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day photo

가석방

시놉티콘 2021. 8. 10. 00:09

 

“종잡을 수 없이 잇따라 등장하는 소비 제품과 서비스들을 연결해주는 유일하게 일관된 요소는 우리의 시간과 활동이 전자 교환의 범위 내부로 갈수록 단단히 통합된다는 점이다. 어떻게 의사결정 시간을 줄일지, 어떻게 숙고와 사색의 쓸데없는 시간을 없앨지를 연구하는 데 매년 수십억 달러가 들어간다. 바로 이것이 현시대 진보의 형식이다-시간과 경험의 가차 없는 포획과 통제.…자본주의 내부에서 혁신은 기존의 권력‧통제관계는 사실상 그대로 놓아둔 채 새로운 것을 계속 촉진하는 형태를 띤다.…24/7은 다른 자들의 희생을 대가로 한 경쟁력, 진보, 탐욕, 사적인 안전, 안락 등의 개인적 목표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조너선 크레리의 『24/7 잠의 종말』 중에서

현 시대 진보의 형식은 시간의 압축과 효율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혁신이다. 그 혁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자본에 의해 추진되는 혁신은 시간의 축소와 비용의 절감이 목적이다. 혁신의 결과 그 공간은 기계와 로봇으로 대체되고 노동자는 사라진다. 도처를 배회하는 일군의 집단이 나타난다. 봉건주의시대에서 자본주의 시대로 넘어올 때, 붙박이 땅에서 배제된 일군의 집단이 이리저리 배회하다 새로운 시설에 집단적으로 감금되어 노동자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던 그 시대의 새로운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24/7의 온 시간을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삶은 항상 사건과 함께 찾아온 극단적 죽음 앞에서만 돌출적으로 세상에 드러난다. 그리고 사라진다. 오늘 다른 방식으로 결정으로 3일 후 누군가 구치소를 나온다. 그럴 수 있다. 가석방 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그 거대한 바벨탑을 세우려고 피와 땀, 목숨을 걸었던 그 많은 노동하는 사람들이 이해는 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처럼, 얼마나 더 물어야 진보는 삶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