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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옴_한국경제] 김정은 집권 3년…격랑의 북한경제

시놉티콘 2014. 12. 1. 12:52

 

 

김정은 집권 3년…격랑의 북한경제
(1) 끝장난 배급제…시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

"뭘 하든 공짜 없다"
장마당 밤장사도 성황…손전등 켜고 거래하기도

"내년부터 인센티브 확대"
국영공장 외국 경영자 영입…자본주의식 성과제 도입

북한 체제는 공식적으로 시장경제를 부정한다. 하지만 전국 400여개의 장마당(시장) 없이는 주민의 생존이 불가능한 단계에 왔다. 사진은 평양에서 최대규모인 통일거리시장. 연합뉴스기사 이미지 보기

북한 체제는 공식적으로 시장경제를 부정한다. 하지만 전국 400여개의 장마당(시장) 없이는 주민의 생존이 불가능한 단계에 왔다. 사진은 평양에서 최대규모인 통일거리시장.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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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한에 풍년이 든 것은 1차적으로 기상여건이 좋았기 때문이다. 거의 연례적으로 농작물에 피해를 끼쳤던 가뭄과 태풍이 잠잠했다는 얘기다. 올해 북한의 농작물 생산량은 10년 전과 비교해 20% 이상 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가을 추수기엔 함경북도 청진에서 탈곡용 트랙터 200개(대당 한국돈 250만원 상당)를 한꺼번에 주문해 중국 업체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다.

“초과 생산분 다 가져라”

식량 사정이 좋아지면서 북한 곳곳의 옥수수밭도 속속 논밭으로 바뀌고 있다는 전언이다. 옌볜에서 기계부속품 판매사업을 하는 A씨는 “얼마 전 나진으로 향하던 도중 도로 양쪽에 있던 옥수수밭에 모두 벼가 자라난 것을 보고 너무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며 “개간을 할 여유가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농촌의 이 같은 변화는 날씨 요인 외에 당국의 정책적 변화도 한몫하고 있다. 공식화된 적은 없지만 북한 당국은 2012년 이른바 6·28조치를 내부적으로 발표했다. 김정은이 ‘우리 식의 새로운 경제관리체계’라고 부르는 농업 개혁이다.

협동농장의 분조 규모를 10~25명에서 4~6명으로 줄이고 성과에 따라 수확물을 차등배분하는 원칙이 포함됐다. 목표생산량을 달성할 경우 생산량의 70%는 국가가, 30%는 분조가 가져갈 수 있도록 자율 처분권을 부여한 것이 핵심이다. 나아가 초과 달성할 경우엔 초과분 전체를 분조가 갖도록 했다. 일종의 자본주의식 인센티브제로 동기 부여를 통해 전체 수확량을 늘리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조치였다
.

식품 국산화 총력

김정은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올해 5월 말 또 다른 발표(5·30조치)를 내놓았다. 내년부터 모든 협동농장과 기업소에 자율 경영제를 본격 도입하고 가족 한 명당 땅 3300㎡를 지급하고 국가가 수확물의 40%를, 개인이 60%를 가져가도록 하겠다는 것. 내용이 워낙 파격적이어서 진위를 의심하는 시각도 없지 않지만 대체로 맞는 얘기라는 전언이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농업뿐만 아니라 제조 건설 등에도 인센티브제가 급속 확산되고 있다. 북한의 국영 공장은 놀고 있는 곳이 많다. 중국산 공산품에 비해 품질 경쟁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데다 전력과 용수 부족으로 가동률을 끌어올리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출경쟁력이 있는 생수산업과 북한 내 장마당에서 중국산 제품과 겨뤄볼 만한 생필품 쪽에선 공장을 돌려보겠다는 움직임들이 나타나고 있다. 북한 당국은 특히 식품 국산화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최근 중국산 폐유가 식용유로 둔갑해 수입되는 바람에 집단 식중독이 발생하는 등 그동안 품질이 떨어지는 중국산 가공식품 때문에 주민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투자금과 시설 확보다. 북한 당국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외국인, 특히 중국인을 전문경영인으로 기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북한 내 경영자로는 중국산 설비 부속품 하나만 고장이 나도 몇 달을 허송세월해야 하는 상황이다. 북한의 항구도시인 강원도 원산에서 국영공장 인수를 검토 중인 중국인 사업가 B씨는 “중국보다 인건비가 싸고 식품 원자재도 비교적 경쟁력이 있는 만큼 수익을 갖고 나갈 수 있는 보장만 확실하면 투자자를 모아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불법 야간시장도 활개

북한 생산시스템의 이런 변화는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있는 장마당 유통과 결합해 의외의 시너지를 낼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장마당은 지역별로 편차가 있지만 나진과 청진은 500개, 평양의 큰 곳은 100개 이상의 매대를 마련해놓고 있다. 당국에 일정 금액의 자릿세를 내고 나머지 수익은 개인이 다 갖는다.

나진에서 가장 큰 장마당은 옌볜에서 가장 큰 시장인 연볜서시장과 규모가 맞먹는다. 성수기 때는 하루에 수만명이 모여 장사진을 친다고 한다
. 영업시간대는 오후 2시에서 6시까지로 제한돼 있지만 불법인 밤장사도 성황이다. 전력 부족으로 사방이 캄캄한데도 상인들이 손전등을 들고 나와서 장사를 한다는 것. 물론 이를 눈감아주고 뒷돈을 받는 관리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장마당에는 없는 게 없다. 북한 당국도 아주 귀한 해삼 도라지 송이버섯 같은 것만 거래를 통제하고 나머지는 묵인한다.

장마당을 오가는 사람 중에는 큰 도시에서 물건을 사다 작은 도시로 뿌리는 도매상들도 많다. 북한 전역에 줄잡아 수만명이다.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고 당국의 이동통제도 받는 이들은 대형트럭이나 짐차에 몸을 싣고 장마당에 들어선다. 거리에 따라 북한 돈으로 1000~2000원을 운전수에게 쥐여줘야 한다. 북한 장마당을 한 달에 한 번꼴로 찾는다는 한 중국 상인의 전언이다.

“요즘 북한 사람들 눈에는 모든 게 돈벌이 수단으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어디서 뭘해도 공짜가 없어요. 자본주의 물이 들었다고 서로 비난하지도 못합니다. 바로 눈앞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무슨 이념 타령을 하겠습니까.”

■ 포전담당제

북한이 최근 일부 도입한 농가 책임 생산제도. 농장의 경작 단위를 기존 ‘분조(10~25명)’에서 가족 중심의 새로운 조(5명 안팎)로 세분화하는 게 골자다. 포전(圃田)은 논밭의 북한말이다.

조일훈/김유미 기자 jih@hankyung.com

특별취재팀 선양·단둥·옌볜·훈춘=조일훈 경제부장/김병언 차장(영상정보부)/김태완 차장(국제부)/김유미(경제부)/전예진(정치부) 기자/천용찬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원

 

 

장마당 향하는 '25㎏ 무역'…北고위관리 부인들 '루트' 장악

입력 2014-11-30 21:05:11 | 수정 2014-12-01 02:26:43 | 지면정보 2014-12-01 A5면
김정은 집권 3년…격랑의 북한경제

단둥세관 점령한 보따리상
물건 수억원어치 공동구매…컨테이너로 운반하기도
中 주재원도 장사 뛰어들어…3년 정도면 수억원 벌어
목숨 건 밀무역도 성행…보트 타고 압록강서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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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북한 보따리상을 태운 버스들이 줄지어 단둥 세관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단둥=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지난 27일 오전 8시 북·중 접경도시인 랴오닝성 단둥시의 세관 앞. 길게 늘어선 화물차 행렬 사이로 북한 사람들을 태운 3대의 버스가 세관 입구에 멈춰섰다. 오전 10시 단둥발 평양행 기차에 몸을 실으려는 이들이다. 이 중 한 대의 버스에는 따로 짐만 가득 실려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100여명은 저마다 자신의 몸집만한 짐을 챙겨들고 세관 검사대 안으로 사라졌다. 단둥의 대북소식통은 “여기 있는 모든 북한 사람이 보따리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단둥 세관에서는 이들에 대한 짐 검사로 매일 북새통을 이룬다”고 말했다.

◆“한 사람이 100만원어치 사기도”

북·중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보따리 무역 규모도 커지고 있다. 요즘에는 중국 주재원 등으로 나온 북한 사람들이 돌아갈 때 장마당에서 팔 물건들을 사가고 있다. 열차와 버스를 이용할 경우 1인당 가져갈 수 있는 짐의 양은 25㎏. 그러나 대부분 벌금을 감수하고 더 많은 짐을 가져간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북·중 보따리 무역은 신용장 없이 인적 거래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에 공식 무역통계에는 잡히지 않지만 상당한 규모로 추정된다. 북한이 중국의 변경지역과 거래하는 변경무역이 전체 북·중 무역의 30%에 이르는데 보따리 무역 규모는 변경무역의 70%에 이를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단둥세관의 동쪽에 있는 스웨이루와 얼징루에는 북한을 오가는 보따리상에게 ‘평양장터’라고 불리는 점포가 100여개 이상 밀집돼 있다. 평소에는 물건을 사러온 보따리상으로 북적이지만 이날은 북한 측이 단둥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조중우의교를 폐쇄한 날이어서 손님이 많지 않았다. 이곳에서 장사를 하는 한 상인은 “한 사람이 한국 돈으로 100만원어치 이상 물건을 사가는 경우도 많다”며 “북한 사람들은 100% 현금거래를 하기 때문에 상인들이 매우 좋아한다”고 말했다.

요즘 단둥 주민 사이에서는 북한 사람들이 돈 많은 사람으로 통한다. 주재 공무원과 무역일꾼들의 부인이나 가족이 보따리 장사에 뛰어들면서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한 대북소식통은 “주재원의 경우 3년 정도 나와 있으면 보따리장사를 통해 한국 돈으로 수억원을 벌 수 있다”고 말했다. 단둥의 한 식당 주인은 “북한 사람들이 와서 비싼 술을 마시고, 음식을 잔뜩 시켜놓고 남기고 가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말이 보따리상이지 기업화된 경우도 목격되고 있다. 랴오닝성 선양에 있는 우아이시장에는 여러 명의 북한 보따리상이 몰려와 수억원어치의 물건을 공동구매하고 이를 컨테이너로 운반하는 경우도 잦다. 선양의 한 사업가는 “한국산 화장품의 재고를 몽땅 사들이는 북한 보따리상도 봤다”며 “국경수비대의 통제를 받지 않고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힘 있는 보따리상도 많다”고 전했다.

◆밀무역하면 이익 30% 더 많아

단둥시 내에서 북동쪽으로 10㎞ 정도 떨어져 있는 후산산성 부근 압록강 반대편에는 북한의 소규모 마을이 즐비해 있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북한 강변까지 접근했지만 경비를 서는 군인 외에는 민간인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안내를 맡은 중국인은 “최근 북한이 어린이나 부녀자는 강변에 나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며 “요즘 북한이 외부인 접촉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단둥의 정치적 긴장감은 고조되고 있지만 압록강 일대에서는 목숨을 건 밀무역이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 중국의 환구시보에 따르면 압록강에 있는 섬 중 드물게 중국이 소유한 위에량도 인근이 대표적인 밀무역지로 알려졌다. 이곳과 신의주시와의 강폭은 불과 150m 정도. 이 주변에서는 밤 9시가 넘으면 파란색 불빛과 붉은색 불빛이 교대로 반짝이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밀수꾼들이 물품 거래를 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이들은 선상에서 물건과 대금을 바로 교환한다.
한 대북소식통은 “압록강변에 있는 소형 보트들은 밤만 되면 밀수에 동원되기 때문에 ‘국제무역선’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며 “밀무역을 할 경우 정상적인 통관에 비해 20~30% 더 이익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국경 경비가 상대적으로 허술한 단둥시 관할 콴뎬현 압록강 유역에서는 최근 대규모 밀수거래가 적발돼 단둥에 거주하는 조선족 상인들까지 체포되는 사건이 있었다.

■ '진짜 남자'

북한에서 오토바이로 돈벌이하는 남자를 멋들어지게 일컫는 말. 오토바이는 상품을 나를 때 기차 버스에 비해 신속하고 보안원의 단속을 쉽게 피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큰 장사를 하는 상인들의 수요가 높다.

김태완/전예진 기자 twkim@hankyung.com

 

 

北 "배급없어도 산다"…단둥서 韓화장품 차떼기

입력 2014-11-30 20:37:04 | 수정 2014-12-01 02:16:05 | 지면정보 2014-12-01 A1면
김정은 집권 3년…격랑의 북한경제

북한 인접한 中 도시 보따리무역 '열풍'
장마당 400곳 하루 수만명 몰려 '흥정'
< 평양행 기차 기다리는 북한 보따리상들 > 지난 27일 평양행 기차를 타기 위해 단둥 세관에 도착한 북한 보따리상들이 짐을 챙겨 들고 세관 검사대로 향하고 있다. 단둥=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기사 이미지 보기

< 평양행 기차 기다리는 북한 보따리상들 > 지난 27일 평양행 기차를 타기 위해 단둥 세관에 도착한 북한 보따리상들이 짐을 챙겨 들고 세관 검사대로 향하고 있다. 단둥=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공식 통계는 없지만 북한 경제가 호전되고 있다는 소식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2년 연속 풍작에 집단농장과 국영기업들에 인센티브제를 도입하면서 생산량이 늘고 있다는 관측이다.

이달로 집권 3년을 채우는 북한 김정은 정권으로서는 어느 정도 체면치레를 한 것일까. 후계자 시절이던 2010년 11월, 경제 관료들을 모아놓고 “3년 안에 경제를 회복시켜 쌀밥에 고깃국을 먹게 해주겠다”고 호언했던 그다.

물론 채 여물지 않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지도력이 척박한 북한 경제를 밀어 올린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기초적 삶조차 당국에 의지할 수 없게 된 주민들이 북·중 국경과 장마당(시장)을 오가며 필사적으로 자구책을 마련한 결과로 봐야 한다.

뭐든 팔 수만 있다면 북한 돈 1000원(미화 13센트)으로 북한 전역 400여개의 장마당행 트럭에 올라타는 사람들이다. 노숙도 불사한다. 거주와 이동의 자유를 막는 북 당국도 속수무책이다.

기아(飢餓) 탈북으로 몸살을 앓던 ‘고난의 행군’(1994~2000년) 이후 배급제는 용도 폐기됐다. 지난 김정일 정권은 시장화를 막기 위해 화폐개혁(2009년)과 장마당 폐쇄라는 초강수를 동원했지만 석 달을 버티지 못했다. 주민에게 나눠 줄 물자가 동난 상태에서 시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막을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정은 정권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의 5·24 제재 조치와 유엔의 경제봉쇄에 내몰린 상황에서 유일한 선택지는 시장밖에 없었다. 지난해 12월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한 이후 중국 거래 기업들의 노골적인 불신도 부담스러운 터였다.

북한 당국은 이 같은 외부 압력을 시장화라는 내부 전략으로 맞서고 있다. 주요 농장과 국영기업에 70 대 30 분배시스템을 공식화한 것. 생산량의 70%만 국가와 당에 바치고 나머지는 기업과 개인이 나눠 가지라는 조치(2012년 6·28조치)를 내놓은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런 몸부림이 북한 경제의 체질을 얼마나 바꿀지는 미지수다. 김정은 체제의 지속 가능성에도 물음표를 떼어낼 수가 없다. 이제 북한 주민들은 배급제의 부활을 원치 않는다.

유통기한이 지난 한국산 화장품 상자를 ‘차떼기’로 실어나르면서도 단속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만큼 절박하다.

한국경제신문은 변의 실상을 취재하기 위해 11월 말 압록강에서 두만강에 이르는 북·중 접경지역에서 접근 가능한 모든 지역을 훑었다. 그 격랑의 현장이 독자 여러분을 찾아간다.

■ 5·24 제재 조치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 이후 이명박 정부가 그해 5월 발표한 남북 관계 단절 조치. 주요 내용은 △우리 국민의 방북 불허 △남북 교역 중단 △대북 신규 투자 금지 △대북 지원사업의 원칙적 보류 등이다.

선양·단둥·옌볜·훈춘=특별취재팀 jih@hankyung.com

 

 

'자력갱생'서 '시장과 공존' 으로 이동

입력 2014-11-30 20:59:21 | 수정 2014-11-30 20:59:21 | 지면정보 2014-12-01 A4면
김정은 집권 3년…격랑의 북한경제

경제정책 어떻게 변했나
계획경제 어려워지자 경제특구·외자유치 추진
눈에 띄는 성과는 적어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지난 8월24일 북한 내 식품공장인 ‘11월2일 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연합뉴스기사 이미지 보기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지난 8월24일 북한 내 식품공장인 ‘11월2일 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은 광복 이후 국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중앙집권적 계획을 바탕으로 분배하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고수해왔다. 김일성은 1965년 집권하자마자 경제 관리 운영체계에서 중앙집권적 계획성을 철저히 요구하는 ‘계획의 일원화와 세분화’를 확립했다. 옛 소련과 중국에 의존하면서 자급자족, 자력갱생을 목표로 하는 폐쇄경제 형태인 ‘자립적 민족경제노선’도 내세웠다.

그러나 1990년대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되자 경제기반이 흔들렸고 대기근과 제조업의 생산성 추락이 동시에 발생한 ‘고난의 행군’ 시기가 닥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결국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을 모델로 1991년 나진·선봉 경제특구를 지정하고 외자 유치에 나섰지만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북한 경제체제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1994년 김정일 정권부터다. 경제 위기 이후 주민들 사이에서는 생존을 위한 시장거래가 확대되고 있었다. 중앙정부의 물자공급체계가 무너지면서 공장 지배인과 기업관리자의 실질적인 권한이 자연스레 확대됐다.

김정일은 2002년 계획경제체제 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시장의 존재를 인정하고 7·1 조치를 단행했다. 이때부터 북한에서는 장마당이 공식 허용됐고 식품뿐만 아니라 일반 상품도 거래할 수 있게 됐다.

공장의 생산 계획과 물자 조달 등 운영에 관한 일부 권한도 기업에 넘어갔다. 이는 임금과 가격 체계를 개편하는 결과도 가져왔다. 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점차 커지면서 배급제를 기반으로 한 북한 경제체제와의 간극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2002년 10월 국제사회가 깜짝 놀랄 만한 대형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신의주를 홍콩, 마카오와 같은 특별행정구로 개발하겠다면서 화교 실업가 양빈을 초대 장관으로 지명한 것. 하지만 막판에 양빈이 뇌물공여 등의 혐의로 중국에 체포되면서 이 구상은 무위에 그쳤다.

외자 유치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물가가 폭등하는 등 경제난이 가중되자 김정일은 2009년 11월 17년 만에 화폐개혁을 단행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풀려나올 것으로 기대했던 미국 달러화, 중국 위안화 등이 더욱 숨어버리면서 물가는 더 뛰어올랐다.김정은이 집권한 2012년 북한은 이미 계획경제와 시장의 공존 상태에 접어들었다. 김정은은 2011년 12월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한 날 고위 간부들을 소집해 ‘새로운 경제관리 방법’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나흘 뒤인 21일 북한은 국상(國喪) 기간이지만 외국인 투자유치와 관련한 7개 경제법령을 대대적으로 발표하면서 경제개혁에 대한 의욕을 보였다.

하지만 경제 재건에 대한 의욕에도 불구하고 장성택 처형사태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정권 안정과 체제 수호에 더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