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지의 세계

2013. 5. 12. 21:30카테고리 없음

 

현대문명 병폐 치유법, 원시부족은 알고 있다

 

등록 : 2013.05.10 20:02 수정 : 2013.05.10 20:57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말하는 ‘전통 사회’의 주민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남미 야노마미족 소년, 안다만 제도 섬사람, 파라과이 숲속의 아체족, 알래스카 이누이트 여자, 아프리카 피그미족 부자, 필리핀 루손 섬 아그타족 여자, 누나 품에 안긴 푸메족 아기, 수단 누에르족 여자.  김영사 제공

‘총·균·쇠’ 다이아몬드 교수
전통사회 급속한 현대화 고찰

생활 편해지고 자유 늘었지만
수백만년 축적한 지혜 사라져
전쟁·육아·종교·언어 등 주제로
서구 문명의 대안적 가치 모색

 

 

어제까지의 세계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강주헌 옮김
김영사·2만9000원

 

<어제까지의 세계>(The World Until Yesterday, 2012)는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은 <총·균·쇠>(1998), <문명의 붕괴>(2004)를 쓴 재레드 다이아몬드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지리학과 교수가 내놓은 또 하나의 문명 탐구서다.

 

1972년에 뉴기니에서 현지 정치가로부터 뉴기니인들이 서구 백인들과 같은 근대 문명을 만들어내지 못한 원인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답한 것이 <총·균·쇠>였다. 그것을 압축하면 그런 결과를 낳은 것은 인종적·생물학적 차이가 아니라 지리·생태학적 환경의 차이라는 것이었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문명의 붕괴>에서도 앙코르와트와 마야의 도시들, 이스터 섬의 거대 석상들을 만든 문명이 멸망한 주된 원인을 자연자원 남용에 따른 환경 파괴에서 찾았다.

 

<어제까지의 세계>는 이들 책과는 약간 방향을 달리한다. 이 책은 결과적으로 주로 서구화에 의해 급속히 변질되고 사라져 가는 전통적 무리·부족 사회에서 최종 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서구 문명이 잃어버렸거나 갖지 못한 가치를 찾아내거나 재발견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다이아몬드 교수가 뉴기니에 처음 들어가 본 것은 26살 때인 1964년이었다. 지금도 1000여개의 언어가 살아 있다는 뉴기니 고원지대 전통 사회를 처음 ‘발견’한 것은 1931년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이었다. 그때 서양인들을 처음 본 뉴기니인들은 공포에 질린 나머지 벌벌 떨며 울었다. <어제까지의 세계>에는 그때 그 장면을 찍은 사진이 실려 있다. 이 책은 그로부터 70여년이 지난 2006년에 지은이가 미국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파푸아뉴기니의 수도 포트모르즈비 공항에서 출국수속을 밟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곳 에스컬레이터 등의 시설과 현대 기술들, 탑승을 기다리는 뉴기니인들을 바라보면서 지은이는 생각한다. “글도 말도 없었던 사회가 어떻게 한 세대 만에 이런 변화를 이뤄낼 수 있었을까?” 반세기 전엔 거의 몸에 걸친 게 없던 뉴기니인들의 옷차림은 지은이와 다를 게 없었다. 그때는 상상할 수 없었던 흰 머리칼의 장수자들과 배가 나온 비만족도 다수 눈에 띄었다. 게다가 역시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자유롭고 비적대적인 여행 분위기.

 

불과 한두 세대 만에 이뤄진 이런 급격한 변화를 지은이는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는다. 다만, 이대로 가면 인류가 오랜 세월 축적해 온 소중한 가치나 현대 문명의 병폐를 치유하고 대체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단기간에, 그것도 영원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현대화된 포트모르즈비가 아닌 뉴기니 고원지대나 캘리포니아, 필리핀, 아프리카, 아마존 깊숙이에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전통 사회에서 서구 문명의 대안적 가치를 찾아낼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전통 사회 자체를 현대 문명의 대안이라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전통적인 삶을 절대 낭만적으로 생각하지 말라. 현대 세계에도 막대한 장점이 있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보장해 주는 물건과 편의시설들, 교육받고 직업을 구할 수 있는 기회, 의사와 병원이 제공하는 양질의 건강과 효과적인 의학, 다른 사람의 폭력과 환경적인 위험으로부터의 상대적인 안전, 안정된 식량 공급과 장수, 여성 권리, 낮은 유아 사망률. 그리고 소금과 후추와 야자유, 냄비와 프라이팬, 넓적한 칼, 침대와 랜턴, 옷, 신발, 위생, 성냥, 도끼, 우산, 수세식 변소, 수도, 전기, 난로, 자동차, 기차 등 서구 문명이 가져다준 혁명적인 삶의 변화를 대다수 전통 사회인들은 갈구해 마지않는다. 심지어 두 문명을 오간 뉴기니인들 중에는 미국 사회의 익명성이 가져다준 해방감과 자유를 예찬하는 이도 있다.

 

지은이가 생각하는 전통 사회의 장점은 서방 부국들(WEIRD=Western, Educated, Industrialized, Rich and Democratic)이 갖고 있지 못한 것, 엄밀히 말하면 갖고 있다가 잃어버린 것들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전통 사회는 600만년 전 인류가 침팬지와 갈라진 이래 축적해 온 가치와 지혜를 담지하고 있다고 본다. 인류는 불과 1만1000년쯤 전에 농업을 시작했으며, 그 물적 토대 위에 국가가 등장한 것은 5400년 전이었다. 그리고 유럽이 산업혁명과 함께 세계를 제패한 것은 불과 수백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세월 동안 서구 문명 및 서구화된 세계는 수백만년 동안 축적되어 오늘의 인류를 있게 만든 생존기술과 지혜를 상당 부분 상실해 버렸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그런 오랜 지혜의 원형들이 여지껏 존속돼온 전통 사회 속에 살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책은 그 지혜를 평화적인 분쟁 해결, 유대감을 강화하는 육아와 노인 대우, 위험에 대처하는 방법, 전쟁, 종교, 언어, 식생활 등 9가지 주제로 나눠 살핀다.

 

예컨대 분쟁이 일어날 경우 현대 국가는 누가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는지 그 잘잘못 자체를 따지는 데서 해결책을 찾지만, 전통 사회는 그것보다는 상대의 기분과 감정을 이해하고 화해·치유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는 분쟁 이후에도 계속 함께 부딪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고, 쌍방이 수긍하는 화해·치유 과정을 거치지 않을 경우 끝없는 복수극과 전쟁이라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는 좁고 한정된 전통 사회 특성에서 상당 부분 기인한다. 삭막하고 계산적인 현대사회가 거기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전통 사회가 뇌졸중과 당뇨병, 심장마비와 같은 비전염성 질병이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도 지은이는 주목한다. 혼자서 음식을 허겁지겁 먹지 말고,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천천히 먹어라. 신선한 과일과 채소, 저지방 살코기, 생선, 견과류, 곡류 같은 건강식품을 선택하라. 염분과 트랜스 지방, 단당류 함량이 높은 음식을 피하라와 같은 현대병 예방 지침을 전통 사회는 오래전부터 실천해 오고 있다. 긴 수유 기간, 부모 옆에서 아기를 재우는 풍습, 조부모나 삼촌·고모들의 대리부모 역할, 끊임없는 신체 접촉 등 전통 사회의 육아방식도 자신감과 호기심, 자주성, 창의력을 키우는 데 현대 문명보다 더 효과적이다. 노인의 지혜와 노동력을 활용하는 것도 전통 사회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지은이는 본다.

 

진화생물학과 유전학, 언어학, 고고학 등 인문과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방대한 연구성과를 동원하는 그의 책들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50여년에 걸친 그의 전통사회 실사(實査)가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