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러시아에서 1917년 2월 23일(신력 3월 8일) 일어난 2월 혁명과 10월 25일(신력 11월 7일) 일어난 10월 혁명은 세계를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2월 혁명과 10월 혁명 모두 이전의 혁명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은 혁명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짜르 체제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했을 뿐 아니라 소비에트라는 노동자 국가의 정치형태와 역사상 처음으로 승리한 사회주의 혁명을 낳았다.
2월부터 10월까지 오는 혁명의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역동적인 상황의 연속이었다. 이 과정을 짧은 글에서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이 글은 이 혁명 과정에서도 매우 짧은 시기, 2월 혁명 초기 일주일을 다루고자 한다. 이 시기는 러시아 혁명의 전 과정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일들인 소비에트의 설립과 이중권력의 등장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2월 23일,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다
러시아 2월 혁명은 2월 23일 발발했다. 이 날은 클라라 제트킨과 같은 제2인터내셔널 소속 여성 사회주의자의 노력으로 탄생한 ‘여성의 날’이었다. 페트로그라드(원래 도시명은 상트 페테르스부르그이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짜르 정부는 이 이름이 독일식이라는 이유에서 페트로그라드로 개칭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전쟁으로 인한 식량부족, 물가고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투쟁에 나섰다. 식량부족으로 아이들이 말 그대로 굶고 있었고, 빵을 얻기 위해 가게 앞에 선 줄은 장사진을 이뤘다. 한마디로 혁명 직전 러시아 상황은 불만 붙이면 금방 활활 타오를 마른 장작과 같은 상태였다.
23일의 혁명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짜르 전제는 존립하기 어려운 위기상황에 처해 있었다. 1905년 발발한 첫 번째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고, 1907년 6월 3일 스톨리핀 수상의 반동 쿠데타로 최종 막을 내렸다. 그 후 러시아는 어두운 반동기를 지나게 되었다. 1912년이 되자 이러한 반동기가 끝나고 노동자들이 다시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각종 투쟁과 파업이 급증했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14년 8월 무렵 짜르는 매우 위험한 처지에 놓였다. 1차 세계대전은 독점단계로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제국주의 열강의 경쟁이 첨예해진 결과 필연적으로 발생한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그런데 러시아 짜르의 입장에서는 고조되는 국내의 혁명적 위기를 타파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짜르의 바람대로 애국주의 열풍 속에서 노동자의 투쟁 기운은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잠깐 뿐이었다. 한창 전쟁 중이던 1915년부터 노동자들은 용감무쌍하게 투쟁하기 시작했다. 1915년 공장노동자의 28%가 파업에 참가했고, 1916년에는 50%, 1917년 첫 두 달간 35%가 참가했다. 투쟁이 상승하면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이 상호 결합되어 나타났다(이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물신성이 만들어내는 정치와 경제의 허구적 분리를 극복하자」를 읽어 볼 것). 전쟁 직전인 1914년 전반기 전체 파업에서 정치파업의 비율은 74%로 최고조에 올랐다. 1915년 그 비율은 29%로 하락했으나 1916년 32%, 1917년 첫 두 달 85%로 급증했다.
1917년 들어 투쟁은 격렬해졌다. 1917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 12주년을 기념하여 전개된 파업에는 페트로그라드 노동자의 40%에 달하는 14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다. 1월 9일 파업 이후 2월 23일에도 대규모 파업이 준비되었다.
1917년 들어 혁명적 결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정확히 어느 때 이런 일이 발생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는 없다. 볼셰비키가 2월 23일 여성 섬유노동자의 파업투쟁 준비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데에는 이러한 사정이 있었다. 볼셰비키는 대규모 투쟁을 전개할 시기로 2월 23일보다는 5월 1일 노동절을 생각하고 있었다. 23일 투쟁을 준비한 사람들도 이 투쟁이 혁명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짜르 타도를 위치는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들불처럼 확산되면서 볼셰비키를 포함한 좌파 사회주의 조직들은 이 투쟁을 지속, 확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23일 첫 파업투쟁은 다섯 곳의 섬유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시작됐다. 그들은 다른 공장을 돌면서 노동자의 파업 참여를 호소했다. 당시 러시아에는 한 공장이 파업에 들어가면 다른 공장 노동자 역시 파업에 참여하는 동조파업의 전통이 있었다. 이는 파업투쟁이 대규모 파업, 시위로 확산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4일에는 파업 규모가 두 배로 늘어 20만 명이 참여했고, 25일에는 30만 명이 참여했다. 파업참가자 외에도 다양한 계급 계층의 참여가 증가했다. 이들은 페트로그라드 시내로 행진하였고 경찰서를 공격했다.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경찰의 급습과 체포가 시작됐고 ‘법과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경찰과 군대의 무기 사용이 승인됐다. 그러나 신기한 일이 발생했다. 병사들이 혁명의 편으로 넘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2월 27일, 병사가 혁명의 편에 서고 승리가 확실해지다
당시 경찰과 군대는 모두 지배계급의 통치를 위한 억압도구이지만, 그 성격은 다소 차이가 있었다. 경찰은 투쟁을 탄압하기 위한 직접적 도구로 오랫동안 기능해온 반면, 군대는 대부분 농민출신의 병사로 이루어져 있었다. 따라서 병사는 ‘군복을 입은 농민’이라고 불렸다. 제국주의 지배계급만을 위한 전쟁에 내몰린 농민출신 병사는 막 시작된 혁명에 대해 경찰과는 다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볼셰비키 조직인 사회민주노동당 페테르스부르그 위원회가 2월 26일 오전 발행한 유인물은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적 군대 속에서 형제와 같은 반응을 발견”했지만, “경찰 용병의 부패한 손만이 자유를 바라는 비무장 인민을 향해 주저하지 않고 일제 사격을 했다”고 적고 있다.
다른 한편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은 1905년 군대가 짜르의 편에 서는 바람에 혁명이 패배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투쟁이 시작되자 마자 병사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적극 노력했다. 그 결과 26일 저녁부터 페트로그라드의 군대들이 반란을 일으켜 하나하나 혁명 진영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27일 절정에 이른다. 이른 아침 볼린스키 연대의 반란을 시작으로 리토프스키 연대,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 모스코프스키 연대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오전에만 10,200명의 병사가 혁명에 가담했고, 그 수가 오후에는 25,700명, 저녁에는 66,700명에 달했다. 모스코프스키 연대는 무기고를 개방하여 병사와 비보르그 지역 노동자들에게 공급했다. 또한 다른 무기고를 공격하여 4만 정의 소총과 3만정의 권총을 확보했다. 이는 노동자를 무장하는데 쓰였다. 혁명은 이제 무장한 모습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2월 혁명은 자생적이고 무혈의 혁명이었다고 주장하는 통설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전부터 밤늦게까지 구체제를 철저히 파괴하고 사실상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무장투쟁이 벌어졌다. 혁명에 가담한 병사와 무장한 노동자들은 페트로그라드 전역의 경찰서를 공격하여 파괴하고 전화국, 전신국, 철도역, 다리 등 중요시설을 접수했다. 혁명 병사들은 교도소에 몰려가 갇혀 있던 정치범을 석방시키는 한편 짜르 정부의 각료, 전쟁장관, 페트로그라드 시장 등을 체포했다. 혁명에 가담한 병사는 28일 72,700명에 이르렀고 3월 1일 저녁에는 17만 명에 도달했다. 속수무책의 짜르는 총사령부를 떠나 프스코프에 있는 남부전선으로 피신했고, 결국 3월 2일 퇴위하게 된다.
2월 27일, 소비에트가 등장하다
병사가 노동자와 함께 하게 되면서 짜르 전제의 타도와 혁명의 승리는 확고해졌다. 그리고 혁명의 승리가 확실해진 이때, 새로운 권력기관 소비에트가 출현했다. 소비에트는 장차 노동자와 민중의 권력기관으로, 노동자국가의 대표적 형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출현하기까지는 여러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23일 시작된 투쟁이 혁명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지면서, 노동자의 투쟁을 전체적으로 조정할 투쟁의 중심을 구성하는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울러 짜르 전제를 타도 한 후 수립할 권력기관의 구성 문제도 함께 고민되기 시작했다. 혁명 초기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구체적 권력기관의 형태에 대해서는 정해진 것이 없었다.
대표적 사회주의 세력인 멘셰비키는 현재의 혁명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혁명의 주도권과 혁명 이후 수립될 정부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후 상당기간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나서야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사회주의 혁명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의 주도권과 자유주의자들과의 동맹이 멘셰비키의 입장이었다.
반면 볼셰비키는 현재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지만 그것을 추진하는 세력은 노동자와 그 동맹세력인 농민이라고 보았다. 자유주의 세력은 자본가 계급이라는 한계 때문에 혁명을 끝까지 추진하지 않고 중도에 배신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혁명을 통해 수립될 권력은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유주의에 대한 철저한 반대, 노동자의 주도권, 농민과의 동맹은 볼셰비키의 핵심 노선이었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권력기관의 구체적 형태까지 확정한 것은 아니었다. 권력기관의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것은 다른 사회주의 세력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이 시기 나온 유인물들은 소비에트 소집 요구만 아니라 ‘임시혁명정부’의 구성 요구도 뒤섞여 나온다. 이때 이 ‘임시혁명정부’는 3월 2일 등장하는 자유주의자 중심의 ‘임시정부’와는 달리 노동자·병사(농민)을 대표하고 혁명의 요구를 끝까지 실현할 정부를 의미했다.
소비에트 출현 자체와 관련해서, 노동자들은 1905년 혁명의 경험을 잊지 않고 있었다. 1905년 10월 13일 수립되어 12월 초 사실상 탄압으로 해체된 페테르스부르그 소비에트는 노동자들의 기억에 남아 자주 노동자 투쟁에서 오르내렸다. 예컨대 1915년 9월경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총파업에서,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각 공장의 파업위원회들이 소비에트 대표를 선출하라고 요구한 바 있다. 이와 비슷한 요구는 노동자 투쟁에서 간간이 제기됐다.
2월 혁명이 일어나자 이른 시기부터 소비에트의 구성을 거론하는 목소리가 등장했다. 24일 이미 소비에트 대표를 선출하기 시작한 공장이 있었다는 근거도 있고, 25일에는 집회에서 ‘노동자 지구 소비에트를 창설하자! 병사 대표를 그곳으로 끌어들이자!’라고 외치는 연설을 들었다는 회고도 남아있다. 그만큼 많은 노동자 사이에서 소비에트 구성이 회자되고 있었던 것이다.
소비에트 구성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25일 낮부터였다. 그 주도권은 멘셰비키가 가져갔다. 협동조합, 전시산업위원회(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볼셰비키는 짜르의 전쟁에 부역하는 이곳에 참여하지 않았다) 등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멘셰비키는 협동조합 본부에 모여 운동의 주도권을 자신들이 갖기 위해 짜르 체제 타도와 즉각적 소비에트 선거를 요구하는 시위를 논했다. 그러나 군대의 급습으로 다수가 체포되면서 본격적인 시도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26일 저녁 모든 사회주의 세력이 모인 회의가 개최됐다. 2월 초 두마 개원과 맞물려 시위를 조직하기 위해 모든 조직의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하는 회의체가 구성되어 있던 상태였다. 26일 회의에는 케렌스키와 같은 사회혁명당 지도자, 츠헤이제, 스코벨레프와 같은 멘셰비키, 메즈라이온카(‘지구간조직’을 뜻함)의 유레네프, 볼셰비키 중앙위원 쉴리아프니코프 등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여기서 의견이 두 파로 갈렸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다음 날 소비에트의 소집을 제안했다. 볼셰비키, 메즈라이온카 등 급진적 사회주의 세력은 이에 반대했다. 소비에트 소집 자체를 반대해서가 아니라, 혁명의 승리가 확실치 않은 상황이었고 자유주의자와의 동맹을 주장하는 우파 멘셰비키의 후원 아래 소비에트가 소집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사실 멘셰비키는 소비에트 소집을 처음으로 공식화하고 주도했지만, 새로운 권력기관이 아니라 노동자의 투쟁을 조정하기 위한 조직체 정도로 소비에트를 상정했다. 그들은 두마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볼셰비키 등의 우려는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고, 그들로 하여금 ‘죽 쒀서 개 주게 생겼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회의가 파한 후, 각 세력은 각자의 생각대로 움직였다. 멘셰비키 주도의 소비에트 소집 계획을 인지한 이후,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은 이에 대당하여 자신들 주도의 소비에트를 구성하려고 시도했다. 병사들의 반란 소식은 이런 시도를 더욱 고무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27일 ‘핀란드 역 문서’(아래 문서)라는 유명한 리플렛이 등장했다. 이 리플렛의 작성단위에 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대개 볼셰비키 비보르그 위원회가 작성한 것으로 지목된다. 이 리플렛은 소비에트의 소집을 요구하였을 뿐 아니라 소비에트의 소집장소로 노동자들이 밀집한 투쟁 중심 비보르그 지역에 있는 핀란드 역을 지목했다는 점이다.
볼세비키 비보르그 위원회 호소문
동지들!
우리가 그렇게 기다려 왔던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인민은 자신의 손에 권력을 잡고 있습니다. 혁명이 시작됐습니다.
시간을 잠시도 낭비하지 맙시다. 오늘 임시 혁명정부를 만듭시다.
오직 조직만이 우리의 힘을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선 대표들을 선출합시다. 그들이 서로 만나도록 합시다. 대표 소비에트가 군대의 보호 아래 만들어질 수 있게 합시다.
여러분은 남은 병사들을 여러분 편으로 끌고 와서 확고한 결속을 이뤄야 합니다. 병영으로 가서 남은 병사들을 불러냅시다. 핀란드 역이 혁명의 참모진이 모이는 중심지가 되게 합시다. 여러분의 투쟁 기지로 이바지할 수 있는 모든 건물들을 점거합시다.
동지들, 병사들, 노동자들이여!
대표를 선출합시다. 서로 만납시다. 전제에 대해 승리를 이룰 수 있는 조직을 위해!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를 조직하자!
반면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소비에트의 소집장소로 타우리데궁을 생각하고 있었다. 케렌스키는 ‘투르도비키’라는 두마 내 소부르주아 의원단을 이끌고 있었고, 츠헤이제 역시 멘셰비키 두마 의원이었다. 그리고 이 두 세력 모두 자유주의자와의 동맹을 당연시했기 때문에, 국가 두마의 의사당인 타우리데궁에 터 잡고 이곳을 소비에트 소집장소로 잡았다.
27일 오후까지 어느 쪽이 소집하는 소비에트가 우세할지는 결정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였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건이 존재한다. 볼셰비키인 자레즈스키의 회상에 따르면, 27일 그와 그 동지들이 감옥에서 풀려난 후 길을 가다가 “청산주의자”인 그브제프 일행을 만났다. 그브제프 일행은 자기들이 “국가 두마”로 간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자레즈스키 일행은 “우리들은 노동자 지구로 가고 있다”고 대답했다.
어느 쪽이 주도할지를 최종 결정한 것은 병사들이었다. 27일 병사들의 반란 소식이 들리기 시작하자, 케렌스키와 사회혁명당, 멘셰비키 소속 두마의원 및 주요 지도자들은 타우리데 궁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짜르는 26일 두마의 활동을 정지시키는 포고를 내렸고, 대부분의 두마 의원들은 짜르의 포고를 온순히 따르는 태도를 취했다. 그들은 오후 4시가 되어서야 간신히 두마 의장 로드쟌코를 중심으로 ‘두마임시위원회’란 것을 만들었다.
오후 1시가 되자 봉기를 마무리한 2만5천명의 병사들이 타우리데궁으로 몰려갔다. 물론 모든 반란 병사들이 타우리데궁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수천 명의 노동자와 병사들이 볼셰비키와 다른 급진 사회주의 세력이 주장한 핀란드 역에 밤늦게까지 모여 있었다. 타우리데궁으로 간 병사들은 반란을 일으킨 병사라는 신분 때문에 형식상 ‘인민의 대표’라는 지위를 가진 두마가 병사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이곳에서 케렌스키와 츠헤이제는 병사들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연설을 했고, 이는 병사들로 하여금 타우리데궁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병사들이 두마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눈에는 두마에 있는 온건 사회주의자들이 혁명의 확고한 지지자로 보였던 것이다.
이로써 타우리데궁에 자리를 잡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소비에트 소집의 주도권을 쥘 수 있게 됐다. 오후 3시경 국가 두마 의사당 13호실에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주도로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임시 위원회가 구성되어 두 가지 선언을 발표했다. 하나는 저녁 7시에 소비에트의 첫 회의를 개최할 것이고 이를 위해 노동자는 1,000명 당 1명, 병사는 각 중대 당 1명 씩 대표를 선출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른 하나는 병사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조치에 대한 것이었다. 소비에트 소집 공지는 곧장 공장과 군대에 공지됐다.
타우리데궁에서의 소비에트 개최가 거스를 수 없게 되자 핀란드역에 있던 사회주의 세력도 타우리데궁에 결합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미 많은 노동자와, 결정적으로 병사들이 이곳에 모이고 있는 상황에서 고립을 자처하면서까지 우파 사회주의자 주도의 소비에트를 거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의 첫 회의는 저녁 9시가 되어서야 시작됐다. 첫 회의에는 250여명이 참석했는데, 실제 의결권을 가진 대표는 50명에 불과했다. 오후 늦게부터 공지가 되어 충분히 많은 곳에서 적절한 절차를 거쳐 선출한 대표를 파견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첫 회의는 의장단과 집행위원회를 선출했다. 의장에는 멘셰비키 의원 츠헤이제, 부의장에는 스코벨레프와 케렌스키가 선출됐다.
회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졌다. 회의 중 병사 대표가 발언을 했고 소비에트에 병사의 참여를 요청했다. 오후에 나간 선언에서 병사 대표의 선출을 언급했지만, 개최된 소비에트의 공식 명칭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였다. 회의 참석자들은 소비에트에 병사의 참여를 결정하고 공식 명칭을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로 개칭했다. 다른 한편 노동자민병대 구성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기관지 발행을 위한 문헌위원회가 구성됐다. 식량공급위원회와 군사위원회는 이미 가동 중에 있었다.
3월 1일, 소비에트 명령 제1호 결정, 이중권력의 수립
27일 혁명으로 넘어온 무장력을 통제하기 위해 군사위원회가 구성됐다. 군사위원회는 사회혁명당 좌파 므스티슬라프스키와 사회혁명당 우파 필리포프스키가 맡았다. 이들의 지도 아래 병사들은 28일까지 페트로그라드 전체를 장악했다. 철도노동자들은 자체적으로, 그리고 군사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수도로 반혁명 군대가 진입하는 움직임을 막았다. 이로서 혁명은 더욱 공고해졌다.
혁명이 공고해지면서 이를 대변할 정부형태 논의가 불거져 나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소비에트는 이런 중요한 정치문제보다 군사문제가 더 중요하게 제기되어 이를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정치권력이 무엇보다 무장력에 의존한다는 냉정한 정치적 진실을 드러낸다. 그 구체적인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병사들이 소비에트와 군사위원회를 통해 혁명적 질서를 확립하자, 두마임시위원회가 슬슬 권력에 대한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27일 저녁 두마임시위원회 의장 로드쟌코는 엥겔가르트 대령을 대동하고 군사위원회로 찾아와 자신들이 수도의 질서를 확립할 책임을 질테니 군사위원회의 통제권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이런 요구는 양측이 거의 주먹다짐을 하기 직전까지 가게 만들었다. 로드쟌코는 나중에 다시 돌아오겠다면서 일단 물러났다.
그러나 28일 오전 4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군대 통제권을 두마임시위원회에 넘기기로 합의하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른다. 이에 따라 당일 오후, 군사위원회는 자신의 통제권을 두마임시위원회에 양보했다. 권력의 기반인 무장력을 두마에 넘길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갖고 있는 인식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었다.
다행히 이 실수는 두마임시위원회의 자살골로 인해 역전의 계기가 됐다. 군대 통제권을 넘겨받은 두마임시위원회는 병사들에게 즉시 부대로 복귀하고 장교들이 부대의 통제권을 행사하라는 선언을 발포한다. 자유주의자 두마의원들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 조치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병사들의 생각은 그것이 아니었다. 분노한 병사들은 28일 오후 소비에트 회의에서 케렌스키와 츠헤이제를 회의에 소환하여 이런 도발행동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라고 요구했다. 심지어 로드쟌코와 두마임시위원회 전체를 체포해야 한다는 요구도 나왔다. 케렌스키가 나와 로드쟌코의 선언을 취소됐다고 해명한 후에야 소동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3월 1일, 같은 상황이 재연됐다. 로드쟌코, 밀류코프, 구츠코프 등 두마임시위원회의 성원들은 병사는 부대로 되돌아가고 장교와 두마임시위원회에 복종해야 한다는 전날과 비슷한 선언, 연설을 내놓았다. 이는 병사들에게 장교의 끔찍한 학대와 전쟁 수행 지속이라는 혁명 전 상태로 되돌아가라는 요구였다. 또한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의 지위를 위태롭게 했다. 1일 아침부터 병사 대표들은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로 찾아가 자신들의 이해를 보호해줄 것을 요구했다. 두마임시위원회가 차지한 군사위원회에도 찾아가 병사와 장교 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명령을 내릴 것을 요구했다. 군사위원회가 이를 거부하자, 병사 대표들은 이렇게 외쳤다. “그럼 좋다! 우리가 직접 그것을 작성하겠다!”
저녁 소비에트 회의에는 병사 대표들이 최초로 참석하였고 1천명 이상의 노동자와 병사 대표들이 집결했다. 여기서는 병사들의 지위에 대한 문제가 집중 논의됐다. 전직 병사로 당시에는 민간인이었던 클리반스키가 병사들을 대변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일부 전쟁 방위론에 치우친 경향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소비에트와 두마임시위원회를 대립시키고 후자가 ‘젠트리와 자본가’에게 권력을 되돌려주려고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모든 군사 문제를 결정하는 데 유능한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병사 소비에트의 지원 하에 군사적 규율을 재확립하자고 주장했다. 그의 주도로 결의문 초안이 작성되어 제출됐다.
최종 결정된 결의문은 “명령 제1호”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명령 제1호에는 병사의 소비에트 대표 선출 절차나 병사들의 시민권 확보, 장교의 학대 금지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명령 제1호의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은 “국가두마 군사위원회가 발포한 모든 명령은,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발포한 명령 및 포고와 상충하지 않은 경우에만 따르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병사의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취지였으나 사실상 혁명진영의 모든 무장력을 소비에트의 통솔 아래 두는 매우 중요한 결정이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명령 제1호
수비대, 육군, 포병, 해군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 의해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집행되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는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1. 모든 중대, 대대, 연대, 포대, 기병대대, 각각의 다양한 병과의 복무처와 군함 안에서 위원회가 전술한 군대의 사병들의 대표들 중에 즉각 선출되어야 한다.
2.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에 보낼 자신의 대표를 아직 선출하지 않은 모든 단위들의 경우, 중대 당 한명의 대표를 선출해야 한다. 대표들은 모두 적절한 신분증을 지참하고 1917년 3월 2일 오전 10시 국가두마 건물에 도착해야 한다.
3. 군대는 정치적 행동에 있어서 모두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 및 소비에트의 자체 위원회들에 예속된다.
4. 국가두마 군사위원회가 발포(發布)한 모든 명령은,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발포한 명령 및 포고와 상충하지 않은 경우에만 따르도록 한다.
5. 모든 종류의 무기, 즉 소총, 기관총, 무장차량 등등은 중대 및 대대 위원회의 처분 및 통제 하에 두어야 하며, 장교가 아무리 고집하더라도 결코 장교에게 지급되어서는 안된다.
6. 편제되어 근무를 하고 있는 경우 병사는 군사 규율을 엄격하게 준수해야 한다. 그러나 편제에서 벗어나 근무하고 있지 않는 경우, 정치적, 시민적, 사적 생활에서 병사는 모든 시민에게 부여된 권리를 완전히 누려야 한다.
특히 근무하지 않을 경우 차렷 자세와 경례 의무를 폐지한다.
7. 마찬가지로 장교는 각하와 같은 존칭 대신 장군, 대령 등등으로 불려야 한다.
모든 병사에 대한 무례한 행동, 특히 병사를 ‘너’라고 부르는 것을 금지한다. 이러한 규칙 위반, 장교와 병사 사이의 불화 사례가 발생할 경우 병사는 중대 위원회에 보고하도록 한다.이 명령은 모든 중대, 대대, 연대, 선원, 포대 및 여타 전투·비전투 파견대에서 낭독되어야 한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
소비에트는 처음 주도한 멘셰비키의 의도와는 달리 등장하자마자 사실상 페트로그라드 노동자와 병사, 그리고 민중 전체를 대변하는 권력기관으로 성장했다. 소비에트는 식량공급, 무장력 확보 등 사실상 국가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명령 제1호는 병사의 지위를 보장해주는 결정인 동시에 소비에트의 힘을 확고하게 만드는 결정적 조치가 됐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 사이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와 두마임시위원회는 정부구성에 대한 협상이 진행되어 혁명을 통해 등장한 소비에트의 권력을 새로 구성된 자유주의자 주도의 임시정부에 넘기기로 합의했다. 이 결정이 아무런 저항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소비에트 회의에서 볼셰비키 자루츠키는 정부를 “다른 계급”에게 넘겨주는 것을 문제 삼았고 우리안체프는 “임시혁명정부는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에 의해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몰로토프 역시 자유주의자 구츠코프, 고노바로프, 로드쟌코로 구성된 정부는 혁명적이지 않고 민중을 조롱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압도적 다수를 점하는 집행위원회는 완전한 정치적 권리, 완전한 정치적 사면, 적절한 제헌의회의 개최를 임시정부 지지의 조건으로 내걸었고, 이렇게 구성된 정부에 사회주의자는 참여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이러한 조건은 겉으로는 임시정부에 대해 굴레를 씌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소비에트 내의 반대파를 의식한 조치들이기도 했다. 또한 집행위원회는 “새로 등장하는 정부가 이러한 의무를 실현하고 구체제에 맞서 단후하게 투쟁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한에서만 민주주의는 그 정부를 지지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결의문을 제출했다. 이 결의문은 단 14명이 반대하는 가운데 400명 이상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볼셰비키가 이에 대항하여 제출한 결의문 역시 압도적으로 부결됐다.
이로써 이중권력이라는 러시아혁명의 독특한 상황이 발생했다.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사실상의 모든 권력을 쥐고 있지만, 타협적인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주도 하에 스스로 권력을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이 권력이 완전히 자유주의자에게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아무런 무장력도 없는 임시정부는 사실상 소비에트의 재가 없이는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게 명령 제1호였고, 또한 “∼하는 한” 지지한다는 결의였다. 이런 이중권력 상태는 유지될 수 없었다. 둘 중 하나는 다른 하나에 자리를 내주어야만 했다. 이것은 8개월 후 일어난 일이었다.
나가며
볼셰비키는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가장 선진적이고 전투적인 노동자들을 자기 편으로 삼고 있었고, 혁명과정 내내 자유주의자들에게 권력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병사)에 기반한 혁명정부/소비에트 수립을 주장했으며, 평화, 토지, 빵, 자유 등 혁명의 가장 핵심 요구가 완전히 쟁취될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온건파가 주도하는 소비에트에서 그들은 턱없이 소수에 불과한 자리에 머물게 됐고 소비에트가 자기 권력을 자유주의적 임시정부에 내주는 상황을 그냥 지켜보아야만 했다.
이런 일이 발생한 사회적, 계급적 배경은 이랬다. 전쟁과정에서 가장 계급의식적 노동자들은 유배나 징집을 당해 그 수가 축소됐고 전쟁물자 생산을 위해 투쟁경험이 부족한 새로운 노동자들이 대거 충원됐다. 혁명적, 전투적 노동자들이 혁명의 선두에 섰지만, 혁명 과정에서 이전에는 정치에 관심이 없던 수많은 민중들이 혁명에 참여하게 됐다. 혁명적 노동자의 기반이었던 대공장은 1,000명마다 1명씩 대표를 선출하지만 1,000명 미만 사업장은 그 수에 상관없이 1명을 선출하게 한 소비에트 선출규정에 의해 노동자계급 중 소규모 사업장의 대표들이 과잉대표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한 중대 당 1명의 대표를 선출하도록 한 병사 대표 선출 규정 역시 군복을 입은 농민인 병사가 노동자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선출되게 만들었다. 결국 혁명을 통해 각성했지만 여전히 불충분한 계급의식을 지닌 노동자, 소부르주아 대표들이 소비에트의 다수를 차지하게 됐다.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등 타협적 온건세력이 소비에트를 주도하고 임시정부의 한계가 처음부터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임시정부에 넘기게 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존재했다.
이 상황에서 혁명의 전진을 위해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이었을까? 임시정부의 즉각적 타도와 소비에트 자체의 권력 수립을 주장해야 했을까? 임시정부 구성이 소비에트에서 토론되고 있던 2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볼셰비키나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이 이런 선택을 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그러나 만약 당시 즉각적 타도를 외치며 노동자와 병사를 움직이게 했다면 임시정부는 타도했을지라도 권력을 유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임시정부와 함께 소비에트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는 임시정부가 자본가와 제국주의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부가 명백하고 전쟁 문제 등과 관련하여 그 한계가 드러나는 시점이 분명히 올 수밖에 없으며, 러시아 노동자와 민중의 절박한 문제인 평화, 토지, 빵, 자유는 오직 노동자, 농민(병사)의 권력인 소비에트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당장 자신의 불리한 위치와 불충분한 조직화 상태를 인정하면서 이를 만회하기 위해 임시정부의 한계를 폭로하고 대중을 조직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면서 머지않은 순간 소비에트 자체의 권력을 수립하고자 했다. 이것은 유명한 슬로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가 의미하는 바였다. 이러한 활동에 부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방향에서 이루어진 일관된 실천은 이후 이중권력을 타파하고 볼셰비키 주도 하에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권력을 손에 쥐는 10월 혁명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