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선생님의 칼럼을 보며, 협동적 삶의 문제를 고민하며

2011. 3. 1. 14:58sensitivity

 

아래 김종철 선생님의 글은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들의 자화상에 대한 아픈 지적이다.

지금까지 김종철 선생님의  [세상읽기] 칼럼의 내용은 세상 사름들에게 성찰과 선회를 요구하는 것 같다.

살아온 삶에 대한 돌아보기, 이렇게 구축되고 구조화되어 가는 세상과 사회에 대한 돌아보기 말이다.

끊임없는 성공과 탐닉의 사회에서 한 치라도 뒤지는 것은 낙오이며 부끄러움이었던 세상에 대한 아픈 지적말이다.

 

공동체의 협동과 협력의 삶이라는 도덕 공동체는 이미 찾아보기 어렵다.

아니 저 인류학자들의 연구대상인 오지의 땅이나 외떨어진 섬의 특이한 일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저 발견일뿐이고 낯설음의 연속이다.

우리와는 다른 타자, 그것은 나보다 뒤떨어진 새로운 그러나 낡은 문명(문화)의 발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가 지속해온 합리주의의 역사, 이성 독주의 역사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다.

공동의 협력적 삶의 문제는 과거 마을공동체의 낡은 문화가 아니다.

 

이제 어쩌면 인류가 가야할 경험적 토대이고 새로운 이정표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을 집어 삼켜 소비를 충족시키는 인류의 탐닉은 이제 낭비라는 단어로 종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파탄이며 명멸의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선회하기란 너무나 어렵다.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두려움이 손과 발을 묶는다.

 

공동의 성찰이 필요하다.

이대로 갈 수 없다고 인지한다면 이제 소비의 축제는 중단되어야 한다.

도시의 삶이 싫어 낙향을 하고 안빈낙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남아 있는 자들의 몫에 대한 이야기다.

논리가 아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얘기하는 것이다.

 

이 가공할 소비사회의 지속적 팽창은 이제 자연을 집어 삼키고 나서 인간을 집어 삼키고 있다.

자연이 인간을 공격하고 있고, 인간이 만든 인공의 조형물이 인간을 공격하고 있다.

협공의 시대다.

그저 우리는 이성의 가능성이라는 허울 아래 초라하게 비를 피하고 있다.

 

협력적 삶의 문제는 다시 대한민국 진보에게 주문을 던지고 있다.

반MB의 세상을 대중에게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협력적 삶의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가?

우리는 좋은 통치의 미래를 대중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연설, 강제, 정언명령의 방식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누는 대화로, 이야기로 말이다.

이야기의 힘은 역사를 넘어서고 금기를 넘나들며 삶을 풍부하게 만든다.

화석의 시대를 넘어서 자연과 친화하는 새로운 세상을 진보는 이야기해야 한다.

이념이 낳은, 이성라는 독단이 낳은 미래의 가능성이 아닌

삶의 경험과 공동체의 문화가 숨쉬고 그 속에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낡은 이념과 낡은 진보가 아니라, 생생한 경험을 통해 날 것의 이야기를 통해 말이다.

[세상 읽기] 협동적 삶의 아름다움 / 김종철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한겨레

 

 
» 김종철 〈녹색평론〉발행인
석유값이 치솟자 정부가 내놓는 대책이란 게 또 에너지절약운동이다. 물론 원유가격이 지금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가고 있는 것은 아랍권을 휩쓸고 있는 민중봉기의 영향이 크다. 그러니까 석유 공급 문제는 이 지역의 상황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 경제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석유값이 오른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시련일지 모르고, 따라서 에너지절약운동으로 이 시기를 무사히 넘기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딴 것은 몰라도, 석유문제만은 이제 임시미봉책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국제에너지기구에 의하면 세계의 석유생산은 이미 정점을 지났다. 그렇다면 아랍권의 동향에 관계없이 값싼 석유시대는 끝났음이 분명하다. 사실 이것은 충분히 예견된 사태이다. 화석연료 문명의 종언을 암시하는 증언과 징후가 그동안 허다히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제1차 ‘오일쇼크’ 이후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옥외조명이나 승강기운행 감축 따위 에너지절약밖에 대책이 없다는 것은 이 나라가 삶의 장기적인 비전을 결여한 하루살이 인생들의 사회라는 것을 말해준다. 현재 한국 경제의 근본 문제는 그것이 거의 전적으로 값싼 석유에 의존하고 있다는 데 있다. 지금은 농사도 석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도 석유 공급에 이상이 생기면 그날로 망하게 되어 있는 이 극히 취약한 토대를 외면하고 우리는 이 상태가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이 엉터리 사회의 모습은 가령 덴마크와 비교하면 훨씬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1973년에 석유위기가 닥쳤을 때 덴마크의 에너지자급도는 1.5%, 식량자급률도 30%에 불과했다. 그러나 석유위기는 덴마크인들을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어, 그들은 재생가능에너지를 실용화하고 화석연료 의존도를 낮춘다는 목표를 내걸고 전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1977년에는 에너지세를 신설하고, 또한 석유류의 국내가격은 국제석유시세 변동에 관계없이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재생가능에너지 개발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다른 한편, 풍력, 태양광, 바이오매스 발전에는 면세나 세금환급 혜택을 부여함으로써 재생가능에너지의 개발과 보급을 급속도로 확대시켰다. 그 결과 지금 덴마크의 에너지자립률은 130%, 식량자급률도 300%나 되었다.

 

주의할 것은 이 성과에는 덴마크의 정치적·사회적 성숙도와 높은 시민적 교양이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높은 석유가격이나 에너지세를 감수하겠다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자세 없이는 지금과 같은 에너지자립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까지는 지도층의 현명한 결단도 필요했겠지만 무엇보다 민주주의가 살아있기에 그것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덴마크의 민주주의는 이 나라의 오래된 협동조합운동의 역사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18세기에 전면적인 토지개혁을 통해 자작소농 중심 사회로 근대를 맞이했던 덴마크는 몇 차례의 전쟁 끝에 국토 절반을 잃는 절망적 현실을 헤치고 세계에서도 드물게 평화롭고 견실한 민주주의 사회로 성장해왔다. 이 성공적인 역사의 원동력이 된 게 바로 활기찬 협동적 삶이었던 것이다. 거대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소농들은 일찍부터 생산과 유통, 소비부문에 걸쳐 서로 연대하고 연합함으로써 수많은 협동조합을 출현시켰다. 그리고 협동조합의 자치적·민주적 방식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자주적으로 통제하는 능력과 습관을 키워왔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덴마크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87%에 달한다. 그뿐만 아니라, 원자력 등 과학기술에 관한 중요한 사회문제가 있으면 전문가들에게만 맡겨놓지 않고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토론하고 결정하는 ‘시민합의회의’를 운영하고 있다. 지금 덴마크의 대학진학률은 40%에 불과하지만, 시민적 교양 수준은 대학 졸업자로 넘쳐나는 어떤 사회보다도 높다.

기사등록 : 2011-02-28 오후 07: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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