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석학과의 대담] 미셸 아글리에타 파리 10대학 교수

2009. 1. 8. 12:38interview

 빚에 의존한 ‘거품성장’이 이번 위기 불렀다

 

 

미셸 아글리에타(70) 교수의 첫번째 저작 <자본주의 조절과 위기>는 1870년에서 1970년에 이르는 기나긴 시간 동안 미국 경제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밝혀낸 독보적인 고전으로 꼽힌다. 이 책에서 처음 싹튼 그의 문제의식은 훗날 로베르 부아예, 알랭 리피에츠 등 젊은 학자들과 함께 ‘조절이론’이라는 새로운 학파를 형성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프랑스 내 엘리트의 산실인 에콜폴리테크닉에서 수학한 뒤 파리1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리나라의 한국개발원(KDI)에 해당하는 국제경제전망예측센터(CEPII) 수석 경제분석가를 거쳐 자문위원을 맡고 있고, 사회당 정부 시절에는 경제분석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안정현(38) 연구원은 고려대 경제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뒤 파리10대학 경제학과에서 수학했다. 파리10대학 강의요원을 거쳐 지금은 사회과학 전문 학위기관인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금융기업국 연구원으로, ‘OECD 국가들의 금융부문-가계부문간 금융 리스크의 전이 과정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주요 연구 관심분야는 1980년대 금융자유화 이후 등장한 이른바 ‘금융혁신’ 기법들, 특히 신용평가 기술과 자산 유동화 메커니즘이 금융부문에 어떤 파급효과를 가져다주는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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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자본주의 역사에서 나타났던 다른 위기들과 질적으로 좀 더 확실하게 구별되는 특징]


• 70년대의 인플레이션 위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착된 포디즘이라는 조절방식에 종지부를 찍었다. 포디즘의 역기능이 인플레이션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점차 심해지다 결국 금융위기로 나타났고, 이를 계기로 80년대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 조절방식이 등장하게 됐다. 고금리를 통한 매우 높은 가격의 신용이 바로 그것이다. 고금리 정책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의도에서 채택됐다. 이 새로운 조절방식이 포디즘을 대체하게 된 것이다.


• 과거 포디즘의 특징은 큰 틀에서의 임금관계가 노동과 자본 사이의 단체협상에 의해 결정되고, 이것이 사회 전체의 생산력을 조절해 왔다는 데 있다. 그런데 포디즘이 무너지면서 이제 이 원칙은 바로 주주가치라는 새로운 원리에 자리를 물려줬다. 주주가치 원리는 기업의 권력을 주주들에게 넘겨주고, 기업의 시장가치를 극대화 하는 것, 즉 주가를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가 되는 체제를 말한다. 결국 생산력 상승분을 노동과 자본이 함께 나누던 과거의 조절방식은 이제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체제로 대체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세 가지 중요한 변화가 뒤따랐다.


• 첫째, 주주들은 기업이 장기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자본이익율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의 수익성을 요구하고 나섰다. 기업이 이런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 결국 부채를 지는 수밖에는 없다. 굉장히 중요한 특징이다.


• 둘째, 임금은 생산성 증가에 비례해서 늘어나지 못한다. 소득 증가가 이루어 질 수 없는 건 당연한 결과다. 미국의 경우, 지난 25년간 생산성이 엄청나게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임금의 중간값(median)은 제자리걸음을 했다. 그 결과, 임금-이윤 분배는 매우 불평등한 방식으로 진행됐고, 소득 불평등정도는 엄청나게 심화됐다.


• 세 번째 결과가 특히 중요한데, 가계의 실질소득은 제자리걸음이다. 소비를 늘리려다보니 결국 저축을 줄이게 되고 가계 역시 점점 더 부채에 의존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략 20여년전부터 기업부채와 가계부채가 모두 증가했다. 앵글로-색슨계 나라들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긴 했지만, 실제로는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 이런 흐름이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이런 점에서, 이번 위기의 싹은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잉태되어 온 것이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가처분소득 대비 부채비율이 90년대 중반만 해도 70%에 불과했는데 2006년엔 무려 150%나 됐다. 영국의 경우, 98년에 가처분소득 대비 80%였던 가계부채가 10년 만에 180%까지 올라섰다. 그 누구도 분명하게 말하지 않지만, 이런 부채 증가 추세는 현재의 자본주의 조절방식, 즉 주주가치 극대화와 연결된 체제적인 현상이다. 여기에다 옛 소련 블록의 붕괴 이후 나타난 ‘워싱턴컨센서스’도 빼놓을 수 없다. 워싱턴컨센서스의 뼈대는 금융자본주의를 개도국에 확대하려는 구상이다. 그 결과, 개도국들 역시 똑같은 논리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바로 부채에 의존하는 시스템 말이다. 하지만 개도국들은 아직 선진국들에 견줘 금융시스템이 덜 발달해 있어 그만큼 위기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97~98년의 아시아 금융위기가 그 본보기다.


<투자은행 모델의 수명>


• 이번 위기는 그저 지금까지의 다른 위기와 비슷한 ‘또 하나의’ 위기가 결코 아니다. 기존의 성장체제, 즉 주주가치 극대화에 밑바탕을 둔 성장체제의 종말이라 봐야 할 것이다. 이 성장체제는 한마디로 부채를 먹고 사는 것이었다. 빚지지 않고는 성장할 수 없는 체제였다.

 

 

 


 

<기존 성장체제 종말이 가져올 변화>


• 지금까지 우리가 지켜봐 왔던 방식의 투자은행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시나리오를 예상해 볼 수 있다. 첫번째 시나리오는 과거로의 회귀다. 물론 이 시나리오는 위기의 여파가 예상보다 훨씬 더 크지 않는 한 실현가능성은 적은 편이다. 첫 번째 시나리오란 바로 1930년대 금융위기 이후 나타났던 각국의 대응과 개념적으로는 같은 것인데, 모든 상업은행 업무와 자본시장 관련 업무 사이에 완전한 칸막이를 쳐서 둘을 구분하는 것이다. 모든 자본시장 관련 업무는 상업은행으로부터 자금조달을 받을 수 없도록 하는 거겠지. 말하자면, 1933년 미국의 글래스-스티걸법 체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 결국, 달리 생각해볼 수 있는 현실적인 시나리오는 ‘좀 더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계화의 장점은 나름대로 유지하면서 여기에 적절한 규제를 덧붙이는 것이다. 과거처럼 두 사업영역 사이에 장벽을 치기보다는,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적절하고도 효율적인 유인책을 제공하는 쪽에 무게를 두는 것이라 하겠다. 관건은 이런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적절한 금융규제를 실현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어쨌거나 내 예상대로 두 번째 시나리오가 선택된다면, 앞으로 금융기관의 모습은 현재의 ‘유니버설뱅크’와 같은 모습이 될 것이다. 여기서 투자은행 업무는 유니버설뱅크의 한 부서에서 담당하게 된다. 은행 전체에 적용되는 자기자본 규제 등의 장치에 따라, 예전처럼 레버리지효과를 이용한 과도한 차입이나 자산유동화(Securitization)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장부외거래(off-balance sheet transaction)는 바젤II에 명시된 자기자본 규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따르는 위험도 동시에 있다. 첫째는 금융기관의 대형화와 집중화가 진행되면서 내부 지배 및 규율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내부규율이나 감시장치가 작동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또 다른 문제는 금융기관이 규모를 무기로 정책당국을 볼모로 잡을 가능성이다.


<위기 이후 나타날 새로운 자본주의 ‘성장체제’>


• 이제 더 이상 신용 확대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러 우리는 파국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 지금이 바로 그 시점이다. 선택은 두 가지뿐이다. 저성장 시대를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다시 생산성 향상과 임금 상승 사이의 관계를 복원하거나 하는 두 가지말이다.. 이것이 나의 문제의식이다. 일부에서는 우리가 다시 포디즘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


<새로운 국제통화제도 구상>


• 국제 통화협력이라는 관점에서 지난 98년에서 2008년 사이의 기간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부조화의 공조’라 할 수 있겠다. 이 기간 동안 몇몇 나라들이 자국 통화가치를 달러에 연계하고 엄청난 외환을 보유함으로써 인위적으로 미국이 국제수지 균형을 유지하는데 기여해 왔다. 결국 앞서 얘기한 부채 시스템으로 다시 돌아가는 듯한데, 부채가 더 이상 성장의 동력이 될 수 없다면, 환율은 변화를 겪게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아시아 나라들은 자국통화를 달러화에 연동시키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아시아 나라들의 통화를 달러화에 연동시키는 일이 처음엔 의미가 있었다. 아시아 나라들 사이에서 통화협력이 어려운 이상 모두가 다같이 하나의 통화, 즉 달러에 연계함으로써 일정한 일관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미국의 부채 수준을 볼 때, 특히 공공부채 수준을 볼 때, 이제 달러는 심각한 위기에 빠지거나 적어도 가치하락을 겪을 것이다.


<신브레턴우즈 체제?>


•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다극적 통화체제’가 될 것이다. 만일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신브레튼우즈 체제 논의가 옛 브레튼우즈체제 때와 같은 고정환율제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내 생각은 그와는 오히려 정반대다.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고정환율제로의 회귀가 가능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 견해는, 바꾸어 말하면, 일종의 통화정책 공조다. 그러나 이런 구상은 통합 지역내에서 원심력이 존재한다면 이루어질 수 없다. 가장 큰 이슈는 역시 아시아 지역에서 이러한 위험을 극복하고 일정한 공조체제를 확보하는 일이다. 이제 아시아가 세계 경제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이상, 이 지역에서 반복적으로 외환위기가 발생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