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4. 22. 13:48ㆍBook
공자와 세계 : ‘패치워크(patchwork)’를 통한 개방적 문명 교류 시대로의 진입
동아시아가 다시 부상하는 이 새로운 패치워크문명 시대는 미국 월가 중심의 서구화로서 ‘세계화’ 시대이기는커녕, 한마디로 동아시아 중심의 ‘아태화(亞太化)’ 시대다. 1)
중국의 부상, 세계 경제의 중심지로서 동아시아의 호명, 동아시아공동체 담론의 등장과 확산 등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가 서양의 시대에서 동아시아의 시대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상황이라는 점을 실감하게 된다. ‘서양중심주의’에 의해 배태된 ‘오리엔탈리즘’에 포박되었던 현대사를 돌아보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동아시아 지역은 한국, 중국, 일본을 필두로 세계 경제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일본은 이미 19세기 말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脫亞入歐)’ 즉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사회를 지향”하면서 산업화의 길에 들어섰고 20세기 내내 아시아 내의 ‘서양’으로서 경제입국을 달성했다. 뒤이어 중국은 2010년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세계은행과 도이체방크에 의하면 2020년, JP모건에 의하면 2020~2025년, 골드만삭스에 의하면 2027년 세계 1위의 경제대국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국도 씨티그룹에 의하면 1인당 국내총생산 규모가 2020년 세계 10위권, 2030년 5위, 2040~2050년 4위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진정 세계화의 최대 수혜자는 동아시아이며, 작금의 세계는 세계화가 아니라 동아시아 중심의 ‘아태화’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세계화가 지금과 같이 위계적 구조화를 지향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동아시아 중심의 아태화로 전환되어야 한다. 서양 중심의 세계화가 더욱 강력한 세계적 수준의 양극화를 고착화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세계화가 아니라 ‘제국화’이다. 이것은 또 다른 분쟁을 의미하며 혼돈을 잉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위계적인 서양 중심의 세계화가 아니라 수평적이며 협력적인 새로운 모습의 세계화의 동력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분쟁이 아닌 평화를, 혼돈이 아닌 안정을 가져올 동력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공자와 세계: 패치워크문명 시대의 공맹 정치철학』(제1~5권)은 세계화시대에 세계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문명사적 갱신의 방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부상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경제력에 비견하자면, 현재 동아시아의 문명은 초라하기만 하다. 황태연 교수의 진단처럼 “지금은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상황이 아니라 ‘동도’는 없고 ‘동기’만 있는 ‘무도동기(無道東器)’상황”이다(황태연 2011, 54). 이제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문명을 재창안해야 한다. 21세기 형 ‘동도동기’와 ‘동도서기’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실천해야 한다. 19세 이래 서양 합리론에 복속되었던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면 참혹하기까지 하다. 현재 서양이 겪고 있는 한계상황은 서양 합리주의에 그 뿌리를 둔다. “서구 기독교문명의 침체와 퇴조는 주로 그 주류 사상인 합리주의의 지성주의적 침략성, 인간파괴성, 자연파괴성에 기인”(황태연 2011, 55)하며, 그들이 기획한 “합리주의 혁명은 엘리트(철인치자) 주도적이고, 합리적․전지주의(全知主義)적이고 기획적이며, 폭발적․격정적․파괴적이고, 메시아적(구세적)․침략적”이어서, 그 결과는 “인간 살육과 자연 파괴로 점철된 실천적 파탄과 이론적 빈사상태”로 귀결되었다(황태연 2011, 59).
이런 문명으로 앞길을 개척할 수 없다. 개방적이고 소통적이며 경험적인 방식의 문명적 가능성을 찾는 도정에 나서야 한다. 그것은 ‘패치워크’ 방법이다. 패치워크는 “헝겊 조각들(patches)을 모아 꿰매고 이어 붙여 만든 완제품의 옷이나 보자기, 우산, 텐트, 이불 등 섬유제품”을 의미한다(황태연 2011, 50). 문명 간의 장단점을 모아 꿰매고 이어 붙이는 창의적 패치워크 과정을 통해 그 가능성은 현실화될 수 있다. 그 이유는 국제관계 속에서 국가들 간의 권력정치들 사이에는 배제․충돌․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지만, 문명들 사이에는 문물교환과 교류협력을 통해 문물을 패치워크시키는 경향이 본질적이며 문명은 근본적으로 ‘초(超)정치적’ 현상이기 때문이다(황태연 2011, 34).
패치워크 모델은 새로운 창조의 과정이다. 만약 적절한 자기 비판적 개방성을 전제할 때, “문명들은 때로 오해와 마찰이 없지 않을지라도-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낮은 곳에 모인 물은 수증기로 증발하여 다시 높은 곳으로 이동하는 순환을 반복하듯이-서로 도움과 영향을 주고받는 교류협력 속에서 고유한 전통에 새로운 수입문물을 짜깁기하여 자기정체성을 새로운 형태로 확대재생산하는 순환적 패치워크 과정을 거쳐 보다 복합적이고 보다 세련되고 보다 고차적인 문화를 창조해 나간다(황태연 2011, 35).” 즉 자기 비판적 개방성의 원칙을 견지한다면, 각자의 높은 문명을 서로 교류함으로써 갱신(更新)된 새로운 문명을 만들 수 있으며, 역으로 갱신된 새로운 문명은 다시 전파되어 갱신되는 선순환적 관계를 만들 수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양은 세계화의 중심에 서양이 서 있으며, 그 세계화는 지구적인 활력을 제공할 것이라고 공언해왔었다. 그 주장에도 불구하고 세계화는 수렁으로 빠져들었고, 오히려 세계화의 최대 수혜자는 동아시아 국가들이었음이 판명되었다. 미국 식 자본주의의 세계화 추진은 2008년 발 ‘금융위기’로 도처에서 파산선고가 내려지고 있으며, 2001년 ‘9․11 테러사건’ 이후 전개한 미국의 세계전략은 오히려 미국의 도덕적 가치를 떨어뜨렸다.
이제 시선을 돌려 동아시아를 보자. 동아시아 흥기는 이 지역 국가들의 오랜 문명적 역사 때문에 가능했다. 동아시아문명은 “외부 문명권에서 들어온 모든 인간들과 모든 문화조각들을 유교적 바탕 위에서 유교적인 실로 꿰매고 유교적인 접착제로 붙여 더욱 강력한 완전품으로 재생산된, 그리고 매일 재생되고 있는 ‘짜집기’” 문명이며(황태연 2011, 28), 따라서 가장 패치워크적인 문명이었다. 이러한 패치워크의 능력으로 인해 가장 발전 속도가 빠르고 세계의 권력과 경제력이 집중될 만큼 높은 산업생산력과 기술력을 축적해갈 수 있었던 것이다(황태연 2011, 41). 이러한 동아시아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즉 “동아시아(인) 정체성을 서유럽에 의해 구성된 것을 수용하는 차원이 아니라 재창안(reinvention)의 차원에서 새롭게 조직”해야 한다.2) 무엇으로 재창안할 것인가, 그것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공통분모인 유교의 현대적 재해석이다.
쑨거(孫歌)는 “유학을 하나의 시각으로 삼아 동아시아 담론을 구축하고자 하고 동시에 직관적인 태도로서 동아시아 각국의 유학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자 한다면, 이렇게 구축된 동아시아 시각에는 역사성과 현실성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동아시아 담론은 한 조각의 공론이 되고 말 것이다”라며 비판적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3) 즉 유학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동일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결론내릴 수 없으며, 동아시아 국가들을 연결하는 매개역할을 할 수 없다는 역사성의 문제와 함께 전쟁에 의한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공동체 형성의 현실적 어려움을 들고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각 국가들은 동일한 문명을 받아들이더라도 각 국가의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수용하는 것은 오히려 보편적이다. 동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유교의 문명적 영향을 받지 않은 나라가 없으며 그 깊이와 시간은 장기 지속적이었다. 또한 20세기적 현상으로서 전쟁에 관한 상흔의 기억도 현실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치유되어야 한다. 따라서 동아시아 국가들의 보편적 토대로서 유교의 현대적 재해석과 적용을 검토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임춘성의 “‘부정의 부정’을 지향하는 문화 횡단”의 제안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자문화와 타문화의 횡단을 통해 새로운 주체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전망을 전제”하면서 “그 경로는 우선 타문화에 심층 진입한 체험을 통해 자문화를 되먹이는 과정을 필요”로 하며, “단순하게 몸만 가고 오는 것이 아니라 부정의 부정의 과정을 통해 자국 이외의 문화 가치를 습득하고 그것을 자국화시키는 과정이 요구”된다는 것이다(임춘성 2010, 291). 이것이 패치워크 방식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패치워크의 방식을 통한다면 타국의 문화에 포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유의 전통을 지키면서 새롭게 문명과 문화를 창출할 수 있다. 국가 간의 오해와 의심, 갈등과 편견을 해소하면서 교류와 소통을 전개할 수 있는 방식이라는 뜻이다.
‘전통의 앵글’이라는 내적 문명을 통해 다양한 타문화를 흡수하고, 재해석하고, 현실에 맞게 재창조하는 과정을 통해 자국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창조의 과정을 만들어갈 수 있다. 이것은 일방이 일방에게 자신의 문명을 강요하는 서구식 합리주의와 단절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준다. 즉 동아시아라는 맥락에서 문명적 패치워크를 통해 자국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공동의 협력적 관계와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방식인 것이다. 또한 문화적 교류에 있어서의 폐쇄성, 문명적 교류에 대한 배타성으로는 국가의 발전은 요원하다. 그 찬란했던 동아시아의 과거 역사가 문화적 폐쇄성, 배타성으로 인해 일거에 서양에 무너졌던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 바탕으로 공자의 유교를 현대적 의미에서 재해석하는 ‘공자주의(Confucianism)'에서 찾아내고, 이를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창조적 재해석’을 통해 구성할 필요가 있다.4)
절차탁마의 과정은 원석이라는 대상을 놓고 원석을 다듬을 도구, 원석을 다듬을 방법, 원석을 아름답게 할 아이디어, 세밀한 손동작, 능숙한 기술력, 다양한 기술적 수용과 창조적 해석 등의 각고(刻苦)가 필요하다. 이 과정은 적확하게 패치워크다. 원석을 그대로 두면 그것은 돌덩어리에 불과하다. 다양한 접합을 통해 절차탁마의 과정을 거쳐 새롭게 변신할 때 보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보물은 세계사적 문명의 재발견과 전파라는 측면에서 더욱 고차원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의 유교를 어떻게 절차탁마할 것인가에 대해 황태연 교수는 세 가지의 인식론을 제시한다. 그것은 인식방법으로서 경험을 우선하는 ‘주학이종사(主學而從思)’, 실질적인 관계 형성의 경험적 접근 및 해석방법으로서 ‘술이부작(述而不作)’, 조화로운 관계 형성의 방법으로서 ‘궐의궐태(闕疑闕殆)’이다.
우선 ‘주학이종사’는 말 그대로 경험(學)을 우선하고 생각을 뒤로 놓는 경험적 인식이다. 공자는 『논어』 「위정」편에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공허하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고 했다. 여기서 ‘학(學)’의 ‘배우다’는 넓은 의미에서 ‘과거와 현재의 경험’에서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즉 배움이란 세상 경험이고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한 협력적 지식획득이다. 따라서 위 「위정」편의 의미를 “경험에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공허하고, 생각하기만 하고 경험에서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의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황태연 2011, 187-190). 서구철학자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배운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오로지 경험에 의해서만 배운다”고 말했다. 장-자크 루소는 자연‧인간‧사물 모두로부터 배운다고 했다. 즉 “자연이나 인간들이나 사물들은 우리를 교육한다. 자연은 우리의 능력과 힘을 개발한다. 인간들은 이 능력과 힘의 사용법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사물들은 우리가 이 사물들과 겪는 경험과 직관을 통해 우리를 교육한다.” 즉 무엇보다 과거의 이데올로기적 대립, 현실주의적 시각에 의한 국가이익 중심의 강자논리 등의 사유를 우선으로 하면 갈등만 증폭시킬 것이다. 따라서 ‘다문다견(多聞多見)’의 상호이해의 경험을 축적해야 한다. 공자는 ‘다문다견’의 경험(學)이 없으면 인, 지혜, 신의, 정직, 용기, 강직의 육덕(六德)이 무너진다고 했다. 쌍방 간 많은 것을 듣고 보는 경험의 축적을 가장 중요한 관계증진의 방법으로 삼아야 한다. ‘박학(博學)’을 통한 경험의 축적과 동시에 공자의 ‘심문(審問)’ 즉 정밀하게 따져 묻는 분석이 필요하다. 단 ‘박학‧심문(博學審問)’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해 생각해야 한다. 즉 ‘신사‧명변(愼思明辯)’의 과정이다. 신중하게 사고하고 명확하게 변별하는 것이다. 즉 발생하는 모든 것은 경험을 통해 인식하고 정밀하게 따져 묻는 과정 이후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신중하게 사고하고 사고에 근거해서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 변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공자의 『대학』에서 “사물에는 본말이 있고 사건에는 시종이 있으니 선후를 알면 도에 가까워질 뿐이다(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라는 구절이 있다. 즉 ‘박학심문’하고 ‘신사명변’하면 발생한 문제의 본말과 시종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며, 문제해결의 방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술이부작(述而不作)’은 겸손한 접근을 의미하며, 동시에 경험에 입각한 해석적 인식방법을 뜻한다. 이러한 관점은 경험적 접근을 강조하는 것이다. 공자 『논어』의 “서술할 뿐이고 사유로 지어내지 않고, 경험(옛 것)을 믿고 이에 충실을 기한다(述而不作 信而好古)”는 인식방법이다. 여기서 ‘술(述)’은 해석을 의미하며 이 해석은 경험을 우선하고 이에 근거하여 변별하고, 종합하고, 일반화하는 것이다. ‘작(作)’은 사유를 과신하여 경험을 불신하고 사유로 경험을 조작하여 연역적으로 공상을 짜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작’은 이데올로기다(황태연 2011, 217-218).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대, 철저히 경험을 통해 사실을 알려는 노력 없이 주관적 상상과 구상에 의해 왜곡되는 결과가 나타나서는 안 된다. 즉 보고 들은 그대로의 사실구조를 해석하는 것에 충실해야 한다. “과거의 대표적 정치사례들을 정치학적 인식을 위한 경험 자료로 활용하여 현재와 미래의 정치를 위한 새로운 지식을 형성”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양한 사례들의 경험 자료를 활용하여 현재와 미래의 새로운 지식을 형성하는 경험적 접근이다.5) 경험적 접근을 우선하고, 이에 근거하여 사유함으로써 공상적 짜내기가 아니라 사실적 관계에 기초한 비전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부지이작(不知而作)’의 선험적 합리론에 빠져 오해만을 증폭시킬 것이다.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상황과 조건에 대한 지속적인 검토와 확인, 쌍방의 의도와 목적 등의 확인을 거치지 않고 일방의 논리만으로 예단하는 오류를 최소화해야 한다.
셋째, ‘궐의궐태(闕疑闕殆)’의 중용적 접근이 필요하다. 『논어』 「위정」편에 “많이 듣고 의심스런 것은 비워 놓고 그 나머지를 신중히 말하면 오류가 적고, 많이 보고 위태로운 것은 비워 놓고 그 나머지를 신중하게 행하면 뉘우칠 일이 적다(多聞闕疑 愼言其餘 則寡尤 多聞闕殆 愼行其餘 則寡悔)”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최대로 다문다견하여 의심스러운 것과 오류의 위험을 줄여 가되, 그래도 진위와 선악 측면에서 미심쩍고 위태로운 것은 그 만큼 덜어내어 말하고 행하면 오류가 적고 뉘우칠 일이 ‘적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오류나 뉘우칠 일이 ‘전혀 없지는 않다’는 개연적 지식과 ‘중용적 회의주의’를 함께 말하는 것이다(황태연 2011, 226).” ‘궐의궐태’의 중용적 접근의 목적은 확실한 사실이 드러나기 전까지 ‘미심쩍고 위태로운’ 것을 잠정적으로 유보하자는 것이며, 동시에 합의가 불가능한 극단적 사안은 아예 논의하지 말자는 것이다(황태연 2011, 226-227). 사실 확인이 되기도 전에 미리 규정하는 오류를 줄이자는 것이며, 합의가 전혀 불가능한 사안을 언급하여 관계를 어렵게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즉 사실 확인이 되기 전까지는 잠정적 유보의 중용적 접근이 필요하며,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어려운 사안은 논의에서 제외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상과 같이 동아시아 국가들은 현대적으로 재해석 된 ‘공자주의’적 프리즘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서구의 국제관계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합리주의적 선험론과 전지주의(全知主義)적 오만의 오류를 반복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오랜 역사와 관계 속에서 형성된 동아시아적 문명의 정수를 현실에서 재해석하여 접근하는 새로운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이것은 이미 동아시아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중국은 18세기 이전까지 세계의 중심이었고 가장 발전된 경제와 문명을 가진 국가였다. 중국의 문명은 유럽의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발생의 토양이었으며, 중국의 문명과 패치워크되지 않은 유럽의 현재를 상상할 수 없다. 공자의 사상이 유럽에서 번역되고 절차탁마의 과정을 거쳐 패치워크되는 오랜 과정을 보면,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공자주의’의 문명적 중요성을 알 수 있다.6) 이제 ‘동도’를 ‘공자주의’를 통해 재창안해야 한다. 그것은 ‘패치워크’를 통한 개방적 문명교류 시대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한발 한발 그 길로 걸어가는 과정에 황태연 교수의 책은 명확한 지도가 될 것이다.
1) 황태연, 『공자와 세계 공자의 지식철학(상)』 제1권(파주, 청계, 2011), p. 50.
2) 임춘성, “동아시아인의 정체성 형성, 장애와 출구: 비판적 동아시아담론을 중심으로,” 『문화과학』 2010년 봄호, p. 283.
3) 쑨거(김월희 옮김), “동아시아 시각의 인식론적 의의,” 『아세아연구』통권 135호(2009), p. 16.
4) “다이아몬드 원석을 각도에 따라 다르게 굴절되는 빛살들이 앙상블을 이루도록 다양한 굴절각도로 절삭하고 광택을 내는 절차탁마의 정교한 창조적 세공작업을 통해 빛나는 다이아몬드 보석을 만들어내듯이, 공자의 경전을 ‘원석’으로 삼아 다양한 관점에서 새롭게 절차탁마하고 광택을 내어 동아시아인과 세계인들을 다시 한 번 매혹시키고 덕스럽고 지혜롭게 만들 수 있는 빛나는 현대철학을 창조하는 것이다(황태연 2011, 62).” 사전적 의미로 ‘절차탁마’는 “옥이나 돌 따위를 갈고 닦아서 빛을 낸다는 뜻으로, 부지런히 학문과 덕행을 닦음을 이르는 말”이다.
5) 황태연, 『공자와 세계 3: 공자의 지식철학(하)』(파주: 청계, 2011b), p. 930.
6) 황태연 교수의 『공자와 세계 1: 공자의 지식철학(상)』, pp. 389~455, 『공자와 세계 2: 공자의 지식철학(중)』(파주: 청계, 2011), pp. 473~910을 보면,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에 미친 동아시아의 문명, 서구식 자유시장 경제 형성에 미친 공자의 사상을 자세히 볼 수 있다. 이 읽기의 여정은 그저 새로움 그 자체이고 진짜 사실일까 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안의 서양’이 얼마나 깊숙이 습속화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인식적 발견의 부수 효과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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