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12. 12:42ㆍlecture
잠들지 못한 ‘학살 원혼’ 60년만에 보듬다 | |
서울수복뒤 부역 누명 ‘아산 희생자 위령제’ 당시 미군·경찰, 확증 없이 민간인 5300여명 총살 진실화해위, 공식사과·위령사업 권고…정부는 외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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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6살이던 문종철(66)씨는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518번지에 살았다. 조부모에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문씨 등 8남매와 조카까지 대식구가 한집에서 지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살아남은 이는 문씨와 문씨의 조부모, 이렇게 셋뿐이었다. 미군과 경찰이 1950년 9월29일 이 지역을 수복한 뒤 ‘부역자’를 처벌하면서 문씨 일가의 비극이 시작됐다. 문씨의 두 형이 인민군의 심부름을 해줬다는 이유로 몽둥이에 맞아 숨졌고, 며칠 뒤인 10월 초엔 1살 난 조카와 5살배기 여동생까지 7명의 가족이 총살을 당했다. 두 형도 이 시기에 행방불명됐다.
학살당한 이들은 문씨네 가족만이 아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조사 결과를 보면, 충남 아산에서 비슷한 시기에 경찰과 대한청년단 등 치안대에 학살된 이들은 8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이들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이들만 77명이다.
11일 오후 아산시 온천동 아산시민문화복지센터에서는 이들을 기리는 위령제가 열렸다. 반세기가 훌쩍 지나, 꼭 60년 만에 열리는 위령제였다. 유해 매장 추정지인 아산시 탕정면에선 안내표지판 제막식도 열렸다.
위령제에선 문씨의 가족들이 한 사람씩 호명됐다. “문현기(아버지), 김삼례(어머니), 문호인(큰형), 임소만(형수), 문민식(작은형), 문윤수(1살 조카)….” 환갑을 넘기고서야 어릴적 가족들의 위령제를 지내게 된 문씨의 눈시울이 이내 붉어졌다.
이날 치러진 아산 위령제는 1950년 9·28 서울수복 뒤 인민군 점령 때 부역한 이들과 그 가족을 대상으로 무차별 학살이 이뤄진 사건 가운데 하나다. 당시 주한미국대사는 1950년 12월31일까지 16만2763명이 부역자로 구금돼 있다고 밝힌 바있다. 그때는 부역자 처벌 기준이 모호했고, 우익단체들은 보복 차원에서 참여해 학살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뤄졌다. 이듬해 1·4 후퇴 때도 ‘인민군에 협조할 수 있다’는 이유 등으로 학살이 계속됐다. 이임하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교수는 “당시엔 인민군 치하에서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부역자로 간주될 만큼 부역의 범위가 광범위했다”며 “부역행위는 자의적이고 모호하며 불특정하게 판단됐다”고 했다.
진실화해위의 조사를 보면, 9·28 수복 뒤의 민간인 학살사건은 194건으로, 최소 2301명이 희생된 것으로 확인됐다. 진실화해위는 이런 조사 결과를 근거로 국가의 공식 사과와 위령사업 지원, 평화인권교육 강화 등을 권고했다. 하지만 정부는 지난달 28일 ‘9·28 서울수복 및 국군의 날 행사’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여는 등 한국전쟁 60년 기념사업에는 적극적이지만, 진실화해위의 권고를 이행하는 데는 소극적이다.
60년 만에 열린 위령제를 두고 김장호 아산유족회 회장은 “일가족이 전부 학살당해 살아남은 유족도 거의 없는 경우도 있고, 과거처럼 피해받을까 두려워 나서기 어려워하는 이들도 있다”고 말했다. 문씨도 “정부가 외면하지 말고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한을 풀기 위해 적극 나서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산/글·사진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
기사등록 : 2010-10-11 오후 08:01: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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