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120주년] 다시 쓰는 근대사 <7> 선포일 기념 전문가 토론

대한제국 창건 120주년을 맞아 ‘왜곡된 대한제국, 부활하는 대한제국’을 주제로 세 전문가가 이야기를 나눴다. 왼쪽부터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김경빈 기자
근대적 민족 정체성의 맹아 마련
광무개혁 근대화 성과 일제가 강탈
건국절 논란도 대한제국이 열쇠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일제 침략 정당화=대한제국 폄하
광복되었어도 일제 프레임 답습
형식상 황제국 … 내용은 ‘民國’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대한제국은 항일투쟁 비상국가
‘낮은 근대’서 ‘높은 근대’로 도약
OECD 통계가 당시 경제성장 입증
<황태연 동국대 교수>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황궁우와 환구단. 1911년 일제의 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풍속풍경사진첩’에 실려 있다. 2년 후인 1913년 일제는 환구단을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 호텔을 지었다. 오른쪽의 둥근 지붕 건물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황제 즉위식을 열었던 환구단이다. 지금은 위패를 모시던 황궁우만이 고층 빌딩 숲속에 외롭게 서 있다.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120주년, 무엇을 기념할 것인가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재평가-망국책임론을 넘어서
서영희=대한제국은 황제정을 통해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한 저항으로 근대적인 민족 정체성 형성의 맹아를 마련하였고, 물적·인적 자원의 측면에서 근대화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식민지 근대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대한제국을 송두리째 부정하면서 편협한 민족주의라고 공격하지만, 대한제국기에 광무양전지계사업이 있었기에 일제강점기의 토지조사사업이 그 토대 위에서 가능할 수 있었고, 대한제국기에 세워진 각종 근대식 학교에서 배출된 인력들이 일제 총독부 관료체제로 흡수된 측면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제국기 광무개혁이 이룩한 근대화의 성과를 일제가 강탈한 것이라는 점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식민지 지배체제의 효율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대한제국을 암흑시대로 만들어 근대와 단절시키는 것은 정당한 역사 인식이 아닙니다.
이태진=저는 원래 조선시대의 정치사·사회사를 전공했습니다. 근대사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1988년 무렵입니다. 서울대 규장각도서관리실장을 맡은 것이 계기였죠. 임기 마지막 연도인 92년에 규장각 장서 속에 포함된 대한제국 시기 정부 문서들을 영인해 보급하는 사업을 진행하다 고종·순종 두 황제의 명령서인 조칙(詔勅), 칙령(勅令) 묶음에서 순종 황제의 이름자 서명이 위조된 문건 수십 점을 발견했습니다. 이 문건은 일본의 통감부가 ‘정미조약’(1907)을 강제하면서 제정한 법령들인데 최종 결재 과정에서 황제 서명을 위조해 처리한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대한제국 시기를 비롯한 일제의 침략사 전반을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비슷한 시기에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도 대한제국 연구를 새롭게 시작했는데 한 교수나 저처럼 조선시대를 연구하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생각은 ‘조선이 그렇게 쉽게 망할 나라는 아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대 시기부터 연구를 시작한 이들은 대체로 1875년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에서 출발하는데 이렇게 되면 아예 패망 과정만을 보는 것이 되고, 그러다 보면 식민지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일제가 만들어 놓은 기존의 통설에 대한 의심이 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한제국의 역사적 과제
![대한제국 정전이었던 중층의 중화전. 1904년 대화재로 사라지기 이전 모습이다. 중화전 뒤로 고종이 각국 공사를 만났던 서양식 건물인 구성헌이 보인다. [사진 국립고궁박물관]](http://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1710/08/ac39e493-d5e0-41eb-8f9e-c6634b98484b.jpg)
대한제국 정전이었던 중층의 중화전. 1904년 대화재로 사라지기 이전 모습이다. 중화전 뒤로 고종이 각국 공사를 만났던 서양식 건물인 구성헌이 보인다.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황태연=대한제국은 세 가지 역사적 과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하나는 동서 격차를 극복해야 하고, 또 하나는 반(反)제국주의 투쟁을 해야 했고, 세 번째는 낮은 근대에서 높은 근대로 가는 과제입니다. 이 중에 반제국주의 투쟁만을 강조하면 위정척사파가 되고, 근대화만을 강조하면 친일 개화파가 됩니다. 세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가려고 치열하게 싸우면서 근대화도 이뤄냈던 대한제국의 역사를 온전히 복원해내야 합니다.
‘民國’을 지향했던 대한제국
서영희=고종이 발탁한 이들은 대개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습니다. 그들이 실권을 잡고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원래의 정통 양반세력들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개화 지식인들이 조롱하고 비아냥대고 했지요. 1880년대부터 신분제는 사실상 폐기되고 있습니다. 소위 갑오개혁(1894) 훨씬 이전인 1886년에 노비세습을 폐지하는 법령이 반포됩니다. 고종은 그때부터 이미 서얼이건 천민이건 간에 능력 있는 인재를 발탁해서 썼습니다. 그런 과정에 근대적 교육기관도 많이 설립되었죠. 대한제국기에는 상공학교, 무관학교, 각종 외국어학교 등 근대적이고 실용적인 학교가 계속 설립되었고 거기에서 근대화를 추진할 신엘리트, 즉 ‘광무 세대(generation)’가 형성됩니다. 대한제국의 정궁인 경운궁(덕수궁) 궁내부에 포진한 이 신흥 관료들의 역할도 새롭게 재평가되어야 합니다.
황태연=우리나라 지식인들의 머릿속에 잡혀 있는 근대국가의 모델은 민주공화국과 인민공화국뿐입니다. 그 모델 속에서 대한제국을 봉건왕조로 보는 거죠. 그런데 오늘날에도 서양의 많은 나라가 왕을 모시고 있는데 모두 다 국민국가이고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영국·스페인 등 소위 선진국들이 그렇습니다. 왕이나 황제가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를 못하거나 근대화를 못하거나 국민국가를 못하는 게 아니라는 얘깁니다.
이태진=황제정이기 때문에 봉건국가라고 인식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거예요. 근대국가를 만들어가기 위해선 권력집중이 있어야 하죠. 선진국들도 다 거쳤죠. 제가 대학에서 이 문제에 대해 강의할 때 일본에서 온 친구가 강의를 들으면서 자기는 다른 학자들이 선생님이 이야기하는 대한제국 황제정을 봉건국가로 간주하여 비판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더군요.(웃음)
중립국 선언과 외교
황태연=어느 나라든 존재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안보 조건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권위로운 국론통일 기제’ ‘첨단 무력’ ‘적절한 동맹’이 있어야 합니다. 작은 나라라서 동맹이 필요한 게 아니라 미국 같은 초강대국도 전 세계에서 동맹을 추구합니다. 대한제국은 황제정을 선포해 권위로운 국론통일 기제가 우선은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3만 명의 병력을 기반으로 첨단 무력도 갖춰가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적절한 동맹’이 문제였는데 영국은 일본 편에 서고 미국은 형식적으론 아무 편도 안 드는 상황에서 당시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수퍼파워가 러시아였죠. 그러니까 고종의 당시 인아거일(引俄拒日) 구상이 틀린 건 아니었죠. 그러나 러시아가 국내 사정으로 붕괴되면서 1903년 무렵부터 일본과 곳곳에서 충돌하지만 제대로 싸움도 못하게 되죠. 그때 고종이 국가 안보를 염려해 중립국 선언을 추진합니다. 하지만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이 같은 외교는 더 이상 설자리를 잃게 됩니다.
이태진=제가 대한제국의 중립국 문제를 최근에 다시 정리해 봤어요. 대한제국 선포 전후 군주가 이용익을 시켜 차관 도입을 추진하면서 거의 동시에 중립국 승인외교가 진행됩니다. 차관 도입과 중립국 승인이 맞물려 가는 것입니다. 1차 대상은 러시아예요.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때 참석한 민영환의 임무 가운데 하나가 차관 도입이었어요. 러시아가 시베리아 철도 부설 사업으로 재정난에 빠져 프랑스를 대신 소개합니다. 이런 가운데 일본의 방해공작이 시작됩니다. 곧 벨기에 기업가들과도 접촉하게 되는데 1901년 중립국인 벨기에와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그다음에 또 하나의 중립국인 덴마크와도 조약을 체결합니다. 유럽의 강소국으로 중립국인 나라들의 도움을 받고자 한 것이죠. 1901년 8월부터 가쓰라 내각으로 바뀐 일본은 영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올인하는데 그 결과가 1902년 1월 30일의 ‘영·일 동맹’이에요. 사실은 영·일 협정(agreement)인데 일본이 영·일 동맹으로 과장을 했죠. 그 내용을 보면 상업적·공업적 이익에 대한 상호 보장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어느 모로 봐도 대한제국의 그동안의 차관 도입과 중립국 승인외교를 차단하기 위한 거예요. 일본의 갖은 방해공작을 타개하기 위해 고종은 국제적십자사와 헤이그 만국평화회원국에 가입합니다. 이것이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1919년 세워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제사회를 상대로 하는 국권회복운동을 진행하는 것도 같은 노력의 연장선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토적으로는 나라를 빼앗겼지만 주권 전체에서 보면 계속 이어진 싸움이었기에 저는 망국은 없었다고 봅니다. 투쟁은 계속되었던 겁니다.
황태연=민비(명성황후)가 죽어서 대한제국이 섰고 고종이 죽어서 대한제국임시정부가 섰습니다. 책임론 관점에서 보아도 그들의 죽음은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죽음이 백성들에게 엄청난 격동을 가지고 왔고 그렇게 공고화된 신존왕주의(新尊王主義)는 대외적으로 독립을 지키고 대내적으로는 개혁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됩니다. 나아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이 되는 과정은 대한제국의 부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태진=아까 이야기를 미처 못했는데 1902년에 고종 황제가 즉위 40주년을 맞아서 칭경예식을 국제 이벤트로 구상한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차관외교와 중립국 승인외교를 서두른 것도 이 행사에 맞추려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거의 시기를 같이해 서울도시 개조사업이 추진되었습니다. 칭경예식에 초청한 외국 특사들에게 동아시아의 한 작은 나라인 대한제국도 중립국을 인정받을 만한 문명국가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죠. 서울시내 거리에 전등불이 켜지고 전화가 개설된 것을 보게 하여 중립국 승인의 전기를 얻으려 한 것이지요. 당시는 제국주의 시대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평화운동도 시작되었습니다. 1900년에 철광왕 앤드루 카네기가 평화기금으로 거액을 내놓고 이듬해 노벨 평화상 시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에 제동을 걸려는 움직임이었습니다. 헤이그 1차 평화회의, 2차 평화회의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고종의 외교정책은 그렇게 국제평화운동의 흐름을 활용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일본이 소위 ‘동양평화론’을 내세우며 영국·미국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거죠. 그것은 거짓 평화론에 불과한 것이었는데 일본이 러시아와 대결해 준다는 것에 영국과 미국이 걸려들어 결국은 러시아·벨기에·프랑스 등을 배경으로 하는 대한제국 외교정책도 실패하게 된 거죠. 이토 히로부미로 대표되는 일본 정부의 동양평화론의 허구는 우리가 앞으로 계속 비판해 국제사회가 바른 인식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할 대상입니다.
연구할 가치의 보고
DA 300
황태연=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여러 가지 안 좋은 이야기가 많은데 ‘세상 물정에 취약했다’는 악평도 있습니다. 사실 정반대의 상황이었죠. 위기상황에서 모든 정보와 지식이 최고 권력자에게 집중된다는 것은 정치학에서는 상식이거든요. 그들이 가장 잘, 가장 많이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분들이 죽임을 당한 겁니다. 세상 물정에 어두웠으면 절대 그분들을 죽일 일이 없어요. 대한제국을 역사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우리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찾는 길입니다. 만약 대한제국을 폄하한다면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거예요. 저는 통일이 되더라도 대한민국 국호는 계속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한’의 ‘대’자는 처음부터 삼국을 다 포함하는 통일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바꿀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진행·정리=배영대 문화선임기자, 김도연 인턴기자 balance@joongang.co.kr