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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를 항꾼에(함께) 읽어 보는 것도

시놉티콘 2025. 1. 24. 16:58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항꾼에(함께) 읽어 보는 것도

뒤늦게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읽어 봐”라는 말을 듣고 적어만 놨던 그 책을 말입니다. 어느 빨치산 아버지의 늦은 죽음과 딸의 기억의 반추로 전개되는 이야기입니다. 현대사의 거칠고, 아프고, 치열하고, 생사를 넘나들었던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 아마도 빨치산이었을 겁니다. 자생적 사회주의자, 고립된 지리산, 신념을 목숨과 바꾼 자들의 이름이지요. 그 자식들은 빨치산 부모를 둔 덕에 평생 빨갱이 자식이라는 손가락질과 집단적 공격을 받으며, 트라우마를 지고 살아야 했습니다. 저 같은 이가 그런 삶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빨치산 아버지를 회상하는 딸의 시선은 그야말로 현실적입니다. 끊을 수 없지만 끊고 싶은, 사랑하지만 그럴 수 없는 그런 관계의 질긴 끈 말입니다. 그 딸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질 게 뻔한 싸움을 하는 이십대의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목숨을 살려주었던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려 했던 이십대의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심연을 누가 안다고 하겠습니까. 역으로 그 자식의 아픈 마음을 누가 안다고 하겠습니까.
그 빨치산 아버지가 사회주의를 몰랐던 어린 시절, 그는 새로운 미래에 부풀었을 청춘이었겠지요. 사회가 부여한 압박과 분단의 고통은 그저 거대한 구조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갔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느 형제는 도대체 화해하지 못했고, 어느 형제는 빨치산이란 이유로 살해되고 그 동생은 베트남 전에서 다리를 잃어버리는 일들이 벌어졌으니 말입니다. 딸에게 그들의 삶의 궤도는 이렇게 다가왔습니다. “아직 사회주의를 모를 때의 아버지, 열댓의 아버지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질곡의 인생을 알지 못한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사진 속 소년 둘은 입산해 빨치산이 되었고, 그중 한 사람은 산에서 목숨을 잃었다. 형들을 쫓아다니던 동생은 형을 잃고 남의 나라에서 제 다리도 잃었다. 사진과 오늘 사이에 놓인 시간이 압축되어 가슴을 짓눌렀다.”
그리고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립니다. 시리도록 행복했던 짧은 순간들을 말입니다. 인생의 긴 여정에서 짧았던 그 순간들, 그것이 훨씬 더 많았으면 좋았을 것으로 생각했던 그 짧은 순간들 말입니다. “나는 늘 그 이전의 날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아버지가 나를 태우고 미친 듯이 페달을 밟던 어느 가을날이. 지각인 줄 알고 엉엉 울며 뛰어 들어간 교실에는 가을 오후의 햇살만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낮잠에서 깨어난 나를 다음 날 아침이라고 원껏 곯린 아버지는 잔뜩 뿔이 난 내 손에 햇살처럼 고운 홍옥 한 알을 건네주었다. 이가 시리도록 새콤한 홍옥을 베며 물며 돌아오던 신작로에는 키 큰 코스모스가 산들거렸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우리 현대사의 반성문 같기도 합니다. 이념이 뭐라고 신념이 뭐라고, 삶과 바꾸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념이 빨갱이 이념이건 파랭이 이념이건 아무것도 몰랐을 그 자식들이 자식이란 이유만으로 고통받아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그들의 생각을 갖는 것이 왜 공포이고 두려움이고, 적이고 죽여야 하는지 말입니다.
오늘도 해는 떠오르고, 또 지겠지요.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인생인데, 왜 우리는 그렇게도 가혹한 잣대로 우리를 옥죄이는 것일까요?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그래서 계획서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 질긴 오욕의 역사를 벗어날 수 있는 어떤 그런 작은 빛을 보여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