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19) 지그문트 바우만 Zygmunt Bauman

2009. 10. 17. 17:34theory & science

 

 

‘쓰레기는 쫓겨난다’ 지구화의 근원 공포에 메스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19) 지그문트 바우만 Zygmunt Bauman

 

바우만은 1925년 폴란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1968년 공산당이 주도한 반유대 캠페인의 절정기에 바르샤바대 교수직을 잃고 조국을 떠났다.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에서 잠시 가르치다 영국 리즈대학으로 옮겨 활발한 학문 활동을 벌이고 있다. 왕성한 저술 작업은 고은 시인을 닮았고, 통찰의 심원함은 이성복 시인을 연상시킨다. 최근 10년간 <지구화>(2000), <액체 근대>(2000), <포위된 사회>(2002), <쓰레기가 되는 삶들>(2004), <노동, 소비주의, 신빈곤>(2004), <액체 공포>(2006), <소비하는 삶>(2007), <삶의 기예>(2008), <소비자세계에 윤리가 소용 있을까?>(2009) 등의 책을 썼다. 다작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으며, 그의 시선은 전 지구를 포괄할 정도로 넓고, 인간 심리의 저 어두운 밑바닥까지 꿰뚫고 있다. 국내에는 <액체 근대>(2009), <유동하는 공포>(2009), <쓰레기가 되는 삶들>(2008), <지구화, 야누스의 두 얼굴>(2003), <자유>(2002)가 번역돼 있다.

 

 

바우만이 말하는 신식 빅브러더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을 골라내, 거기서 쫓아낸다. 용산에서, 숱한 도시재개발 현장에서 벌어지는 추방을 상기하자. 우리는 남들에게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 남들을 추방하려고 애쓰며 사는, ‘리얼리티 티브이’보다 더 리얼한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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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언론과 사회과학계에서 가장 빈번하게 논의되는 주제는 지구화이다. 월드와이드웹(WWW), 텔레커뮤니케이션 등 새로운 소통 테크놀로지는 시공간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지그문트 바우만도 여기서 출발한다. 지구화는 인간 조건을 동질화하기보다 오히려 양극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지구화는 역설이다. 극소수에게는 상당한 혜택을 준 반면, 세계 인구의 대부분은 철저히 외면한다. 현대 사회에서 계층화를 결정짓는 것은 이동성의 정도이다. 바우만은 지구화가 낳은 유복한 소수를 관광객이라 부르고 가난한 다수를 떠돌이라 부른다. 관광객은 시간에 산다. 공간은 중요하지 않다. 거리는 쉽게 극복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떠돌이는 게토라는 제한구역에서 산다. 도망치기 어렵다. 부자들은 전자감시장비를 갖춘 담장으로 둘러싸인 문 안의 공동체에서 도둑이 없고 이방인으로부터 안전한 환경에서 산다. 반면 떠돌이는 피난민과 이주자로 붐비는 위험한 지역에서 겉돈다.

 

근대 사회는 구성원들을 생산자와 군인으로 호명했다. 탈근대 단계에서는 소비자로 호명한다. 소비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신자유주의 정서가 확산된다. 소비사회에서 빈곤층은 더는 산업예비군이 아니다. 노동시장과 산업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했다. 이제 생산하는 데는 점점 더 적은 수의 노동자만 필요하다. 그것도 매우 숙련되고 규율 잡힌 노동자만. 빈곤층은 전혀 쓸모없다. 부적당한, 결점 있는 소비자일 뿐이다. 이들은 범죄자로 취급되며 우리 시대의 새로운 공포인 테러리즘과 연결된다.


바우만은 탈근대성을 ‘근대성에서 환상을 뺀 것’으로 정의한 바 있다. 그렇지만 현대 사회를 묘사하기 위해 요즘은 ‘액체 근대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바우만은 “모든 견고한 것들이 녹아내리는” 마르크스의 부르주아 근대성 비판에 이의를 제기한다. 마르크스가 꿈꾼 혁명은 과거의 잔재가 영원히 사라질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롭고도 향상된 견고한 것들이 자리 잡을 수 있게 현장을 청소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지배질서를 송두리째 녹여버리려는 충동 뒤에 도사린 가장 강력한 동기는 지속적인 견고함을 발견하거나 발명해내려는 바람이었다고 본다. 신뢰와 확신이 고체 근대의 구성요소였다면 리스크와 불확실성이 액체 근대의 징표이다. 마르크스의 시대와 지금 또는 고체 근대와 액체 근대를 구별 짓는 것은 안정된 제도의 부재이다. 불확실성이야말로 개인화를 촉진시키는 강력한 힘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던” 시대에서 바야흐로 “흩어져야 살 가망이 있고 뭉치면 반드시 죽고 마는” 개인화 사회로 접어든 것이다.

 

액체 근대에 시간과 공간의 관계는 바뀌었다. 근대 권력의 속성을 가장 잘 포착한 것은 미셸 푸코가 제러미 벤담한테서 차용한 파놉티콘이다. 그렇지만 파놉티콘이 아무리 적은 비용으로 지배를 보장해준다고 해도 지배자 또한 그곳에 묶여 있어야 했다. 파놉티콘 건설과 유지에는 아무튼 비용이 들었다. 현대 사회에서 권력은 전자신호의 속도로 이동할 수 있다. 권력은 더는 공간의 저항에 발이 묶이거나 늦춰지는 일이 없다. 권력은 진정 공간에서 해방되었다. 이러한 탈원형감옥 권력관계에서 인간의 상호연대는 종말을 고한다. 원형감옥 사회에서 지배자는 어쨌든 지척에 있었다. 이제 탈원형감옥 사회에서 지배자는 멀리 있거나 또는 어디에도 없다. 지금은 독재나 종속, 억압이나 노예화가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의 액체 공포는 선택하고 행동할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족쇄와 사슬이 모두 녹아버렸기 때문에 초래되었다는 것이 바우만의 진단이다. 조지 오웰이 묘사한 구식 빅브러더는 사람들을 학교, 군대, 공장에 포함시켜 정렬시키고 합하는 데 열중했다. 바우만이 말하는 신식 빅브러더의 관심은 어디 있는가? 사람들을 배제하는 데 있다. 그들이 있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을 골라내, 거기서 쫓아낸다. 용산에서, 숱한 도시재개발 현장에서 벌어지는 추방을 상기하자. 우리는 남들에게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 남들을 추방하려고 애쓰며 사는, ‘리얼리티 티브이’보다 더 리얼한 삶을 살고 있다.

 

복지국가가 정당성을 주장한 기초는 시민들이 ‘인간쓰레기’로 전락하지 않도록 보호해준다는 약속이었다. 이제 복지국가의 해체와 종말을 맞아 각 국가의 정부는 새로운 정당화 공식을 찾아내야 한다. 어떻게? 바우만에 따르면 자국 시민들이 지구적 경제발전의 ‘부수적 사상자’로 전락하는 것을 개별 국가는 더는 막아낼 수 없다. 대신 국가는 새로운, 그렇지만 다루기 편한, ‘적’을 발명해낸다. 국가 내외의 ‘테러리스트’가 그들이다. 재개발과 강제철거에 반대하는 평범한 주민은 ‘도시 테러리스트’라는 딱지가 붙는다. 국가는 이제 개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테러 음모자들’의 공포를 과장하고 이들에 대한 선제공격과 예방구금을 통해 안전을 보장하겠노라고 약속하면서 스스로의 역할에 만족한다. 국가는 공포로부터 보호의 초점을 사회보장 대신 개인안보로 이동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에 따르면 공포에 맞선 이 영구전쟁에서 누구도 결코 이길 수 없다. 비록 몇 차례 전투에서 이긴다 할지라도 전쟁 그 자체의 승패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바우만은 1989년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를 출간하면서 세계적인 석학으로 떠올랐다. 아우슈비츠나 소련의 굴라크가 주는 도덕적 교훈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방심하면 철조망 안에 갇히거나 가스실에 들어갈 수 있다는 개연성이 아니다. ‘적당한 조건이라면’ 우리가 가스실 경비를 서고, 굴뚝에 독가스를 넣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악은 도처에 잠복한다. 악인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고, 별도의 신분증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아무도 믿지 마라.” 이제 사회생활에 필수요소인 신뢰는 무너졌다. 개인은 시민적 무관심으로 무장하고 타인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인간관계는 단절된다. 사람들은 구체적인 상대와 전인격적인 인간관계 맺기를 두려워한다. 신뢰하면 배신당한다. 대신 사이버 네트워크에 목숨 건다. 질적 결핍을 양적으로 보충하고자 한다. 리스크를 분산시키고 양다리 걸치기. 좀처럼 진정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기 쉽지 않다. 공포는 수그러들 줄 모른다. 자유의 아이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평생 친구와 영원한 적을 가르는 명확한 선은 이제 희미해졌다. 대신 드넓은 회색지대가 드러난다. 경계는 매번 변하고 구획은 달라진다. 이 불확실성, 불투명함이야말로 악이 숨어 있기에 가장 좋은 거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까? 2000년판 후기에 바우만은 다음과 같이 썼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오웰의 말이 옳다면, 바로 그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지배하는 자들이 과거를 제멋대로 주무를 수 없게 해야 한다.” 그에 따르면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 운명과 종착지, 표류와 여행의 차이를 낳는다. 현대사회의 도덕 지체가 문제다.

 

정일준/고려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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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준 교수는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에서 사회사상과 역사사회학, 문화사회학을 전공했다.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연구원과 워싱턴대 방문교수 겸 강사를 지냈다. 아주대 국제학부 교수를 거쳐 현재 고려대 사회학과에서 가르치고 있다. <1960년대 한국의 근대화와 지식인>(공저, 2004), <아메리카나이제이션>(공저, 2008)을 썼다.

 

기사등록 : 2009-10-16 오후 09: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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