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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인용] 대한민국 헌법 제31조(2)20대, 사다리를 말하다

시놉티콘 2021. 7. 11. 11:58

대한민국 헌법 제31조(2)20대, 사다리를 말하다

대학 진학도 취업도…부모 경제력 따라 ‘노력의 결과’가 갈리는 현실

이성희 기자

2021.06.22 06:00 입력

‘능력주의’와 공정 담론의 함정

20대들이 직접 만든 ‘성공 공식’
최대 변수는 부모 경제력·지위


‘노력×재능+거주지역×부모의 경제력+열정+경험=능력’(황산하씨·24)
‘부모의 경제력×부모의 사회적 지위+능력×(학벌+취업)²=성공’(이동원씨·20)

경향신문과 한국교육방송공사(EBS)가 <대한민국 헌법 제31조> 기획을 위해 만난 20대 대학생 21명 중 다수는 직접 만든 ‘능력·성공 공식’에 부모의 경제력을 주요하게 배치했다. ‘부모’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경제력’ ‘인맥’ ‘자라온 환경’ 등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을 적는 경우가 많았다. 강소영씨(23)는 “한국 사회에서 부모의 경제력과 지위가 뒷받침된다면 노력하기도 성공하기도 쉽다고 생각한다”며 “부모의 경제력과 지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노력이라는 요소만으로는 성공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유진씨(24·충남대)는 “한국에서는 부모님의 사회적 지위가 큰 부분이라고 느낀다”며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은 경험을 터득한 인생 선배와 혈연관계라는 건 타고난 환경”이라고 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한 이씨는 지금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다. 인터뷰에 응한 대학생 다수는 대학을 인생의 출발선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모두에게 평등한 출발선은 아니라는 인식이 강했다. 대학입시를 치르면서 지역과 경제적 차이에 따른 교육불평등을 경험한 이들은 ‘청춘’이라는 단어에서 ‘젊은 낡은이들’ ‘포기에 익숙해지는 나이’ ‘연습생’ ‘불확실한 미래’ ‘희망고문’ ‘고등학교에 이어 또 노력을 해야 하는 사람’ 등을 떠올렸다. 송경원 정의당 교육 분야 정책위원은 “경쟁이 심해지면 가지고 있는 밑천을 총동원하기 마련”이라며 “밑천의 차이에 따라 기회나 과정, 결과가 불균등하다”고 말했다.



20대 대학생들은 한국 사회에 교육불평등이 존재한다는 데 대체로 동의했다. 학창시절과 대학입시 과정에서 경험했거나 나중에서야 깨달은 여러 가지 기억이 근저에 있다. 서울 서초구에 사는 유시연씨(22)는 고등학교 때 평일에는 국어·영어·수학 학원에서 공부하고, 주말에는 논술학원을 다녔다. 지금 돌이켜보면 고1 때부터 하던 진학도우미 반이 대입에 가장 도움이 됐다. 진학도우미 반은 학년마다 최상위권 학생 30명으로 구성됐는데, 방과후나 점심시간에 따로 모여 발제 스터디를 했다. 대학서적으로 영어 토론을 했고, 탐구 동아리 소논문 보고서도 썼다. 이 모든 활동은 수시 학생부종합전형(학종) 자기소개서에 빼곡하게 기재됐다. 김수인씨(23)도 고1 때부터 학종을 준비했다. 그도 서울에 살지만 상황은 전혀 달랐다. 김씨는 “‘너네가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할 내용을) 써와. 그대로 올려줄게’라고 했던 선생님도 계셨고, 그냥 한 줄 정도 적어준 선생님도 있었다”며 “고3 때는 학종 서류전형에 붙었다니까 담임선생님이 ‘학원 가서 컨설팅을 받으라’고 하셨다”고 했다. 당시 그의 부모님은 건강이 좋지 않았고, 생활비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강원 출신인 박재민씨(23) 역시 “논술학원이 없다 보니까 논술전형 준비하는 친구가 거의 없었는데 서울에 와보니 엄청 많더라”며 “가정형편으로 교육 투자 자원이 부족한 것도 느꼈지만 정보의 격차도 컸다”고 했다.

전경원 경기도 교육정책자문관은 교육불평등을 기회·과정·결과의 3단계로 설명한다. “영재고 입학통계를 보면 서울 대치동·목동·상계동 등 사교육 밀집지역과 비례해요. 왜 특정지역에서 배출이 많을까. 기회의 평등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편향된 거죠. 또 과정을 보면 누구나 동일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데, 학교에서는 소수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는 학생들에게 ‘올인’해서 생기부를 관리합니다. 결과를 봐도 특권층 자제들의 입시 부조리 등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대물림 돼요. 계층 이동 루트가 계속 차단되는 겁니다.” 한번 벌어진 격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경남 통영 출신으로 영어영문학을 전공 중인 김민지씨(21)는 원어민 교수 수업을 들을 때마다 가슴을 졸인다. 그 전에 원어민은 중학교 때 한번 본 게 전부다. 주어진 지문을 보고 답을 고르는 수능 영어는 자신있지만 영미 문학을 이해하고 영어로 작문하는 수업은 차원이 다르다. 외국어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은 영어로 바로 필기할 때 그는 남몰래 번역기를 돌린다. “영작 수업시간에 원어민 교수가 제 문장이 마음에 안 드셨나 봐요. ‘너 ○○대 영문 아니야’ 하시며 가시더라고요. 그것도 한국말로. 여기서 난 평균 이하인가보다 생각했어요.”

■ 이어지는 다중불평등의 고리

교육불평등은 대개 경제적 불평등에서 비롯된다. 박진원씨(27)는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다. 야간 편의점부터 택배 상·하차, 엑스트라 연기, 결혼식 하객까지. 자동차 공장에서도 일해봤다. 지금은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오전 8시까지 보완업체에서 일한다. 공부가 잘될 리가 없다. 학점 관리며 자기계발도 소홀할 수밖에 없다. “친구들이 어학연수 가고 공부할 때 저는 바코드를 찍고 ‘어서오세요’를 반복했던 것 같아요.” 간호학을 전공 중인 허예람씨(21)는 당장 2학기 기숙사비가 걱정이다. 기숙사비는 한 학기에 100만원이 넘는다. 2학기에도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뛰면 되지만 학과 교수가 연구 보조 아르바이트를 제안해 고민 중이다. 아무래도 연구 보조 금액이 다른 아르바이트보다 적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허씨는 “대학에 들어오니까 책값이 비싸고 돈 들어갈 데가 너무 많다”며 “청진기도 좋은 건 하나에 18만원 하는데 동네에서 1만5000원짜리 샀더니 교수님이 청진기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 이렇게 또 ‘돈의 힘을 맛보는구나’ 했다”고 말했다. 김경애 한국교육개발원 교육정책지원연구본부장은 “저소득층 학생들은 ‘시간빈곤’에 빠진다. 돈을 벌기 위해 빨리 취업해야 하다 보니 탐색하고 뭔가를 시도해볼 여유를 갖기 어렵다”고 말했다. 불평등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진다. 지방대 학생들 인식 전반에 깔린 무력함은 이와 무관치 않다. 21명 학생들은 지방대하면 떠오르는 키워드로 ‘소외’ ‘부족한 인프라’ ‘사이드’ ‘세금루팡’ ‘낙인’ 등을 떠올렸다. 지방대에 없는 것으로는 ‘관심’ ‘열정’ ‘자신감’ ‘다양한 활동 기회’ 등을 꼽았다. 부정적 인식은 지방대를 다녔거나 현재 재학 중인 학생들에게서 특히 두드러졌다. 황산하씨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도 수도권 친구들은 5급, 7급을 목표로 하는데 지방대생은 7급이나 9급, 그것보다 조금 더 낮은 목표를 갖는 친구들이 많다”고 말했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쓴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는 “단순히 지방대 학생들의 함량이 떨어진다고 보기보다 대학 내에서 그들이 성장하고자 해도 서울권과 (교육여건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며 “개설 과목의 차이도 크고 교수 숫자도 몇 배 차이가 난다”고 말했다. 대학알리미를 보면 전남에 있는 A대의 학생 1인당 교육비(2019년 기준)는 1178만4329만원, 재학생 기준 전임교원 확보율은 72.44%에 불과하다. 하지만 서울대의 학생 1인당 교육비는 4824만7883원, 재학생 기준 전임교원 확보율은 123.41%이다. 경쟁이 안 되는 구조다.

■ “인맥도 스펙” 막힌 계층 이동 루트

“예전에는 ‘개천에서 용 난다’고 했지만, 요즘은 ‘콩 심은 데 콩 나는’ 느낌이에요.” 서울로 대학만 가면 모든 게 해결되는 줄 알았다던 박효정씨(23)가 말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은 본래 노력한 만큼 성과를 얻는다는 의미다. 그러나 박씨 말에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콩은 콩이 될 수밖에 없고 팥은 팥이 된다는 자조적 의미가 담겨 있다. 계층 이동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바이올린을 전공한 이유진씨(24)는 그동안 스스로 앞날을 결정해왔다. 예술고등학교 시절에는 비용 탓에 대전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았고, 서울권 대학에 합격했지만 생활비 등이 부담돼 알아서 포기했다. 요즘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예체능을 하면서 지역에서 밥벌이하는 게 쉽지 않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그가 진로와 관련해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부모님은 ‘네가 알아서 하라’고 했다. “(예체능 쪽으로) 막상 가보니까 어머니들 치맛바람과 조언, 정보력, 서포트가 어마어마하더라고요. 그런 것들에 답답함을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취업 생각을 하면 김재은씨(22)도 막막하다. 김씨는 “취업에 바로 성공한 선배가 없고 졸업을 유예하고 독서실에 다닌다든가 고시 준비도 많이 한다. 나도 저런 루트를 따라가겠구나 싶다”고 했다. 가보지 않은 길, 누군가의 조언만으로도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더욱이 그 길을 가본 사람이 개입한다면 인생 경로가 달라질 것이다. 학부모 이모씨(48)는 아들을 사립초와 과학고를 거쳐 서울대에 보냈다. 이씨는 “대학이 목표가 아니라 대학 이후의 삶까지 고려해 플랜을 짰다. 네트워크 형성까지 고려한 진로설계였다”며 “요즘은 유명한 교양수업 족보도 학과가 아닌 고교 동문들끼리 공유한다”고 말했다. 그는 “세상을 살아보니 학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안다. 서울대라고 하면 더 이상 능력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며 “아이가 나만큼도 살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가정배경이 좋을수록 고소득 직장을 얻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소득상위층 자녀일수록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고, 상위층 대학 졸업자일수록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직업을 가질 확률이 높다. 이수빈 연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과 최성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가 지난해 발표한 논문 <한국 대학들의 사회이동 성적표 : 경제적 지위의 세대간 이동과 유지에서 대학이 하는 역할>을 보면, 소득 상위 20%인 중산층 출신의 최상위권 대학 졸업생이 고소득 직장을 얻을 비율은 22.07%다. 그러나 최상위권 대학 졸업생이더라도 소득 하위 20% 출신의 상위소득 20% 진입 비중은 5.61%밖에 안 된다.

■ 능력주의, 일종의 사회적 함정

전문가들은 경제 성장에 따라 중산층이 두꺼워지면서 고등교육을 경험한 부모가 많아진 점을 최근 한국 사회의 주요 변화로 꼽는다. 지난해 고등학교 졸업자의 대학진학률은 72.5%로, 1990년(27.1%)보다 3배가량 늘었다. 반면 노동시장의 문은 갈수록 좁아진다. 상위권 대학을 졸업해도 예전처럼 안정적인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는다.

박효정씨는 “공고 뜨는 걸 봐도 채용 인원 자체가 줄었고 수시 채용이라든지 채용 연계형 인턴 같은 전형이 많아졌다. 정직원 되기 굉장히 어려운 시대”라며 “친구들을 보면 ‘우선 뽑아주는 곳으로 가자’고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최율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취업 및 사회적 이동) 기회가 많았다면 지금은 절대적인 삶의 이동 기회가 줄었는데 교육이라는 똑같은 기제를 두고 벌어지는 경쟁은 더 커진 것”이라고 짚었다.

청년들이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으로 몰리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로스쿨을 시험이라는 제도를 통해 기득권에 입직하는 확실한 경로로 인식하는 것이다. 박진원씨는 “로스쿨 준비하는 친구들한테 물어보면 ‘잘살 수 있잖아. 성공하는 대표적인 길이잖아’라는 말을 많이 한다”며 “자신의 신분을 업그레이드하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열려 있기 때문에 내 기회라고 생각해서 들어가지만 일종의 사회적 함정”이라고 했다. 로스쿨을 포함한 공무원 시험에 저소득층이 많이 지원하지만 합격률은 소득 상위층이 높다는 것이다.

각종 스펙으로 끊임없이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사회 분위기는 최근 화두로 떠오른 공정담론과 연결된다. 대학생들은 공공기관의 지역인재 할당제에 불만을 나타내기도 한다. 박재민씨(23)는 “역량 차이를 무시하고 일정 비율 이상을 무조건 채용하는 것은 서울권 학생들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했다. 김유나씨(22)도 “너무 많은 기회를 주면 수도권에서 아예 기회조차 잃어버리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퍼센티지(인원 비중)를 늘리는 것은 제재해야 한다”고 말했다.

능력주의에 기반한 공정담론에 대해선 비판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청년들의 능력주의만 탓할 수도 없다. MZ세대(밀레니얼+Z세대)는 ‘친구를 경쟁자’로 인식하게끔 하는 상대평가 중심의 교육 시스템에서 자랐다. 더구나 경쟁의 결과에 따라 삶의 조건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게 현실이다. 송경원 정의당 교육 분야 정책위원은 “사회 전체를 평등하게 해줘야 병목이 해소된다”며 “임금 격차를 해소해주면 이 직업을 택하나 저 직업을 택하나, 이 회사를 가나 저 회사를 가나 똑같아 과도한 경쟁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헌법 제31조1항에는 ‘모든 국민은’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사이에 ‘능력에 따라’라는 전제조건이 붙어 있다. 학생들은 고개를 갸웃한다. 박효정씨는 “취업준비생으로서 요즘 뉴스를 보면 능력이 뭘까? 균등이라는 게 애초에 존재하긴 할까라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유시연씨는 “능력이라는 단어가 어쩌면 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이들은 교육이 과연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될 수 있느냐고 묻고 있다.

 

지역·학벌 차별 뚫고…간신히 한 칸 올라와도 더 높은 사다리 있어

이성희 기자

입력 : 2021.06.22 06:00 수정 : 2021.06.22 10:35

  • 20대 앞에 겹겹이 놓인 ‘사다리’
  • 대구는 광역시이다. 하지만 장씨는 대구도 교육 인프라가 한정돼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각종 공모전과 서포터스 활동, 봉사활동, 프로젝트 등 입사지원서에 스펙으로 넣을 만한 대외활동은 대부분 서울 등 수도권에서 열린다. 장씨가 대외활동을 하려면 학교 수업을 빼먹고 교통비와 숙박비를 오롯이 감당하며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 영상편집과 일러스트도 배우고 싶지만 대구에는 관련 학원이 몇 개 없다. 집안 형편이 여유로웠다면 진작에 서울에서 생활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마케팅 쪽으로 취업을 원하지만 직무경험은 거의 없다. 상황이 답답하기는 같은 동아리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지방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능력을 펼칠 기회를 놓치는 것만 같다. 이모씨는 “서울에 있는 기업에 인턴 지원을 많이 해봤는데 매번 떨어졌다”며 “탈락 이유야 모르지만 회사들이 서울에 있는 학생을 뽑지 굳이 지방에 있는 학생을 뽑을까 싶다”고 했다. 김모씨도 “선배들도 ‘기회가 되면 편입하는 게 최선의 선택일 수 있다’고 하더라”고 했다.
    ■ “편입 준비, 대학 네임밸류만 따져”
    “상위권 학교에 오전 9시쯤 가본 적이 있어요. 도서관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고, 캠퍼스에는 ‘○○고시 합격’ 같은 플래카드가 많더라고요. 이렇게 열심히 일상을 꾸려야지 좋은 곳, 대기업에도 갈 수 있구나 했죠. 학벌이 이렇게 내 삶에 영향을 끼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지방대생의 한계도 여실히 느낀다. 홍씨는 최근 방위산업체 복무를 위해 봤던 한 중견기업의 면접을 잊지 못한다. ‘군복무 기간이 끝나고도 계속 일할 수 있느냐’는 그의 질문에 면접관은 “저희, 그래도 나름 대학 봅니다”라고 답했다. “주변에서 어느 대학에 다니냐고 물어봐서 답하면 안 좋은 시선을 느껴요. 지잡대(지방의 잡스러운 대학)라는 놀림도 받고. 노력하려고 해도 위축이 되죠. 스무 살에 내 인생을 모두 평가받은 느낌이에요.” 홍씨의 말이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면 학벌에서 좀 자유로울까. 마케팅 직무에 관심이 있던 강소영씨(23·경희대)는 그날 이후 진로를 바꿨다. 그는 “취업시장에서 이 정도 학벌이면 마이너스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취업특강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특성화고등학교에서 조리를 전공한 강씨에게 대학은 ‘신분상승’을 뜻하는 곳이었다.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특성화고에 진학했고, 학력의 영향을 덜 받는 길을 찾아 해외취업을 나갔다. 하지만 해외에서도 영주권을 받을 때 대졸 학력이 있으면 가산점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귀국해 뒤늦게 대입을 준비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 대학은 ‘원점’을 의미한다. “열심히 노력해서 대학에 왔는데 이때까지 노력했던 것과는 또 다른 것들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취업시장에선 학벌, 학점, 토익점수, 어학연수, 자격증, 봉사활동, 인턴, 수상경력은 물론 성형까지 포함한 취업 9종 세트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돈다.
    ■ 상위권 대학 재학증명서는 ‘프리패스’
    대외활동도 열심이다. 대학생 박람회를 기획하는 활동과 카드뉴스 및 유튜브 콘텐츠 제작 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틈틈이 인턴 모집 공고를 확인하는 일도 잊지 않는다. 누군가는 아르바이트를 줄이면 되지 않겠냐고 할지 모른다. 그는 “취업시장에서 매력적인 인재가 되기 위해서는 정량적인 스펙이 많이 필요하다”며 “자격증 학원이나 인터넷 강의 비용 등을 충당하려면 아르바이트 2개는 필수”라고 했다. 김씨는 현재 자신에게 가장 부족한 것도, 가장 필요한 것도 ‘경제적 여유’를 꼽는다. 서울의 한 중위권 대학에 다니던 손평아씨(20·서울대)도 얼마 전까지는 능력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삶을 살았다. 생활이 달라진 것은 반수로 서울대에 합격하면서다. 서울대생이 된 후에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기도 훨씬 수월해졌다. 시급도 많아졌다. 동문 인맥 덕분에 인턴 고민도 덜었다. 대학생 커뮤니티의 학교별 취업 게시판을 봐도, 예전 학교의 게시판에는 생소한 회사 이름들이 있었지만 서울대 게시판에는 이름이 알려진 기업들의 공고가 올라온다.
  • “여러 가지 스펙을 쌓아야 하는 수시(전형) 성격이 강한 취업준비보다 로스쿨은 법학적성시험(LEET) 성적과 학점, 토익점수를 보니까 온전히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것 같아요.” 실전감각을 익히기 위한 LEET 사설 모의고사도 연간 몇 차례 열리지만 1회 응시료가 10만원가량 한다. 기초수급대상자인 박씨는 좀처럼 엄두를 내지 못한다. 로스쿨 진학에 필요한 정성적 요건을 채우려면 법률 동아리 활동이 필수이지만, 이마저도 최소화하고 있다. 반면 성규륜씨(21·서울대)는 로스쿨 진학을 위해 대외활동을 활발하게 한다. 법무부가 주최하는 법령경연 학술대회에 나갔고, 이번 여름방학 때는 국제법 모의재판 대회에 나갈 계획이다. 매주 한 차례 국제법 학회에서 관심있는 법령을 찾아 평석을 달고, 모의재판을 준비하기도 한다. 로스쿨 진학을 위해 복수전공도 하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해본 적도 없다. 그도 학비가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이다. “친구한테 고민을 이야기했더니 ‘법조계로 가고 싶다면 그것조차 투자로 이해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그 이야길 들으니 나에 대한 투자로 마음먹게 되더라고요. 그만큼 열심히 해야겠죠.” 법률 동아리 활동을 마음껏 하지 못하는 것은 윤태양씨(22·한양대)도 마찬가지다. 윤씨는 “장학금 활동에만 치중하다 보면 스펙을 쌓기 어렵다. 시간이 없다. 스펙이 달린다”며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이런 걱정 안 하고 좋아하는 법 동아리에 들어가고 학회활동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기숙사 방 책상 앞에는 ‘물고 늘어지자 포기 X’ 등이 적힌 노란색 포스트잇이 빼곡하게 붙어 있다. 박재민씨(23·서강대)는 기존에 나온 문제집 위주로 변호사시험 기출문제를 풀고 있다. 사설업체의 인터넷 강의도 있지만 강의당 수업료가 50만~60만원이나 한다. “한 달 월세보다 많은 돈을 지출해야 하니까 할 수가 없죠.” 대학 문턱을 넘기 위해 오랜 시간 달려온 청년들은 대학에 들어와서 또 다른 사다리 오르기에 매달린다. 간신히 한 칸 올라왔는데, 숨 쉴 틈이 없다. 다음에 올라야 하는 칸은 더 높고, 더 멀리 떨어져 있다.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진학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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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법률 동아리 활동도 가정형편 따라
  • “재학증명서가 프리패스 같아요. 그런데 저 자체는 변한 게 없고 제 실력은 여전히 똑같은데 ….” 손씨는 세상의 달라진 대우가 씁쓸하다. “초·중등 학원에서 청소하고 채점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서울대에 합격하니까 원장님이 ‘영어 수업을 해주시면 안 될까요’ 하더라고요.” 가끔은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조금만 여유가 있었다면 할 수 있는 게 조금 더 많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그는 한 방송사 인사팀에 지원했다 떨어졌다. 언론사 인턴과 리서치 인턴 등에도 지원했지만 떨어졌다. “머리가 멍해질 때가 있어요. ‘뭘 위해 이렇게 살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긴 한데, 그래도 이렇게 살지 않으면 마음이 더 불안하고 불편해요.” 김수인씨(23·숙명여대)도 생존과 경쟁 사이에서 매일 바쁘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30분까지 비대면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학원 두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한 곳에서는 채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다른 한 곳에서는 아이들을 직접 가르친다. 강씨는 학교 근처 샌드위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교내 근로도 한다. 부모님 도움 없이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강씨는 지난해에는 치킨집 서빙도 함께했다. 과외와 학원 강의 등도 알아봤지만 그에겐 면접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최근엔 모 식품기업의 서포터스 면접에서 떨어졌다. 인턴이나 아르바이트 시장에도 학벌이 작용한다고 강씨는 생각한다. “취직하기 위해 쌓아야 하는 스펙을 만드는 시장에서도 학벌 차이가 존재하고,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없는 친구들은 어떻게 취업시장에 나갈 수 있나, ‘현타’(현실자각타임)가 오더라고요.” “학교 취업특강에서 4학년 선배가 ‘마케팅팀에 가고 싶다’면서 자기 스펙을 열거하더라고요. ‘스펙이 엄청나구나’ 했는데, 대기업 전 인사팀 관계자가 ‘포기하세요. 안 됩니다’라는 거예요. 단호하게. 그러면서 ‘여기보다 높은 학교 친구들도 갈 자리가 없다’, ‘티오(모집인원) 많은 영업직으로 가서 부서 이동을 하라’고 하더라고요.”
  • ■ “스펙 만드는 시장서도 학벌 차별” 
  • 현재 휴학 중인 홍준선씨(22·배재대)도 편입을 고민하고 있다. 홍씨가 재학 중인 학교는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신입생 충원 미달로 최근 학과를 잇따라 통폐합했다. 정치언론안보학과로 입학한 그는 1학년 1학기가 지나기도 전에 학과 통폐합으로 공공인재학부 소속이 됐다. 이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올해에는 행정학과와 다시 통폐합됐다. 정치학을 배우고 싶어서 들어온 대학이지만 행정학과로 강제 전과된 셈이다. 강원 지역 대학에 다니던 송예슬씨(23·단국대)에게 편입은 ‘사다리’를 오르기 위한 돌파구였다. 주로 서울에서만 열리는 북콘서트 같은 문화예술행사가 송씨에게는 매번 눈앞에서 놓치는 기회 같았다. 그는 결국 지난해 편입했다. ‘인서울’에 성공하자마자 대학생 연합 봉사동아리에 들어갔고, 3개 영화제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자원봉사단에도 참여하고 있다. 편입을 준비하면서 대학 서열을 열심히 따졌지만 당초 목표한 대학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당장 여름방학에 하려고 신청한 현장실습 목록에는 이름을 들어본 기업이 많지 않다. 최근에는 국제학교에 다녀 영어를 잘하던 친구와 집안이 풍족해 4수까지 한 친구가 상위권 대학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 “하나둘씩 포기하다 보면 스펙에서 밀리게 되는 거죠. 사람이 많은 서울에 혜택이나 정책이 많은 건 어쩔 수 없는데, (지방에 사는 게) 저희 잘못은 아니잖아요. 빨리 탈출하고 싶어요.” 대학생 장나현씨(23·계명대)는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데 대략 2시간30분 걸린다. 경북 상주에 사는 장씨가 대구에 있는 학교에 가려면 논밭이 펼쳐지는 시골길을 지나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한참 기다렸다 탄 뒤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야 한다. 거기서 또 1시간30분가량 버스를 타고 대구시내에 도착해 전철을 갈아타야 학교에 갈 수 있다. 광고기획 공모전을 함께 준비 중인 동아리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도 그는 왕복 5시간을 꼬박 투자한다.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으니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는 일이 다반사다. 장씨는 “별로 한 것도 없이 지친다”고 했다. 서울 소재 대학을 다니는 강소영씨(23)는 “내가 나를 먹여 살려야 하는 처지”라고 말한다. 소영씨는 학교 근처 샌드위치 가게에서 오전 8시30분부터 낮 12시까지 아르바이트(위 사진)를 하고 오후에는 교내 근로를 한다. 학교 강의는 코로나19 때문에 비대면으로 이뤄짐에 따라 점심시간 등에 틈틈이 동영상으로 듣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