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1. 18:12ㆍlecture
변호인들 조서 열람·등사 차단 수차례 진술 녹취 요구도 거절 1심 2주만에 김재규 사형선고 수사책임자 전두환 ‘권력장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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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 - 회한과 오욕의 역사
16. 10·26 사건 재판 (상)
법의 심판과 역사의 심판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청와대 부근의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총격을 가해 이들을 살해했다. 정부는 대통령의 유고를 이유로 10월 27일 0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합수부)는 11월 13일 사건을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 검찰부로 송치했고, 검찰부는 11월 26일 김재규 등을 내란목적 살인 등의 혐의로 군법회의에 기소했다. 체제 유지의 버팀목인 현직 중앙정보부장의 대통령 살해라는 초유의 사건에 대한 재판은 12월 4일 국방부 청사 뒤편의 계엄보통군법회의 대법정에서 열렸다. 인정신문과 공소장 낭독이 끝난 뒤 김재규의 변호인단을 대표하여 김제형 변호사는 이 사건은 “역사의 심판, 국민의 심판만이 있을 수 있을 뿐”이며 현재의 법체계로 재판하는 것은 “몹시 부적당”하며, “재판과정 및 절차의 적법성이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보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쏘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명백한 사실이었지만, 10·26사건 재판은 처음부터 관할권 문제, ‘내란목적 살인인가, 단순살인인가’, ‘우발적 행동인가, 계획적 행동인가’, ‘이른바 확인사살은 살인죄인가, 사체훼손인가’ 등 많은 쟁점을 갖고 있었다. 첫 공판에서 변호인들은 계엄 선포의 정당성과 재판 관할권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고 했고, 계엄법은 좀더 구체적으로 “비상계엄은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할 사변에 있어서 적의 포위공격으로 인하여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된 지역에 선포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변호인들은 자연인인 대통령의 피살이라는 계엄 선포 이유는 “적의 포위공격”이라는 비상계엄 선포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변호인들은 또 김재규 등의 행위는 계엄 선포 이전에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군법회의가 재판할 법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대법원에 재판권에 대한 재정신청을 제기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계엄 선포의 정당성을 판단할 권한은 사법부가 아니라 헌법상 계엄해제 요구권이 부여된 국회만이 갖고 있고, 계엄 선포 전의 행위라도 군법회의에서 관할한다는 판례가 있다는 이유로 재정신청을 기각했다.
신군부의 재판 개입
12월 4일 처음 열린 재판은 재정신청의 결과를 기다리는 사흘간과 12·12 사태가 발생한 다음날인 13일을 제외하고는 일요일만 빼고는 거의 매일 밤늦도록 열렸다. 재판은 미리 짜인 각본에 따라 절차를 무시한 채 초고속으로 진행되었다. 2회 공판에서는 피고인 중 유일한 현역 군인인 박흥주 대령(김재규의 수행비서)의 변호인인 태윤기 변호사가 계엄하 현역 군인에 대한 단심제를 규정한 군법회의법이 위헌이라며 재판부가 위헌 제청을 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재판부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태 변호사가 재판부 기피 신청을 내자 재판부는 이를 기각했고, 태 변호사가 다시 법관기피 신청 사유서와 즉시 항고장을 제출하려 하자 법무사인 황종태 대령의 퇴정명령으로 헌병들은 그를 끌어냈다. 재정신청도 기각되고, 공정한 재판을 위한 재판부 기피 신청도 기각되고, 법무사나 재판부의 거듭된 신문 제한으로 변호인들의 손발은 묶여버렸다.
김재규의 변호인 해임
게다가 김재규는 4회 공판에서 사선변호인의 변호를 거부한다는 뜻밖의 선언을 했다. 김재규는 자신의 행위는 “민주회복 국민혁명”을 기도한 것이었다면서 “소신과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한 혁명”이 재판을 받는데 변호인은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군법회의는 반드시 변호사가 있어야 하는 필요적 변호이기 때문에 재판부는 다른 피고인의 변호인인 안동일, 신호양 변호사를 김재규의 국선변호인으로 선임했다. 이돈명 변호사는 처음 유신체제 수호의 야전사령관이던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했다고 그냥 변호를 맡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평소에 쓴 ‘민주주의 만세’, ‘민권 승리’ 등의 붓글씨를 보고 마음을 돌려 변호를 맡았다고 회고했다. 당시 김재규의 행동에 대해서 유신체제 쪽 사람들은 대통령을 ‘시해’한 ‘패륜’이라고 한 반면, 민주진영 일각에서는 김재규의 ‘민주회복 국민혁명’ 주장에 동조했다. 그러나 김대중씨 등 많은 사람들은 유신체제가 민중의 힘으로 붕괴되는 것이 임박했는데, 김재규의 행동으로 군이 나설 소지를 준 것 아니냐고 아쉬워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돈명 변호사는 변호인의 일부도 이런 생각을 어느 잡지에 말한 적이 있는데 김재규가 그 소식을 듣고 화가 나 변호인을 해임한 것이 아닌가 추측했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시위대에 대한 발포 의지나, 차지철이 킬링필드에서 200만~300만 죽이고도 까딱없으니 우리도 100만쯤 죽여도 문제없다는 등의 발언을 한 것을 소개하면서 자신이 대규모 유혈참사를 막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말했다. 그는 거사 배경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박근혜의 구국여성봉사단 문제, 박지만의 행실 문제 등 자녀 문제를 항소이유 보충서 등을 통해 거론했지만, 박정희의 여자 문제에 대해서는 함구했고, 부하 박선호의 발언을 제지하기도 했다.
김재규는 항소심에서는 마음을 바꿔 변호인을 다시 선임했지만, 1심에서나 2심에서나 변호인들의 변호권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변호인들은 방대한 수사자료를 검토할 시간도 없이 매일 밤늦게까지 재판을 해야 했다. 변호인들은 처음부터 법정에서의 모든 발언과 진술 녹취를 허용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재판장은 공판조서를 정확히 작성하겠다며 거절했다. 그런데 초고속 재판이라 공판조서가 제때 작성되지 않으니 변호인들은 조서를 열람할 수도, 등사할 수도 없었다. 국선변호인 안동일 변호사는 “변호인들이 줄기차게 요청한 공판조서 열람 청구도, 공판조서에 대한 이의신청도, 외부의사진단 신청도, 현장검증 신청도, 그 많은 증인 신청도 다 물거품”이 되었다고 한탄했다.
커튼 뒤의 재판 지휘
신군부는 변호인들의 녹취는 허용하지 않았지만, 합수부 관계자들은 법정 옆의 법무감실에 모여 스피커로 법정의 모든 발언을 듣고 녹음하면서 대책을 협의했다. 신군부가 비밀리에 녹음한 테이프는 1994년에 유출되어 <박정희 살해사건 비공개진술 전녹음 최초정리>라는 제목으로 두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합수부 관계자들은 재판 도중에 수시로 재판부에 쪽지를 전달했고, 심지어 심판관들 뒤에 쳐진 휘장 뒤에 나와서 재판부에 훈수를 두어 그 소리가 변호인단이 있는 데까지 들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돈명 변호사는 “아니 재판장은 왜 가만히 있고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재판에 관여를 하는 겁니까?”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합수부 수사단장인 보안사 ㄴ준장은 법무감실로 국선변호인 안동일 변호사를 불러 국선변호인이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 재판을 불필요하게 지연시키지 말라고 노골적인 압력을 행사했다. 당시 합수부 내에서는 국선변호인을 해임시키자, 잡아다 조사하자는 의견까지 있었다는 것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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