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25. 15:07ㆍinterview
[특별좌담] “뒤얽힌 동북아 정세가 부른 ‘끝나지 않은 전쟁’” | |
[한국전쟁 60년 특별좌담] 박명림·와다·커밍스 ‘13년만에 성사된 좌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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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냉전시대’의 꼭짓점이었던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0년을 맞는다. 냉전이란 말은 역사 뒤로 사라졌지만,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만큼은 예외다.
<한겨레>는 23일 밤 연세대 상남경영관에서 브루스 커밍스(67)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 와다 하루키(72)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 박명림(47) 연세대 교수 등 한-미-일 한국전쟁·한반도 문제 연구분야 권위자 3명이 참여한 한국전쟁 60돌 특집 좌담회를 열었다. 세 사람은 한국전쟁 발발 원인과 성격, 동북아 정세에 끼친 영향, 북한 정권의 운명, 남북관계 전망 등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나눴다. 1997년 ‘셋이 함께 학술회의를 해보자’는 와다 명예교수의 제안이 13년의 세월이 흘러 한국 전쟁 60돌을 계기로 결실을 얻었다.
박명림(이하 박) 근대 이래 한국 최대의 비극이었던 한국전쟁 60주년을 맞는다. 60주년에 갖는 오늘의 우리 대담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냉전 시대 세계 최대의 전쟁이었던 한국전쟁은, 비록 전쟁행위는 60년 전에 끝났지만 한국민들에게는 여전히 살아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분단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당시 죽은 자들과 다친 사람들의 아픔도 지속되고 있다. 우리가 이 비극적 고난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한국과 동북아 미래와 관련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와다 하루키(이하 와다) 한국전쟁은 과거가 아니다. 끝나지 않은 유산으로 한반도 뿐 아니라, 역내 모든 아시아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한반도 내 유일한 정권이 되기를 바라는 양쪽이 벌인 특이한 내전이었다. 소련의 기밀문서 해제 뒤, 이제는 누구도 북한이 1950년 6월25일 38선을 넘어와 전쟁을 시작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일부에선 북한의 침공론이 소련의 인준을 받은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 정부 문서를 보면, 이승만 대통령 또한 한반도를 무력 통일하고 싶어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무력 통일의 시도는 김일성이 먼저 시작했지만 실패했다. 이어서 이승만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내전은 중-미 전쟁으로 확대됐고 결국 한국전쟁은 동북아전쟁이 됐다. 동북아 나라들이 모두 참여했고, 모든 나라의 운명이 깊은 영향을 받게 됐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전쟁을 주시해야만 하고, 휴전 상황의 진상을 알아야만 하며, 현 상황을 벗어나는 길을 찾아야만 한다. 역내 모든 이들의 의무다.
브루스 커밍스(이하 커밍스) 60년은 긴 시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예컨대 1850년 시작한 전쟁이 1910년까지 지속됐다고 하면, 이는 절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다. 또한 한국전쟁은 전쟁이란 게 애초 얼마나 쉽게 일어나며, 얼마나 끝내기 어려운지를 잘 보여준다. 전쟁 관계자 가운데서, 중국 말고는 남북한과 미국이 모두 풀려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 쪽에선 전쟁 기간이 1950-53년 3년 동안 계속됐다고 보는 경향이 있고, 1950년 6월25일에 전쟁이 시작했다는 데엔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이(전쟁)는 한반도 분단에 관계된 여러가지 고통이 복합된 사건이었다. 일본 나가사키 폭탄(원폭) 투하 뒤 미국이 깊은 생각없이 38선을 그은 게 전쟁의 충분조건은 아니었지만, 이 당시 전쟁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생각한다. 한반도 분단이 진정한 전쟁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국경갈등이나 게릴라전, 정치갈등 다른 형태로 싸움이 계속되다가, 김일성이 1950년 이를 종식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이 개입하면서 오늘날까지 영향을 주는 막대한 계기가 됐고, 중국도 개입했다. 내전이 그냥 발발해 6월25일에 전쟁이 시작했다기보다는, 단계가 있었다고 본다. 어떻든, 전쟁의 주요 참가자들이 오늘날까지 이렇게 길게 올 것으로 예상하진 못했을 것이다.
박명림 와다 커밍스
박 북한의 급진적인 군사적 통일의지가 초래한 이 참혹한 전쟁은 유동적이었던 1948년의 남북분단을 53년 종전의 시점에는 결정적으로 고착시켰고, 하늘을 찌를 듯한 적대이념을 산생하였다. 또한 남과 북에서 독재의 토대를 놓았으며 군사주의를 강화시켰다. 물론 남북에 각각 단결과 경쟁을 통한 거시적인 발전의 기원을 형성한 것도 사실이다. 모든 것이 파괴되어 사람만이 남은 사회로서 두 한국에 생명과 평화에 대한 절대적 소망을 심어준 것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커밍스 그다지 극단적이지 않았던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아온 유산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948~49년엔 38선을 넘나들 수 있었다. 북쪽 정권은 좌파연립정부였고, 남쪽은 어떤 연립정부라고 봐야할지 모르겠지만, 좌파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냉전의 초기 단계라 할 수 있는 한국전쟁으로 숱한 참상을 겪은 뒤, 단순한 분리가 아니라 편지·전화도 오갈 수 없고 이산가족이 생겨나는 끔찍한 분단이 이뤄졌다. 전쟁에는 외세가 큰 영향을 미쳤고, 한반도는 냉전의 중심부가 됐다. 냉전이 끝난 지 20년인데 왜 아직도 한국전쟁이 계속 되고 있는지는 설명하기가 힘들다. 한반도의 끝나지 않은 전쟁은 내재된 분단 체제와 관계가 있을 수 있다. 전쟁이 양쪽에 어마어마한 군사력을 초래했다. 북쪽의 군부는 이미 강력한 권력집단이었고, 남쪽도 61년 쿠데타 이후 30년간 군사정권이 계속됐다. 이는 명백한 전쟁의 유산이며, 분단 장기화로 이어진 불운한 모습이었다.
와다 전쟁은 식민지배 뒤 독립된 통일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바람에서 시작한 것으로, 자연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결과는 강력한 두 외세에 의한 분단이었다. 8월15일 미국은 분할점령을 제안했고, 한반도 내 우호적인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북쪽을 유지하고 싶었던 스탈린은 즉시 동의했다. 그 원인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유산, 곧 한반도의 혼란은 주변 강대국들의 민감한 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데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전쟁,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같은 맥락에 있다. 이는 내가 한국전쟁을 ‘제4차 한국전쟁’이라고 보는 이유다. 남북의 정권은 역내 주변강대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으며 수립됐다. 북한은 소련, 남한은 미국이었다. 남북은 통일된 독립국가를 바랐지만, 이는 주변 강국들의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실현되지 않았다. 북한은 소련의 도움과 지원 없이는 움직일 수 없었고, 이승만 또한 미국의 지원과 도움을 기대했다. 애초부터 아주 비극적인 상황이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을 담은 내전은 결국 역내 국제전쟁, 미-중 간 전쟁으로 비화했다. 이것이 모든 비극의 뿌리다. 이런 관계를 어떻게 끊어낼 것인지, 어떻게 국제적 간섭으로부터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지가 여전히 중요한 과제다. 전쟁은 한반도를 재앙으로 몰아갔고, 내적 갈등을 심화시켰다. 남북의 갈등과 적대감의 원인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공산당과 비공산당 같은 이데올로기도 하나겠지만, 역사적 전통도 있다. 한국이 외세 영향권으로부터 독립한다 해도, 남북간의 이런 적대감을 해소하는 게 큰 과제가 될 것이다.
커밍스 만약 스탈린이 38선을 제안하고 미국이 동의했다면, 모두가 나서서 스탈린을 비난했을 것이다. 사실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분단을 만든 것은 미국이었다. 한반도도, 영국도, 소련도 아니었다. 딘 러스크(당시 국무장관)가 위도 38도로 정한 것은 미국 쪽에 서울을 포함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들 알듯이 한국은 아주 중앙집중화된 나라다. 프랑스의 파리나 일본의 도쿄같은 곳이다. 미국으로서는 이익이라고 생각했다. 소련은 서류로 남아있지는 않지만 이해 했다. 그러자 러스크는 이것이 한반도 내 앞날의 협력을 위해 좋은 사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미국은 분단에 대해 아주 큰 책임이 있다고 본다. 소련도 나름의 책임이 있지만, 미국이 먼저 제안한 것이다. 한반도 분단은 이른바 신탁(trusteeship), 곧 미국과 소련이 서로 함께하는 통치를 추구한 루스벨트 정책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루스벨트 사망 뒤 이를 거부한 것이 분단의 씨앗이 됐다. 나는 내 나라(미국)가 스스로 세운 원칙에 따라 내 나라를 평가한다. 스탈린의 원칙이 아니다. 스탈린이 한반도 분단을 원했거나, 잘은 모르지만 한반도 전부를 원했다고 가정할 수는 있다. 하지만 미국이 좀 더 심사숙고했더라면, 악몽이 돼버린 이 현실을 막을 수 있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분단이 결정되자마자 1~2주 사이에 남북은 각각의 동맹과 더불어 정부 수립에 나섰기 때문이다. 미국 쪽은 정말 생각없는(thoughtless) 정책이었다. 그만큼 미국은 이 분단을 해결해야 하는 책임이 있지만, 미국 지도자들은 그런 책임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와다 미국의 원죄를 찾아보자는 내 오랜 친구 브루스의 생각에 동의한다. (웃음)
커밍스 (웃음) 원죄라기보다는, 뭔가 다른 방법을 고민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란 의미다. 한반도 뿐이 아니었다. 맥아더의 일반명령 제1호는 베트남 분단, 중국 분단이었다. 일본군이 장제스(장개석) 군대에 항복하는 지역과 공산당에 항복하는 지역으로 분리정책을 펴거나, 호찌민 군대의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처럼, 일반적인 분리는 전후 아시아에서 대개 한동안 지속된 현상이기도 하다.
박 전쟁의 기원을 이룬 남북 분단을 미·소가 그 씨앗을 제공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38선 합의, 분할점령, 분단국가 수립을 주도해놓고 아무런 평화와 통일의 조건도 만들어 놓지 않은채 떠났다. 갈등의 기원을 정초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한국 사람들의 책임도 작지 않다. 그들은 세계냉전을 국내냉전으로 더욱 격화시켰고, 워싱턴과 모스크바보다 더 갈등하였다. 천년단일국가의 전통이 전혀 무의미할 만큼 이념적 적대가 컸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이점이 가장 깊이 반성되어야한다고 본다. 갈등의 조건은 밖에서 주어지지만 평화의 해법은 반드시 내부에서도 함께 찾아야하기 때문이다.
와다 일본 쪽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포츠담선언(항복권고)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오키나와 항복 직후 받아들였다면 소련은 전후 협상에 낄 수 없어 어떤 것도 요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커밍스 원자폭탄(투하)도 없었을 것이고.
박 원자폭탄, 소련 진군, 일본 항복, 일반명령 제1호 등 일련의 사건배열을 보면, 이성의 간계(cunning of reason)라기 보단 역시 신의 간계(cunning of god)가 아닌가 싶다. 이 시간배열로 인해 2차세계대전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한국이 일본 대신 분단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전쟁책임으로 분단되어야했다. 유럽의 독일처럼.
와다 만약 일본이 계속 싸워 수백만 일본인의 희생을 결심했다면, 미국 군사력은 일본 본토 공격에 집중됐을 것이고, 소련은 한반도로 내려와 부산까지 왔을 것이다. 그랬다면 한반도는, 통일된 상태로, 동유럽 국가같은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을 수도 있다. 그런 맥락(항복시점이 적절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일본엔 큰 책임이 있다고 본다.
커밍스 동의한다. 미국이 일본을 점령할 때엔, 다른 유력한 동맹국가, 특히 소련의 참여가 없어 통째로 점령했다. 결국 어떤 면에서 한국은 희생된 셈이다. 언젠가 어떤 학생이 왜 2차대전 뒤 일본은 분단되지 않았냐고 물었는데,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와다 독일은 분단됐지만, 일본은 그냥 하나로 유지됐다. 오로지 한국 만이 고생한 셈이다.
커밍스 한반도 내 일본군 지도부는, 소련이 오는 게 두려워 미군이 빨리 오기를 바라기도 했다.
박 이제 주제를 바꿔 전후 60년간의 남북한을 말해보자. 북한은 전후 초기엔 남한에 앞서 갔으나 결국 남한에게 경제, 국제관계, 민주주의, 인권, 복지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역전당하고 말았다. 50년대의 북한우위, 60년대의 균형, 70년대의 역전, 이후 남북 격차의 급격한 확대…. 나는 이것을 ‘역사적 역전’이라고 부른다. 남한은 시민사회의 민주화 운동과 도전을 통해 독재를 물리치고 자기교정을 할 수 있었던 반면, 북한의 지속적인 독재, 폐쇄와 군사주의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고 본다.
“제2의 한국전쟁 막는데엔 남쪽 의지가 결정적”
와다 북한의 발전은 의심할 필요 없이 국가 사회주의에 기반했다. 이들은 공산당 내셔널리스트였고, 이데올로기는 소련 공산당에 가까웠다. 초기 효과는 좋았다. 재앙적인 전쟁 뒤였음에도, 모든 역량과 자원을 경제 개발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 사회주의가 종언을 고한 오늘날에 와서 돌이켜 보면, 국가 소비에트 시스템은 전시엔 적합하지만, 평시에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체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서동만의 연구에 따르면, 1961년 북한에서도 국가사회주의 시스템을 고안했고, 60년대 말 북한의 정치 시스템도 국가사회주의에 기반했다. 나는 ‘유격대국가’라고 부르는데, 이 시스템은 인민의 자원과 역량을 활용하기엔 유효했지만, 발전할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주는 데에는 실패했다. 반면, 한국의 발전의 뿌리는 자본주의였다. 박정희 정권 이래는 군사정부가 주도했는데 국가사회주의에 아주 가까웠다고 본다. 하지만 다른 세계에도 개방해, 국제관계를 통해 자본, 자원, 현물 등을 교류했다는 차이가 있었다. 권위주의가 주도하는 시스템이라는 점은 비슷했지만, 남쪽은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 차이가 북한을 약오르게 했고, (대립) 상황은 악화됐다.
커밍스 군사적 발전은 아주 중요하다. 남쪽은 군사독재였지만, 개방돼있었고 미국 영향권 아래 있었기에 아주 빨리 성장했다. 북한의 경우엔, 1940년대 말 만들어질 때부터 군은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소련이 아닌, 1차적으로 김일성과 일치하는 조직으로, 전쟁을 거치면서 거대하게 컸다. 기본적으로 북한의 사령관들은 지난 57년 동안 남쪽과 다시 싸울 준비를 해오면서 100만이 넘는 규모의 거대한 군을 갖게 됐다. ‘국가사회주의’는 분명 경제적 상황을 적절히 특징짓는 용어이지만, 북한은 전통적인 관점에서 군이 가장 지배적인 조직인 ‘군사국가’이다. 김일성 사후의 ‘선군정치’는 이를 명시한 셈이다.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노동당 등 같은 모든 것을 걷어낼 수는 있지만, 여전히 군부는 상대해야 하는 조직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에게 한국전쟁이 남긴 가장 심오한 유산은 지구상 가장 놀라운 군사국가의 건립이다. 북한의 미래, 붕괴, 지도부 붕괴 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심지어 김정일, 김정은, 김정남 모두 사라진다 해도, 거대한 군 조직이 절대 권력을 놓지 않을 것이란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북한과 동유럽 위성국가의 차이다. 동유럽 쪽은 군 규모가 작았고 소련 지원을 받았다. 어떻게 다뤄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군 조직을 갖춘 북한이 완전히 붕괴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 북한의 변화나 한반도 통일, 어떤 상상을 하든 북한의 군부는 거대한 난제이자 문제이다.
와다 1960년대 말 북한은 국가소비에트에 기반해 특별한 정치체제 유격대국가를 구축했다. 국가사회주의와 군사국가가 결합되고, 그 중심은 노동당이었다. 노동당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조달 가능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가동하도록 했는데, 이 시스템이 악화했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은 체제를 바꿔 ‘정규군국가’로 만들고 싶어했다. 군의 사기를 이용하면서 조직화해, 경제 체제를 바꾸려 했다. 그런데 필요조건은 개방이었다. 신기술과 신자본들 들여와야 했다. 남쪽의 박정희식이다. 김정일이 남쪽 시스템을 수입하고 싶어했던 셈이다.
박 맞다. 박정희방식이 변형되어 북한에서 나타나려했던 측면이다.
커밍스 중국식이기도 하다.
와다 김정일은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어서 경제협력을 얻으려 했다. 2001년 공동사설은 ‘’‘현대적 기술에 의한 경제 개건(개척해서 일으키다)’에 대해 썼다. 신문은 ‘신사고’의 필요성에 대한 기사도 썼다. 로동신문은 “우리 친애하는 지도자는 신사고의 챔피언”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필요조건은 개방이었다. 외부로부터 기술과 자원, 자본을 끌어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배신했고 김정일은 실패했다. 결국 군만 제대로 작동했다.
박 그러나 냉전 해체에도 북한은 무려 20년을 생존해오고 있다. 그들의 경제파탄 및 위기와는 다른 차원에서 해석이 필요한 문제이다. 동유럽과는 달리 소련위성국가가 아니었다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이고, 중국의 후원도 결정적이다. 물론 미국과의 적대나 남한과의 경쟁, 내부 통제도 중요했다고 본다.
커밍스 앞서 말했듯이 군부는 국가 유지에 거대한 요소이다. 90년대 후반 이후 기근과 기아 등 국면에서 생존 전략에 깊이 개입해 일반인들에 큰 영향을 줬던 것 같다. 미국과의 외교관계도 아주 중요한 요소다. 1994~2002년 동안 외교는 성공적인 듯 보였다. 핵프로그램 동결로 미국으로부터 식량을, 중국으로부터 여러가지를 지원받았다. 최근까지도 외교는 아주 효과적인 생존 수단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아들에서 손자로 권력이 이어지는 ‘유격대국가’ 지도자는 강한 반미·반일 내셔널리즘 성향을 보이며,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서독에 흡수통일된) 동독처럼 남쪽에 접수되지 않으려 한다. 이달 초 임명된 핵심인사들은 모두 80대로, 이들의 노인적 리더십(geriatric leadership)은 머릿속 깊이 강한 내셔널리즘으로 무장한 채 (체제를)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 자세로 요약된다. 그들 자신 뿐 아니라 가족 모두가 (체제를) 포기하면 잊혀지고 말 것처럼 여기는데, 이들 내셔널리스트가 20년간 집권하고 있는 원인이기도 하지않나 생각한다.
와다 강력한 내셔널리즘은 북한 체제 동력의 비밀이라고 본다.
커밍스 동의한다.
박 그 점은 양면적이다. 체제 단결-유지와 체제 고립-파탄의 동시 요인이기 때문이다.
와다 동유럽은 반대였다. 동유럽의 내셔널리즘은 반소련·친서방이었다. 북한으로선 강력한 군사 조직과 더불어 내셔널리즘에 기반해 경제를 개방하는 게 유일한 길이다.
커밍스 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베트남처럼 개방하되 계속 통제를 하는 식으로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은가?
와다 미국과 일본이 거부하기 때문이다. 김대중-노무현 시절 한국만이 도우려 했지만, 미국이나 일본과의 관계가 없이 남쪽만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흡수통일이 두렵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제력이나 민주적 역량은 아주 높아서, 북한으로선 두려워할 만하다.
커밍스 중국도 북한을 돕고 싶어해왔다. 중국이 북한을 돕는다는 것은 20년 전부터 예상할 수 있었던 상황이다. 중국은 줄곧 도왔고, 북한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한 밸러스트(ballast·바닥짐,지지대) 구실을 했다. 워싱턴에선 이에 대해 놀라워하는 분위기인데, 놀랄 일이 아니다. 중국은 적대적인 세력과 국경을 맞대길 원치 않고, (중국) 군부 내 강경파는 지금도 북한을 좋아한다.
박 현존하는 사회주의 국가 셋이 동아시아에 위치(중국, 베트남, 북한)할 뿐만 아니라 이들이 모두 국가형성과정에 미국에 맞서 싸운 전면적인 반제전쟁을 수행했다는 공통경험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유럽의 사회주의는 모두 망했다. 국가건설과 유지의 동력으로서 사회주의보다는 동아시아 민족주의를 다시 보게 만드는 점이다. 민족주의는 학문이나 현실에서 참으로 난해한 문제다.
커밍스 이들 모두 반식민주의 내셔널리즘에 기반해 성립된 나라다. 동아시아 공산권에서 유일하게 무너진 몽골은 위성국가였다. 뿌리가 달랐다.
와다 이들 세 나라는 모두 미국에 맞서 싸웠다. 베트남은 이겼고 미국과 관계가 편하다. 유일하게 북한만 바깥 세계로부터 단절됐다.
커밍스 누군가 왜 베트남이 미국과 친해졌냐고 물은 적이 있다. 이겼기 때문 아닐까. 이기고 나면 화도 한도 사라지는 것 아닌가.
박 공식적으로 남북은 정전 상황이다. 전후 최장의 한반도 안보문제로서의 북핵문제나 최근의 천안함 사건과 남한의 전시작전권 전환 문제 논란을 보면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은 너무도 필수적이고 시급하다. 나는 이를 위한 과제로 그동안 네 가지를 말해왔다. 북미국교정상화, 남북 화해협력과 무기감축,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전환, 북한의 비핵화와 민주화 등이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지만 한반도 평화를 위해 우리가 반드시 가야할 길이다.
와다 평화체제는 미-중, 그리고 남-북의 문제이다. 이런 프로젝트는 한반도비핵화와는 별개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합쳐놓으면 어떤 해결책에도 이를 수 없다. 평화체제가 구축되고, 관계정상화(북-일)도 필요하며, 남북 화해도 필요한데, 이 모든 것은 별도로 진행해야 한다. 이 가운데 남북간 화해를 이룩하려면, 남북한 사람들이 한국전쟁의 시작에 대한 공감대를 얻어야 한다. 공감대 없이 화해는 불가능하다. 양쪽 모두 무력통일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재발해선 안 된다는 공감대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화해의 첫발이 될 것이다.
커밍스 궁극적으로 동의한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진정한 통일을 위해 북한의 민주화가 꼭 필요할까. 10년동안 지속한 김대중의 화해정책은 20~30년간 지속할 것으로 고안됐다. 경제 협력, 민간 협력, 학자교류 등을 지속하다가, 결국 하나의 국기 아래 하나의 나라를 이루되 북쪽에 일종의 지방자치를 허용한다. 40년 뒤 최종 단계에는 북쪽 지역정부가 민주화한다는 계획이다. 이 모든 것은 가능하고, 10년 전엔 그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북한 민주화만 기다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완전한 긴장 완화, 미국과의 관계정상화, 전쟁 종식, 장기적 화해 등이 이뤄지는 등의 맥락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북쪽 주민들 스스로가 남쪽같은 민주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북한이 민주화하지 않으면 통일할 수 없다고 하는 건, 북한이 사라질 때까지 통일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통일에 이르지 못한 단계에서도 정말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김대중의 지혜였다. 그리고 많은 면에서 성공했다고 본다.
와다 북한 민주화는 북한에 요구할 일은 아니다. 자연스러운 발전이 가능하도록 해야한다. 물론, 북한 같은 나라에선 강력한 지도자의 사망이 변화의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사망을 기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김정일의 강력한 집권에 기대하면서 그와 협상해야 한다. 그것이 진전이다. 성급한 민주화는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반도의 평화, 북한의 평화이다. 이것이 필요조건이다.
박 전후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제2의 한국전쟁의 가능성을 언급해왔다. 정치인, 학자, 언론인, 시민을 막론하고 이념적 정치적 동원을 위해 그래왔다. 그런데 나는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에 제2의 한국전쟁은 구조적으로 상상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주장해왔다. 자료들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해준다고 믿는다. 지금의 경제, 군사, 세계대면 수준에 비추어 현재는 더욱 그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와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남쪽 사람들이 두번째 전쟁을 바라지 않는 한,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엔 남쪽 사람들의 의지가 결정적이다. 커밍스 상상할 수 없다고 본다. 전쟁이 시작된 지 60년이 지나면서, 양쪽은 무기를 발전시켰다. 북쪽은 핵무기를, 남쪽은 고성능 장비를, 그리고 미국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굉장히 파괴적일 것이고, 누구도 얻는 게 없을 것이다. 일본도 아마 개입하게 되지 않겠는가.
와다 물론이다.
박 오늘날에 대한 문제로 옮겨와 보자. 기대가 높았던 미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실망의 소리가 높다. 북핵문제, 6자회담, 북미관계…. 거의 모든 것이 막혀 있어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상당히 실망하고 있다. 왜 이렇게 적극적 해결의지와 정책을 보이고 못하고 있는가.
와다 대북정책은 아주 실망스럽다. 이제 미국에 희망을 잃었다. 일본의 전문가들은 항상 미국이 북한에 대해 어떤 액션을 먼저 취하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일본도 움직일 수 있다는 의미다. 이제는 일본이 자체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오바마 정부가 군사적 움직임을 한반도에서 취하진 않을 것이라 본다. 적절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커밍스 오바마 정부에 대한 실망에는 동의한다. 2000~2006년 부시 행정부 정책이 계속되고 있다. 존 볼턴이 배후에 있었던 비핵화, 안보 이니셔티브 등의 이른바 ‘피에스아이’(PSI) 담론과 다르지 않다. 이를 북한에 적용하는 것일 뿐이다. 아주 실망스럽다. 그러나 북한도 오바마 행정부와의 나쁜 분위기를 조장한 면도 있다. 지난해 4월의 장거리로켓 발사나 현충일이었던 5월25일 핵실험 등은 오바마가 “주먹을 펴면 악수하겠다”고 한 뒤 일어난 일이었다. 북한으로서는 도움이 안 되는 일을 한 셈이다. 특히 오바마 정부가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산적해 있던 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지금까지는 아주 불운한 상황이었지만, 최근 오바마 쪽에 10년 전 대북정책 자료가 전달됐다는 이야기가 국무부에서 나온다. 2000년 말에 있었던 (계획·시설의) 동결, 미사일 제거, 관계정상화 등에 대한 이야기다. 국무부에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싶은 이들이 있다는 의미다. 그동안 북한에 대해선 대통령이 제시하는 특정한 방향이 제시되지 않은 것 같다. 방향을 제시한 건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었다. 한국 해군이 실시하는 서해 훈련에 미군이 참여할지(비행기를 보낼지) 여부를 놓고 싸우고 있다는 보도를 오늘 읽었다. 대통령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싸우고 있는 꼴이다. 부시 행정부 내내 그랬다. 북한에 대해 강경파와 온건파가 내내 싸웠다. 오바마가 주의를 기울여서 정책을 통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10년 전의 미래’로 돌아가도록 추진하기를 희망한다.
박 6자회담 중지, 개성공단 위축, 금강산관광 중단, 천안함사건 등 악화한 오늘날 남북 관계는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까? 단기적으로는 길이 보이질 않는다. 이 정도로 후퇴할 줄은 몰랐다. 출구가 없는 것이다. 평화를 열망하는 한국시민으로서 참으로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이명박 정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산물인 개성공단의 존재가 남북대결과 충돌을 막았다는 구조적 요인으로부터 배웠으면 좋겠다. 출구는 결국 남북정상회담과 남북대화 복원, 6자회담 재개, 북미대화 재개, 이 세가지라고 생각한다.
와다 다소 비관적이다. 천안함 관련해서, 일단 조사단의 조사결과라며 북쪽이 공격했다고 결론지은 성명을 내놓은 이상, 이명박 대통령은 돌아갈 수가 없다. 북한은 인정도 하지 않는다. 현재로서 남북 관계는 악화된 상태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 상황을 적절히 조절해서 최악으로 치닫지 않도록 하는 게 필요할 뿐이다. 외국이 남쪽 정부를 도와야 할 때다. 일본 정부가 새로운 긍정적인 접근법을 시도해서 북한 설득에 나서야 한다.
커밍스 교착 상태다. 지난 6·2 지방선거를 보면, 이명박 정부는 이미 레임덕이다. 북한도 현 정부와는 공조 않을 것이며, 차기 정부를 기다리겠다고 한 상태다. 따라서 몇 해 정도는 그냥 지금과 같은 교착상태가 이어질 것으로 내다볼 수 있다. 미국이 북쪽과 6자회담이나 직접 교섭을 통해 이를 깰 수는 있다. 그렇게 되면 이명박 정부도 반대하지 않고 따라갈 것으로 생각한다. 일본 정부도 이를 지지할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가 시도한다면 교착은 깨질 수 있지만, 그렇게 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박 나는 인간의 열정과 이성을 동시에 믿는 낙관주의자이다. 특히 거대한 비극을 겪은 사람들의 지혜를 믿는다. 내가 한국사회를 비판하면서도 사랑하는 이유이다. 생애를 걸고 오랫동안 한국문제를 지켜봐온 전문가로서 한국과 자국에 대한 지혜와 성찰의 말을 바란다.
와다 나는 한국 사람들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이해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이런 믿음은 계속 견지하려 한다. 일본 정부는 올 가을 새로운 대북정책을 시작하기를 바란다. 일본 사회도 병합 100주년 역사를 잘 새겨보고, 북한에 대한 이해를 바꿔 정부를 돕게 되기를 바란다.
커밍스 예컨대, 진실위(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남북 갈등과 좌우 갈등 속에서 서로에 대해 또는 양쪽에 대해 잘 이해하도록 했고, 이는 한국전쟁 이래 최고의 노력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를 추구하면서 한국 사회에 냉정하면서도 현실적이고, 도움이 되는 태도를 배양했다고 생각한다. 미국도 더이상 문제를 일으키기만 할 게 아니라, 한국 관련 역사를 이해하고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같은 종류의 관심이 생겨나기를 바란다.
박 전쟁 60주년을 맞는 오늘의 특별 대담이 평화와 화해의 관점에서 한국문제를 보는데 도움이 되었기를 기대하고 희망한다. 과거의 비극은 우리의 몽매를 깨우는 이성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한국시민으로서 나는 한국의 비극이 이제 한국과 동북아, 세계평화를 향한 지혜의 자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럴 경우 한국인들은 경제와 민주주의 발전 못지 않은 평화창조를 통해 세계에 공헌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정리/김외현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
기사등록 : 2010-06-24 오후 08:31: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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