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 21. 국가모독죄와 안기부

2009. 10. 7. 14:08lecture

5공의 매력적 통치수단 ‘국가모독죄’
외신에 정보 제공 막으려 1975년 제정
올림픽 앞둔 5공, 보안법 대신 써먹어
정치인·종교인·학생 ‘표적’…88년 폐지
이명박정권 ‘박원순 소송’으로 살려내
한겨레
» 1988년 12월 국회 언론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온 김태홍, 신홍범, 김주언씨.(왼쪽부터) 유신시대에 만들어진 국가모독죄는 5공화국 내내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국민의 입을 틀어막는 도구로 쓰였다. 5공정권의 언론통제장치인 ‘보도지침’을 폭로하면서 외신기자회견을 한 김태홍, 신홍범, 김주언 등도 국가모독죄로 구속되거나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21. 국가모독죄와 안기부

 

국가모독죄의 추억

 

최근 ‘대한민국’이, 박원순 변호사가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과 시민단체 후원 기업에 대한 압력 의혹을 제기한 것에 대해, 대한민국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2억원의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을 준비한 대한민국의 관료들은 아마도 과거 독재정권 시대의 형법 104조 2항 국가모독죄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형법은 1953년 9월18일 제정된 이래 1996년에 그동안의 사회 변화를 반영하여 전면 수정될 때까지 딱 두 번만 개정되었다. 첫 번째 개정은 1975년 3월19일 국회에서 날치기로 국가모독죄를 신설한 것이고, 다른 한 번은 6월항쟁 이후인 1988년 12월31일 반민주악법 개폐의 일환으로 국가모독죄를 삭제한 것이다. 이 악법을 통과시키는 데 앞장섰던 공화당 정책위의장 박준규는 <중앙일보> 등과의 인터뷰에서 이 법은 “고질적인 사대풍조”를 뿌리 뽑고 “주체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유신정권이 날치기를 마다지 않고 이런 황당한 법을 만든 이유는 한마디로 외신 때문이었다. 1974년 말부터 끌어온 <동아일보>의 백지광고 사태는 이 법이 통과되기 하루 전에 농성중이던 기자 130여명이 폭력으로 축출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국내 언론은 완벽하게 장악되었지만, 외국 기자들은 잡아다가 고문할 수도 없고 기자 추방이나 지국 폐쇄도 여의치 않으니 참으로 골칫거리였다. 유신정권은 이에 국내의 취재원이 외신 기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가모독죄를 신설한 것이다. 유신정권은 날치기 소동을 벌여가며 국가모독죄를 요란하게 형법에 끼워 넣었으나, 막상 이 칼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중앙정보부 보고서를 보면 1976년 명동사건 당시에 국가모독죄를 적용하려다가 포기한 사례가 나온다. 검찰은 피고인들이 국가모독죄에 해당되나 “이를 공소하였을 시는 공판 과정에서 외국인을 참고인으로 출석시켜야 하므로 물의 야기가 예상”되어 이를 적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준규가 국가모독죄의 신설을 두고, “사대언동을 처벌하려는 것보다 예방하려는 데 입법취지가 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유신정권 스스로도 이 ‘법’이 실제 써먹기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제2의 국가보안법, 국가모독죄


전두환 정권은 언론인 1000여명의 목을 치고 출범하였기에 유신 시절보다 국내 언론에 대한 장악력은 더 높아졌다. 그런데 문제는 88올림픽이었다. 언론 통제를 위해 과거처럼 긴급조치나 계엄령 같은 비상조치를 취했다가는 올림픽 유치 자체가 취소될 수도 있고, 동유럽 공산국가의 올림픽 참가를 유도하자니 반공법을 되살릴 수도 없었다. 급진 성향의 청년학생이나 재야인사들은 국가보안법으로 규제하는 데 문제가 없었지만, 종교인이나 야당 정치인들을 국가보안법으로 걸어 넣는 데에는 무리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유신이 남겨준 국가모독죄는 전두환 정권에게 언론, 특히 외신 통제의 매력적인 수단으로 다가왔다.
 

국가모독죄의 첫 희생자는 기독청년연합회(EYC) 상임총무 김철기였다. 한국에 진출한 다국적기업 콘트롤데이타는 노동쟁의가 발생하자 일방적으로 공장 철수를 선언했는데, 기독청년연합회 관련자들은 ‘콘트롤데이타 사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성명서를 작성하여 1982년 7월23일 기독교회관에서 일본 교도통신 한국지국장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 등 국내외 기자 10여명과 교계에 배포했다. 이 성명서에서 김철기 등은 “정부가 콘트롤데이타 사태의 폭력에 대하여 수수방관, 동조, 지원하면서도 다국적기업에는 나약 비굴하며 민중의 지지가 아닌 외세에 의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경찰은 즉각 김철기를 구속했고, 검찰은 1975년 3월 국가모독죄 신설 이후 처음으로 김철기를 이 조항 위반으로 기소했다. 1982년 10월21일 서울형사지법 제3단독 노원욱 판사는 징역 3년을 구형받은 김철기 피고인에게 징역 1년6월을 선고했고, 김철기는 이에 불복하여 항소했다.

 

항소심 무죄 판결과 안기부의 개입

 

1983년 2월11일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서울형사지법 항소3부(재판장 신진근 부장판사)는 예상을 깨고 김철기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국가모독죄가 성립하려면 내국인이 외국인을 비방하는 행위와 이용당한 외국인이 국외에서 대한민국 및 그 헌법기관을 비방하는 등의 행위가 있어야” 하지만 “김 피고인이 유인물을 외국인에게 배포한 사실만 인정될 뿐 유인물을 배부받은 외국인이 이에 이용돼 국외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비방하여 국가의 안전이익이나 위신을 해하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행위를 했다고 볼 아무런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만약 이 사건이 무죄로 확정된다면 국가모독죄를 통해 외신을 통제하려던 전두환 정권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무죄판결이 있고 난 뒤 40여일이 지난 뒤 안기부는 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를 보면, 하버드 대학에 가기로 되어 있던 이신섭 판사의 유학이 갑자기 취소된 것은 표면적으로는 서울형사지법의 법관 부족 때문이지만, 사실은 “국가모독 사건 무죄선고에 따른 간접적인 응징”의 결과였다. 이 보고서는 다른 사건에서 이신섭 판사가 기각한 영장이 법원에 의해 발부된 것을 들어 “법관으로서 상식 이하의 행위를 자행한 자로 법관 자격이 없다고 판단”된다면서 “차기 인사 시 지방 좌천 예정자”라고 단언했다. 다행히 이신섭 판사는 다음번 인사인 1983년 9월1일의 정기인사에서 지방으로 좌천되지 않고, 서울민사지법으로 발령받았다. 그는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와의 전화통화에서 자신은 다음 기회에 해외연수도 다녀왔기 때문에 이 판결로 별다른 불이익을 받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주심이었던 이신섭 판사는 큰 불이익을 입지는 않았지만, 재판장 신진근 부장판사는 1983년 5월27일자로 ‘의원면직’되었다. 대법원장 비서관 뇌물사건의 여파로 2월과 3월에 두 명의 부장판사가 옷을 벗은 데 이어 또다시 서울형사지법의 부장판사가 옷을 벗은 것이다.

 

대법원 파기환송과 소수의견

 

그로부터 약 2주일 후인 1983년 6월13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3명의 대법원 판사 중 11명의 다수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유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형사지법으로 되돌려보냈다. 이때 무죄 취지의 소수의견을 낸 대법원 판사는 대쪽 판사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일규와 이회창이었다. 이들은 소수의견에서 “외국인에게 유인물을 배포한 것만으로는 외국인의 행위를 이용해 국가모독 행위를 한 것으로 볼 수 없다”며 “국내에서의 국가모독 행위의 규제는 자칫 헌법이 보장한 표현·비판의 자유를 부당하게 제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소수의견의 핵심은 “내국인이 국내에서 한 국가모독 행위는 원칙적으로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2월5일 서울형사지법 항소1부(재판장 안우만 부장판사)는 김철기에 대한 국가모독죄 사건 재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1년6월이 선고된 원심을 깨고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김철기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고 해서 가벼운 형이 선고된 것이라 할 수는 없다. 그는 1982년 7월에 구속되어 이미 1년 6개월 가까이 구금되었기 때문에, 1심 형량이 그대로 유지되어도 곧 석방될 몸이었다.

 

남용되는 국가모독죄

 

대법원에서 국가모독죄에 대해 유죄 취지의 판결을 한 사흘 뒤,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의 비서실장 김덕룡이 외신 기자에 반정부 유인물을 나눠준 혐의로 국가모독죄로 구속되었다. 이를 시발로 국가모독죄는 5공화국 정권이 국가보안법으로 다스리기 힘든 야당 정치인, 종교인 등을 처벌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고, 1987년 6월항쟁 이후에도 학생들이 외신과 기자회견을 하였을 때 단속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김덕룡에 이어 민청련의 김병곤 상임위원장과 기독청년연합회 총무 황인하 등이 정부의 공안탄압을 비판하다가 국가모독죄로 구속되었고, 이철 의원도 국회발언 내용을 30여개 외국 공관과 외국 언론에 배포한 혐의로 소환되었다.

 

안기부는 1985년의 2·12 총선을 앞두고 야당의 바람이 일 기세가 보이자, 국가모독죄를 동원하여 재야의 정치활동 피규제자들의 모임인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에 대하여 국가모독죄를 동원하여 이들을 억압하려는 방안을 모색했다. 1984년 12월28일자 <민추협에 대한 법률적 규제 대책 보고>라는 안기부의 보고서는 “민추협의 성명 발표는 상임운영위(위원 25명)의 결의를 거치므로 상임운영위원 전원에 대해서 국가모독 등 공범으로 필요 시 입건 조사처리 가능”하다고까지 주장했다. 외신 기자회견에서 정부를 비판한 전학련 의장 오수진, 건국대 사건을 용공좌경이 아니라고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한 민추협 대변인 한광옥, 보도지침을 폭로하면서 외신기자회견을 한 김태홍, 신홍범, 김주언 등도 국가모독죄로 구속되거나 유죄 판결을 받았고, 김영삼 민주당 총재도 군사정권하의 서울올림픽을 나치하의 베를린올림픽에 비유했다가 상이군경회에 의해 국가모독죄 위반으로 고발되었다.

 

»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5공정권의 국가모독죄 운영은 점점 더 경색되어 1987년 6월항쟁 직전에는 “기자회견 장소에 외신기자가 1명이라도 있을 경우 국가기관을 비방하는 발언을 하면 해당되며, 외신 보도 여부에 관계없이 죄가 성립한다”는 것이 검찰의 공식 입장이었다. 6월항쟁 후에도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 우상호가 <뉴욕 타임스>에 나치에 대한 저항은 합법적이라 말했다가 징역 1년6월,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받았다.

 

국가모독죄는 1988년 13대 국회에 들어와 대표적인 5공악법으로 꼽혀, 1988년 12월31일자로 국가모독죄를 담은 104조 2항을 삭제한 형법 개정안이 공포되었다. 지금 그 법을 아까워하는 자들이 꽤 많은 듯싶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기사등록 : 2009-10-05 오후 09: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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