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애서 삼청동으로 거쳐 인사동까지 가는 길
딸과 해방촌 ‘수제 햄버거 집’을 갈 것인지, 북촌의 ‘수제 햄버거 집’을 갈 것인지에 대한 열띤 토론 끝에 집에서 좀 더 가까운 북촌으로 결정했다. 요즘 TV 먹방으로 아이들이 맛집을 더 잘 안다. 부모 손에 이끌려 외식을 하던 시대에서 이젠 아이들 성황에 못 이겨 외식을 하는 시대로 변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중학교 시절, 일주일에 한 번씩 꼭 다닐 수밖에 없었던 삼청동과 북촌, 그 촌스럽고 재미없는 길이 지금은 화려하고 복잡하고 재미있는 곳으로 변했다. 길은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데 그 길을 채운 것들은 자본의 냄새로 가득한, 엇박자와 unbalance한 거리....
어린 시절, 이 골목에서 미로 같은 길을 친구들과 걸으며 이리저리 배회하던 기억이 새롭다. 투박하고 촌스럽고 재미없는 골목이었지만, 익숙하고 정겹고 그냥 받아주던 골목이었다. 회색 양은간판 하나 달랑 있던 ‘수제비 집’은 이젠 기업 형으로 변했다. 사람 두 명이 동시에 걷기 어려웠던 그 좁은 길엔 비싼 인테리어로 치장된 멋진 양장점, 악세사리점, 레스토랑, 카페 등이 들어섰다.
전두환정권 시절, 자기 집도 마음대로 수리할 수 없었던 이 곳이, 매일매일 바뀌고 있다. 남아 있는 곳은 그야말로 맛 하나로 승부할 수 있는 곳 밖에 없다. 이곳의 원주민들은 이제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고, 이곳의 신주민들은 이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뭐 삶이 그런 것이고 자본이 그런 것인데...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북적인다. 사람에 밀려 움직이고 움직이는 곳...닭꼬치가 얼마나 맛있다고 떡꼬치가 얼마나 맛있다고 매번 20~30명 씩 줄을 서는 곳...서서 먹는 생맥주집...아주 예쁜 인테리어의 카페들...여기저기 들리는 외국어...외국 방송카메라...
골목의 아름다움과 곡선의 아름다움이 남아 있는 곳...옛 목욕탕 굴뚝이 인테리어로 남아있고 목욕탕에 목욕하는 사람이 아니라 잠이 자기 위한 사람이 드나드는 게스트하우스로 변해 있고...흙먼지 날리던 옥상과 옥탑방에는 탁자와 소품이 대신하고 연인들이 서로의 눈빛을 확인하며 전망을 조망하는 명소로 변해 있고...옹기종기 작은 집들의 그 소박함은 탁 트인 넓은 창유리와 발코니, 테라스의 화려함으로 변해 있고...아마도 이 길을 걸어 다니던 사람들도 너무 많이 변해 있을테고....
중고등학교 시절 일주일마다 다녔던 절은 옛 모습의 절반만 담고 있었다. 절 유치원은 밥집으로 바뀌어 있고, 그 아이들이 뛰어놀던 마당에는 의자에 앉은 중년 남녀의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절 옆의 조그만 구멍가게는 그 모습 그대로다. 아직도 주인장께서 건강하게 장수하고 계셔서 그런지, 아니면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한 또 다른 이야기가 있을게다.
딸과 북촌에서 시작해서 삼청동 끝자락까지의 주말 여정은 즐거웠다. 또 집으로 돌아와서는 잔소리로 티격태격하지만...그래도 더 나이 먹으면 이마저도 힘들게다. 더 안 컸으면 좋겠다는 것이 아빠 마음인 것 같다. 그러나 어쩌겠나...시간을 가는 것이고 그렇게 기억으로 남는 것이니...그 기억을 먹고 사는 것이겠지....내가 이렇게 이 시간이 고마운 것처럼, 내 딸에게도 이 시간이 아빠를 기억할 수 있는 단초가 될테니...그러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수제 햄버거를 먹으려고 왔는데, 딸이 라자냐를 먹겠다고 하는 통에 원래 목적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런데 사단이 났다. 딸아이 라자냐가 옛날 그 맛이 아니란다. 이거 사춘기 아가씨 입맛 맞추기 힘들고...음식맛 계속 유지하기도 힘들고...투덜거리는 딸 달래려고 인사동 한 바퀴 돌고 ‘별다방 미쓰리’에서 도시락과 떡볶이 먹여서 화 다스려줬다. 좋다고 먹는다. 살찐다고 투덜거리면서 멈추질 않는다. 이거 안 먹고 집으로 왔으면 티격태격이 아니라 전투가 벌어졌으리라...다행이다. 전투를 예방해서...하루 힘들지만 즐거웠다.
단 한 곳...일본대사관 앞에 슬픈 누이의 아픈 과거는 여전히 치유되지 않고 있어서 화가 난다. 용서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하지 않으면 미래에 우리는 또 그 누이를 만나게 될테니 말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행동해야 한다는 것, 우리에게 역사는 항상 정의와 용기를 준비하라고 말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