예총독 및 북양통신대신)은 톈진에서 2개의 조약을 맺었다. 하나는 청불전쟁에 패배하고 프랑스와 맺은 조약이고, 다른 하나는 갑신정변 사후처리로 일본과 맺은 조약이다.
청불전쟁은 류큐왕국(오키나와)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는 모습을 지켜본 청이 처음으로 조공국 방어를 위해 무력 개입을 시도했던 것이지만, 프랑스의 압도적인 화력을 꺾을 수는 없었다. 2년여간의 전쟁은 결국 청이 프랑스의 베트남 보호권을 인정하는 톈진조약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동남아시아에서는 청이 종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조공국이 모두 사라졌다. 이제 청의 유일한 조공국은 동북아시아의 조선이었다. 하지만 같은 해 조선의 거문도마저 영국에 무단 점거당하면서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도 위협받기 시작했다. 이처럼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변화 속에서 청은 조선을 둘러싸고 일본과 또 다른 톈진조약을 체결했다.
■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임오군란 이후 청은 한성(서울)에 병력 3000명을 주둔시키고 있었지만, 청불전쟁이 발생하자 그 절반을 베트남으로 이동시켰다. 이를 기회 삼아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개화파는 일본 공사관의 지원을 받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는 청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왕권을 제한하여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려 했다. 그러나 청의 일본 공사관 공격으로 46시간 만에 실패했다. 문자 그대로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은 단순한 조선 국내의 정권 쟁탈이 아니라 처음부터 청·일 양국이 개입된 동아시아적 사건이었다. 일본 정부는 이토 히로부미를 톈진으로 파견하여 리훙장과 갑신정변과 관련된 사항들을 교섭했다. 교섭은 두 달간 이어지면서 난항을 겪었지만, 마침내 청·일 양국이 조선에서 공동으로 병력을 철수하고, 향후 파병 시에는 사전에 서로 통고할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톈진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은 한쪽의 파병이 반드시 다른 한쪽의 대항 파병을 유발시키므로 당사자 조선의 주권을 침해하는 부당한 내용이었으나, 역설적이게도 청·일 양국에는 조선으로의 재출병을 신중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청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약 10여년간 조선을 둘러싸고 청과 일본 사이에는 별다른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학 농민군의 전주성 함락으로 다급해진 조선 정부가 청에 원병을 요청하는 순간, 때를 기다리던 일본은 거류민 보호라는 명목 아래 신속히 조선으로 ‘혼성 1개 여단’을 파병했다.
■ 독립국이며 속국인 조선
1882년 톈진에서 리훙장은 조선정부를 대신하여 미국의 전권대사 슈펠트와 조약 교섭을 추진하면서 “조선은 청의 속국이지만 내정과 외교 모두 자주”라는 조항을 명문화하려 했다. 이는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는 의도였다. 조선에서 파견된 김윤식도 조선은 ‘자주’의 입장에서 각국과 ‘평등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고, 동시에 ‘속국’으로서 청을 섬기는 ‘사대의 의리’도 저버리지 않기 때문에 ‘일거양득’이라고 찬성했다. 그가 생각한 ‘속국’이란 아직 최소한의 병력도 마련하지 못한 ‘고립되고 약한 형세’의 조선을 종주국 청이 지켜준다는 것이며, ‘자주’란 조선이 자립하여 각국과 통교할 수 있는 권리였다. 결국 리훙장이 제안한 조항의 명문화는 미국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대신 조약과 별개로 청이 기초한 “조선은 청의 속국이지만, 내정과 외교는 지금까지 대조선국 군주의 자주에 따랐다”는 내용을 조선 국왕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것으로 타협했다. 이후 조선은 청의 손을 거치지 않고 영국, 독일, 러시아와 직접 교섭하여 조약을 체결하면서도, 그때마다 동일한 내용을 상대국에 보냈다. 조선으로서는 청의 ‘속국’임을 부정하지는 않으면서 ‘외교의 자주’를 행사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젊은 나이에 영국령 인도차관에 임명된 유능한 외교관 커즌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세계에서 조선처럼 스스로 독립국이자 속국이라고 주장하는 나라는 없다. 또한 양쪽의 성격과 관련된 증거도 분명히 제시할 수 있는 정치상 가장 불규칙한 상태의 나라는 아마도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현존하는 국가를 만국공법에 따라 ‘독립국’ 아니면 ‘속국’으로 이해하는 커즌에게 독립국이자 속국이라고 자칭하는 조선의 조약체결 방식은 이해하기 어려웠으리라. 점차 조선 내부로부터도 청과의 관계에서 속국을 어떻게 볼 것인지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것은 일찍이 갑신정변에서 ‘조공허례 폐지’라는 강령으로 제시되었고, 이후에는 두 차례나 러시아와 밀약을 맺고 청을 견제하려던 고종의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또 고종은 서양식 학교나 사관양성학교를 만드는 등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1890년대 들어설 무렵부터는 방곡령 보상금 등으로 재정난이 발생하면서 청의 속국화 정책에 반대하며 실질적인 ‘자주’를 실현하려던 움직임도 좌절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서 청에 밀려 있던 일본에서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총리가 1890년 12월 처음 열린 제국의회에서 주권선과 함께 조선을 이익선으로 상정하고 군비확장을 위한 예산 승인을 요청했다. 그 결과 1894년경에는 육·해군 모두 언제든 청과 전쟁을 개시할 수 있는 준비를 갖췄다.
■ 청·일 양국의 조선 출병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황토현과 장성에서 승리를 거두며 마침내 5월31일 전주성을 점령했다.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은 전라도의 점령이자 조선 정부에 대한 정면 도전을 의미했다. 당황한 조선 정부는 고종의 주재 아래 긴급 대신회의를 열고 농민군 진압을 위해 ‘임오와 갑신의 전례’에 따라 청의 원병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을 입수한 일본은 공사관과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출병하기로 결정하고, 6월5일 전쟁지도부인 대본영을 설치했다. 공식적으로 전쟁 준비에 착수한 것이다. 청의 원병을 요청하는 조선의 공식문서가 한성에 머물고 있던 위안스카이에게 제출된 것이 6월3일이므로, 일본이 얼마나 신속히 출병을 결정했는지 알 수 있다. 톈진조약에 근거한 청·일 양국의 상호 통고는 같은 달 7일 이뤄졌다. 이때 청은 ‘속방을 보호하는 구례’에 따라 조선의 원병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일본에 통보했다.
전주를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청·일 양군의 개입에 위기감을 느껴 같은 달 10일 정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물러났다. 이는 청·일 양군이 조선에 주둔할 이유가 없어졌음을 의미했다. 조선 정부는 일본군의 즉시 철병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은 임오군란 때 맺은 제물포조약에 따라 파병 여부의 권한은 일본에 있으므로 조선의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한편, 청에 조선의 내정개혁을 공동으로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만약 청이 거부한다면 일본이 단독으로라도 개혁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공사관 및 거류민 보호라는 애초의 출병 목적이 조선의 내정개혁으로 변경된 것이다.
청은 이미 ‘내란’이 진정되었으므로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하는 한편, 조선의 내정개혁은 조선이 자주적으로 결정할 문제라며 일본의 제안을 거부했다. 청은 조선은 물론이고 영국과 러시아 등 각국 공사가 청과 일본의 동시 철군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철군할 의사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에서 내정개혁이 실현될 때까지 철군하지 않겠다고 청에 통고하는 한편, 인천에 체류 중이던 일본 육군을 용산으로 옮겼다. 일본은 ‘속방을 보호하는’ 청군의 존재가 조선의 ‘자주’를 규정한 강화도조약 제1조를 위반하고 있다며 조선 정부에 청군 퇴각을 압박했다. 이것은 조선 정부가 청군을 물러나게 할 수 없다면, 일본이 대신 축출해주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청·일 양국이 철수한 후 ‘자주’적으로 개혁을 실시하겠다는 답변을 고수했다.
조선을 둘러싸고 청과 전쟁도 불사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은 머나먼 런던에서 전해 온 낭보를 배경으로 한다. 7월16일 체결된 영·일통상항해조약이 그것이다. 이 조약으로 미국 페리 제독이 일본을 찾은 이래 일본의 오랜 염원이던 영사재판권이 철폐됐다. 물론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의 군사력을 선택한 영국의 양보로 이뤄진 것이지만, 이로써 일본은 청과 전쟁을 벌여도 영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장받았다. 유럽의 대립이 동아시아 긴장과 연동되면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전쟁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으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일본에는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확실한 명분이 필요했다.
■ 일본군 경복궁을 기습점령, 전쟁 발발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와 청와대로 통하는 길을 걸어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경복궁의 서쪽 출입구인 영추문이 있다. 지금은 광화문의 명성에 눌려 왕래가 드물지만, 조선시대에는 문무백관이 주로 출입하던 문이었고, 120년 전 7월23일 새벽 5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기 위해 부수고 들어간 최초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후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옹립하고 김홍집으로 하여금 내각을 구성하여 갑오경장을 실시하도록 지원했다. 이런 의미에서 영추문으로 들어가 처음 보이는 건물이 갑오경장 때 내각본부로 사용된 수정전이라는 점은 매우 상징적이다.
오랫동안 일본 육군의 경복궁 점령은 우발적인 소규모 충돌 사건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던 것이 일본의 역사학자 나카츠카 아키라의 노력으로 일본 육군의 의도적 도발이었음이 밝혀졌다. 그가 찾아낸 비밀 자료는 일본 공사관과 일본군이 하나가 되어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작전 계획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작전은 경복궁과 그 주변 한성의 중축 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점령이었음이 상세히 적혀 있다. 영추문을 부수고 기습해 들어오는 일본군에게 총을 쏘며 저항한 것은 당시 경복궁을 지키고 있던 약 500여명의 평양 감영 소속 호위군이었다. 이들의 총격전은 오전 7시경 고종이 포로로 잡힐 때까지 계속되었다.
경복궁을 점령하고 내각을 교체한 일본은 ‘조선 정부가 즉시 아산에서 청군을 몰아내 달라는 요청을 하도록’ 흥선대원군에게 요청했다. 흥선대원군은 끝까지 거부했다. 그러나 일본은 무력을 앞세워 마침내 조선 정부의 요청서를 받아냈다. 이제 청군은 수호자가 아닌 침입자였다. 일본 해군은 같은 달 25일 기습적으로 충청도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청 군함을 격침시켰다. 일본 함대의 합계 톤수는 약 1만1000톤으로 청 함대의 합계 톤수 3300톤보다 세 배가 넘는 압도적 우세였다. 29일 아산 동북 20㎞의 요충지 성환에서 일본군 5000명이 풍도해전 패배로 군대를 증원시키지 못한 청군 3500명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청군은 평양에 병력 1만2000명을 집중하고 일본군의 북상에 대비했다.
8월1일 일본은 정식으로 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이 전쟁을 청일전쟁이라 부르는 이유다. 하지만 선전포고에서 전쟁 상대국을 ‘청국 및 조선’으로 할지 아니면 ‘청국’만으로 할지 여섯 차례나 수정을 거듭하다가 결국 조선을 제외시키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것은 만약 경복궁 기습 점령으로 조선 정부를 일본에 협조하도록 만들지 못했다면 ‘청국 및 조선’이 전쟁 상대국으로 설정될 수 있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일본군의 경복궁 기습 점령에 맞서 싸우던 평양 감영 소속 호위군들이 청군과 함께 일본군에게 저항한 평양성 전투, 그리고 일본군과 손잡은 조선의 정부군에 맞서 다시 봉기한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는 청일전쟁의 실체가 한·중·일 3국의 동아시아 전쟁이었음을 말해준다. 그것도 조선 땅에서 민중 홀로 치렀던 처절한 전쟁이었음을. 이것이야말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아시아로 선회하는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여를 선언하며 ‘제2의 갑오경장’을 구상하는 ‘박근혜호’가 기억해야 하는 청일전쟁의 교훈이 아닐까.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자의 논리에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힘은 결국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1885년 청나라 리훙장(직예총독 및 북양통신대신)은 톈진에서 2개의 조약을 맺었다. 하나는 청불전쟁에 패배하고 프랑스와 맺은 조약이고, 다른 하나는 갑신정변 사후처리로 일본과 맺은 조약이다.
청불전쟁은 류큐왕국(오키나와)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는 모습을 지켜본 청이 처음으로 조공국 방어를 위해 무력 개입을 시도했던 것이지만, 프랑스의 압도적인 화력을 꺾을 수는 없었다. 2년여간의 전쟁은 결국 청이 프랑스의 베트남 보호권을 인정하는 톈진조약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동남아시아에서는 청이 종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조공국이 모두 사라졌다. 이제 청의 유일한 조공국은 동북아시아의 조선이었다. 하지만 같은 해 조선의 거문도마저 영국에 무단 점거당하면서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도 위협받기 시작했다. 이처럼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변화 속에서 청은 조선을 둘러싸고 일본과 또 다른 톈진조약을 체결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장악하기 위해 침입했던 영추문 앞에서 건국대 박삼헌 교수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경복궁 기습점령’은 일본군과 일본 공사관이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계획이었다는 사실이 일본 역사학자에 의해 밝혀졌다. |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임오군란 이후 청은 한성(서울)에 병력 3000명을 주둔시키고 있었지만, 청불전쟁이 발생하자 그 절반을 베트남으로 이동시켰다. 이를 기회 삼아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개화파는 일본 공사관의 지원을 받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는 청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왕권을 제한하여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려 했다. 그러나 청의 일본 공사관 공격으로 46시간 만에 실패했다. 문자 그대로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은 단순한 조선 국내의 정권 쟁탈이 아니라 처음부터 청·일 양국이 개입된 동아시아적 사건이었다. 일본 정부는 이토 히로부미를 톈진으로 파견하여 리훙장과 갑신정변과 관련된 사항들을 교섭했다. 교섭은 두 달간 이어지면서 난항을 겪었지만, 마침내 청·일 양국이 조선에서 공동으로 병력을 철수하고, 향후 파병 시에는 사전에 서로 통고할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톈진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은 한쪽의 파병이 반드시 다른 한쪽의 대항 파병을 유발시키므로 당사자 조선의 주권을 침해하는 부당한 내용이었으나, 역설적이게도 청·일 양국에는 조선으로의 재출병을 신중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청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약 10여년간 조선을 둘러싸고 청과 일본 사이에는 별다른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학 농민군의 전주성 함락으로 다급해진 조선 정부가 청에 원병을 요청하는 순간, 때를 기다리던 일본은 거류민 보호라는 명목 아래 신속히 조선으로 ‘혼성 1개 여단’을 파병했다.
■ 독립국이며 속국인 조선
1882년 톈진에서 리훙장은 조선정부를 대신하여 미국의 전권대사 슈펠트와 조약 교섭을 추진하면서 “조선은 청의 속국이지만 내정과 외교 모두 자주”라는 조항을 명문화하려 했다. 이는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는 의도였다. 조선에서 파견된 김윤식도 조선은 ‘자주’의 입장에서 각국과 ‘평등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고, 동시에 ‘속국’으로서 청을 섬기는 ‘사대의 의리’도 저버리지 않기 때문에 ‘일거양득’이라고 찬성했다. 그가 생각한 ‘속국’이란 아직 최소한의 병력도 마련하지 못한 ‘고립되고 약한 형세’의 조선을 종주국 청이 지켜준다는 것이며, ‘자주’란 조선이 자립하여 각국과 통교할 수 있는 권리였다. 결국 리훙장이 제안한 조항의 명문화는 미국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대신 조약과 별개로 청이 기초한 “조선은 청의 속국이지만, 내정과 외교는 지금까지 대조선국 군주의 자주에 따랐다”는 내용을 조선 국왕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것으로 타협했다. 이후 조선은 청의 손을 거치지 않고 영국, 독일, 러시아와 직접 교섭하여 조약을 체결하면서도, 그때마다 동일한 내용을 상대국에 보냈다. 조선으로서는 청의 ‘속국’임을 부정하지는 않으면서 ‘외교의 자주’를 행사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젊은 나이에 영국령 인도차관에 임명된 유능한 외교관 커즌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세계에서 조선처럼 스스로 독립국이자 속국이라고 주장하는 나라는 없다. 또한 양쪽의 성격과 관련된 증거도 분명히 제시할 수 있는 정치상 가장 불규칙한 상태의 나라는 아마도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현존하는 국가를 만국공법에 따라 ‘독립국’ 아니면 ‘속국’으로 이해하는 커즌에게 독립국이자 속국이라고 자칭하는 조선의 조약체결 방식은 이해하기 어려웠으리라. 점차 조선 내부로부터도 청과의 관계에서 속국을 어떻게 볼 것인지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것은 일찍이 갑신정변에서 ‘조공허례 폐지’라는 강령으로 제시되었고, 이후에는 두 차례나 러시아와 밀약을 맺고 청을 견제하려던 고종의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또 고종은 서양식 학교나 사관양성학교를 만드는 등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1890년대 들어설 무렵부터는 방곡령 보상금 등으로 재정난이 발생하면서 청의 속국화 정책에 반대하며 실질적인 ‘자주’를 실현하려던 움직임도 좌절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서 청에 밀려 있던 일본에서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총리가 1890년 12월 처음 열린 제국의회에서 주권선과 함께 조선을 이익선으로 상정하고 군비확장을 위한 예산 승인을 요청했다. 그 결과 1894년경에는 육·해군 모두 언제든 청과 전쟁을 개시할 수 있는 준비를 갖췄다.

중국을 상징하는 용에 칼을 겨누는 모습을 그린 만평. 청에 대한 일본의 선전포고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일조각 제공
■ 청·일 양국의 조선 출병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황토현과 장성에서 승리를 거두며 마침내 5월31일 전주성을 점령했다.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은 전라도의 점령이자 조선 정부에 대한 정면 도전을 의미했다. 당황한 조선 정부는 고종의 주재 아래 긴급 대신회의를 열고 농민군 진압을 위해 ‘임오와 갑신의 전례’에 따라 청의 원병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을 입수한 일본은 공사관과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출병하기로 결정하고, 6월5일 전쟁지도부인 대본영을 설치했다. 공식적으로 전쟁 준비에 착수한 것이다. 청의 원병을 요청하는 조선의 공식문서가 한성에 머물고 있던 위안스카이에게 제출된 것이 6월3일이므로, 일본이 얼마나 신속히 출병을 결정했는지 알 수 있다. 톈진조약에 근거한 청·일 양국의 상호 통고는 같은 달 7일 이뤄졌다. 이때 청은 ‘속방을 보호하는 구례’에 따라 조선의 원병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일본에 통보했다.
전주를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청·일 양군의 개입에 위기감을 느껴 같은 달 10일 정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물러났다. 이는 청·일 양군이 조선에 주둔할 이유가 없어졌음을 의미했다. 조선 정부는 일본군의 즉시 철병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은 임오군란 때 맺은 제물포조약에 따라 파병 여부의 권한은 일본에 있으므로 조선의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한편, 청에 조선의 내정개혁을 공동으로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만약 청이 거부한다면 일본이 단독으로라도 개혁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공사관 및 거류민 보호라는 애초의 출병 목적이 조선의 내정개혁으로 변경된 것이다.
청은 이미 ‘내란’이 진정되었으므로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하는 한편, 조선의 내정개혁은 조선이 자주적으로 결정할 문제라며 일본의 제안을 거부했다. 청은 조선은 물론이고 영국과 러시아 등 각국 공사가 청과 일본의 동시 철군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철군할 의사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에서 내정개혁이 실현될 때까지 철군하지 않겠다고 청에 통고하는 한편, 인천에 체류 중이던 일본 육군을 용산으로 옮겼다. 일본은 ‘속방을 보호하는’ 청군의 존재가 조선의 ‘자주’를 규정한 강화도조약 제1조를 위반하고 있다며 조선 정부에 청군 퇴각을 압박했다. 이것은 조선 정부가 청군을 물러나게 할 수 없다면, 일본이 대신 축출해주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청·일 양국이 철수한 후 ‘자주’적으로 개혁을 실시하겠다는 답변을 고수했다.
조선을 둘러싸고 청과 전쟁도 불사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은 머나먼 런던에서 전해 온 낭보를 배경으로 한다. 7월16일 체결된 영·일통상항해조약이 그것이다. 이 조약으로 미국 페리 제독이 일본을 찾은 이래 일본의 오랜 염원이던 영사재판권이 철폐됐다. 물론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의 군사력을 선택한 영국의 양보로 이뤄진 것이지만, 이로써 일본은 청과 전쟁을 벌여도 영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장받았다. 유럽의 대립이 동아시아 긴장과 연동되면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전쟁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으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일본에는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확실한 명분이 필요했다.
갑오개혁을 주도했던 개혁파가 집무실로 썼던 경복궁내 수정전. | 김정근 기자
■ 일본군 경복궁을 기습점령, 전쟁 발발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와 청와대로 통하는 길을 걸어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경복궁의 서쪽 출입구인 영추문이 있다. 지금은 광화문의 명성에 눌려 왕래가 드물지만, 조선시대에는 문무백관이 주로 출입하던 문이었고, 120년 전 7월23일 새벽 5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기 위해 부수고 들어간 최초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후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옹립하고 김홍집으로 하여금 내각을 구성하여 갑오경장을 실시하도록 지원했다. 이런 의미에서 영추문으로 들어가 처음 보이는 건물이 갑오경장 때 내각본부로 사용된 수정전이라는 점은 매우 상징적이다.
오랫동안 일본 육군의 경복궁 점령은 우발적인 소규모 충돌 사건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던 것이 일본의 역사학자 나카츠카 아키라의 노력으로 일본 육군의 의도적 도발이었음이 밝혀졌다. 그가 찾아낸 비밀 자료는 일본 공사관과 일본군이 하나가 되어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작전 계획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작전은 경복궁과 그 주변 한성의 중축 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점령이었음이 상세히 적혀 있다. 영추문을 부수고 기습해 들어오는 일본군에게 총을 쏘며 저항한 것은 당시 경복궁을 지키고 있던 약 500여명의 평양 감영 소속 호위군이었다. 이들의 총격전은 오전 7시경 고종이 포로로 잡힐 때까지 계속되었다.
경복궁을 점령하고 내각을 교체한 일본은 ‘조선 정부가 즉시 아산에서 청군을 몰아내 달라는 요청을 하도록’ 흥선대원군에게 요청했다. 흥선대원군은 끝까지 거부했다. 그러나 일본은 무력을 앞세워 마침내 조선 정부의 요청서를 받아냈다. 이제 청군은 수호자가 아닌 침입자였다. 일본 해군은 같은 달 25일 기습적으로 충청도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청 군함을 격침시켰다. 일본 함대의 합계 톤수는 약 1만1000톤으로 청 함대의 합계 톤수 3300톤보다 세 배가 넘는 압도적 우세였다. 29일 아산 동북 20㎞의 요충지 성환에서 일본군 5000명이 풍도해전 패배로 군대를 증원시키지 못한 청군 3500명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청군은 평양에 병력 1만2000명을 집중하고 일본군의 북상에 대비했다.
8월1일 일본은 정식으로 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이 전쟁을 청일전쟁이라 부르는 이유다. 하지만 선전포고에서 전쟁 상대국을 ‘청국 및 조선’으로 할지 아니면 ‘청국’만으로 할지 여섯 차례나 수정을 거듭하다가 결국 조선을 제외시키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것은 만약 경복궁 기습 점령으로 조선 정부를 일본에 협조하도록 만들지 못했다면 ‘청국 및 조선’이 전쟁 상대국으로 설정될 수 있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일본군의 경복궁 기습 점령에 맞서 싸우던 평양 감영 소속 호위군들이 청군과 함께 일본군에게 저항한 평양성 전투, 그리고 일본군과 손잡은 조선의 정부군에 맞서 다시 봉기한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는 청일전쟁의 실체가 한·중·일 3국의 동아시아 전쟁이었음을 말해준다. 그것도 조선 땅에서 민중 홀로 치렀던 처절한 전쟁이었음을. 이것이야말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아시아로 선회하는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여를 선언하며 ‘제2의 갑오경장’을 구상하는 ‘박근혜호’가 기억해야 하는 청일전쟁의 교훈이 아닐까.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자의 논리에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힘은 결국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